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은(蘇隱)
- 조회 수 4125
- 댓글 수 3
- 추천 수 0
제가 새해를 잘 시작하기 위해 결심한 3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머리를 자르는 것이구요,
요가를 시작하는 것이구요,
7일 포도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 3일에 머리를 잘랐고, 현재 낯선 제 모습에 익숙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5일에 처음으로 요가 클라스에 등록해서 한 시간 요가 훈련을 받았습니다.
오늘이 그 두 번 째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로 포도단식 3일 째를 맞고 있습니다.
누구의 지시도, 같이 하는 사람도 없이 단식을 하는 일은 좀 지루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혼자서 계획하고, 일상을 무리없이 끌어가면서 단식을 하는 일은
짜릿한 흥분을 줍니다.
'요리를 하면서 밥은 먹지 않는다'.
이보다 절제를 더 시험해볼 곳이 어디있겠습니까.
저는 모든 유혹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일상 속에서 굶고 있는 것입니다.
사투를 벌여야 할 심각한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자발적 고난에 스스로를 몰아넣는 것이지요.
그 일이 생각보다 짜릿한 것은
아무래도 말로 설명하기 힘든 피학의 심리가
인간에겐 본능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저의 평소 의심을 정당화해주는 것 같습니다.
머리를 자르고 난 이후,
'짧은 커트 머리가 좀 더 샤프하고 도회적인 인상으로 바꾸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지
그렇지 못한 저의 외양에 실망이 많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외모가 좀 안되도, 열정 만으로 사람들에게 쉽게 호감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좀 더 자주 하게 됩니다.
머리를 자를 때는 남을 의식하는 자의식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와지고 싶고
남에게 잘보이고 싶은 끈질긴 욕망으로부터도 탈출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자르고나서 생각하는 것은, 그런 욕망은 한 순간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뿌리가 깊은 욕망일수록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시도를 통해 그런 욕망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것을 느낍니다.
요가를 하면서도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강사의 인스트럭션대로 여러 동작을 1시간 동안 따라하는데
내 몸이 그토록 뻣뻣하다는 데 스스로 많이 놀랐습니다.
게다가 앞에 앉은 한 여자가 얼마나 제 기를 죽이던지.
자그맣고 단아한 체구에 마치 무용을 오래 한 사람처럼 균형이 잘 잡힌 몸매로
요가의 모든 동작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하는 그녀를 저는 질투나는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실은 요가의 동작 중 대다수는 어릴 적 저의 장기였습니다.
요가가 이 땅에 보급되기 전의 일이지요.
시골 초등학교에서 기계체조라는 걸 했었거든요.
유연함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내 몸이 어느새, 어쩌자고 이렇게 되었는지!
그녀를 눈부시게 바라보며 나는 1시간 내내 꿈을 꾸었습니다.
언제쯤 나도 저런 몸을 만들 수 있을까.
3개월, 아니 6개월..
그런 꿈이나마 꿀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요가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뭔가를 시작하는 기분이 참 좋습니다.
오늘 아침 편지 하나를 받았습니다.
변경연 연구원 한 명이 '마음을 나누는 편지'의 새 필진으로
첫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그 친구는
첫 편지를 앞에두고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몇 일 밤잠을 설쳤다고 합니다.
지식이 모자라 쓸 수 없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능력이 없어 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모두 '조금은 서툴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함께 공감할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겠다며
자신의 '서툼'을 딛고 용기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의 진솔한 글이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그에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 답장은 저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____________
따뜻한 그대의 글에 응원을 보냅니다.
시작하기 전 까지는 누구에게나 늘 두려움이 있지요.
그 두려움은 시작하기 전에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법이지요.
일단 '시작'을 한 그대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원래 좀 두려운 것을 해야 성취감이 더 큽니다.
그것은 나의 어떤 기대가 기대로만 끝나지 않고
현실이라는 가능성의 장벽 안으로 진입하는 일이니까요.
고통은 심해도, 한 마디로 짜릿한 경험이지요.
그대는 그대로도 참 좋아요.
잘 할 거예요.
오늘 글이 벌써 이렇게 좋은 걸요.
미남인 것만으로도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데
글까지 너무 잘쓰면 오히려 여러 사람 기를 죽일텐데..
질투하는 사람이 여럿 생기겠어요.
겸손한 휴매니티를 유지하면 그런 질투는 막을 수 있을라나,후후.
__________
오늘 아침, 이틀 굶은 몸에 포도알 다섯 개를 넣어 주었습니다.
구본형 선생님이 '낯선 곳에서의 아침'에 쓴 글이 생각이 납니다.
단식 셋째날 먹는 포도를 두고 그는
'평생 그렇게 맛있는 포도를 먹어보기는 처음'이라고 쓰셨습니다.
역시 그 맛은 남달랐습니다.
아마 평생 그 포도맛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
꿈이 단지 꿈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
적어도 가능성의 영역 안으로 진입하는 그 기분,
그 기분이 참 좋습니다.
댓글
3 건
댓글 닫기
댓글 보기
VR Le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