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iph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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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장 큰 자극과 감동, 보람을 안겨주는 것은 지적 호기심이다. 미지의 세계에서 탐험가들이 느끼는 스릴, 새로운 체험해서 오는 만족감 같은 것은 모두 육체적인 것이지만, 정녕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즐거움을 주는 정신적인 모험 정신, 즉 지적 탐험은 그것보다 상위의 것이다. 무엇인가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기 위해 스터디를 하는 것도 평생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며, 누굴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성찬식에서 성병(聖餠)을 먹을 때, 혀를 내밀어 녹여먹는 것이 정례화 되어있다. 성서 어디에도 '빵을 먹어라(take it)'라고만 언급될 뿐, 녹여먹으라(melt it)고 명시되어 있는 것이 아닌데 왜 사람들은 그것을 녹여먹을까…
이에 대해 "하느님은 진리이고, 빛의 상징인 하느님의 몸을 우리는 녹여먹을 것이 아니라 어금니로 그것을 적극적으로 깨물어 먹어야 한다. 그리고 성병도 얇고 쉽게 녹는 것이 아니라 두껍고 딱딱한 것을 주어 막 씹어 먹게(chewing) 해야 한다."라고 반론을 제기한 사람도 있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의미의 녹여먹음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진리를 씹게끔 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어려운 것일수록 씹어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이빨 없이도 좋을 맹물만 마시려한다. 오늘날에 점차로 사람들이 어려운 것을 피하고 쉬운 것을 찾는 것은 어린아이들이 딱딱한 음식 안 먹고 유동식, 또는 달콤한 것만 먹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젊었을 때 느낀 학문의 즐거움은 엄청나게 어려운 것,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과 씨름했을 때의 쾌감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씹는 그 맛이었다. 이것은 젊은이의 특권이다. 사회에 나가면 지적 호기심은 점차 사라지고, 하루하루 끼니를 위해서 열정이나 자기의 진실을 맞바꿔야 하는 현실이 찾아온다.
4년간의 대학 시절이 지나고 나면 원치 않아도 그 세계로 가야만 한다. 그런데 왜 미리 그 특권을 포기하는지… 나의 대학시절은 취직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캠퍼스 생활을 최대한 즐기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도서관에서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고, 문과대 학생임에도 위상기하학(topology) 같은 수업과, 수강신청 때는 제목 자체가 신기한 것을 신청해 듣는 등 지적 방황을 하면서 보냈다.
이것은 마치 오딧세이가 오랜 항해 끝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 것과 마찬가지로, 험하고 모험적인 지적 항해를 겪고 사회에 돌아온 사람과 처음부터 지름길로 사회에 진출한 사람의 몸에서는 다른 냄새가 난다. 지적 호기심으로 방황하고 온 사람들에게서는 무수한 바다냄새가 날 것이고, 지름길로 달려온 사람들에게서는 땀내 밖엔 나는 게 없다.
미리 계산되어있지 않는 지적 탐험은 대학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고 열정이고 재미다. 내 학창시절은 가장 비참한 환경에 있었지만, 실제 지적탐험을 하는데 있어서는 목적 없이, 어떤 효용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호기심 하나만 가지고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고, 그래서 거기에서 오는 떨림, 전율을 만끽하게 해주었던 환경이었다.
이런 떨림 속에서 4년 동안의 긴장된 대학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4년이 40년이 되어 아직도 지적 호기심이 젊은 사람들 못지않다. 만약에 그 때 국회의원, 정치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스터디 그룹 만들었다면, 지금 이렇게는 절대 안 되었을 것이다.
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 없는 것이 쓸만한 것이며, 활력 있는 것임을 구체적으로 체험했다고 느낀다. 현재처럼 가혹한 경쟁사회에서 과연 지적 호기심만 가지고 살 수 있는가, 대학시절 4년을 낭만적인 지적 체험으로 보낸 후 그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자신이 없지만, 어쨌든 나는 그러한 시대에 살 수 있게 했던 시대에 감사드린다.
당시는 중심 의식을 형성할 수 없었고, 그만큼 우리는 중심이 없었다. 국수주의자도 될 수 없었고 사대주의자도 될 수도 없었던, 떠도는 보헤미안들이었다. 나는 이것을 회색지대(Gray Zone),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회색의 아름다움이 나를 키워준 것이라 생각하며, 신에게 감사한다. 만약 내가 흑이나 백이었다면 반밖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회색에서 살았기 때문에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혹은 흑이 될 수도, 백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너무 규정지어 양분법적 사고를 갖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그들이 더 애늙은이 같고 내가 훨씬 어리고 유연해 보인다.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지적 자유이기 때문에, 자기를 규정하고 자기의 정체성을 만들기엔 대학생활이 지난 4년 후에도 늦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데 벌써 자기의 인생관을 결정하고, 이념을 결정하고…이렇게 갈 길이 결정된 젊은이를 볼 때, 나는 '참 딱한 젊은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360도로 뚫린 벌판에서 하나의 길만 만들어놓고 그 길로 질주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늘 '우리 세대는 최고(Best)가 되려고 애썼지만, 너희들은 유일한 사람(Only One)이 되라' 말한다. 온리원은 베스트가 아니며, 그 분야의 유일한 사람을 뜻한다.
360도로 돌면 360명의 온리원이 생기지만, 동쪽 한쪽으로만 달리면 1등은 하나 밖에 없다. 왜 굳이 이렇게 치열한 경쟁 속에서 베스트1이 되려고 하는지, 오히려 온리원이 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베스트1이 죽으면 베스트2가 대신할 수 있지만, 온리원이 죽으면 이를 대신할 다른 온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온리원이 되는 것이, 남이 대신할 수 있는 베스트1이 되는 것 보다 값지다.
대학생들 토론에서 잘 인용하는 '라파엘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하루는 천정화를 그리고 있는 라파엘로에게 왕과 재상이 찾아왔다. 왕이 사다리에 올라가 일하는 라파엘로를 보고 재상에게 '잘못하면 떨어져 목이 부러지니, 사다리를 잡아주라'고 했다.
이에 재상이 화를 내면서 '제가 명색이 이 나라의 정승으로, 폐하 다음가는 사람인데 저까짓 환쟁이의 사다리를 잡으라니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라고 반문했다. 이에 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모르는 소리 말게. 자네 목이 부러지면 얼마든지 재상할 사람 있지만, 라파엘로의 목이 부러지면 저렇게 그림 그릴 사람은 세상에 없네. 자네 목이 중요한가, 라파엘로의 목이 중요한가? 나는 라파엘로의 목이 더 중요하다.'
베스트1은 그 사람 없어도 대신할 사람이 있다. 하지만 독특한 글을 쓰는 사람, 유일한 지식을 가진 사람, 남다른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다시는 그런 똑같은 사람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온리원이 될 것인가, 베스트1이 될 것인가는 그 4년 동안에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스터디 그룹을 같이 만들고 했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오리지낼러티(개성)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잘났어도, 그 사람하고 똑같이 되는 건 최대의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스피노자가 말한 대로 '유일자'가 되어야 한다.
왜 판에 박은 듯 똑 같은 벽돌장이 되려 하는가. 차라리 헤르만 헤세가 말했듯, 하나하나 완성체인 돌맹이가 되는 게 낫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돌이라도 똑같이 생긴 돌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적 트레이닝을 하는 것은 '내가 나로써 유일자'가 되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다.
우리 시절엔 연애할 때에도 돌아다닐 때가 없었다. 커피숍도 다 폭격을 맞아 건물 위는 없는 지하실 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토향'이라는 지하 커피숍이 있었는데, 커피숍엔 습기찬 흙냄새밖엔 안났지만, 이름이 너무 예뻐 '토향'에 들어가 연애하곤 했다. 당시에는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선생님'이었고, 만나면 지적 대화를 나누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닭살이 돋지만 모여서 시가 어떻고 철학이 어땠는지 이야기하는 것이 참 좋았다.
사랑하는 애인의 환심을 사려고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던지… 지금도 그런 허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당시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여학생들이 상대도 해주지 않았고 웬만큼 해가지고는 사람 노릇도 못했다. 그러니까 책 읽고 아는 체 하고 상대방을 감동시키고 하는 것이, 지금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고 춤추는 하는 것 보다 훨씬 여자들에게 환심을 사는 것이었다. 지적인 자력(磁力), 지식으로 매력을 느끼게 하는 그런 시대 분위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촌스럽지만 유쾌했던 지성의 축제, 지식의 축제 같은 그런 분위기가 대학가에 존재했고, 정말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시민들이 갖고 있는 철저한 시민의식, 교양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작년에 대학을 떠났지만, 내가 떠날 무렵의 대학은 참 삭막하게 느껴졌다. 너무도 이기적으로, 자기 진로에 따른 걱정과 그런 공부를 하고 라이센스를 따기 위해 대학의 자유를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의 어느 대학하고 비교해도 한국의 대학이 지닌 지식의 자유, 지성의 자유는 이전보다 많이 줄어들고 부족해지고 있다. 시장 논리가 대학까지 침범한 이후 이런 추세가 더 가속화된 것 같다.
대학은 먼지구덩이어야 한다. 그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 진짜 지성이다. 시장논리가 적용되고, 학교가 완전히 직업양성소처럼 되어버리고, 학생들은 입학하자마자 자기 진로에 대해 대해 걱정하고 긴장하는 그 팽팽한 긴장감과 경쟁력을 바라보고 있자면, 대학만큼은 좀 고고하게 존재하고, 비록 쓸모없어도 대학의 지성만큼은 지식 자체의 재미와 호기심에 전율하는 그런 지적 진동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사회가 활기 있어지고, 환기되어 인류의 뜻밖의 진로 같은 옆 골목이 생겨나는 것이지, 주어진 시장논리 속에서 1, 2등되는 것에만 매달린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정해진 지도에서 가면 기차처럼. 일정한 궤도를 달리는 삶이 되서는 안 된다. 성능 좋지 않은 자동차라도 자기가 핸들을 꺾을 수 있는 자동차... 그런 자동차가 소중한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은 걷는 것이다. 멈추고 싶으면 멈추고, 걷고 싶으면 걷고…
그 옛날 소요학파는 앉아서 세미나를 하는 대신, 정원을 걸어 다니면서 화두를 꺼내 주고받는 식으로 지식을 논했다. 예수님이나 석가님도 걸어 다니면서 진리를 이야기했다. 보행의 리듬을 타고 지식을 전파한 것이다. 걷지 않는 지성, 한 곳에 멈추어 있는 지성은 역동성(dynamic)이 없다. 소요할 줄 아는 것, 걸을 줄 아는 것, 한 곳에 멈추지 않는 것이 바로 지적 탐험, 지적 순례인 것이다. 이런 것들이 대학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인문학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대학에 몸담기 힘든 상황임을 절감했었다.
나는 내 시대의 방식이 꼭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경쟁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실용적인 스터디에 매달리는 것이 딱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평생을 짊어지고 다닐 일상의 짐을 자유로와야할 4년간의 대학시절에 지고 산다니… 일생에 단 4년뿐인 세월을 그렇게 보내서야 되겠는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내 대학시절은 전시였기 때문에 졸업해도 구할 직장조차 없던 시절이라 오히려 자유로웠고, 맨 몸을 던질 수 있던 행복한 시대였다. 당시는 내가 태어난 세대에 대해 저주했지만, 지금은 신이 나에게 자유로운 공간과 시간을 주었다는 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한다.
모든 것이 무너졌기에 더 자유로울 수 있었고, 전쟁과 혼돈, 무질서와 무국적에 가까운 혼란기를 살았기 때문에,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능력을 한곳에 고정하지 않고 끝없이 순례하고 방황하는 젊음을 보내면서 지식을 얻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문학(liberal Art & Science)은 사회에 나와 써먹자고 배우는 학문이 아니다. 응용학문은 응용이고, 기술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문학이 진짜 학문이라 여겨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대학에는 이 자긍심이 없고, 인문학은 고사 직전에 와 있다. 생각(thinking)하는 즐거움과 자유는 찾아보기 힘들다.
나도 24시간을 48시간처럼 살았던 것 같다. 언제 잠을 잤는지, 언제 일어났는지, 음악 듣고, 연애하고, 술 먹고…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했을까… 48시간을 살아야 한다. 최소한 곱빼기로 살아서 4년 동안의 생활을 8년 정도로 살아야한다. 요즘은 인터넷도 있고 핸드폰도 있어, 인생을 더블로 살기에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인생을 더블로 살아라. 그리고 그 중의 반은 지식에 할애하라. 다른 것 다 해도 좋다. 단, 24시간을 48시간으로 만들어, 그 중 24시간은 지적생활을 해보길 권한다. 필요 없는, 아무 쓸 데 없을 것 같은 것을 익히고 배워라. 그것도 젊음의 특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고 몰래 귀띔해주고 싶다. 왜… 요즘은 그런 유혹조차도 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인생이 그런 게 아니다. 사회에 나오면 다 알게 될 거다'라고 말하는 너무 철이 일찍 든 어른들이 많다. 이들의 말에 학생들은 겁먹고 꿈을 버리게 만든다. 특히, 여학생들에게 '결혼해봐라. 나도 너만할 때 그러다가 네 아버지 만나 후회한다…'라는 말로 일찌감치 못을 박아놓는 식의 말을 조언으로 해주는 어른들… 첫사랑도 해보지 못하고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는가, 서로 상대방의 덕을 보자고 사랑한다면, 그 사랑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사랑과 지식은 같다. 사랑해보기 전까지 모르지만, 사랑에 몰입하면 세상이 달라지고, 바람소리가 달라지고, 햇빛이 달라지고, 눈이 찡해지고, 괜히 기뻐서 웃음이 나오는 그런 느낌. 좋은 책을 읽으면 그렇게 된다. 기가 막힌 책을 읽으면 들뜨게 되고 '너 애인 생겼냐? 좋은 일 생겼냐?'라는 물음을 받게 된다.
사실 아름다운 책 한 권, 지적인 전율적인 책 한 권의 감동은 바로 첫사랑, 처음 체험해보는 사랑의 기쁨과 똑같다. 다만 하나는 액체를 마시는 것이고, 지식은 자기 이빨로 씹어야 한다는 것이 차이일 뿐.
지식은 적극적으로 씹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지식의 참맛을 안다.
- 이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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