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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레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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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일 09시 06분 등록
절 이라는 공간에서의 3박 4일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것이 몸에 배일 즈음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내 계획은 어디가 그리 잘 못 만들어지는 건지, 세우는 계획마다 뚜껑을 열어보면 틀어지기 일 수인데, 이번 사찰 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속에 담아놓은 책 두 권을 읽으며 영국에서의 9개월을 정리하고 사방팔당 떠있는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 그 첫 번째였고,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3기 연구원이 되기 위한 페이지에 원서를 쓰는 것도 첫 번째에 비할 만큼 큰 목표였고 절 행을 결심하게 된 주된 요인이기도 했다. 절에서 나를 돌아보며 20페이지에 걸친 내 삶의 목표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은 듣기만해도 아귀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은가.

계획은 출발부터 틀어졌다. 먼저 영국행 직후 떠나려했던 시간적 배경이 집안일과 엄마의 병원입원으로 인해 뒤로 밀렸고, 때문에 변화경영연구소 원서를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4일에서 하루로 베어지고 말았다. 더욱이 나 홀로 절 한 칸에 틀어박혀 사색과 독서에 몰두하려 했던 계획은 엄마가 동행하게 되면서 둘의 오붓한(?) 밀월 여행이 되었으니 계획을 앞서 말한 것이 무색하게 할 만큼 모든 것은 변해있었다.

앞서 장황히 설명했듯이 내게 있어 이번 절 행은 새벽기도, 사시기도, 저녁불공 3연타를 모두 행하는 불공여행이 아니었음에도 도착 후 자연스레 결정이 되어 버렸고 모든 일정과 취침시간 바이오 리듬 역시 여기에 맞춰지게 되었다. 4시 새벽불공을 드리기 위해서는 열 일을 제쳐두고 9시에 자리에 누워야 했고 9시에 잠을 자기 위해서는 8시부터 사력을 다해 책장을 넘겨야 했다. 불공을 드리고 곧 아침 공양(절에서는 먹는 식사), 오전 10시 30분에 드리는 사시불공 후 바로 점심 공양이 이어졌고 하루는 그렇게 그렇게 물 흐르듯 흘러갔다.

도착 한 날부터 ‘찬아’ ‘찬이야’ 내 이름을 불러주시던 지성스님. 어차피 처음의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던 터라 나는 이내 절에 푸욱 묻혀버리기로 했다. 그 때부터는 부처님오신날 쓰는 연 꽃잎도 만들고, 스님이 주시는 차도 연거푸 들이키고, 그제부터는 절에서 재배하는 배 밭(광활했다)에 거름 90포를 쏟아 붙고 덮는 일까지 도맡았다.
지난 밤에는 법당에 있는 연등(천장에 매달려있는)을 새 걸로 교체하기 위해 사다리를 놓고 연등을 떼는 일을 했는데 늘 연등의 똥꾸녁만 쳐다보다가 사다리를 놓고 머리를 들이밀어 천장에서 연꽃의 정수리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는데 그 광경이 장관이더라. 연꽃을 띄다 말고 스님께, “ 스님, 여기 올라와보니 연꽃들이 바다와 같습니다. 맨날 밑에만 보다가 올라와 보니 장관입니다. 올려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하니 스님은 “ 차니가 한 3일 불공을 드리더니 아주 도가 트였구나” 하셨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피사체가 있을 때는 사진기가 없고, 사진기를 가지고 다닐 때는 찍을만한 피사체가 없다. 간혹 담고 싶은 찰나의 순간이나 피사체가 있고 하늘이 도와 사진기 또한 내 손에 있을 때는 배터리가 뾰롱뾰롱 심술을 부리거나 염병할 메모리카드가 풀인지라. 내공 없는 초보 사진가의 넋두리다.

내 절 행이 산으로 치닫고 있어도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지원의 열망은 점점 커져가서 잠을 쪼개서라도 글을 다 쓰고 싶었는데, 결정적으로 올 해 지원을 포기한 순간이 불공을 드리다가 찾아왔다. 지난 1년 동안 내 관심의 중심이었던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지원이 한 순간에 연기가 된 연유는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불공을 드리는데 망상이 끊이지 않더라. ‘불공 드리고 뭐하지’ 부터 시작해서 새해벽두에도 세우지 못한 한해 계획을 세우는가 하면 1년 전에 헤어진 예전여자친구생각까지 온 망상이 머리를 삐집고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삐집고 들어온 것이 아니요 머리안쪽에서 만들어져 밖으로 헤치고 나오더라.
그러다가 내 망상의 끝이 변화경영연구소에 머물렀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한 자락. ‘ 아 이번에 불공의 힘을 받아 글빨이 먹혀서 연구원이 된다면 이력서에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3기 연구원이라고 쓸 수 있을 것이고 그건 내 이력서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되겠구나. 어쩌면 취업대란 속에서 잘 헤쳐나갈 수도 있겠구나 ‘
그 생각이 스미자 바로 쫓아 온 생각은 다름아닌 부끄러움이었다. 구본형님의 ‘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접하고 일었던 가슴 속 파장, 그 이후로 그 분과 연결되고 싶어했던, 그리고 지금보다 발전하고 커지고 싶었던 순수했던 열망이 모조리 파괴되는 것 같았다. 깨끗한 마음에서 좀 더 진실한 글을 쓰고 싶었던 산사에서 새롭게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지닌 나를 보고 말았다. 어쩌면 김형경님의 심리 에세이 ‘사람풍경’을 읽고 있는 중이라서 인지 알 수 없으나 그 부끄러움만큼은 진실이었다. 어제 읽었던 ‘사람에게서 구하라’의 한 꼭지가 선명해짐을 느꼈다. 1장 49p. 안연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사공과 나눈 대화의 한 꼭지.

‘ 내기를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기왓장 하나를 걸고 내기를 하면 활을 쏘아 기막히게 맞히는 사람이,허리띠의 황금 고리를 내기의 상품으로 걸면 어지러워 활을 쏘지 못하게 된다. 기량은 동일하지만 내기 상품에 마음이 쏠리는 이유는 외물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대체로 외물을 중히 여기면 내심은 졸렬해진다. ‘

난 내 이력서의 화려함을 위해, 면접 때의 멋진 한마디를 위해 (저는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의 3기 연구원 입니다. 라고 너무도 말하고 싶었으니까.) 졸렬해졌다. 이런 나로는 멋진 활 시위를 당길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 길로 쓰고 있던 글을 중지하고 이번 한 해의 연구원 지원을 내년으로 연기했다. 나의 지금에 불만을, 나의 지금에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법당에서 느낀 그런 마음가짐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1년여의 시간을 다시 갖고 싶다. 그래도 결코 놓지 않는 마음은 반드시 그곳에 가고 싶다는 것과 더 성장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언젠가 나는 그곳에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 그리고 그 확신은 항상 기분을 좋게 한다.

마지막 새벽기도. 오늘은 이상하게 망상이 적었다. 하품도 적당히 했고, 눈도 맑아지는 듯 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간다. 치열하게 살아야 할 1년이 앞에 놓여있다. 우습게도 또 한아름 계획을 세우고 말았다. 또 다시 산으로 갈 계획묶음들. 그래도 난 계획을 세우고 그 안에서 기쁨을 느낀다. 산으로 가도 그 만한 가치가 있다. 이번 절 행이 그러했듯이.






-1-
여담이지만 절에 오기 전 읽고자 마음 속에 담고 온 책은 두 권이었다. 하나는 구본형님의 ‘사람에게서 구하라’ 였고 다른 한 권은 앞서 얘기했던 김현경님의 심리에세이 ‘사람풍경’이었다. 시작은 구본형님의 책이었는데 절에 읽는 동안 마지막을 본건 사람풍경이었다. 나름 나를 바라 볼 수 있는 시간을 원했던 것 때문이 아니 였나 싶다. 어찌됐건 묘하게도 두 책 모두 사람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새로 세운 계획다발에도 모두 사람이 포함되어버렸다.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공간에서 읽는 책의 힘은 실로 놀랍다.

-2-
끝으로 연구원 원서에 써넣은 한 꼭지를 넣고자 한다. 이 꼭지를 넣는 연유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됨을 밝힌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내 마음이 어떠한 해 없이 그대로 전해지기만을 바라며 글을 쓴다. 꼭 이 말을 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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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이 되어 처음으로 지우들과 사부님을 뵙는 자리를 상상해 봅니다. 오늘도 일찍 잠들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저는 늘 앞으로 일어날 기분좋은 상상을 하곤 합니다. 이뤄진 것도 있고 허망하게 사라진 것도 대다수였습니다. 그 중에 연구원이 되어 처음으로 제 소감을 말하는 그 장면은 늘 저를 흥분케합니다. 저는 말을 더듬지는 않습니다만 가끔 다음말할 단어를 머리 속에서 끄집어 내는데 긴시간이 걸리는 편입니다. 스스로 이것을 병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끔 굉장히 곤혹스러울때가 있지요. 혹시나 첫 소감발표에서도 그러지 않을까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굉장한 기우임에 틀림없습니다. 정말 사실이 된다면 다음단어를 꺼내느라 허둥지둥되며 얼굴이 빨개지더라도 그 자리에 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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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 많은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할 수 있는 인연을 만드는 오늘이 되시길 빕니다.

에레혼
IP *.9.6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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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지원자
2007.03.01 06:37:42 *.72.153.164
아무래도 자신을 정리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듯 합니다.
저는 2달이 넘게 걸려서 지원서를 썼습니다.
삶이란,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동안에 자꾸 무언가를 만들고, 이끄는 엉뚱한 구석이 있습니다.
연꽃의 바다를 본 것을 부러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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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2007.03.01 07:51:59 *.9.64.142
답글 감사합니다. 연꽃의 바다를 사진기로 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다만 눈과 가슴에 그 순간을 넣은 것에 감사하고 있지요.

생각하기 시작하고 새 글 열기로 글을 쓰기시작한 지는 9개월 전으로 올라갑니다. 정리되지 않고 산만했었지요. 아직 마무리도 짓지 못했지만요.

지원자 님의 좋은 소식을 기원합니다. 좋은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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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지원자
2007.03.02 00:50:04 *.48.37.157
참 글을 잘 쓰시는 분이네요.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셨는지..이제 글을 접하고 보니 지원을 한 제가 부끄러울만큼 맛깔스러운 글솜씨입니다.
저는 일주일만에 후다닥 자신을 정리했는데 막상 보내고 나니 다신 보고싶지 않을 만큼 제 글에 얼굴이 붉어질 정도네요.
에레혼님,앞으로도 많이 글 남겨주시고 같이 동참해서 좋은 글 보여주세요. 참 마음에 와닿게 잘 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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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2007.03.02 11:29:58 *.232.173.10
과찬이십니다. 얼굴이 빨게지려하네요.

언제인지는 정확치 않으나 제 스스로 인정중독증에 걸린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중독성이 강하더군요.

문제는 일에 대한 인정과 칭찬이 이어져 그 인정과 칭찬이 다음 일을 추진하는데 원동력이 되는 자연스러운 프로세스가 아닌 앞뒤가 전복되어,
가끔 인정과 칭찬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이때는 일의 결과가 기대치보다 훨씬 낫기도 하거니와 많은 스트레스를 받곤 하더군요.

그럼에도불구하고 아직은 인정중독증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자신할 수 없습니다. 훌쩍 뛰어넘는 성장이 필요한 저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위의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칭찬받고 격려받는 것 만큼은 너무도 기분 좋은일임에는 틀림없네요.

감사합니다.
지원자님의 건승을 빕니다. 다음 글에서는 ' 정식 연구원'이란 닉네임으로 글을 올리시길 기대합니다.

오늘도 멋진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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