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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7일 11시 26분 등록
윤동주의 편지를 읽는다.

종시(終始)

종점이 시점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
아침, 저녁으로 이 자국을 밟게 되는 데 이 자국을 밟게 된 연유가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살았을 듯한 우거진 송림 속,
게다가 덩그러니 살림집은 외따로 한 채뿐이었으나
식구로는 굉장한 것이어서 한 지붕 밑에서
팔도 사투리를 죄다들을 만큼 모아놓은 미끈한 장정들만이
욱실욱실하였다.
이곳에 법령은 없었으나 여인금납구였다.
만일 강심장의 여인이 있어 불의의 침입이 있다면 우리들의 호기심을
저윽이 자아내었고, 방마다 새로운 화제가 생기곤 하였다.
이렇듯 수도 생활에 나는 소라 속처럼 안도하였던 것이다.

사건이란 언제나 큰 데서 동기가 되는 것보다 오히려 적은 데서 더 많이
발작하는 것이다.

눈 온 날이었다. 동숙하는 친구의 친구가 한 시간 남짓한 문안 들어가는
차시간까지 낭비하기 위하여, 나의 친구를 찾아 들어와서 하는 대화였다.
" 자네 여보게 이집 귀신이 되려나? "
" 조용한 게 공부하기 작히나 좋잖은가? "
" 그래 책장이나 뒤적뒤적하면 공분 줄 아나. 전차간에서 내다볼 수 있는
광경, 정거장에서 맛볼 수 있는 광경, 다시 기차 속에서 대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생활 아닌 것이 없거든. 생활 ??문에 싸우는 이 분위기에 잠겨서,
보고, 생각하고, 분석하고, 이거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아니겠는가.
여보게! 자네 책장만 뒤지고 인생이 어드렇니 사회가 어드렇니 하는 것은
16세기에서나 찾아볼 일일세. 단연 문안으로 나오도록 마음을 돌리게"

나한테 하는 권고는 아니었으나 이 말에 귀틈 뚫려 상푸둥 그러리라고 생각하였다. 비단 여기만이 아니라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이 한낱 오락이요, 오락이매 생활이 될 수 없고, 생활이 없으매 이 또한 죽은 공부가 아니랴, 하야 공부도 생활화하여야 되리라 생각하고 불일내에 문안으로 들어가기를 내심으로 단정해 버렸다. 그 뒤 매일같이 이 자국을 밟게 된 것이다.

나만 일찍이 아침거리의 새로운 감촉을 맛볼 줄만 알았더니 벌써 많은 사람들의 발자욱에 포도는 어수선할 대로 어수선했고, 정류장에 머물 때마다 이 많은 무리를 죄다 어디 갖다 터뜨릴 심산인지 꾸역꾸역 자꾸 박아 싣는데, 늙은이 젊은이, 아이 할 것 없이 손에 꾸러미를 안 든 사람은 없다. 이것이 그들 생활의 꾸러미요, 동시에 권태의 꾸러미인지도 모르겠다.

이 꾸러미를 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씩 뜯어보기로 한다. 늙은이 얼굴이란 너무 오래 세파에 짜들어서 문제도 안 되겠거니와 그 젊은이들 낯짝이란 도무지 말씀이 아니다. 열이면 열이 다 우수 그것이요, 백이면 백이 다 비참 그것이다. 이들에게 웃음이란 가물에 콩싹이다. 필경 귀여우리라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수밖에 없는데 아이들의 얼굴이란 너무나 창백하다. 혹시 숙제를 못해서 선생한테 꾸지람들을 것이 걱정인지 풀이 죽어 쭈그러뜨린 것이 활기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다. 내 상도 필연코 그 꼴일 텐데 내 눈으로 그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만일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듯 그렇게 자주 내 얼굴을 대한다고 할 것 같으면 벌서 요사하였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기로 하고 단념하자!
차라리 성벽 위에 펼친 하늘을 쳐다보는 편이 더 통쾌하다. 눈은 하늘과 성벽 경계선을 따라 자꾸 달리는 것인데 이 성벽이란 현대로써 캄플라지한 옛 금성이다. 이 안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졌으며 어떤 일이 행하여지고 있는 지 성 밖에서 살아 왔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알 바가 없다. 이제 다만 한 가닥 희망은 이 성벽이 끊어지는 곳이다.

기대는 언제나 크게 가질 것이 못되어서 성벽이 끊어지는 곳에 총독부, 도청 무슨 참고관, 체신국, 신문사, 소방소, 무슨 주식회사, 부청, 양복점, 고물상 등 나란히 하고 연달아 오다가 아이스케이크 간판에 눈이 잠깐 머무는데 이 놈을 눈 나린 겨울에 빈집을 지키는 꼴이라든가, 제 신분에 맞지 않는 가게를 지키는 꼴을 살짝 필림에 올리어 본달 것 같으면 한 폭의 고등 풍자만화가 될 터인데하고 하고 나는 눈을 감고 생각하기로 한다. 사실 요즈음 아이스케이크 간판 신세를면치 아니치 못할 자 얼마나 되랴. 아이스케이크 간판은 정열에 불타는 염서가 진정코 아수롭다.

눈을 감고 한참 생각하느라면 한 가지 꺼리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도덕률이란 거추장스러운 의무감이다. 젊은 녀석이 눈을 딱 감고 버티고 앉아 있다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번쩍 눈을 떠본다. 하나 가차이 자선할 대상이 없음에 자리를 잃지 않겠다는 심정보다 오히려 아니꼽게 본 사람이 없었으리란 데 안심이 된다.

이것은 과단성 있는 동무의 주장이지만 전차에서 만난 사람은 원수요, 기차에서 만난 사람은 지기라는 것이다. 딴은 그러리라고 얼마큼 수긍하였댔다. 한 자리에서 몸을 비비적거리면서도 '오늘은 좋은 날씨올시다.' '어디서내리시나요' 쯤의 인사는 주고받을 법한데, 일언반구 없이 뚱한 꼴들이 작히나 큰 원수를 맺고 지내는 사이들 같다. 만일 상냥한 사람이 있어 요만쯤의 예의를 밟는다고 할 것 같으면, 전차 속의 사람들은 이를 정신이상자로 대접할 게다. 그러나 기차에서는 그렇지 않다. 명함을 서로 바꾸고 고향 이야기, 행방이야기를 꺼리낌없이 주고받고 심지어 남의 여로를 자기의 여로인 것처럼 걱정하고, 이 얼마나 다정한 인생행로냐.

이러한 사이에 남대문을 지나쳤다. 누가 있어 '자네 매일같이 남대문을 두 번씩 지날 터인데 그래 늘 보곤 하는가'라는 어리석은 듯한 맨탈 테스트를 낸다면은 나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본달 것 같으면 늘이 아니라 이 자국을 밟은 이래 그 모습을 한번이라도 쳐다본 적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하기는 그것이 나의 생활에 긴한 일이 아니매 당연한 일일 게다. 하나 여기에 하나의 교훈이 있다. 회수가 너무 잦으면 모든 것이 피상적이 되어버리나리라.

이것과는 관련이 먼 이야기 같으나 무료한 시간을 까기 위하여 한 마디 하면서 지나가자.
시골서는 제로라고 하는 양반이었던 모양인데 처음 서울 구경을 하고 돌아가서 며칠동안 배운 서울 말씨를 섣불리 써가며 서울 거리를 손으로 형용하고 말로서 떠벌여 ?グ
IP *.142.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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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1.06 06:37:14 *.72.153.164
그러게....허허.

환하게 웃는 낯으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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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01.06 08:56:13 *.116.34.232
?K구나. 그래 인간을 떠나 도를 닦으면 죽은 공부일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속에만 파묻혀 조용한 공부를 안하는 것은 게으른 사람들이 놀고 먹으며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방 깨끗이 치우고 차 한잔 마시며 책에 파 묻히는 것도 눈 오는 날의 좋은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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