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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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놈들의 완벽한 광고는 스펙만이 살길임을 알리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양질의 스펙을 쌓을 수 있는 최적의 시스템을 갖추는 방향으로 완전하게 기울었다. 정착하지 못한 80만 청춘들은 ‘묻지마’ 스펙 쌓기에 내몰려 있다. 그 결과 자원들의 스펙은 우수해졌지만 한편으론 서로 똑같아지지 않았는가! 마치 제원에 맞게 찍어낸 주물제품처럼. 개인은 우수해지는데 비해 집단은 열등해지고 있다. 그러니 우수한 개인이 집단에 들어가면 그저 평범해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외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성형기술의 발달로 예뻐 보이는 청춘들은 많아졌지만 서울의 거리에는 비슷한 눈, 코, 입을 가진 청춘들뿐이다. 외모의 다양성과 개성은 사라졌고 얼핏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이것이 다양성을 보는 우리의 눈을 가로막는 원인이다. 그것을 하겠다고 미래는 영원히 미래로 미루어두고 오늘의 스펙에 매몰된다. 강자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담보로 맡기고 기꺼이 약자의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삶의 흐름은 극적이지 못하다. 청춘은 그렇게 지나가고 청년실업은 ‘청년실종’ 으로 막을 내린다.('쎈놈'중에서)

‘지나간 과거도 바꿀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의아하겠지만 그것은 인식과 수용의 문제이다. 상상의 한계를 두지 마라.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하는가에 따라 과거 사건의 의미는 달라진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감상과 추억의 느낌은 달라진다. 예를 들면 편견과 오해가 그렇다. 우리는 다음의 언어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괘씸한~, 아! 그랬었구나,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이러한 언어들은 과거의 사건을 현재시점에서 달라지게 하는 것들이다. 동시에 새로워진다. 편견과 오해로 가득 차 불편했던 마음이, 지나간 사건은 달라진 것 없이 내 마음이 바뀌어 과거의 사건이 달라진 것이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로 이어져 흐르고 있다. 마음을 바꾸는 일로 새로운 인식과 유연한 수용력을 키워보자.('쎈놈'중에서)

357일차 단군일지 (2011.7.10)
약한 놈은 슬프다. 약한 놈의 현실과 강한 놈의 현실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램프를 찾을 수 없는 약한 놈의 현실은 실패를 통하여 배우게 한다. 꿈이 꿈으로 그치고, 마음속에 하고 싶은 것이 쌓일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의 한계임을 깨닫게 된다. 어제의 좌절과 오늘의 불안으로 약한 놈들은 꿈으로부터 멀어져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래는 나락에 섰을 때 오히려 자신의 위치와 모습을 조금씩 보여준다. 꿈은 자신에게 다가서는 방법을 조금씩 깨닫게 하고, 우리가 깨닫는 만큼만 희망이라는 것을 보상으로 돌려준다.
한편 모든 것을 갖춘 강한 놈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넘쳐나는 물질은 미로와 같다. 누구든지 그 안에 갇히면 끝없는 경쟁의 미로 속에서 머물게 된다. 그리고 세상을 얻기 위한 수고는 자신을 더욱 미로 속으로 몰고 들어간다. 이처럼 강한 놈의 풍요롭지만 불안한 현실은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게 할 뿐이다. 물질은 영원하지 못하고 욕심은 끝이 없다. 이런 불완전한 성공이 현실과 꿈의 거리를 떨어뜨려 놓는다. 넘치나 불안한 현실보다, 부족한 약한 놈의 현실이 오히려 희망적인 이유가 이것이다.('쎈놈'중에서)

이러한 겸손은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감추고자 하는 무기력의 또 다른 모습이다. 확신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것을 실행해야 할 때, 우선적으로 넘어야 할 고난의 언덕에는 두려움이 먼저 지배하고 있다. 그 두려움이 무기력을 부른다. 그러므로 쎈놈으로의 변화를 꿈꾸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면, 자신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 첫 번째다. 과거의 실패 경험에서 패배의식이 생겼다면 만들어진 겸손을 주의해야 한다. 이때의 만들어진 겸손은 실상은 나약함이고 무기력이다. 약한 놈의 무기력은 춤추는 고래도 멈추게 하지 않는가!('쎈놈'중에서)

인류의 역사에서 힘은 진리의 위치에서 군림하여왔다. 그리하여 힘은 진리 그 자체보다도 더 확고하고 그럴듯한 사실들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힘 때문에 가능하다. 왜곡된 힘이 더 공포스러운 것은 현상을 더 그럴듯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힘을 힘으로 과시하는 것보다, 힘을 장난처럼 행사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것은 상대의 가치를 가볍게 여길 때 가능하다. 왕따는 상대를 무시하면서 코너로 몰아넣고 이어서 가치를 땅에 떨어뜨려 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폭력성을 왜곡하여 장난처럼 행사하거나, 아예 자신의 행위를 장난으로 만들어 버린다. 폭력은 차라리 폭력적이어야 비난을 하든지 아니면 개선의 여지를 갖는데, 이것이 장난이 되어버리면 어느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다. 이러한 행동은 작게는 교실에서 비일비재하다. 일진은 싸우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장난만 칠뿐이다. 이 과정에서 선생님들은 손을 쓸 타이밍도 잡을 수 없다. 그래서 다른 기준과 다른 매뉴얼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크게는 기업 간, 국가 간에도 벌어진다. 이것은 따로 예를 들지 않겠다. 각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있으면 그것이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생각이 잘 안 난다면 오늘 저녁 당장 ‘9시 뉴스’를 보라. 그러므로 힘의 본질은 그 양에 있지 않다. 힘의 진짜 모습은 사건을 더 그럴듯한 사실로 만드는 데 있다. 힘 있는 자의 편견과 선입견은 그 자체로도 모든 것을 사실화할 뿐만 아니라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도 한다. 강한 놈의 힘은 합의하려 들지 않는다.(쎈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