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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9일 23시 42분 등록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어머니


황지우


저를 이, 시간 속으로 들여넣어주시고
당신을 생각하면 늘, 시간이 없던 분
틀니를 하시느라
치과에 다녀오신 직후의,
이를 몽땅 뺀
시간의 끔찍한 모습
당신은 그 모습이 미안하시었던지
자꾸 나를 피하시었으나
아니, 우리 어머니가 저리 되시다니!
목구멍에까지 차오른 술처럼
넘치려는 시간이 컥, 눈물되네

안방에서 당신은 거울을 피하시고
나는 눈물을 안 보이려고 등을 돌리고

흑백 텔레비전 시절 어느 연속극에서
최불암씨가 늙으신 어머니를 등에 업고
"어머니, 왜 이리 가벼워지셨으요?"하고
역정내듯 말할 때도 바보같이
막 울어버린 적 있지

저에게 이, 시간을 주시었으되
저와 함께 어느덧
시간이 있는 분
아직은 저와 당신, 은밀한 것이 있어
아내 몰래 더 드리는 용돈에 대하여
당신 스스로 제 앞에서 애써 기뻐하시지만
그러니까, 아직은 시간이 좀 있을까

연립주택 붉은 벽돌벽에 그늘을 옮기는 흰 목련,
그 테두리를 저는 오래오래 보고 있어요





꽃 피는 아버지


이성복


1
아버지
만나러 금촌 가는 길에
쓰러진 나무 하나를 보았다 흙을
파고 세우고 묻어주었는데 뒤돌아보니
또 쓰러져 있다
저놈은 작부처럼 잠만 자나?
아랫도리 하나로 빌어먹다보니
자꾸 눕고 싶어지는가보다
나도 자꾸 눕고 싶어졌다
나는 내 잠속에 나무 하나
눕히고 금촌으로 갔다
아버지는
벌써 파주로 떠났다 한다
조금만 일찍 와도 만났을 텐데
나무가 웃으며 말했다 고향 따앙이 여어기이서
몇리이나 되나 몇리나 되나 몇리나되나……
학교 갔다 오는 아이들이 노래불렀다
내 고향은 파주가 아니야 경북 상주야
나무는 웃고만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쓰러진 나무처럼
집에 돌아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


2
언덕배기 손바닥만한 땅에 아버지는
고추나무를 심었다
밤 깊으면 공사장 인부들이
고추를 따갔다
아버지의 고함 소리는 고추나무 키 위에
머뭇거렸다
모기와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엉켜붙었다
내버려두세요 아버지
얼마나 따가겠어요
보름 후 땅 주인이 찾아와, 집을 지어야겠으니
고추를 따가라고 했다
공사장 인부들이 낄낄 웃었다


3
아무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아버지는 저리
화가 나실까 아버지는 목이 말랐다 물을
따라드렸다 아버지, 뭐 그런 걸 가지고
자꾸 그러세요 엄마가 말했다 얘, 내버려
둬라 본디 그런 양반인데 뭐 아버지는
돌아누워 눈썹까지 이불을 끌어당겼다
1932년 단밀 보통학교 졸업식
며칠 전 장날 아버지 떡 좀 사먹어요
그냥 가자 가서 저녁 먹자
아버지이…… 또! 이젠 너 안 데리고 다닌다
네 월사금도 내야 하고 교복도 사야 하고……
아버지, 아버지는 굶었다 그해 모심기하던
날 저녁 아버지는 어지러워 밥도 못 잡숫고
그 다음날 새벽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藥 한 첩 못 써보고
아무도 일찍 잠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꽃 모종
하고 싶었지만 꽃밭이 없었다 엄마, 어디에
아버지를 옮겨 심어야 할까요 살아온 날들
물결 심하게 이는 오늘, 오늘


4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기 며칠 전부터 벌레가 나와 책장을 갉아 먹고
있었다 처음엔 두 군데, 다음엔 다섯 군데 쬐그만 홈을 파고
고운 톱밥 같은 것을 쏟아냈다 저도 먹어야 살지, 청소할 때마다
마른 걸레로 훔쳐냈다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만 계셨다
텔레비 앞에서 프로가 끝날 때까지 담배만 피우셨다 벌레들은
더 많은 구멍을 파고 고운 나무 가루를 쏟아냈다 보자 누가 이기나,
구멍마다 접착제로 틀어막았다 아버지는 낮잠을 주무시다 지겨우면
하릴없이, 자전거를 타고 水色에 다녀오시고 어머니가 한숨 쉬었다
그만하세요 어머니, 이젠 연세도 많으시고…… 어머니는 먼 산을 바라보며
또 한 주일이 지나고 나는 보았다 전에 구멍 뚫린 나무 뒤편으로
새 구멍이 여러 개 뚫리고 노오란 나무 가루가 무더기, 무더기
쌓여 있었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노오랗게 묻어났다 숟가락을 지우며
어머니가 말했다 창틀에 문턱에 식탁에까지 구멍이…… 약이 없다는데,
아버지는 밥을, 소처럼, 오래오래 씹고 계셨다





...그러니까, 아직은 시간이 좀 있을까...


IP *.237.200.52

프로필 이미지
한희주
2005.05.10 06:22:26 *.201.224.98
"간절하다뿐이었겄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륵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 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어머님, 그 때 우시지 않았어요?"
"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 .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
- 이청준의 < 눈길>에서 -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이승을 뜨신 부모님께 두 손 모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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