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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26일 14시 30분 등록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순간

누구에게나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엉망인 하루가 있지요.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꾸만 꼬여가는 하루. 짜증이 나다못해 눈물까지 나려하는 그런 하루가 말이예요.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그날 따라 일찍 일어나서 인사해주던 아이가 잠에 쿨쿨 빠져 있었지요. 야근 일지도 모르는데 지금 아니면 얼굴 한 번 못 볼지도 모르는데. 아이는 여전히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별 수 없이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인사를 하고 출근을 했더랬습니다. 엄마 오늘 늦을 지도 모른다며 자고 있는 아이에게 말을 해주고 말이예요.

별 탈없이 넘어가나 싶었던 상사는 오늘도 여전합니다. 어제까지는 “그랬어?”라면서 자신도 넘긴 일을 잘못되니 전부다 제 탓이랍니다. 자기가 언제 그리 말했냐며 얘기한 내용을 기억 못하냐며 옆애서 떽떽거립니다. 몇 살만 어렸다면 아이가 없었다면 당장 박차고 나왔을 텐데 그저 말없이 들어요. 무슨 할말이 있겠어요. 어처피 저 사람도 내 대답 듣고 싶지 않을껄요. ‘아~ 이루미 성질 많이 죽었구나. 너도 별 수 있냐?’ 는 생각이 들며 왠지 씁쓸해 집니다.

이놈의 야근은 오늘도 그칠 줄 모릅니다. 저녁까지 시키는 걸 보니 늦어질 모양이예요. 혼자 생각으로는 저녁 먹을 시간에 일을 해서 30분이라도 빨리 들어가고 싶은데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저녁을 먹고 살짝 빠져나와 아이에게 전화를 합니다. “엄마는 오늘도 늦을 것 같아. 우리 공주 잘 자. 일어나보면 엄마가 옆에 있을꺼야.” 무슨 영화를 볼꺼라고 아이에게 이리 비싼 엄마가 되어 있는지. 아침에 얼굴한번 못보여준 엄마는 저녁에도 마찬가지네요. 월급이라고는 예전 하던 일보다 더 안 좋은데 대체 뭐하고 있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리저리 뭔가하다보니 시간은 가고 이제 슬슬 정리하는 분위기가 되어갑니다. 눈치껏 챙겨서 사무실 밖으로 나왔는데 이런, 그래 오늘 눈이 오는 날이었죠. 차 앞에서 서성거립니다. 이제 운전한지 1년도 되지 않았어요. 아직 얼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법 길가에 쌓인 눈인데 과연 차를 끌고 갈 수 있을까. 혼자서 생각을 해봐요. 놓고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다가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이 아이도 집에 가고 싶을꺼야. 어차피 내일은 길이 얼어 차를 끌고 나오지 않을꺼야. 내일 퇴근때까지 녹지도 않겠지. 그럼 며칠은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할 거야. 그래 가져가는 거야. 조심히 가면 돼. 아직 길이 얼어버린 건 아니니까. 그리고 우리집 가는 길은 큰 길뿐이잖아. 뒷차가 욕을 하더라도 천천히 가면돼. 루몽(제 차의 이름이예요. 루미의 모닝호죠)아 언니가 집에 데려다 줄게. 계속 차가 다니는 길이라 다행히 길이 얼지는 않았더라구요. 천천히 운전을 하고 갑니다. 나만 기어가는 게 아니네요. 다들 그런데요. 집을 5분도 채 남겨놓지 않았을 때 일입니다. “어어어어?” 꿍. 제설작업을 하던 커다란 차와 부딪힌 거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차 타이어에 스치듯 부딪히면서 지나친 것이지요. 다행히 차를 새울 수 있는 길이라 차를 세웁니다. 백미러가 접힌거 외에 별 다른 외상은 보이지 않네요. 작업하던 아저씨에게 다가가서 사과의 인사를 꾸벅 드립니다. 이제 큰 길로 갈 자신이 없어서 제법 한적한 길로 들어서는 팔이 떨리기 시작하네요. 뭐가 문제인지 길이 얼어서진이 차가 휘청휘청 합니다. 가까스로 집앞에 세워 두었더니 눈물이 나려 합니다.

하나쯤은 안 일어나 줘도 좋잖아요. 아침에 딸 아이 얼굴이라도 보고 나올 수 있으면 좋잖아요. 다 내 잘못인양 나한테만 그리 떽떽거릴 일이 아니잖아요. 처음부터 아니라고 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잡을 수 있잖아요. 자기도 그냥 넘겨놓고 잘못되니 제 잘못은 없는 것처럼 그러는 거예요. 저녁 안 먹고 야근했으면 아이 자기 전에 도착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냥 차 데려다 주고 싶었던 건데. 며칠 씩 그 삭막한 주차장에 버려두고 싶지 않았던 건데. 그 아이도 집이 좋을 것 같았는데. 바보 같이. 핸들 조금만 왼쪽으로 돌렸어도 부딪히지 않았을 건데. 내려서 다시 살펴봐도 차에는 외상의 흔적이 없는데 이 놈의 손은 왜 자꾸 진정이 되지 않는 거예요.

잘 해보고 싶은 하루지요. 누가 엉망인 이런 하루를 바라겠어요. 내 뜻대로 잘 풀리는 하루를 보고 씨익 하고 웃고 싶지 누가 이런 하루를 상상이나 했겠어요. 진짜 최악이네요. 딸 아이는 자고 있고 억지로 먹은 저녁은 거북하고 사고의 생각에 몸이 떨리는. 어디서 뭐부터 잘못된 건지 찾을 수 조차 없는 하루네요. 흠씬 두들겨 맞은 샌드백처럼 그저 한없이 한없이 무겁기만한 그런 하루. 이건 정말이지 내가 바란게 아닌데요. 온몸에 기운이 빠지고 내가 지금 무얼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나를 사랑하는 법.

뜨거운 물을 틀어 놓고 샤워를 합니다. 너무 지쳐서 울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아요. 처음으로 일어난 사고에 나를 자책하는 마음도 듭니다. 그게 뭐라고. 차를 놓고 오면 되었잖아. 루몽이는 거기서도 나를 잘 기다려 주었을 거라고. 김이 뭉게뭉게 일어나 욕실을 가득 채울대가지 뜨거운 물을 맞고 서있어요 떨리는 몸이 많이 진정됩니다. 정신이 많이 들어요.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이 마치 오래전에 일어난 일인양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아저씨에게 사과를 드리고 왔군요. 괜찮냐는 아저씨 물음에 괜찮다고 대답도 하고 왔네요. 엄마가 걱정할만한 외상은 없는지 차도 꼼꼼히 살펴보고 왔구요. 길던 하루가, 엉망인 하루가 씻겨 나가는 느낌입니다. 몸이 따뜻해지고 문득 내가 참 고생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니까. 누군가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한 것도 아니고 하루를 엉망으로 만들려고 한 것도 아니고 아이도 그냥 피곤해서 아침에 일어나지 않을 것 뿐이고. 그래도 이 하루를 이렇게 버티고 있어서 내가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들어요. 샤워를 마치고 나오려다가 바디 로션을 바릅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평소때는 귀찮아서 잘 바르지도 않는데 그 날은 왠지 바르고 싶은. 구석구석 꼼꼼하게 바릅니다. 팔도, 다리도, 발도. 아. 고생했다. 이리저리 깨지느라 고생하고 처음 당한 사고에서 그래도 집까지 루몽이 데라고 오느라고 고생했다. 그 순간 차를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거든요. 운전을 더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요. 사고가 났지만 그래도 차도 무사하고 나도 무사하잖아요. 지금 로션을 발라줄 수 있는건 아직 제 몸이 무사하다는 거잖아요. 그 끔찍한 하루에 저는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서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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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16:14:02 *.194.110.155

스스로 느끼기에 엉망인 하루가 따뜻한 샤워로 풀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방법적인 것도 좋지만, 생각을 바꾸는 쪽으로도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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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18:37:35 *.166.205.132

루미스러운 또 한 꼭지 탄생! 축하ㅎ~

 

근데 양적인 균형에서 '나를 사랑하는 법'이 좀 작아보인다.

채워줄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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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19:23:59 *.143.156.74

그래. 그런 날이 있지.

모든 일이 꼬이고 사람들과 부딪히고 내가 왜 이러나 싶은 날이.

'나를 사랑하는 법'이 루미의 민간요법인거야?

그런데 팁은 없네.

민간요법 하나, 팁 하나 이렇게 가면 균형도 잡히고 더 재미있을것 같네.

루미야, 수고 많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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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20:25:19 *.35.244.10

목소리의 톤도 분위기에 맞춰 안정되게 들리네.

어디에 스피커가 달려있는 기분이야.

루미체가 갈수록 안정되는 느낌이다.

 

좋다. 더 재잘거리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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