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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29일 21시 57분 등록

가까이 있는 친구의 꿈을 그린다? 이 소재로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싶다. 그림은 이야기이고, 나는 그 소재의 주인공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요즘 알게 된 캘리그라피라는 소재가 자체가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요근래 떠오르는 것은 그것뿐이다.

 소재의 주인공이 거부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거부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머리 속에 가득한 이야기는 한번은 쏟아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진다. 책임이 충분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그리겠다고 말을 해두었는데, 어떻게 그려졌으면 좋겠냐라든지, 꿈이 뭔지라든지, 이전에 다른 꿈그림을 그릴 때 하던 것과는 달리 전혀 묻지 않았다. 한번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 나니 머리 속에는 하나의 구도만 떠오른다. 계속 품고 있던 이미지를 어렴풋이나마 종이로 옮겨본다.  캘리그라피를 하는 사람과 길.   

 

그림 속 주인공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요즘 한창 2011년을 마무리하며, 2012년을 계획하면서 큰 계획을 잡아나가기 때문이다. 그 계획안에 2012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것도 들어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계획에는 무엇을 하든지 괜찮다는 믿음도, 그리고 스스로의 발걸음으로 열었을 때 앞길이 보인다는 이야기도 해주고 싶다. 누구나 앞이 잘 보여서 그 길 속을 걷는 것은 아니라고 발걸음이 옮겨져야 보이는 것도 있다고. 

 

s-꿈그림1-캘리-구상1.JPG \

<구상1>

 

 

이 구상을 하게 된 것은 만화가 박흥용씨의 영향이 크다. 나는 한 화면에 시간의 흐름을 담고 싶고, 또 하고 싶은 이야기도 아주 많다. 한 화면에 이 모든 것을 담기에는 곤란하지만, 박흥용은 화면에 참 많은 것을 담았다. 그의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정적인 것을 동적으로 표현했다고 했던가, 동적인 것을 정적으로 표현했다는 서평을 기억한다. 그의 만화 중에 스토리 상의 주요 장면은 큰 컷으로 그려졌는데, 숨막히는 적막함이 돌 정도의 공간에 바람과 그 사람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런 장면 속에는 바람에 휩쓸려 이러저리 물결치는 갈대나 벼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속에 흐름이 들어 있는데, 그 흐름들은 숨박히는 상황이자만 그 속에 선 사람의 내면의 소용돌이처럼 보여서 나는 그것을 무척 좋아했다. 물론 나도 흐름을 좋아하기 때문에 뭔가 서로가 반응한 것이겠지만, 하여간 그 장면이 연상 되어서 시간의 순서로 화면을 구성했다.

 

길은 역사이까, 이력이니까. 그런데 이 구성은 내게서 자주 나오는 것 같다. 인생을 길로 비유하면 제일먼저 시간의 순서로 성장해가거나 지나온 길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화면 구성산 그것은 살짝 구부러져 있어 한 화면에 들어가는 구도가 된다. 이번에도 같은 구도가 되어버려서 좀 머뭇거려지기도 한다. 매번이 같은 구도라면 좀 밋밋하게 않을까. 그런데 이번에는 크게 흐르는 이 구도가 가장 어울릴 것 같아 다른 것을 하기 어렵다. 내 한계인가 보다.

 

처음에 색을 보겠다고 칠해둔 색이 그리 진하지 않아서 다시 진하게 칠했다. 어떤 느낌일지 다시 보고 싶었다.

색 배합까지 보고 나니 이 구도는 좌우로 긴 것보다는 정사각형의 화면이 더 잘 맞을 것 같다.

시간 순으로 배치할 것들이 좁은 화면에 자세하게 그려 넣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이번에는 느낌만으로 안되는 주제다. 느낌보다는 디테일이 중요한데 이 구도로는 디데일이 잘 나올 같지 않다. 주요 색은 주인공의 색인 초록색과 막막함을 나타내는 어두운 색으로 정했다. 그리고, 발자국 뒤쪽은 컬러풀하게 구성했다. 미래야 막막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것들은 색을 가지는 진짜 세계처럼 보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s-꿈그림1-캘리-구상2.JPG

<구상2>

 

구상하고 나니 뭔가 부족해 보여서 고치고 싶은 게 많았다. 크레파스로 색을 칠하기에는 디테일이 살지 않을 것 같다. 너무 많은 색을 사용해도 시각을 분산시키니까 각각의 영역별로 비슷한 계열로 그리되 디테일을 한껏 살려야 한다. 그럴러면 전에 잘 사용하던 크레파스나 파스텔은 포기하고 수채물감을 사용해서 세세하게 그려야 할 것 같다.  상체는 숙인 것보다는 꼿꼿이 선 모습이 좋을 듯 하다. 굳이 바닥에다 직접 쓰지 않아도 자신이 쓴 글씨를 밟고 지나가게만 구성하면 되니까 주인공의 허리를 세워 다시 구상해야겠다.

 

 

s-꿈그림1-캘리-스케치0.JPG

<스케치1>

 

구상한 그림을 하룻밤 묵히고 다음날  정사각형으로 다시 스케치했다.  주인공이 배경에 비해 너무 작다. 디테일도 어느 정도인지 봐야하는데, 떠오르는 것이 또렷한 영상이 아니다. 막막하다. 그려가면서 찬찬히 살펴봐야할 사항이다. 캘리그라피로 많이 쓸 문구를 중심으로 자료 사진을 찾아 본다. 사물 그리는 것이 사람보다는 좋지만 캘리로 늘러선 것들이 사물만이면 세상이 너무 초라할 것 같다. 이 소재의 주인공이 사람과 친하니 사물보다는 사람이 들어가면 더 좋을 것 같다. 한눈에 척 봤을 때 글씨와 그림이 모두 드러나는 것들로 재구성한다.  

 

상단에 그려진 것은 너무 크고 주인공은 작은데 이것은 주제가 부각되지 않는 구도다. 주제를 좀 더 중심으로 옮기고 크게 그리면 괜찮을까? 그것으로도 부족해 보인다. 비슷비슷한 것들이 하나의 흐름을 따라 배열되지만 눈을 한곳에 모야야 한다. 눈이 따라간 곳에는 주인공이 있어야 한다. 사람을 크게? 사람을 크게 그리면서도 발이 캘리그라피를 놓은 종이에 닿아야 하는데 그것을 그냥 넣으면 전체적으로 밋밋하다. 사람을 크게 부각시키는 게 뭐가 있지? 하이앵글? 상체로 중심을 옮기는 시점 전환이 필요하다.

 

s-꿈그림1-캘리-스케치1.JPG
<스케치2>
 
하이앵글의 자료를 찾았다. 손으로 뭔가를 그리거나 쓰는 사람이 나올 법한 사진을 검색하려면 뭐라고 검색어를 넣어야 하나? '낙서하는 사람.' 원하던 것은 나오지 않고 엉뚱한 사진들이 나왔다. 낙서 사진들만 검색 되었다. 실컷 웃었다. 낙서 그림은 엄청 웃긴데 현실이 나로 돌아오니 참 초라하다. 낙서하는 사람들은  그림 실력이 너무나 출중하다. 이건 뭐 미친사람 수준이다. 나는 사람에 미치지 않고 뭐했나? 원하는 것 못그려서 쩔쩔매면서 뭘 하겠다고 하는 비판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니 그림 그릴 맛 안난다. 그래도 '낙서'라는 검색어를 버리고 다시 '하이앵글'로 검색해서 다시 탐색한다.  하이 앵글 중에 옆보습이면 좋겠는데 딱 맞는 사진이 없다. 그래도 하이앵글 사진 속의 인물 특징을 익힌다. 위쪽으로 갈수록 크게, 하체는 짧아진다. 하체를 짧게 그려야 아래로 처진 구도를 중심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 '짧아진 하체가 이상해 보이지 않게, 자연스럽게.'  고쳐야할 것들을 주문으로 외우며 눈을 감고 머리 속으로 사람을 이러저리 돌려 보아도 어느 정도로 크게 보이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피규어 가지고 오는 건데 아침에 집에서 집어오지 않고 나온 건 잘못이다. 그거라도 있었으면 참고가 될 텐데. 아쉬운 마음에 내 팔뚝을 쳐다보다가 눈을 감고 회전시켜봐도 얼마나 크게 보일지는 시점 이동이 잘 되지 않는다.
 
만화가들이 왜 죽어라고 사람을 그리는 연습을 하는 지 알겠다. 또 왜 자연스럽게 보이는 구도와 앵글을 놔두고 사람이 크게 왜곡되어 보이는 앵글을 선택하는지도 짐작이 된다. 보통 사람들은 그 각도로 누군가를 쳐다보지 않는다. 왜 그런 왜곡된 크기를 보여주는 각도를 사용하는지, 무엇이 주제인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일러주기 위해 변형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주변에 배경으로 들어간 것보다 훨씬 더 잘그려야 한다는 건데, 내겐 그런 실력이 없다. 참고할 자료도 변변치 않고 난감하다. 그래도 그 구도 외에는 주제로 들어가는 구도가 떠오르지 않아 하이앵글 사진 속 인물을 쳐다고는 눈을 감고 회전시키고 위에서 본 것을 계속 상상한다. 
 
너무 큰 두 개의 캘리그라피 주제는 조금 작게 줄이고, 사람 머리 위에 놓일 캘리는 조금 더 크기를 줄인다. 캘리그라피 문구는 소재의 주인공이 쓸만한 것, 썼던 것을 찾아서 그대로 흉내내서 그려 넣는다. 이런 주문들을 잊지 않기위해 구상하고 스케친한 것들 눈 앞의 벽에 붙여두었다. 디테일을 살릴 소재는 미리 프린터로 인쇄해서 보고 그리도록 옆에 놔두고 그릴 종이를 화면에 붙이고 채색도구를 늘어 놓는다.
 
심호흡을 하고 종이를 바라본다. 단번에 그려야 한다. 수채화 종이는 밑그림을 그렸다 지웠다하면 보플이 사라져 종이의 특성이 사라진다. 수채화로 맑게 채색할 거니까 지운 선이 남아도 안된다. 심적 부담 때문에 원 종이에 바로 그리기 않고 다른 종이에 먼저 연습으로 그려본다. 시원스런 선을 위해 구상해 두었던 것보다 더 크게 그려서 선을 연습한다.
 
밑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하려니 구상해 두었던 것에도 색이 참 많다. 노랑과 핑크계열은 빼고, 초록으로부터 빨강으로 들어간다. 막막한 미래는 어두워보이게. 구상하고 스케치 했지만 원 종이에 옮겨질 때는 또 다른 생각이 끼어든다. 아침에 도서관에 들러서 빌려온 그림책이 있어 다행이다. 맑은 수채화. <용의 눈물>.  배경에 색을 칠하지 않아서 넉넉한 여백을 넣은 수채화. 맑게 시원하게 깨긋한 선으로 시원스럽게 그려진 밑그림.  그걸 따라서 배경에는 처음에 구상한 색을 버리고 여백으로 남겨 두었다. 맑은 느낌까진 닮을 수 없어도 가벼워야 한다는 것은 살리고 싶다.
 
채색을 한 색들이 마르니 물기가 있을 때의 색보다는 엷여졌다. 발색이 좋은 종이인줄 알았는데 아닌가보다. 너무 많이 스며서 자연스런 번짐이 없어져 버린 건가? 색들이 선명하지가 않다. 급한 마음에 붓을 대니 경계를 넘어 먼저 칠한 다른 곳으로 번져버린다.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채색해야 한다. 이럴 때는 급한 성격을 눌러서 기다려야 한다.  기다렸다가 파스텔로 색을 보탠다. 보탠 색은 이전의 가벼운 색과 어울리지 않는다. 지우개로 이미 칠한 파스텔가루를 찍어내고 박박 문질러 지워서 덜어낸다.
 
'이다, 아이다'의 수많은 판정. 방책강구, 다시 판정. 대치, 수정. 덜어내기, 보태기, 다시 덜어내기. 내 마음 속의 전쟁은 종이 위에서 실행된다. 끝났다 싶은 전쟁은 작은 분쟁으로 다시 일어나고 마무리 되기를 반복한다. 얼마나 더 해야 하지? 더 고쳐야 하나? '더해도 별로 나아지지 않아.'라는 판정을 받을 때까지 전쟁은 계속된다. 화구를 치우면서 판정은 다시 반복된다. 
 
s-꿈그림1-캘리-편집.jpg
 
몇 시간 동안의 전쟁 속에, 그림속의 주인공은 내 마음 속에 있었는가? 글쎄. 전면에 나섰다가 없어졌다가 나중에는 그림 속 주인공이 다시 등장하지 않았나? 정말 그 주인공이 맞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맞나? 글쎄, 그 사람이기도 했고 나이기도 했지. 그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내게도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잖아. 그리고 그 주인공이 아니었으면 이런 색을 선택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모든 순간에 그 사람만 있었던 건 아니야. 그리는 어떤 순간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
 
몇 시간 동안의 전쟁이 끝났다. 정말 끝이었으면 좋겠다. 사진으로 찍어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또 보인다. 그래 그것만 수정하고 이번엔 진짜 끝! 종료선언으로 몇시간 동안의 긴장이 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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