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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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귤이 아니다, 사진/양경수>
한 밤 중에 검정 종이를 깔고 귤 하나를 올려놓는다. 다음엔 삼각대를 세운 후 카메라를 셋팅하고 후레쉬를 비추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컴퓨터로 사진을 옮기고는 제목을 달았다. <이것은 귤이 아니다>라고.
귤을 찍어놓고 귤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신은 지금 어떤 생각이 들까? 이 사람이 귤이 뭔지 몰라서 그러나 할지도 모르고, 다시 사진을 살펴보며 귤이 아니라 한라봉이나 청견 같은 다른 품종인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조금 독특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라면 '귤'이라는 단어와 사진 속 사물을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할 수 도 있다. 단지 저것 자체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귤'이란 이름으로 저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저 자체를 그대로 본다는 얘기다. '귤'이란 이름은 사람들이 약속한 기호에 불과하니까. 저것을 '사과'라고 부르자고 약속했다면 저건 '사과'인 것이다. 언어를 버리고 저 질감과 저 빛깔을 그대로 보고 느끼면 더욱 사물 자체를 자세히 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사물의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가는 방법이다.
더 나아가 아예 저것을 환영으로 볼 수도 있다. 위의 저 사진은 이미지에 불과하니까, 귤의 실재가 아니라 카메라 이미지 센서에 투영된 흔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고 믿어지지만 사물 그 자체는 아니다. 카메라와 렌즈를 거쳐 어딘가에 새겨진 이미지인 것이다. 물론 사진은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대로 담고 있기에 받아들이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눈보다도 더 정확하게 사물을 그려내니까. 허나 사진을 실재 그대로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사진도 이미지의 합성, 후보정, 그리고 프레임으로 잘라내는 방법 등에 따라서 수많은 거짓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29년 르네 마그리트는 담배 파이프를 사진처럼 그려놓고는 그 밑에 '이것은 담배 파이프가 아니다' 라고 써놓은 작품을 내놓았다. 사진을 통해 본다는 '새로운 시각'이 세상에 알려지던 시점이었다. 마그리트는 사진가는 아니었지만, 사진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인 사실성을 뒤집어서 물었다. 저 사물을 닮은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귤인가? 귤이라 불리는 저것인가? 아니면 그냥 환상에 불과한가? 훗날 마그리트의 작품은 마르셀 뒤샹의 <샘>과 함께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회화 작품으로 남게 된다. 왜냐고? 사람들에게 생각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저게 귤이 아니면 뭐지? 진짜 귤은 뭘까? 그런 생각 말이다. 서양 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은 플라톤의 '이데아'까지 떠올렸을지 모른다. 사물의 원형인 이데아 말이다. 그들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진짜 이데아는 이성으로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사색은 계속될 수 있지만 마그리트가 의도한 것은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있다. 귤 사진을 보여주고, 제목에 귤이 아니라고 쓰면, 그럼 진짜 귤은 뭐지? 저것은 진짜로 뭐지? 라는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저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다. 질문을 떠올리며 고민하는 순간 우린 철학자가 된다.
실제로 진짜 철학자 미셀 푸코도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고 1973년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논문을 썼다. 기호철학자이자 구조주의자인 미셀 푸코는 '인간의 자아나 관념이 언어로 짜여진 틀 안에서 만들어 진다고 보았다. 그런데 파이프 그림 하나가 그 단단하게 짜여진 틀에 구멍을 낸 것이다. 단지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게 만듦으로써 말이다.
이제 대상의 본질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에게 달렸다.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림이나 사진 속에는 답이 없다.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난 개인적 경험에서 해답의 일면을 본 것 같다. 2002년 매일 점심마다 홀로 걷던 남산의 산책길이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나뭇잎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던 어느 순간 머리 속 이 맑아지더니 나무와 내가 하나 된 생생한 느낌을 받은 체험을 했다. 생각이나 언어 이전의 경험이었다. 나무 뿐 이 아니라 그 순간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그날의 그 순간은 아직 한 장의 사진으로 내게 남아있다.
서양에서는 언어와 생각을 통해서 '보는 것'을 넘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보는 것' 자체를 의심했다.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겉모습 뿐 이라고 했다. 겉모습이 다가 아님을 우리 조상들은 알고 있었다. 겉모습 만 을 보는 눈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 내 시력은 별로 좋지 않다. 안경이 없으면 내 안경을 찾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내 눈을 더욱 믿을 수가 없다. 차라리 동양적 사고에서는 봐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알게 된다고 말한다. 난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감정을 나누고 공감할 수 있다. 그렇게 내가 관계 맺는 것들을 통해 세상을 알 수 있다. 사랑해야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이지 본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다.
'귤이 아닌 귤 사진' 하나로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떠올렸고 해답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이렇게 사진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면서 평범했던 우리가 철학자가 된다. 정답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다. 사람마다 그 대답은 모두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찾아가는 과정과 그 속에서 겪는 체험이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를 새로운 관점으로 고양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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