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애
- 조회 수 2101
- 댓글 수 8
- 추천 수 0
안녕하세요? 무척 오랜만이죠?
먼저 소장님의 신간 '사람에게서 구하라'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역사와 경영의 절묘한 조화에서 나온 보석과 같은 책!' 기대됩니다.
새해 벽두, 재동 선이님의 득남 소식이 참 반가웠고 방금 읽은 승완님과 호정님의 사랑 얘기 또한 반갑습니다. 참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옹박님과 귀자님의 얘기 기대해도 될까요?
세상에 '젊음' 만큼 화려한 악세사리가 또 있을까요!
더 좋은 소식 기다립니다.
지난 24, 25일 이틀간 가족여행을 다녀 왔어요.
저번에 기원님이 소개해주신 지리산 자락 '작은영토' 황토방에서 묵으며 일원을 돌았습니다. 베품으로써 더 충만된 삶을 살고 계시는 두 분이 내어 주시던 향기로운 차는 바로 두 분의 향기였습니다. 기원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조금 긴듯한 여행기를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새뜻한 날들 기원 합니다.
**************************************************************
탁! 차문을 닫고 내리는 순간 지리산 자락의 칠흑같은 밤하늘,
춥다고 옹송 거리며 수다 떨던 숱한 별들이 놀라 한꺼번에 떼구르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작은 영토’ 마당 가득 별밭이 되어 쟁그랑쟁그랑 거립니다.
혼자 살아 외로운 초엿새 쪽달은 밤나무에도, 소나무에도, 감나무에도 걸리지 않은 거리낌 없는 얼굴로 별들의 수다에 흐뭇하게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주인장이 내어준 향기로운 차 귀하게 마시고 마당에 내려서니 건넛마을엔 또 다른 별꽃무리가 활짝 피어 있습니다.
큰 보석 박힌 새카만 벨벳을 좌악 펼쳐놓은 듯한 마을의 반짝이는 전등불빛은 지상으로 내려온 또 다른 별무리였습니다. 태초의 신비로움으로 다가옵니다.
수직 성향 문명의 거대한 이빨 같은 고층건물이 아니기에, 부드러운 수평의 마을자락이기에 그 불빛은 아름다운 보석이 될 수 있겠지요.
여장을 풀려고 방문을 여는 순간 훅 끼치는 황토방의 연기 냄새...
투명한 슬픔에 코끝이 찡했습니다.
겨울 짧은 해가 고향 타래산에 걸리고 한 집 두 집 저녁 연기가 굴뚝에서 올라오면 집으로 돌아와 가마솥에 불을 때기도 하는데...... 쇠죽 가마솥이 눈물을 흘리고 외양간에서 큰 눈망울 두리번거리며 소가 워낭을 흔들면 여물 익는 물큰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집니다. 그때쯤이면 큰 소두뱅이 열어 기역자 모양의 뒤지개로 섞어 쇠죽을 골고루 익게 합니다. 미리 떠다둔 큰 양은 대야, 닳아 한쪽 귀퉁이 날아간 세숫대야의 물을 소죽솥에 넣지요. 그것은 온식구들이 찬물을 조금씩 섞어가며 쓸 귀중한 저녁온수가 됩니다. 아궁이 앞을 몽당 빗자루로 흙까지 싹싹 쓴 다음 큰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동안 쇠죽솥은 뜸 들이며 기다리겠지요.
살얼음 둥둥 떠 있는 양은 동치미 그릇이 놓여있는 두리상에 앉으면 바로 그 황토방의 연기 냄새가 났었지요.
엷은 물빛 저고리에 색바랜 한복바지를 입으신 야윈 할아버지, 무명 머릿수건을 벗으시며 쪽진 머리 쓰다듬으시는 할머니, 읍내에서 배운 양재 기술로 당시 유행하던 월남치마를 손수 만들어 입은 젊은 고모, 네 살 위의 막내 삼촌, 꺽다리 남동생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밀물처럼 짭조름히 밀려드는 향수입니다.
섬진강 기차마을, 60년대를 향한 타임캡슐 승차였지요. 영화 ‘아이스케키’의 셋트장에서 60년대 골목길을 걸어보았습니다. ‘풍년상회’, ‘도라지위스키’,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이 걸린 읍내의 극장 , ‘신세계 사진관’ , '정미소'등이 삐뚤삐뚤한 얼굴로 걸려 있는 간판들의 모습들, 좁은 길목이 그렇게 정겨웠습니다. 사진관 앞에 서니 35년전 읍내에 고향 동무들과 나가서 찍었던 흑백 사진 한 장이 떠오릅니다. 사진에 ‘우정을 변치 말자’라고 새겨 넣었던 문구도 함께. 그 당시엔 사진마다 그런 문구를 새겨 넣곤 했지요.
증기기관차가 허연 김을 뿜으며 왼쪽 옆구리에 끼고 도는 섬진강엔 봄빛 도는 파란 하늘이 떠내려가고 경상도 경계의 음영 깊은 산갈피들이 자맥질 합니다. 푸른 얼굴 혹은 까칠한 얼굴로 어깨 걸고 두런거리는 산들이 정겹습니다. 조잘거리는 자갈들을 혹은 깊은 침묵을 지키는 묵직한 돌들을 품은 채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은 언제 보아도 자태가 고운 여인 같습니다. 정지된 한 폭의 맑은 수채화 같은 풍경에 생명의 붓끝인양 큰 새 한마리가 유선을 그리며 낮게 비상합니다. 아마 먹이를 겨냥하나 봅니다. 기차가 섬진강 강줄기를 어루 만지며 희뜩희뜩 맴돌아 가는 길에 경상도와 전라도가 정답게 마주 보고 있습니다. 몇 번의 기적을 울리며 도착한 섬진강 강마을 ‘가정리’에서 새로 단장한 ‘두가교’에 서니 강바람에 제법 매섭게 달려듭니다. 옛날 목선을 보며 스무 살 들 무렵 겨울에 목선을 타고 강 건너 까지 밤 마실 가던 생각을 합니다. 노 젓는 것은 고향 동무가 맡았습니다. 삐거덕 거리는 목선에 앉아서 교교히 내리던 달빛, 강물에 잠긴 둥근 달의 처연함은 지금도 선연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강 건너 마을은 땅콩 곳이라 피 땅콩(껍질채 땅콩) 볶아주던 더벅머리 머슴아 얼굴은 생각 안 나고 수북이 내어온 땅콩만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도회지로 전학 가서 방학 때마다 고향에 가곤 했습니다. 앞서 노를 저었다는 동무는 초등학교 졸업 후 당시 주부 부업의 대명사이던 '홀치기'를 하며 일찍 생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열 네살 어린 나이로...... 두뇌가 명석한 동무 였는데 그 울분이 오죽했을까만은 다른 동무들과 어울려 조미미의 '단골손님', '바다가 육지라면',을 구성지게 따라 부르며 야무지게 홀치기를 잘 했습니다. 요즘 대형 벽걸이 티비에 버금가던 트랜지스터 라디오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추며 중학교 음악책의 가곡을 배우는 대신 트로트를 배우며 홀치기를 재바르게 하던 여윈 손이 떠오릅니다. 트로트 가사처럼 인생의 쓴맛, 단맛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탓인지 그녀의 생은 평탄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남동생은 읍내의 고등학교 까지 마칠 수 있었지요. 고향 동무 대개가 그랬습니다. 기껏해야 중학교 진학 정도였지요. '여자가 많이 배우면 뭐 해?'하는 자조적인 소리는 딸자식을 제대로 교육시킬 여력이 없었던 가난한 이웃 아재들의 탄식의 소리는 아니었는지......지금도 겨울 달밤이면 그때 강 건너 마을로 가는 모래톱길과 차가운 겨울 온 달이 아득하게 갱겨 오곤 합니다.
태안사 오릿길의 운치있는 숲길, 지리산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안고 사는 이 임소혁, 그의 사진전에서 늘 연모하던 지리산 사계의 풍모를 마음껏 안아볼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사진을 조금 접하다만 저로써는 완벽한 사진 앞에서 작가의 혼을 느낄 수 있어 경외심이 들었습니다.
조태일시문학관, 그의 6집인 ‘풀꽃은 시들지 않는다’를 우연히 가지게 되어 그저 서정 시인으로만 알았는데 군부 독재 시절 고은, 신경림과 함께 한 저항시인인줄 처음 알았습니다. 그의 유품과 함께 전시된 그 곳에서 하도 꼼꼼히 보는 바람에 가족들의 걱정을 들어야 했습니다. 전시관 직원에게도 미안 했구요. 관람 시간이 지나서 양해를 얻고 들어갔거든요.
특별한 의미의 토지 무대인 평사리 최참판댁과 작품속의 마을을 완벽하게 묘사해놓은 토지 셋트장은 또 다른 감동이었어요. 고샅길, 초가들을 한군데라도 빠질세라 구석구석 다니며 <토지>에 나오는 대사들을 주절거렸습니다. 작품 속에서 만났던 질박하고 지난한 삶을 살았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대서사인 토지를 짧은 시간에 다시 훑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약삭빠르고 속물적이지만 가족에 대한 애정만큼은 남다른 봉기네엔 정말 돼지우리가 있었고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던 막딸네 궁색한 살림집에선 임이네 애호박을 따가던 손버릇 나쁜 그녀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이평이네(두만이네), 성실히 일하는 평사리 과부 야무네, 조준구의 모함을 받아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정 한조, 평산의 꾐에 빠져 최 치수 살인사건에 가담하여 사형을 당하는 칠성이, 그의 댁 임이네, 월선을 사랑하나 신분의 차이로 강청 댁과 결혼 하지만 정을 못 붙이고 자식도 없이 살아가는 준수한 외모의 용이...... 끝도 없이 나오는 토지의 인물들을 모두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어 흠뻑 취했어요. 특히 평산이네에선 낯익은 살구나무를 어루만지며 감회에 젖었습니다.몰락한 양반인 평산의 처 함안댁이 거기에 목매어 죽는데 그 살구나무가 작품에 묘사된 그 위치에 심어져 있더군요. 얼마나 반갑던지! 남편 평산이 최치수 살인의 주모자로 사형 당하자 중인 출신이지만 양반가 여성으로써 긍지를 지니고 지난한 삶을 살아가던 버팀목을 잃어 버려 거복이, 한복이 어린 두 아들을 남겨 둔 채 그 살구나무에 목을 맵니다. 사람이 목매어 죽은 살구나무를 달여 먹으면 몸에 좋다며 새벽 일찍 살구나무 가지를 꺾어가는 봉기의 이기적인 모습도 보입니다. 물레방앗간 옆의 '타작마당'에 서니 용이, 판술이, 칠성이가 주축이 되어 놀던 풍물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 모습을 자랑스럽게, 반쯤은 부끄럽게 바라보던 그들의 아낙들 모습도...... 작품 <토지>는 2년전에 또다시 SBS에서 방영 되었다는군요. TV 시청은 전혀 안하지만 괜히 그 방송사에 신뢰가 갑니다.
5년 전인가 이 곳에 들럿을땐 한창 최참판댁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듬해엔 공사는 마무리 되었으나 작품속의 이미지가 아니어서 많이 실망하고 근처 ‘고소산성’에 들러 위로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그 곳은 작품속의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를 생생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둘러본 구례 화엄사의 금강문과 사천왕문 앞에서 잠깐 머물렀습니다.
남도엔 예향도 많을뿐더러 맛 고을도 참 많지요. 그래서 매번 여행지로 ‘남도여행’을 꼽게 되나 봅니다. 또 다른 이유 하나는 감명 깊게 읽었던 대서사시의 작품 무대가 주로 남도란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작품의 무대를 가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욕심이겠지요.
용이네 삽작에 붉은 몽우리 도톰도톰하던 나무는 아마 매화이지 싶습니다.
봄이 멀지 않았습니다. 봄은 흔들림이라 하던 어느 시인의 말이 언뜻 떠오릅니다.
올 봄엔 흔들리고 싶군요.
IP *.150.69.12
먼저 소장님의 신간 '사람에게서 구하라'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역사와 경영의 절묘한 조화에서 나온 보석과 같은 책!' 기대됩니다.
새해 벽두, 재동 선이님의 득남 소식이 참 반가웠고 방금 읽은 승완님과 호정님의 사랑 얘기 또한 반갑습니다. 참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옹박님과 귀자님의 얘기 기대해도 될까요?
세상에 '젊음' 만큼 화려한 악세사리가 또 있을까요!
더 좋은 소식 기다립니다.
지난 24, 25일 이틀간 가족여행을 다녀 왔어요.
저번에 기원님이 소개해주신 지리산 자락 '작은영토' 황토방에서 묵으며 일원을 돌았습니다. 베품으로써 더 충만된 삶을 살고 계시는 두 분이 내어 주시던 향기로운 차는 바로 두 분의 향기였습니다. 기원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조금 긴듯한 여행기를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새뜻한 날들 기원 합니다.
**************************************************************
탁! 차문을 닫고 내리는 순간 지리산 자락의 칠흑같은 밤하늘,
춥다고 옹송 거리며 수다 떨던 숱한 별들이 놀라 한꺼번에 떼구르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작은 영토’ 마당 가득 별밭이 되어 쟁그랑쟁그랑 거립니다.
혼자 살아 외로운 초엿새 쪽달은 밤나무에도, 소나무에도, 감나무에도 걸리지 않은 거리낌 없는 얼굴로 별들의 수다에 흐뭇하게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주인장이 내어준 향기로운 차 귀하게 마시고 마당에 내려서니 건넛마을엔 또 다른 별꽃무리가 활짝 피어 있습니다.
큰 보석 박힌 새카만 벨벳을 좌악 펼쳐놓은 듯한 마을의 반짝이는 전등불빛은 지상으로 내려온 또 다른 별무리였습니다. 태초의 신비로움으로 다가옵니다.
수직 성향 문명의 거대한 이빨 같은 고층건물이 아니기에, 부드러운 수평의 마을자락이기에 그 불빛은 아름다운 보석이 될 수 있겠지요.
여장을 풀려고 방문을 여는 순간 훅 끼치는 황토방의 연기 냄새...
투명한 슬픔에 코끝이 찡했습니다.
겨울 짧은 해가 고향 타래산에 걸리고 한 집 두 집 저녁 연기가 굴뚝에서 올라오면 집으로 돌아와 가마솥에 불을 때기도 하는데...... 쇠죽 가마솥이 눈물을 흘리고 외양간에서 큰 눈망울 두리번거리며 소가 워낭을 흔들면 여물 익는 물큰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집니다. 그때쯤이면 큰 소두뱅이 열어 기역자 모양의 뒤지개로 섞어 쇠죽을 골고루 익게 합니다. 미리 떠다둔 큰 양은 대야, 닳아 한쪽 귀퉁이 날아간 세숫대야의 물을 소죽솥에 넣지요. 그것은 온식구들이 찬물을 조금씩 섞어가며 쓸 귀중한 저녁온수가 됩니다. 아궁이 앞을 몽당 빗자루로 흙까지 싹싹 쓴 다음 큰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동안 쇠죽솥은 뜸 들이며 기다리겠지요.
살얼음 둥둥 떠 있는 양은 동치미 그릇이 놓여있는 두리상에 앉으면 바로 그 황토방의 연기 냄새가 났었지요.
엷은 물빛 저고리에 색바랜 한복바지를 입으신 야윈 할아버지, 무명 머릿수건을 벗으시며 쪽진 머리 쓰다듬으시는 할머니, 읍내에서 배운 양재 기술로 당시 유행하던 월남치마를 손수 만들어 입은 젊은 고모, 네 살 위의 막내 삼촌, 꺽다리 남동생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밀물처럼 짭조름히 밀려드는 향수입니다.
섬진강 기차마을, 60년대를 향한 타임캡슐 승차였지요. 영화 ‘아이스케키’의 셋트장에서 60년대 골목길을 걸어보았습니다. ‘풍년상회’, ‘도라지위스키’,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이 걸린 읍내의 극장 , ‘신세계 사진관’ , '정미소'등이 삐뚤삐뚤한 얼굴로 걸려 있는 간판들의 모습들, 좁은 길목이 그렇게 정겨웠습니다. 사진관 앞에 서니 35년전 읍내에 고향 동무들과 나가서 찍었던 흑백 사진 한 장이 떠오릅니다. 사진에 ‘우정을 변치 말자’라고 새겨 넣었던 문구도 함께. 그 당시엔 사진마다 그런 문구를 새겨 넣곤 했지요.
증기기관차가 허연 김을 뿜으며 왼쪽 옆구리에 끼고 도는 섬진강엔 봄빛 도는 파란 하늘이 떠내려가고 경상도 경계의 음영 깊은 산갈피들이 자맥질 합니다. 푸른 얼굴 혹은 까칠한 얼굴로 어깨 걸고 두런거리는 산들이 정겹습니다. 조잘거리는 자갈들을 혹은 깊은 침묵을 지키는 묵직한 돌들을 품은 채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은 언제 보아도 자태가 고운 여인 같습니다. 정지된 한 폭의 맑은 수채화 같은 풍경에 생명의 붓끝인양 큰 새 한마리가 유선을 그리며 낮게 비상합니다. 아마 먹이를 겨냥하나 봅니다. 기차가 섬진강 강줄기를 어루 만지며 희뜩희뜩 맴돌아 가는 길에 경상도와 전라도가 정답게 마주 보고 있습니다. 몇 번의 기적을 울리며 도착한 섬진강 강마을 ‘가정리’에서 새로 단장한 ‘두가교’에 서니 강바람에 제법 매섭게 달려듭니다. 옛날 목선을 보며 스무 살 들 무렵 겨울에 목선을 타고 강 건너 까지 밤 마실 가던 생각을 합니다. 노 젓는 것은 고향 동무가 맡았습니다. 삐거덕 거리는 목선에 앉아서 교교히 내리던 달빛, 강물에 잠긴 둥근 달의 처연함은 지금도 선연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강 건너 마을은 땅콩 곳이라 피 땅콩(껍질채 땅콩) 볶아주던 더벅머리 머슴아 얼굴은 생각 안 나고 수북이 내어온 땅콩만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도회지로 전학 가서 방학 때마다 고향에 가곤 했습니다. 앞서 노를 저었다는 동무는 초등학교 졸업 후 당시 주부 부업의 대명사이던 '홀치기'를 하며 일찍 생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열 네살 어린 나이로...... 두뇌가 명석한 동무 였는데 그 울분이 오죽했을까만은 다른 동무들과 어울려 조미미의 '단골손님', '바다가 육지라면',을 구성지게 따라 부르며 야무지게 홀치기를 잘 했습니다. 요즘 대형 벽걸이 티비에 버금가던 트랜지스터 라디오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추며 중학교 음악책의 가곡을 배우는 대신 트로트를 배우며 홀치기를 재바르게 하던 여윈 손이 떠오릅니다. 트로트 가사처럼 인생의 쓴맛, 단맛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탓인지 그녀의 생은 평탄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남동생은 읍내의 고등학교 까지 마칠 수 있었지요. 고향 동무 대개가 그랬습니다. 기껏해야 중학교 진학 정도였지요. '여자가 많이 배우면 뭐 해?'하는 자조적인 소리는 딸자식을 제대로 교육시킬 여력이 없었던 가난한 이웃 아재들의 탄식의 소리는 아니었는지......지금도 겨울 달밤이면 그때 강 건너 마을로 가는 모래톱길과 차가운 겨울 온 달이 아득하게 갱겨 오곤 합니다.
태안사 오릿길의 운치있는 숲길, 지리산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안고 사는 이 임소혁, 그의 사진전에서 늘 연모하던 지리산 사계의 풍모를 마음껏 안아볼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사진을 조금 접하다만 저로써는 완벽한 사진 앞에서 작가의 혼을 느낄 수 있어 경외심이 들었습니다.
조태일시문학관, 그의 6집인 ‘풀꽃은 시들지 않는다’를 우연히 가지게 되어 그저 서정 시인으로만 알았는데 군부 독재 시절 고은, 신경림과 함께 한 저항시인인줄 처음 알았습니다. 그의 유품과 함께 전시된 그 곳에서 하도 꼼꼼히 보는 바람에 가족들의 걱정을 들어야 했습니다. 전시관 직원에게도 미안 했구요. 관람 시간이 지나서 양해를 얻고 들어갔거든요.
특별한 의미의 토지 무대인 평사리 최참판댁과 작품속의 마을을 완벽하게 묘사해놓은 토지 셋트장은 또 다른 감동이었어요. 고샅길, 초가들을 한군데라도 빠질세라 구석구석 다니며 <토지>에 나오는 대사들을 주절거렸습니다. 작품 속에서 만났던 질박하고 지난한 삶을 살았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대서사인 토지를 짧은 시간에 다시 훑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약삭빠르고 속물적이지만 가족에 대한 애정만큼은 남다른 봉기네엔 정말 돼지우리가 있었고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던 막딸네 궁색한 살림집에선 임이네 애호박을 따가던 손버릇 나쁜 그녀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이평이네(두만이네), 성실히 일하는 평사리 과부 야무네, 조준구의 모함을 받아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정 한조, 평산의 꾐에 빠져 최 치수 살인사건에 가담하여 사형을 당하는 칠성이, 그의 댁 임이네, 월선을 사랑하나 신분의 차이로 강청 댁과 결혼 하지만 정을 못 붙이고 자식도 없이 살아가는 준수한 외모의 용이...... 끝도 없이 나오는 토지의 인물들을 모두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어 흠뻑 취했어요. 특히 평산이네에선 낯익은 살구나무를 어루만지며 감회에 젖었습니다.몰락한 양반인 평산의 처 함안댁이 거기에 목매어 죽는데 그 살구나무가 작품에 묘사된 그 위치에 심어져 있더군요. 얼마나 반갑던지! 남편 평산이 최치수 살인의 주모자로 사형 당하자 중인 출신이지만 양반가 여성으로써 긍지를 지니고 지난한 삶을 살아가던 버팀목을 잃어 버려 거복이, 한복이 어린 두 아들을 남겨 둔 채 그 살구나무에 목을 맵니다. 사람이 목매어 죽은 살구나무를 달여 먹으면 몸에 좋다며 새벽 일찍 살구나무 가지를 꺾어가는 봉기의 이기적인 모습도 보입니다. 물레방앗간 옆의 '타작마당'에 서니 용이, 판술이, 칠성이가 주축이 되어 놀던 풍물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 모습을 자랑스럽게, 반쯤은 부끄럽게 바라보던 그들의 아낙들 모습도...... 작품 <토지>는 2년전에 또다시 SBS에서 방영 되었다는군요. TV 시청은 전혀 안하지만 괜히 그 방송사에 신뢰가 갑니다.
5년 전인가 이 곳에 들럿을땐 한창 최참판댁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듬해엔 공사는 마무리 되었으나 작품속의 이미지가 아니어서 많이 실망하고 근처 ‘고소산성’에 들러 위로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그 곳은 작품속의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를 생생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둘러본 구례 화엄사의 금강문과 사천왕문 앞에서 잠깐 머물렀습니다.
남도엔 예향도 많을뿐더러 맛 고을도 참 많지요. 그래서 매번 여행지로 ‘남도여행’을 꼽게 되나 봅니다. 또 다른 이유 하나는 감명 깊게 읽었던 대서사시의 작품 무대가 주로 남도란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작품의 무대를 가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욕심이겠지요.
용이네 삽작에 붉은 몽우리 도톰도톰하던 나무는 아마 매화이지 싶습니다.
봄이 멀지 않았습니다. 봄은 흔들림이라 하던 어느 시인의 말이 언뜻 떠오릅니다.
올 봄엔 흔들리고 싶군요.
댓글
8 건
댓글 닫기
댓글 보기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354 |
-->[re]욕지도의 밤 사진 ![]() | 한정화 | 2007.02.01 | 1750 |
1353 |
-->[re]아름다운 삼덕항 ![]() | 한정화 | 2007.02.01 | 1849 |
1352 |
한림아림(한아름)의 팔불출아빠 일기 ![]() | 空기원 | 2007.01.30 | 2022 |
1351 |
[아.특.인] - '죽은 시인의 사회' 존 키팅(후편) ![]() | 亨典 이기찬 | 2007.01.30 | 2813 |
» | 남도 여행기 [8] | 서정애 | 2007.01.29 | 2101 |
1349 | 사라진 육교 그리고 장례식 [1] | idgie | 2007.01.26 | 1942 |
1348 |
시간개념 해석영화에 대한 오마주 - '데자뷰' ![]() | 이기찬 | 2007.01.26 | 2552 |
1347 |
한 나무 ![]() | 이은미 | 2007.01.25 | 1815 |
1346 | 만일 네가 [3] | idgie | 2007.01.21 | 1927 |
1345 | 思想의 벗들 [5] | 초아 서대원 | 2007.01.20 | 1888 |
1344 | 책을 쓰고 후회한 일들 [9] | 운제 | 2007.01.17 | 2069 |
1343 | 역시 재동군은 훌륭한 아버지. [3] | 초아 서 대원 | 2007.01.17 | 2002 |
1342 | 기쁜 얼굴으로... [3] | 백산 | 2007.01.15 | 2135 |
1341 | EBA-MBA에서 보고.. [1] [1] | 강희경 | 2007.01.15 | 1922 |
1340 | 생각 주간의 끝에서.. [8] | 香仁 은남 | 2007.01.14 | 1927 |
1339 | -->[re]자로님께 [2] | 김나경 | 2007.01.14 | 1928 |
1338 | 3기 연구원 모집공고를 보고나서 [1] | 김나경 | 2007.01.13 | 1891 |
1337 | 재동군의 아들 이름을 지으며. [6] | 초아 서 대원 | 2007.01.13 | 2504 |
1336 | 오디오북 [2] | 운제 | 2007.01.12 | 1926 |
1335 | 어느 컴퓨터 아저씨의 이야기 [3] | 향인 은남 | 2007.01.12 | 2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