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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9일 10시 23분 등록


별도로 e-mail을 받지 않는 분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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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유난히 아름다운 아침으로 시작합니다.

눈부신 5월이고,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들이 모여 저녁을 먹고 술과 차를 마시다 헤어진 후, 문득 가족 속의 내 자리, 아버지의 자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몇자 적어 둔 것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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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생전에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말이 많은 분이 아니셨다. 그러나 참 잘 생긴 분이셨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난 후 아버지는 아주 많이 아프셨다. 아버지를 살려내신 분은 할머니셨다.

몸이 나으신 후 처음으로 외출을 하게 되었는데 못내 불안해하신 할머니께서 그때 소년이었던 나더러 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오라 하셨다. 한 여름이어 혜화동 거리는 햇살 가득했고 무더웠다. 커다란 프라타나스 나무 사이로 우리는 걷고 있었다. 아버지는 잘 다려진 흰 모시옷을 입고 조금 창백한 얼굴로 천천히 걸으셨다. 참 멋스럽다 생각 했다. 난 아주 자랑스러워졌다.

이 장면이 내가 아버지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진이다. 아마 아버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아주 중요한 장면이 기억의 대상인 그 사람에게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림이라는 것, 이 빗나감, 이 미끄러짐이 재미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우습지만 바로 아버지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는 그것 하나로 나는 아버지의 꽤 괜찮은 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제 내가 아버지가 되었다. 흰 모시옷 속의 그 아버지만큼 나이 먹은 아버지가 되었다.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 좋은 아버지. 그러나 난 그게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 그저 난 아이들에게서 이미 아주 많은 즐거움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웃음, 그 찬란한 웃음, 어떤 순간, 어떤 눈빛, 어떤 일상의 대화, 아픔, 아비이기 때문에 느끼는 그 아이가 인식한 아픔 보다 어쩌면 더 아픈 아픔들을 나는 기억한다.

아이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빛나는 순간들을 아주 많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 나는 그것이 좋은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들에 대해 아주 많은 아름다운 심상을 기억하고 싶다.

하얀 모시옷의 멋스러운 아버지를 기억하듯 나도 내 아이들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고 싶다. 나는 그것이 훌륭한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종종 우리는 거울 속에서, 어떤 사건 속에서, 어떤 말투 속에서, ‘너는 네 아버지를 꼭 빼닮았구나’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럴 때 마다 그 말이 어떤 아름다운 심상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심상이란 겉의 모습이 아니다. ‘아버지의 뒷모습’처럼 아주 많은 사연을 담고 그 사연들과 함께 녹아내리고 혼융되어가는 기억과 흔적들로 눈물겹도록 정겨운 오래된 도자기 같은 것이다. 그것은 내면의 아우라가 은은히 배어 나오는 정신적 격조 같은 것이다. 그저 나는 내 아이들에게 그런 모습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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