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자유

주제와

  • 엄승재
  • 조회 수 1710
  • 댓글 수 3
  • 추천 수 0
2007년 3월 21일 19시 41분 등록
꿈을 앗아가는 사회, 꿈을 격려하는 사회
내 아이의 꿈



한때 둘째 놈의 장래 희망은 축구선수였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의 선전은 여섯 살 녀석에게 푸른 잔디구장을 누비는 꿈을 꾸게 했습니다. 부지런히 국가대표 선수의 이름과 등번호를 외우던 녀석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급기야 매주 토요일마다 축구를 하는 '참스포츠 축구교실'에 등록하기도 하며 꿈을 키워갔습니다.

학교에 늦는 것은 크게 개의치 않더라도 축구교실에 조금이라도 늦을라치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녀석이 어느 날 축구선수의 꿈을 접었습니다. 판사가 되겠다는 거였습니다.

같은 반 아이들이 싸우는 걸 말리는 과정에서 "너는 이래서 잘못했고, 너도 이래서 잘못했어. 그렇지만 네 잘못이 더 크니까 네가 사과해"라고 녀석이 하는 말을 우연히 들으셨던 선생님께서 "용우는 판사하면 잘 하겠구나. 용우야, 이제부터 너는 우리 반 판사야!"라고 하시는 말씀 한 마디에 여섯 살부터 꿔 오던 녀석의 꿈은 하루아침에 바뀌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30년 전, 작가의 꿈을 꿨던 적이 있습니다. 펄벅의 <대지>를 읽게 한 다음 달력 뒷장에 독후감을 써보라고 하신 작은어머님께서 말도 안 되게 쓴 내 글을 보시고 하신 "너는 커서 작가 해도 되겠다"라는 말씀 한 마디를, 정작 작은어머님께서는 그때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신 걸 기억 못하고 계십니다만, 전 20년도 넘게 간직했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둘째 녀석 용우의 장래 희망은 은행원입니다. 세뱃돈이나 용돈을 곧잘 제 엄마에게 맡겨놓던 녀석이 제 엄마를 졸라 은행 통장을 만들면서 녀석의 꿈은 국민은행 은행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제 이름의 통장과 직불카드를 만들면서 뿌듯해하는 녀석의 머리를 집 앞 국민은행 창구 직원이 쓰다듬어 주었던 것이 녀석을 또 춤추게 한 모양입니다.

누가 먼저 물어보지 않아도 자기는 은행원이 될 거라고 공공연하게 떠벌이던 녀석이 어느 날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는 은행원이 안 될 거랍니다. 왜 그렇게 마음이 변했냐고 물어보니, "로봇이 은행원 일을 대신 하게 되면 얼마 안 가서 자신의 할 일이 없어질 거"라는 걱정 때문에 은행원을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아는 게 병이었습니다. 뉴스나 신문을 보면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는 나와 달리 녀석은 보고 들었던 뉴스 토막을 느닷없이 꺼내 놓을 때가 있는데, 로봇이 은행 일을 대신 할 거라는 기사가 있었나 봅니다.

사람 일을 기계가 대신 하는 만큼 남는 시간을 재미있게 활용할 수 있지 않겠냐고 현실보다는 제 희망사항에 방점을 찍고 녀석에게 말을 했던 건, 과학기술의 발달이 아이들의 꿈을 꺾는 데 이용되어서는 안 될 거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이것저것 갖다 붙이다가 끝내 아톰이나 태권V도 사람이 만들었다는 나의 무지막지한 이야기를 듣고서야 겨우 녀석은, 은행원이 되어서 자기가 존경하는 장영실을 모델로 화폐를 새로 만들겠다는 국민은행 은행원의 꿈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모처럼 휴일을 맞아 체육관을 함께 가던 녀석이 느닷없이 국민은행 은행원이 공무원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니라고 하니까 그럼 은행원 중에 공무원은 어디냐고 물어 얼떨결에 한국은행이라고 말했습니다. 두 말 하지 않고 녀석은 한국은행 은행원이 되겠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공무원보다 일반 회사원이 더 쉽게 잘리기 때문이랍니다. 돈을 많이 만지는 만큼 은행원이 돈을 많이 버는 줄 아는 녀석은 은행원을 오래 해야 엄마 아빠한테 공수표를 날렸던 이것저것을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뉴스에서, 신문에서, 그리고 엄마 아빠 말에서 '해고'니 '퇴출'이니 '실업자'니 '잘렸'느니 하는 말들이 일상화되었기에 호기심 많고 고지식한 녀석의 꿈이 자꾸 자꾸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국은행 은행원으로 바뀐 녀석의 꿈은 몇 번이고 또 바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화려하고 돈을 많이 버는 직장에 혹하는 녀석이 언젠가는 가치 있는 삶을 꿈꾸기를 기원해 봅니다. '무슨 일을 할까 보다는 어떠한 삶을 살까'로 녀석의 꿈이 진화할 수 있도록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꿈을 앗아가는 경쟁과 약육강식의 사회가 아닌, 아이들의 꿈을 격려하고 북돋아주는 조화와 존중의 세상을 꿈꿔봅니다.


이한주/ 철도노동자,시인

* 이 글은 전태일통신 71호에서 퍼왔습니다
IP *.235.90.3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7.03.21 23:10:49 *.70.72.121
가장 중요한 건 부모님이 어떤 일을 하시건 열심히 그리고 행복해 하시는 것 아닐까요? 참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쵸?

그리고 조금 더 크고 넓은 마음으로 이 세상이 어제보다 나아지도록 우리 함께 날마다 생각하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

저도 고민 중이에요. 좋은 세상을 물려줘야 할텐데 말에요.
프로필 이미지
2007.03.22 07:55:21 *.128.229.88
사람들은 기회비용이 큰 일일수록 소신을 지키기 보다는 대세를 따르려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같아요.
지나서 생각해보면, 정말 별것도 아닌 유혹들인데...
가슴아프죠. 이렇게 꿈이 변색되어 버리는 걸 보면...
프로필 이미지
Alice
2007.03.22 11:09:07 *.133.120.2
사회 현실이 아이들의 꿈까지 퇴색되게 만든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조차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꿈이 아닐까 합니다. 현실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꾸는 꿈은 늘 변할 수 있을거 같아요... 저는 이미 적당히 old(?)한 나이인데도 꿈이 수시로 바뀌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 꾸는 꿈이 "꼭 ~~가 되겠다"라고만 한정되는데 있는거 같습니다. 흔히들 꿈을 물어볼 때 "뭐가 되고 싶느냐?"가 질의 내용이 되고 그에 대한 답이 대답이 됩니다.
위에 칼럼의 필자께서 말씀하셨듯이 "무슨 일을 할까 보다는 어떠한 삶을 살까"로 아이들의 꿈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어제 저녁 뉴스에 나온 프로 바둑기사사 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이겨내야 하는 어린 초등생을 보니, 그것이 아이의 꿈(또는 소망)이라기 보다는 부모의 꿈인거 같아 보기 안타깝고 딱했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