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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가 백동수에게 안분지족의 뜻을 전한 간찰
봄 기후가 한창 화창한데 지금 형은 도성에 머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아우는 산수가 중첩된 천리 밖에서 어비이를 그리워하고 있으니,
지금은 영숙이나 나나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족하는 친척들 사이에서
노닐며 나그네 생활의 괴로움을 모를 것입니다. 이 아우는 날마다 사나운
풍속을 대하여 하는 일이라고는 오직 빚이나 독촉하고 송사나 판결하면서,
본의 아니게 거짓 성을 내기도 하는가 하면 상대방이 거짓 자복하기도 하니,
결국은 위아래가 다 함께 잘못을 저지를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옛사람은
승이여! 승이여! 하였습니다만, 저는 승 또한 제대로 할 수가 없군요.
더러는 잠시 한가한 시간을 내어
대숲에서 나는 바람 소리를 듣고
배꽃에 흐르는 비를 맞으며 그림자하고 즐긴다오.
그 누가 이런 흥을 알겠습니까!
++++++++++++++++++++++++++++++++++++++++++++++++++++++++++++++
시골의 현감으로 있으면서 실권 없이 형식적인 사무에 골몰하는 것을
남전승이라고 한다. 이 간찰에서 '승이여, 승이여!'라고 한탄하는 말은
한유가 지은 <남전현승청벽기>에 나온 말이다. 당나라 박릉 사람
최사립이 남전 현령의 부하 직위인 현승이 되어 있을 때, 아무 실권이
없어서 아전이 올리는 문서에 시키는 대로 공란에 서명만 하는 것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관서 안뜰에 있는 두 소나무 사이를 거닐면서
시문을 읊을 따름이었다. 뒤에 아송이라고 하면 현승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 간찰은 이덕무가 1781년에 내각(규장각) 검서관의 직을 그만두고
사도시 주부를 거쳐 사근도 찰방으로 나가 있을 때 쓴 것이다.
외방의 한직에 나가 있는 불평스런 마음을 토로하면서, 동시에
한직이기에 유유자적할 수 있다는 자기 위안의 말을 덧붙였다.
간찰을 받은 백동수(1743~1816)란 인물은 이덕무.박제가, 박지원이나
성대중과 교분이 깊었다. 북학파를 태동시킨 백탑시사의 중심인물이라고도
일컫는다. 박지원을 위해 홍국영의 탄압을 미리 알려 피하게 도와주기도
하고, 황해도 연암에 집터를 가려 주기도 했다.
백동수, 그는 무장의 후손이지만 서자의 신분이었다. 본관은 수원이고,
자가 영숙이다. 증조부는 절도사 백시구로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나, 경종 때인 1721년에 발생한 신임사화 때 노른 4대신(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등과 함꼐 화를 입었다. 백동수는 29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나, 일을 즐거워하지 않고 협객의 생활을 하였다.
1789년 45세 때는 장용영 초관으로 있었으며, 생애 후반에는 비인 현감과
박천 군수로 재직하다가 1816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박제가는 그를 일러 "경사와 <사기>를 능히 논할 만하다" 라고 했고,
성대중(1732-1812)은 "무로써 문을 이룬 사람"이라고 했으며,
박지원은 "전서와 예서에 뛰어나다."라고 했다. 이덕무는 백동수에게
자기 글에 대한 평을 부탁했으며, 당대의 화가 김홍도와는 화법에 대해
토론했다.
백동수는 물명에도 밝았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들어 있는 <앙엽기>의 맥 조항에는 백동수가 노새, 나, 맥, 것귀, 등맥, 버새, 특의 물명을 변별한 말이 인용되어 있다.
백동수는 스스로의 호를 "야뇌"라고 하였다. 재야에서 굶주려있는 사람이란 뜻이니, 권력에 얽매여 비굴해지는 것을 싫어해서 그런 호를 사용한 것이다.
이덕무가 1761년 (영조 37) 정월 20일에 그를 위해 <야뇌당기>를 써 주었다. 그 일부를 보면 이러하다.
야뇌는 누구의 호인가? 나의 벗 백영숙의 자호다. 내가 영숙을 보매 우람한 선비인데 무엇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고 비루하게 여기는가?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무릇 사람이 시속에서 벗어나 군중에 섞이지 않는 선비를 보면 반드시 조롱하기를, "저 사람은 얼굴이 순고하고 소박하며 의복이 시속을 따르지 않으니 뇌인이로구나!"한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그와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 온 세상이 모두 이러하기에, 이른바 야뇌라고 하는 자 가운데 어떤 이는 홀로 행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와 함께 어울려 주지 않는 것을 탄식하고 후회해서 순박함을 부끄러워하여 질실質實함을 버리고 차츰 천박함을 따라가게 된다. 이것이 어찌 진정한 야뇌이겠는가? 그렇기에 참으로 야뇌라고 할 만한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영숙은 옛스럽고 소박한 본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차마 세상의 간사한 것을 따르지 아니하여, 굳세게 우뚝 자립해서 마치 저 딴 세상에 노니는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 모두가 비방하고 헐뜯어도 그는 조금도 야野한 것을 뉘우치지 아니하고 뇌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 이야말로 진정한 야뇌라고 일컬을 수 있지 않겠는가?
IP *.142.150.131
봄 기후가 한창 화창한데 지금 형은 도성에 머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아우는 산수가 중첩된 천리 밖에서 어비이를 그리워하고 있으니,
지금은 영숙이나 나나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족하는 친척들 사이에서
노닐며 나그네 생활의 괴로움을 모를 것입니다. 이 아우는 날마다 사나운
풍속을 대하여 하는 일이라고는 오직 빚이나 독촉하고 송사나 판결하면서,
본의 아니게 거짓 성을 내기도 하는가 하면 상대방이 거짓 자복하기도 하니,
결국은 위아래가 다 함께 잘못을 저지를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옛사람은
승이여! 승이여! 하였습니다만, 저는 승 또한 제대로 할 수가 없군요.
더러는 잠시 한가한 시간을 내어
대숲에서 나는 바람 소리를 듣고
배꽃에 흐르는 비를 맞으며 그림자하고 즐긴다오.
그 누가 이런 흥을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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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 현감으로 있으면서 실권 없이 형식적인 사무에 골몰하는 것을
남전승이라고 한다. 이 간찰에서 '승이여, 승이여!'라고 한탄하는 말은
한유가 지은 <남전현승청벽기>에 나온 말이다. 당나라 박릉 사람
최사립이 남전 현령의 부하 직위인 현승이 되어 있을 때, 아무 실권이
없어서 아전이 올리는 문서에 시키는 대로 공란에 서명만 하는 것이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관서 안뜰에 있는 두 소나무 사이를 거닐면서
시문을 읊을 따름이었다. 뒤에 아송이라고 하면 현승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 간찰은 이덕무가 1781년에 내각(규장각) 검서관의 직을 그만두고
사도시 주부를 거쳐 사근도 찰방으로 나가 있을 때 쓴 것이다.
외방의 한직에 나가 있는 불평스런 마음을 토로하면서, 동시에
한직이기에 유유자적할 수 있다는 자기 위안의 말을 덧붙였다.
간찰을 받은 백동수(1743~1816)란 인물은 이덕무.박제가, 박지원이나
성대중과 교분이 깊었다. 북학파를 태동시킨 백탑시사의 중심인물이라고도
일컫는다. 박지원을 위해 홍국영의 탄압을 미리 알려 피하게 도와주기도
하고, 황해도 연암에 집터를 가려 주기도 했다.
백동수, 그는 무장의 후손이지만 서자의 신분이었다. 본관은 수원이고,
자가 영숙이다. 증조부는 절도사 백시구로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나, 경종 때인 1721년에 발생한 신임사화 때 노른 4대신(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등과 함꼐 화를 입었다. 백동수는 29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나, 일을 즐거워하지 않고 협객의 생활을 하였다.
1789년 45세 때는 장용영 초관으로 있었으며, 생애 후반에는 비인 현감과
박천 군수로 재직하다가 1816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박제가는 그를 일러 "경사와 <사기>를 능히 논할 만하다" 라고 했고,
성대중(1732-1812)은 "무로써 문을 이룬 사람"이라고 했으며,
박지원은 "전서와 예서에 뛰어나다."라고 했다. 이덕무는 백동수에게
자기 글에 대한 평을 부탁했으며, 당대의 화가 김홍도와는 화법에 대해
토론했다.
백동수는 물명에도 밝았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들어 있는 <앙엽기>의 맥 조항에는 백동수가 노새, 나, 맥, 것귀, 등맥, 버새, 특의 물명을 변별한 말이 인용되어 있다.
백동수는 스스로의 호를 "야뇌"라고 하였다. 재야에서 굶주려있는 사람이란 뜻이니, 권력에 얽매여 비굴해지는 것을 싫어해서 그런 호를 사용한 것이다.
이덕무가 1761년 (영조 37) 정월 20일에 그를 위해 <야뇌당기>를 써 주었다. 그 일부를 보면 이러하다.
야뇌는 누구의 호인가? 나의 벗 백영숙의 자호다. 내가 영숙을 보매 우람한 선비인데 무엇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고 비루하게 여기는가?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무릇 사람이 시속에서 벗어나 군중에 섞이지 않는 선비를 보면 반드시 조롱하기를, "저 사람은 얼굴이 순고하고 소박하며 의복이 시속을 따르지 않으니 뇌인이로구나!"한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그와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 온 세상이 모두 이러하기에, 이른바 야뇌라고 하는 자 가운데 어떤 이는 홀로 행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와 함께 어울려 주지 않는 것을 탄식하고 후회해서 순박함을 부끄러워하여 질실質實함을 버리고 차츰 천박함을 따라가게 된다. 이것이 어찌 진정한 야뇌이겠는가? 그렇기에 참으로 야뇌라고 할 만한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영숙은 옛스럽고 소박한 본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차마 세상의 간사한 것을 따르지 아니하여, 굳세게 우뚝 자립해서 마치 저 딴 세상에 노니는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 모두가 비방하고 헐뜯어도 그는 조금도 야野한 것을 뉘우치지 아니하고 뇌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 이야말로 진정한 야뇌라고 일컬을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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