-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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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게 산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르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 셋이 내려오다 나와 서로 스치고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귀 결에 이런 이야기가 들려 옵니다.
“... 그 일 이후 내 마음이 많이 아팠어. 그 애 때문에. ”
나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며 내려 왔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스칠 때 이 말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 때 나는 어떤 노래의 한 구절을 반복해서 흥얼거리고 있었지요.
‘찬바람이 불면 내가 떠나간 줄 아세요’
마음 아픈 일들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들 없이 산다는 것 또한 심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을이 되어 낙엽이 지고, 그가 혹은 그녀가 떠나고, 계획한 일이 생각 같지 않고, 하루가 허물어지듯 내려앉고, 오래 전에 묻어 두었던 것들이 되살아 나는 그런 짭잘한 눈물 같은 기억들이 우리를 약하게 하는 날이 있습니다. 약하다는 것이 선량함과 같고, 참으로 순수해지고, 모질게 무장한 마음들이 눈 녹듯 하는 햇빛 가득한 날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베트남처럼 전쟁을 통해 통일을 할 수 없습니다. 독일처럼 흡수통일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상생과 공존의 통일’입니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우리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현실적 대안입니다. 서로 부드러워지고 극단을 버리고 화해하고 안아주어야 합니다. 단숨에 될 수 없는 노릇이니 오래 동안 이야기해야하고 참아야 합니다. 그래야 미국인들이 그 대통령으로 누구를 뽑던 우리의 안전이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게 됩니다.
깊게 눈 밑을 쏘던 늦은 오후 서향 빛이 지고 날이 어두어져서야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연약함이 우리를 단련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아주 깊이 찌르는 침처럼 우리 영혼의 어딘가를 건드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몸과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지 않고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 주곤 합니다. 종종 약한 것들이 강한 것들을 허물고 그 부드러움으로 우리를 채우기도 합니다.
*** 그 동안 일주일에 한 두 번 여러분에게 보내드리던 일년 반 정도의 편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출간했습니다. 책의 제목은 ‘일상의 황홀’입니다.
지난번에 나온 ‘나-구본형의 변화 이야기’와 쌍을 이루는 것으로, 그 책이 10년간에 걸친 개인사라면, 이번 책은 그 개인사를 구성하는 일상의 사료라 할 수 있겠지요. 지난 주말에 나와 아직 따끈할 때, 여러분들에게 먼저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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