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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19일 08시 28분 등록

군산을 다녀왔습니다. 군산 공항 옆에 옥서 삼거리라는 곳이 있고, 그곳에서 하제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10분도 걸리지 않아 뻘이 가득한 포구가 나옵니다. 하제 포구는 여느 포구와 다릅니다. 한 30년 정도의 시간 여행을 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유달리 오래전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곳입니다. 말하자면 어정쩡한 개발이 이루어져 색치에 가까운 원색 간판이 난무하고 횟집이 즐비한 여느 포구와 다릅니다. 소설 속의 오래 된 포구 하나 그 곳에 있습니다.

작은 배들이 옹기종기 갯벌 위에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갯벌사이로 작은 물길들이 달리고, 생합과 어류를 파는 아주 작은 가게 들이 몇 개 있습니다. 흰 바탕에 검은 페인트로 무슨 무슨 수산이라고 꾸불거리는 막글씨로 간판을 써두었습니다. 햇살이 오래 비치고 짠물기가 스미고 배어 페인트는 자연스럽게 탈색되어 있습니다. 시멘트와 페인트도 고풍스러 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과 낙후의 사이로 어렸을 때의 아늑한 기억이 스물거립니다.

하제에 가면 꽃게 무침을 먹어야 합니다. 꽃게 무침을 파는 집이 그저 서너 집 있습니다. 망설이다 마음이 머무는 아무 집이나 들어갔습니다. 커다란 암꽃게의 알과 내장을 다 긁어내어 파 마늘 양파 고추등을 넣고 맵게 주물거려 게딱지에 버무려 올려놓은 것입니다. 게의 진한 맛과 전라도 찡한 손맛이 어우려져 밥 한공기가 언제 먹었는 지 모르게 사라집니다. 하제에 가면 간 김에 생합을 조금 사가지고 와 파 마늘 넣고 시원한 조개탕을 끓이면 그 포구의 맛이 조금은 서울에서도 묻어 날 수 있습니다.

지금의 하제의 모습은 곧 이윽고 사라져 갈 풍광일 것입니다. 그 곳에 갈 때 난 과거 속으로 들어갔고, 나올 때 다시 현재로 복귀하는 듯 했습니다. 하제는 한 30-40년 전에 우리가 먹었던 삼립 크림빵 같은 곳입니다.

주말에 일부러 찾아 가지는 마세요. 실망할 테니까요. 그저 그 근처를 지나다가 배가 고프면 한 번 물어물어 가 보세요. 아주 작은 시간 여행을 한다는 생각으로,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는 크림빵 맛을 보러 간다는 생각으로. 어쩌면 한 없이 바삐 돌아가는 지금에서 벗어나 흘러가는 시간의 물결 속에 잠시 넋놓고 몸 담그고 싶을 때 잠시 들리는 마음으로. 비오는 날은 과거와 만나기 좋아요. 초라함과 약간의 궁상, 은은한 막막함은 비 오는 날 진해져요. misty water colour 처럼.


"꿈을 이루는 것이 쉽다고 믿는 사람은 아마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삶을 생존으로 쉽게 치환하는 사람을 나는 더욱 미워한다 - 어느날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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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주
2005.05.20 06:57:52 *.201.224.98
이윽고 사라져 갈 남루한 모습의 하제포구 , 영락없는 작품의 무대 같습니다. 아주 작은시간 여행을 한다는 생각으로 지나는 걸음이 있거든 꼭 들러보겠습니다. 유년에 즐겨 먹었던 삼립 크림빵의 달콤한 맛도 아련히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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