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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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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7일 20시 10분 등록

예전에 써 놓고 올리지는 않았던, 신질도 여행후기를 우연히 다시 읽었습니다. 그때의 감동이 새록새록 되살아 났습니다. 행복해 졌습니다. 즐거워 졌습니다. 잊고 지내셨던 분들 다시한번 그 감동을 끄집어 내어 즐기시기 바랍니다.^^;


 

  마치 꿈을 꾼 듯 하다. 현실과 현실사이의 틈을 걷고 있는 듯 하다. 몽환적이다란 표현이 이런 것일까. 시간은 흘러갔건만, 몸은 현재를 걷고 있건만 머릿 속 기억과 마음은 아직도 벅찬 뉴질랜드의 경관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하나하나가 감동이며 하나하나가 벅차오름이다.


  여행은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에 좋다고 한다. 여행은 떠나기 전 설레임이 있기에 좋다고 한다. 하지만 돌아오기를 아쉬워 하는 아련함에도 여행의 행복은 있다. 이번 여행이 바로 그랬다. 몸은 힘들고, 피로에 쩌들고, 잠도 부족했건만 정신만큼은, 영혼만큼은 더욱 또렷해질 수 있었던 건 이번 여행이 그만큼 행복의 극치를 맛보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정해진 틀 속에서 만들어지는 행복은 정해진 틀 만큼만 행복해 질 것이다. 하지만 정해지지 않은 무한의 공간에서 얻어질 수 있는 행복은 그 한계가 없다. 어떠한 행복이 내게 다가올 지, 아니면 스쳐지나갈 지 어느 누구도 모른다. 그것은 몰래 숨죽이며 다가오는 행복을 스스로 움켜 쥘 수 있는 자만의 몫일 것이다. 이번 여행의 23명은 각자 원한 만큼의 행복을 잡아, 마음 속에 꼭꼭 재여둔 채로 다시 돌아오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을 어느 순간 조금 조금씩 풀어 놓으며 다시 그 즐거움의 순간들을 되새기며 좋아라 할 것이다.


  변명이지만 메모를 하지 않았다. 할 시간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대신 눈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자 노력했다. 자연은 인간의 스승이자, 가르침이다. 그냥 자연이 내게, 우리들에게 하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다른 것이 필요없었다. 나에게 여행은 나를 놓아두는 시간이었다. 나는 자연과 하나되고 싶었다. 자연이 그렇게 아름답고 웅장한지 다시한번 깨닫고 고개 숙이게 했다. 나는 여행기간 내내 체해 있었다. 배가 아닌 눈이 소화를 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것을 받아들이려 했고, 끊임없이 소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내 눈의 용량은 한계가 있었다. 파노라마처럼 광활히 펼쳐지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하지만 나는 무모히 도전했다. 그리고 내내 행복한 괴로움에 시달렸다. 그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바로 내가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서 더욱 행복했고, 힘들었다.


  이번 여행의 또 하나의 즐거움은 아들과 함께한 시간들이었다. 아들과 함께 같은 자연을 보고 같은 자연에서 즐거울 수 있었다는 것은 부자(父子)로서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이미 5학년이 되어 샤워도 혼자 하는 나이가 된 아들을 좁은 뉴질랜드 Holiday Park 공용 샤워장에서 씻기고 닦이는 시간들은 내가 애비이고, 효빈이가 아들임을 더욱 각인시키고 확인시켜주는 시간이 되었다. 끈끈한 정은 일상이 아닌 일탈의 순간에서 더욱 옹매듭 지어지듯 강하게 연결되는 듯 하다. 뉴질랜드의 겨울 바람이 공용 샤워장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속에서 따스한 물에만 의지한 채 아들을 씻기고 닦아주는 시간은 아들이나 나나 서로에게 기쁨이 되었다. 아들의 재잘거림, 나의 적당한 술기 속에 우리의 샤워는 로마 황제의 샤워보다도 값지고 행복했다. 특히 내가 샤워하기를 기다렸다가 나의 발을 수건으로 닦아주는 아들의 덜 익숙한 손길은 나를 큰 감동에 빠지게 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 작지만 서로를 눈길 속에 담을 수 있는 것, 그 눈길 속에서 따스하게 감싸 안아 줄 수 있는 것, 여행에서 나는 그것을 얻었다. 아들과의 끈끈한 관계를 얻었다. 그리고 한층 더 성숙해가는 아들을 담을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행복했다.


  신질도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데카포 호수에 위치한 Holiday Park였다. 마지막 저녁 식사시간 이었다.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다 털어 부엌에 가져다 놓은 후 모두 모여 식사 준비를 했고, 같이 저녁을 먹었다. 진수성찬이었다. 금방 배가 불러왔다. 하지만 먹을 것이 너무 많았다. 포만감이 위를 넘어 식도까지 올라 왔을 때 수저를 놓았다. 그러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지난 일주일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잠시 눈을 붙이기로 하고 캠퍼밴으로 들어가 누웠다. 30분, 1시간 정도 눈을 붙이려 한 것이 무려 5시간 가까이 잠들어 버렸다. 효빈이가 옆에 와서 2번인가를 깨웠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다 모여 한마디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자기는 조금 있다 자기 차례가 올까봐서 차로 돌아왔다고 이야기 하는 걸 들으면서도 눈을 뜰 수 없었다. 눈꺼풀은 이 세상 어떠한 쇠붙이보다도 무겁기만 했다. 나의 정신은 꿈과 현실 속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피로에 발목 잡힌 채 현실로 돌아오기 힘들어 했다.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마지막 밤을 같이 하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한 다는 것 만큼 괴로운 것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아들이 옆에서 책을 읽다가 쓰러져 잠 들어 있었다. 시간을 보았다. 거의 새벽 1시를 달려가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아쉬웠다. 내가 원망스러웠다. 이 중요한 순간을, 이 아쉬운 순간을 잠으로 보내다니.... 정화씨가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들을 깨워 벙커방으로 올려 보내고 자라고 한 후 바깥으로 비틀거리며 나갔다. 누군가가 우리 캠퍼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누구일까. 익숙한 목소리. 사부님이었다. 그리고 한숙씨, 홍스, 춘희씨였다. 모두 다 끝나고 호숫가를 거닐고 싶은 사람만 몇 명 가고 있는 중이라 했다. 합류했다. 마지막이었으므로, 더 이상의 신질도를 운치를 즐길 시간은 없으므로.


  데카포 호수의 밤은 조용하지 않았다. 약간 구름낀 날씨 탓에 물감번진 듯 보이는 달과 구름 사이로 맑게 빛나고 있는 수 많은 별들, 바다인 양 쏴~아 소리를 내며 파도치는 데카포 호수 그리고 술에 취해, 경치에 취해, 사람에 취해 즐겁게 재잘거리는 우리 5명이 있었다. 찬 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우리는 노래를 불렀고, 와인을 마셨다. 춘희씨는 맨발인 채로 호숫가 얕은 물 속을 이리뛰고 저리뛰고 1시간 이상을 뛰어다녔다. 월광녀(月光女)였다. 아니 월광녀(月狂女)였는 지도 모른다.


  사부님은 트윈폴리오의 '축제의 밤'을 불렀다. 그랬다. 그날은 축제의 밤이었다. 아니 신질도에서의 모든 밤이 축제의 밤이었다. 즐거움의 밤이었다. 누구도 우리를 말리지 못할 행복감에 빠진 밤들이었다. 우리는 같이 불렀다. 축제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달빛 아래, 별빛 아래 그리고 우리가 들고 있던 와인잔 안에서. 사부님이 갑자기 큰일났다고 몸을 흔들어 댔다. 그러더니 한마디 하신다.


  "어떡하냐. 이제 나 죽기 싫어. 이렇게 좋은 데 어떻게 죽냐?"


  돌발스러움에 우리는 웃었다. 그랬다. 한없는 즐거움이, 샘솟는 행복감이 우리를 뒤엎었다. 데카포의 넓은 호수도 우리와 함께 즐거워 했다. 수 많은 호수위 달빛의 파편들이 우리를 환하게 비춰 주었다. 호수 위 한없이 빛나는 별빛들이 우리를 내리쬐고 있었다. 우리를 바라보며 춤추고 있었다. 반짝반짝 많은 별....


  사부님이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재우야. 너의 별은 어디에 있니?"

  "글쎄요. 저 달 뒤에 숨어 있지 않을까요?"

  "아니야. 저 뒤를 봐. 저 수많은 별 들 어딘가에 이미 너의 별도 환화게 빛나고 있을꺼야."


  나의 별은 이미 빛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아직 무언가에 가려 제 빛을 온전히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뿐. 나는 먼저 나의 빛을 가리는 그 무언가를 치우고, 나의 빛이 더욱 더 빛날 수 있도록 닦아주는 작업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주위의 환하게 빛나는 별들과 어울려 나만의 독특한 빛을 화려하게 뿜어낼 것이다. 나는 나만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빛을 보고 도움을 얻을 것이며, 행복해 할 것이며, 즐거워 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길이 될 것이며, 그로 인해 나 또한 행복한 인생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하나가 될 것이고, 자연에 머물며 또한 하나가 될 것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를 추구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완벽함이 될 것이다. 그것만큼 행복함도 없을 것이다.


  여행은 끝났다. 화려한 풍광의 축제는 끝이 났다. 하지만 마음 속의 축제는 이제 시작이다. 여운의 축제는 다음 여행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아니 죽음을 맞이할 순간까지 가슴 속에 계속 되살아나 불타오를 것이다. 흥겨워할 것이다. 춤 출 것이다. 그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 장작을 공급할 것이다. 여행의 끝은 다시 다른 여행, 축제의 시작이 될 것이다. 일상에서 일탈로, 다시 일탈에서 일상으로. 삶의 법칙은 때론 하나로 적용 가능하지만, 때론 그 어느 것도 적용되지 않는다. 일상에서 일탈로의 그 무법칙성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즐기라. 맘껏 즐기라. 그리고 다시 돌아오라. 가슴 속 축제의 열정을 가득 안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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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녀
2008.11.11 00:01:11 *.111.241.42
잊지 못할 그날 밤을 그리셨군요.^^
아! 그 달빛, 그 바람, 그 물결, 그 발의 감촉... 그리고 그 와인과 노래.

달빛이 호수 위로 길을 만들어 주더군요.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수초만 아니 었으며 전 지금 달나라에 가 있을텐데요.^^

그 한여름에 한겨울로 떠났던 여행이
시간이 갈수록 새록새록 마음속에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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