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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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은 눈이 크고 피부가 하얀 여인입니다. 보는 순간 눈길을 빼앗기는 곳입니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적당히 황폐한 시간의 이끼로 뒤덮힌 로마의 성벽을 끼고 마르마라 바닷가 해안도로를 달려가는 내내 이곳에 오기를 참 잘했다고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보스포로스 해협을 바라 보다 왼쪽으로 꺽어 아야소피아 사원으로 접어들면 모스크의 첨탑이 하늘을 찌르는 1500년 전의 역사 속으로 돌연 침잠해 드는 듯합니다.
터키인들은 단 것을 좋아합니다. 끔찍하게 달아 질리게 합니다. 터키인들은 또한 말하기를 좋아 합니다. 아이고 어른이고 길거리를 가다 보면 다가와 말을 부칩니다. 호객을 목적으로 접근하는 삐끼들도 있지만 이국인들에 대한 호기심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잘생긴 터키 남자들의 끈질긴 구애에 이끌려 장기체류하는 한국이나 일본의 여인들도 많다 합니다. 우리가 만난 한 일본 여인은 정말 몇 달째 카파도키아에 홀로 머물고 있었습니다. 셀주크에서 묵었던 민박집 여주인은 영국 여인인데 배낭여행 왔다가 터키 남자와 결혼하여 눌러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형이 아시아인과 유럽인을 가리지 않고 선호하는 핏줄의 교류를 즐기게 하나 봅니다. 젊었을 때는 다리가 길고 헌출하지만 나이가 들면 뚱뚱하고 비대해지는 경향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여행은 눈길 속에 남습니다. 우리는 어느 찻집 앞에 서 있던 13살짜리 여자아이의 눈길에 끌려 그 아이 만큼 작은 찻집에서 빨강색 쿠시보노차를 마셨습니다. 연두빛 도는 황색 눈의 아주 귀여운 아이였지요.
내가 ‘예쁜 아줌마’라고 부르니 정말 좋아하던 샤프란보로 하숙집 여인도 친밀한 눈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아줌마의 남편은 독실한 무슬렘인데 조용하고 진중한 눈길을 가지고 있었지요. 터키에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렸던 밀라노의 거리에서 만나 길을 물어 본 영어 잘하는 이태리 마담의 약간 끈끈한 눈길도 나쁘지 않았지요.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우리가 다녔던 거리와 유적과 풍광은 그 공간을 함께 공유했던 사람들의 특별한 눈길들 속에 머물고 있는 듯합니다.
여행은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함께 기거하고, 그 사람들이 만들어 먹고 마시는 것들을 함께 먹고 들이키는 것입니다. 여행은 새로운 먹거리며, 새로운 침구며, 새로운 생각입니다. 여행은 새로운 곳에서 겪는 불편이며, 익숙치 않은 버스 시간표며, 알 수 없는 언어며, 어이없고 황당한 시스템이며, 새벽의 추위며, 느닷없는 눈발입니다. 낯선 것들에 대한 경계며, 과장된 두려움이며 동시에 과장된 허구와 감동이기도 합니다.
여행은 자유의 공기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끝없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종종 이런 공기는 허파 깊숙이 들이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초록빛 산소이기도 합니다.
날마다 짐을 싸고, 밤마다 새로운 거처에서 잠들었습니다. 지치고 피곤할 만큼 돌아 다녔습니다. 이 피곤함에 대한 갈증이 여행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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