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미
- 조회 수 259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순간
억세게 재수없는 하루
쿵. 끼이익.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밟아요. 멈춰선 차 안에서 핸들을 쥐고 있는 두 손이 떨립니다. '정신 차리자.' 혼잣말을 합니다. 괜찮은 척 내려서 차를 살펴보니 백미러가 접힌 거 외에는 별다른 외상이 눈에 띄지 않네요. 다행이예요. 상대 차량 아저씨에게 가서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해요. 상대차량은 타격도 없어요. 그도 그럴 것이 제설작업하는 커다란 차의 바퀴에 부딪힌거거든요. 괜찮은 척 죄송하다고 인사하고 괜찮냐는 물음에 괜찮다며 씩씩하게 돌아옵니다. 몸이 떨려서 더 이상 큰 길로 차를 몰 수가 없어요. 한적한 길로 이리비틀 저리비틀 집으로 돌아와 주차를 해 놓으니 눈물이 나려 하네요. 정말 엉망인 하루예요.
아침부터 재수없는 하루였어요. 그날 따라 일찍 일어나서 인사해주던 아이가 잠에 쿨쿨 빠져 있었지요. 야근 일지도 모르는데 지금 아니면 얼굴 한 번 못 볼지도 모르는데. 아이는 여전히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별 수 없이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인사를 하고 출근을 했더랬습니다. 엄마 오늘 늦을 지도 모른다며 자고 있는 아이에게 말을 해주고 말이예요.
별 탈없이 넘어가나 싶었던 상사는 오늘도 여전합니다. 어제까지는 “그랬어?”라면서 자신도 넘긴 일을 잘못되니 전부다 제 탓이랍니다. 자기가 언제 그리 말했냐며 얘기한 내용을 기억 못하냐며 옆에서 떽떽거립니다. 몇 살만 어렸다면 아이가 없었다면 당장 박차고 나왔을 텐데 그저 말없이 들어요. 무슨 할말이 있겠어요. 어처피 저 사람도 내 대답 듣고 싶지 않을껄요. ‘아~ 이루미 성질 많이 죽었구나. 너도 별 수 있냐?’ 는 생각이 들며 왠지 씁쓸해 집니다.
이놈의 야근은 오늘도 그칠 줄 모릅니다. 저녁까지 시키는 걸 보니 늦어질 모양이예요. 혼자 생각으로는 저녁 먹을 시간에 일을 해서 30분이라도 빨리 들어가고 싶은데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저녁을 먹고 살짝 빠져나와 아이에게 전화를 합니다. “엄마는 오늘도 늦을 것 같아. 우리 공주 잘 자. 일어나보면 엄마가 옆에 있을꺼야.” 무슨 영화를 볼꺼라고 아이에게 이리 비싼 엄마가 되어 있는지. 아침에 얼굴한번 못보여준 엄마는 저녁에도 마찬가지네요. 월급이라고는 쥐꼬리만한데 대체 뭐하고 있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오후부터 내린 눈은 제법 쌓여서 길을 질척거리게 만들고 있네요. 한참을 차 안에 앉아서 망설였지만 걸어갈 기운은 남아 있지 않았어요.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또 걸어가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그냥 눈을 감았다 뜨면 집에 도착했으면 좋겠어요. 순간이동이라도 하고 싶어요. 주문을 외우고 발을 쿵쿵 구르면 집에 짠하고 도착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차를 이대로 세워놓고 싶지도 않아요. 며칠은 길이 얼어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이라면 잘 몰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천천히만 가면 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걸요. 집에 도착하기 5분밖에 남지 않은 거리였어요. 커다란 차량이 제설작업 중이었지요 점점 차가 가까이 다가오고 결국은 스치듯이 부딪히고 말았어요. 모든 것이 엉망이예요. 이대로 땅으로 꺼져들어가고 싶어요. 그냥 잠시만 나를 내버려두고 싶어요. 하지만 집에 들어가 엄마와 인사를 해야 겠지요. 아무렇지 않은 척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야 하겠지요. 다행히 차는 별다른 외상도 없으니 모른척 해도 잘 넘어갈 수 있을거예요. 그런데 너무 지치네요.
차를 놓고 왔어야 되는 건데. 운전한지 아직 1년도 안 된게 눈길은 처음인게 뭘 할 수 있다고 꾸역꾸역 차를 끌고 온건지. 핸들을 조금만 돌렸어도 되는건데 바보냐. 차가 가까워오는 것 같으면 반대편으로 핸들을 꺾었어야지. 그걸 부딪히겠다고 지켜보고 있는 건 뭐냐. 할 수 있다고 마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거냐. 이 대책없음은 도대체 어떡할래. 사치부리지 말고 들어가서 엄마한테 다녀왔다고 인사나 해라. 눈길에 운전한다고 걱정하고 계실걸. 가서 괜찮은거 보여줘야지. 뭘 잘한게 있다고. 밖에 앉아 있다고 뭐 변하는 거 있냐?
집에 들어와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가방을 내려놓는데 지칠대로 지쳐서 말도 하기 싫고 아까의 사고로 뻣뻣하게 굳어진 몸은 가늘게 떨리기까지 합니다.
누가 이런 하루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침부터 뭔가의 일정이 꼬이더니 사고로 대미를 장식하는 어이없는 하루. 나 혼자 결정해서 운전을 한 것이기에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내 결정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는 하루. 이런 하루를 바라는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래도 우리는 그런 하루를 맞이할 때가 있지요. 빛나는 하루를 기대하며 희망에 찬 아침을 맞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찾아오는 원치 않는 하루. 그 안에 이리저리 깨지고 치인 만신창이가 된 내가 있어요. 팔을 들어올릴 힘도 손가락을 까닥거릴 기운도 남아 있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그래도 움직여야 하는 내가 있지요. 애써 괜찮은 척 해봐도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내가 있어요. 방에 들어와서 한동안 가방을 아직 들고 있는지도 모를만큼 정신없고 경황없는 내가 있어요. 바라지는 않지만 이런 하루는 언제나 우리를 찾아올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것은 내가 바란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가 바란 것도 아니지요. 그냥 그런 하루는 우리를 찾아오는 거지요. 이상하리만치 모든 것이 꼬이고 그런 날에는 내가 찬 돌멩이도 나에게로 돌아올 것 같아요. 힘껏 찼는데 벽에 딱 맞고 나에게 다시 돌아와 내 머리를 깰 것 같아요. 이런 날 우리는 말합니다.
"진짜 재.수.없,다."
나를 사랑하는 법.
바디로션 맛사지
뜨거운 물을 틀고 샤워를 해봐요. 차갑고 뻣뻣하게 굳어버린 몸이 다시 따뜻해질 수 있도록. 탕에 물을 받아놓고 반신욕이라는 이름을 붙여 줘도 좋겠지요. 우선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휴식 공간이 필요해요. 따뜻한 이불 속으로 폭 파고 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지만 화장실만큼 개인적 순간을 유지해주는 공간은 없어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족들 중 누구라도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 대화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니까. 우리에게는 지금 휴식이 절실하게 필요하답니다. 그것도 우리를 따뜻하게 만들어 줄. 누군가의 이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혼자 앉아서 한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거예요. 하루의 재수없음에 너무나 지쳐버렸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위로가 들리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다른 이의 위로를 받으면 괜찮다고 말해줘야 하니까. 하지만 지금 우리는 괜찮다고 말할 기운조차 없으니까요. 아니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 않은건지도 모르지요. 전혀 괜찮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괜찮지 않아요. 그리고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구요. 괜찮다고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는 건 더더욱 싫지요. 그러기에 가장 훌륭한 공간은 누가 뭐래도 화장실인거예요. 뜨거운 수증기가 뭉게뭉게 차오르도록 몰을 맞고 서 있어봐요. 온 몸이 노곤노곤해질때까지 탕에 기대있어봐요. 몸이 풀어지고 한없이 늘어지는 기분을 느껴보는 거예요. 우리는 오늘 하루 충분히 고생했잖아요. 이런 휴식을 느껴도 괜찮잖아요. 어떤 하루였는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당신이 이런 하루를 위해 노력한 건 아니잖아요. 당신은 이런 하루를 바라고 움직인 것이 아니니까요. 결과는 그리 되었을지라도 이건 당신이 바라고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예요. 이런 일을 예측하고 움직인 것도 아니구요. 물론 잘못은 있을지라도 일부러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니지요. 최대한 잘 하려고 잘 해내려고 노력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이예요. 오늘 하루 당신은 노력했고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기에 더욱 지쳐있을 거예요. 10분, 5분이라도 좋아요. 잠시 뜨거운 물에 몸을 맡기고 늘어져 있어 봐요. 그 물에 하루의 재수없음이 흘러가도록 말이예요. 모든 것이 당신의 책임인 것은 아니잖아요.
나오는 순간에는 당신의 몸에 바디로션을 발라줘요. 뜨거운 물에 한껏 몸을 담궜으니 이제 보습에도 신경써줘야 할 때잖아요. 구석구석 내 손으로 잘 발라주는 거예요. 뜨거운 물에 충분히 늘어져 있었던 당신이라면 바디로션 정도는 발라줄 힘이 남아있을 거예요. 따뜻해진 몸에 충분히 시간들여 정성스레 발라줘야 해요. 우리의 몸에 마사지를 해주는 거지요. 뜻대로 되는 하루보다 더 힘들고 지치는 하루였잖아요. 마음이 지쳤기에 몸은 몇 배나 더 지쳐버린 하루였잖아요. 괜찮아 괜찮아 하는 말보다 더 큰 위로를 해줘봐요. 내 몸을 쓰다듬어 주고 격려해주는 거지요. 이렇게 힘든 하루 동안 그래도 다른 이들 앞에서 꿋꿋하게 벼텨준 내 몸에게 고마워하는 거예요. 내 팔은 떨리는 순간에도 운전대를 놓지 않았고 내 다리는 자랑스레 액셀과 브레이크를 구분해 내었잖아요. 온 몸이 떨렸지만 상대편 아저씨게에 미안하다는 말도 했으며 더 이상 자신감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차를 버리지 않고 집 앞까지 꿋꿋하게 끌고 왔어요. 별일 없었던 듯 엄마에게 인사도 잘 하고 왔구요. 수고했다. 그래도 이만큼 해줘서 고맙다. 그래도 우리는 이만큼 버텨준 자신 덕분에 내일도 웃으며 다른 이들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은가요.
이것은 매우 간단한 작업이예요. 그저 따뜻한 물과 함께 하루를 정리하고 바디로션으로 마사지를 해주는 것 뿐이지요. 이것만으로 무엇이 바뀐다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듯 해요. 하지만 이건 단지 한 번의 샤워와 보습제가 아니예요. 우리 자신에게 주는 휴식인거죠. 그렇게 엉망인 하루에서 우리는 지쳤잖아요. 뜻대로 되지 않아 더욱 지쳐버렸잖아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이런 순간 우리는 자신을 자책하고 힐난하게 되지요. 비난을 퍼붓게 되지요. 그리 하려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고 말아요. 그러기에 휴식을 베풀어 주는 거예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혼자만 푹 쉬기를 권하는 것이지요. 그냥 정지하는 거예요. 뜨거운 물속에서 그 물만 느끼는 거죠. 긴장감을 내려놓고 허물어지는 거죠. 그 엉망인 하루를 꿋꿋하게 버텨오지 않았나요. 의도하지 않았던 힘듬 속에서 예상치못한 시련 속에서 우리는 그래도 하루를 버티었으니. 다른 이의 시선 속에서 우리를 끝없이 몰아세웠으니 이제 우리는 흐트러질 때가 된 거죠. 아무런 성과가 없어서 더 힘든 날 이 30분의 휴식은 당신에게 편안함을 줄 거예요.
아무런 외상이 없어 보이던 제 차는 바퀴랑 연결되는 부위가 휘었다면서 50만원에 가까운 수리비를 요구했습니다. 다행히 자차보험이 들어가 있어서 5만원에 때웠지만 처음 50만원을 듣는 순간 덜컹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그래도 그 순간에 들었던 생각은 “내가 미쳤지. 그러게 차는 왜 몰아서.”하는 자책보다는 “뭐 어쩌겠어. 안 고치면 못 타는데. 비싸게 배우네.”하는 생각이었어요. 그만큼 제 마음 속에서 그 하루의 참담함이 옅어진 거지요.
정말 잘 해보려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더욱 쳐지고 힘든 날 자신에게 30분의 휴식을 선물해주는 건 어떨까요? 자신을 다그치지 말아요. 누구보다 잘 해보고 싶은 당신이었다는 걸 당신은 알고 있잖아요. 그러기에 더 속상해 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잖아요. 수고하셨어요. 이 힘든 하루를 잘 버텨내시느라. 자. 이제 편안히 몸을 담그고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나에게 이야기 해주기로 해요.
“수.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