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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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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월 8일 10시 55분 등록

동남아 여행기 ③ - 벤츠 완행버스와 태국시골의 하루

거의 15시간을 열차에서 보낸 다음 날 정오가 다 되어서 핫야이(말레이시아와 태국 국경에 있는 곳으로 태국의 관문정도 되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대단한 기차여행이었습니다. 아침에 깨서 말레이시아 농촌을 보니 거의 평야란 느낌입니다. 벼가 한 편에서 베어지고, 또 다른 편에서는 익어가고, 다른 쪽에서는 이제 자라고 있는 광경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줍니다. 과연 3모작, 4모작 하더니만 동남아 식당에서 밥값이 제일 싼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싶더라구요. 새벽에 깨어 책도 보고, 중간 결산도 보고, 제가 공동경비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다 깨다를 반복했습니다. 드디어 말레이시아국경을 넘어 태국령으로 입국하니 술을 팝니다. 어제 쿠알라룸프 역에서 술을 팔지 않아 꼬박 하룻밤을 굶었거든요. TOM이라는 프랑스 신부가 개발한 유럽식 약주(이것도 40도짜리이다)를 기차안에서 근 1시간가량 마시며 왔습니다.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연구원들 이야기, 꿈 벗들 이야기, 그리고 저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고통의 밑바닥을 겪은 사람만이 또 다른 고통을 앓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청하고 또 경청하였습니다.

우리가 묵을 'Lee Garden Plaza Hotel'은 별 다섯 개짜리 호텔로 33층까지 있습니다. 왕년에 대단한 기세를 올린 것으로 짐작되는 요즘은 급이 좀 떨어져 보이는 호텔입니다. 이 호텔의 장점은 스카이 풀장이었습니다. 12층에 위치한 풀장은 전망과 조경, 인테리어 무엇보다 깨끗한 물이 압권입니다. 게다가 사람이 적어 너무 좋습니다. 핫야이 시내를 조망할 수도 있고, 서늘한 바람까지 느긋한 휴식을 바라는 여행객에게는 그만입니다. 저녁 늦게 풀장 안에서 등받이의자를 베고 느긋하게 안동소주를 일 배하며 수영하다가 또 한잔 ··· 술과 바람과 물에다 여유까지 묻어 있는 이곳은 태국여행객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침 닭이 홰치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잘못 들었나? 이불속에서 다시 들립니다. 분명하게. 아니 이런, 닭 우는 소리를 이국땅에서 들어볼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는데, 순간 시골에 온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렇지. 핫야이가 시골도회지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문득 어제 밤 500바트(한화 13,000원 정도)에 근사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곳. 핫야이가 이런 곳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짐을 꾸려 푸켓행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갔습니다. 우리가 예약한 버스에 짐을 실으려는데 바로 옆에 벤츠버스가 보였습니다. 그 버스도 푸켓행이라고 써 있고 ···, 물어보니 출발시간도 10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순간적으로 뭔가에 홀린 것처럼 차표를 환불하고 이 버스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번의 여행사측에서 교통편에 소홀했던 기억도 스쳐가고 더군다나 이 버스는 벤츠가 아닌가? 안된다는 것을 우겨서 환불받고 벤츠버스에 타보니 아뿔사! 에어콘 버스가 아니라 선풍기 버스가 아닌가? 얄팍한 견물생심이 화를 자초한 겁니다. 원래 예약한 버스는 운전석과 손님석이 구분되어 있는 고급 에어컨 고속버스인데 바꾼 버스는 무뉘만 벤츠이지 천정에 선풍기가 돌아가는 완행시외버스인 겁니다. 이미 물은 엎질러져 버렸고, 선생님께서는 뭐가 좋은지 허허하고 웃으십니다. 잘 했다하시면서. 다시 바꿀 수도 없고 해서 맥주 4캔과 물을 사서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립니다. 10%를 공제한 환불받은 돈으로 버스비를 지불하고 맥주와 물을 사고도 돈이 남았으니 어림직잠 감을 잡을만 할 겁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8시간 30분 동안의 시외완행버스 투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지금부터 시간대별로 태국 시골의 하루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기록과 정리하면 이미 이골이 났으니 다이어리에 기록한대로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벤츠에 대해서 한 마디 안할 수 없습니다. 무뉘만 벤츠인 줄 알았는데 내부도 왕년의 명성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구석구석 늙어가는 사자의 위용을 드러내 보입니다. 먼저 버스 내부는 2층 버스처럼 고급 에어콘 버스보다 높습니다. 저도 이때까지만 해도 과연 벤츠는 벤츠다 그랬으니까요. 게다가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나이드신 분들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복도가 나무로 되 있고 초칠해서 매끈매끈한 기억 나실런지···. 그런 나무로 바닥이 되어 있습니다. 의자도 묵직한 쇠의 기운을 느끼게끔 아주 천천히 뒤로 제껴지고요. 특히 이 차의 포인트는 음향시스템입니다. 차내에 설치된 앰프는 800w입니다. 예전에 집회할 때 1,000명 모일때도 보통 1.6kw 정도 음향으로 했었거든요. 그런데 거의 그 반정도 되는 시스템이 여기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구요? 보통 괜찮다고 하는 노래방 음향시스템이 400w입니다. 그럼 아시겠죠. 7,80년대 우리나라 버스처럼 여기도 차장(18세 소년조수)이 직접 버스비를 받고 스톱, 오라이를 하는 방식으로 운행되고 있습니다. 동그란 긴 통 안에 버스표와 잔돈을 넣고 다니면서 손님이 타면 앉은 자리로 가서 돈을 받고 차표를 끊어주는 아주 재미있는 모습입니다. 오래 된 차라 언덕길은 아주 천천히 올라갑니다. 차가 힘겨워 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잔소리나 재촉하지 않습니다. 운전수도 당연한 듯 느긋하게 운전합니다. 차안에서 운전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서고 안서고도 자기가 결정합니다. 쉬는 시간도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운전대도 아무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차안에서만큼은 지배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이미 아주 젊은 나이에 작은 독재자가 되버린 셈입니다. 이들 3총사는 오늘은 푸켓에서 자고 내일 핫야이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틀을 주기로 핫야이와 푸켓을 왕복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셈이네요. 내릴 때 헤어지는 인사를 하면서 악수하고 돌아서는데 이미 버스는 보이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자기 갈 길을 갔나 봅니다.

[09:10] 핫야이 해피가이 멋쟁이 챨리(여행사측과 연결된 것으로 보이는 안내인)를 보내고 옥신각신 벤츠에 타고 허탈해 합니다.

[09:40] 드디어 출발, 증거로 몇 컷의 벤츠와 사진을 찍었습니다. 분명히 벤츠는 맞습니다.

[10:00] 벤츠 3인방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운전수는 23살, 조수는 18살 먹은 소년, 또 한명은 24살 먹은 부조수 또는 그냥 친구처럼 보입니다. 애는 별 할 일도 없이 하루 종일 같이 있더라구요. 어쨌던 이 세 명과 앞으로 8시간동안 같이 보냈습니다. 쬐끄만 놈들이 담배는 하루 종일 무지막지 피워대 혼도 냈지만 웃으면서 계속 피기만 합니다.

[10:30] 옆 자리에 할머니와 손주로 보이는 손님이 탑승했습니다. 할머니는 손주에게 여기 저기 가르키며 많은 얘기를 나눕니다. 나중에 메추리알도 나눠주고도 했는데 태국식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손주가 무척 귀여워 보였습니다.

[11:00] 18세 소년 조수의 여자친구인 듯한 아가씨가 내렸습니다. 어느 시골이었는데 아가씨와 소년 조수의 티 없이 맑은 눈과 미소가 한 동안 잔상에 남을 정도로 보기 좋은 장면이었습니다.

[11:30] 오랜만에 밭일 하는 농부(?)들을 보았습니다. 아니 이 더위에 일을 해?

[12:00] 강원도 산길같은 정말 멋있는 드라이버 코스를 근 한 시간 가량 달렸습니다. 구형 버스라서 그런지 시속 60km 이상은 거의 밟지 않아 환상적인 드라이버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휴가때 가 본 정선에서 대관령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최고의 드라이버 코스가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12:30] 일단 점심을 먹고, 볼 일도 보고 오후 더위에 대비한 체력을 비축하였습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우리는 6시간이면 푸켓에 도착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죠. 조금만 더 가면 된다? ㅎㅎㅎ

[13:00] 뜨거운 햇볕이 무지 덥습니다. 선풍기도 더운 바람을 불어주니 시원한 맥주와 물만이 유일한 낙입니다.

[13:30] 길가 평상 같은 곳에 앉아 아마 고스톱 같은 게임(?)을 하고 있는 남정네들이 보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이런 일을 벌이는 사람은 남자들밖에 없습디다. 하여간 남자란 동물들은 어디가도 여자들 고생시키고 사는 부류란 느낌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무료한 시간을 과연 이곳의 사람들은 무엇으로 채우고 있을까요?

[14:00] 크라비 부근 어디엔가 잠깐 정차했는데 오토바이 기사들이 호객행위를 합니다. 아, 아저씨 나도 힘들어요. 그냥 빨리 호텔에 갔으면 좋겠다구요. 후다닥 차에 타고 소년 조수만 원망스런 눈으로 째려 보았습니다. 어이구, 저 놈 말만 제대로 알아들었어도 이 고생 안 하는 건데···, 영어마져도 미워진 순간입니다.

[14:30] 크라비라고 하는 지역에는 석회암산들이 낙타등 혹처럼 솟아올라 장관을 연출합니다. 한 두 개가 아니라 아주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산위에는 템플(사원)이 있어서 여기 산에 한 번 와보자는 말씀도 선생님께서 하십니다. 마침 앞자리에 않으신 어느 촌로께서 뭐라고 하셨는데 아쉽게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 석회암산들 때문에 한동안 시름을 잊고 갈 수 있었습니다.

[15:00] 시골 학교에서 공차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어릴 적 했던 모습이랑 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방과 후 갈데는 없고 운동장에서 공차다 해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가던 초등학교 기억이 새로운 꼬마들의 모습입니다.

[15:30] 시골 5일장이 열렸나 봅니다. 길거리 난전이 전형적인 시골 장터의 모습입니다. 아직도 더운데 저 사람들은 덥지도 않나? 좀 시원해져서 장을 보면 어떨까?

[16:00] 이제 6시간 안에 푸켓에 도착할 수 없다는 확연한 사실을 느끼고 제풀에 지쳤습니다. 잠시 정차한 틈에 어느 화장실에 볼 일을 보러 갔는데 이건 완전 푸세식입니다. 옆에 있는 물양동이에서 바가지로 물을 부어야 하는···

[16:30] 어쨌던 푸켓 가까이 가고 있나 봅니다. 하교하는 학생들도 보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누군가 버스에서 내리면 가족 중의 한 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기다렸다가 태우고 갑니다. 아저씨도 아주머니도 오토바이는 잘 몰고 다닙니다. 태국의 시골 교통시스템은 버스와 오토바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곳의 오토바이는 아주 중요한 운행수단이군요.

[17:00] 드디어 푸켓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건너면서 수상가옥을 보았습니다. 강위에 지은 집들을 영상이 아닌 직접 본 느낌이 무척 생경합니다. 이젠 퇴근하는 많은 인파들이 보입니다. 버스 안에도 퇴근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타기 시작합니다.

[17:30] 하루 종일 태국의 일상에는 별 시끄러운 일이 없었습니다. 따분한 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조용한 하루였습니다. 그런데 난데없는 싸이렌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늘의 느긋한 신경을 갑자기 경직되게 만든 패트롤카의 경적소리.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차창밖으로 삐죽삐죽 쳐다 봅니다. 알고 보니 별 거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다 한참 후 앰뷸런스 차 한대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지나갑니다. 얼핏 보니 임산부가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보면 아마 산부인과로 급하게 가는 응급차 같았습니다. 이 두 가지가 오늘 하루 유일한 반전을 가져온 인공효과였습니다.

[18:00]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시내가 많이 붐벼서 버스도 급하게 갈 수 없습니다. 밀려서 간신히 푸켓 정류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총 버스운행시간 8시간 30분 가량 걸렸습니다. 휴~

이렇게 태국의 하루가 시간대별로 낯선 여행객들에게 찾아와 주었습니다. 시골의 하루를 영화관에 앉아서 본 것 같은 느낌이었던 하루였습니다. 그 와중에 아주 많은 생각도 스쳐지나 가기도 하였습니다. 푸켓행 벤츠투어는 생경한 태국의 하루를 볼 수 있었지만 더위에 지치게 한 하루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다음 날은 더위 먹은 것처럼 아주 힘든 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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