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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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지18. 친구에게 배우다>
금요일 오후, 하루 종일 한글 창을 띄워놓고, 그 동안 맡았던 업무들을 정리하고, 여유가 좀 생겨서 페이스북을 들여다보았다. 그 때 마침 친구가 페이스북 담벼락에 글을 남겼다. 아침에 갑작스레 받은 새로운 일에 대한 제안으로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라 그녀의 글에 댓글을 남겼다.
“어디냐???? 나 또 고민이 생겼어…ㅜㅜ..”
“지하철이닥 ㅋㅋㅋㅋㅋㅋㅋ 왝??!”
“웅… 오늘 아침, 다른데서 일하자고 아는 선배님이 얘기해 주셨는데… 고민됨..”
“에헤 저녁에 볼랴?!”
“그르까??? 그럽세.. 아으…”
“ㅋㅋㅋ 옹냐 씨유쑨베베 ^^*”
이렇게 친구와 급 약속을 잡았다. 이 친구와의 약속은 늘 이런 식으로 잡힌다. 그리고 언제 봐도 어제 만난 것마냥 편하다. 얼굴을 보면 ‘어찌 지냈어?’라는 말과 함께 그 동안 서로에게 있었던 일들을 마구 쏟아내고, 매번 만날 때마다 우리의 술자리에 안주거리가 되는 이야기들은 참 다양하기도 하다. 친구는 나와 참 비슷하다. 삶에서 결혼, 연애, 명품 가방 같은 것들 보다 일, 자신의 커리어가 중요한 사람이다. 그랬던 그녀가 곧 결혼을 한다. 연애한지 3개월도 채 안 되서 결혼을 하겠다는 그녀가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남자를 만나보니,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를 몹시 아껴주고 사랑하는 마음이 내게도 전달되는거 보니, 결혼하고도 두 사람 무척 행복하게 잘 살 것 같다. 물론 내 친구들 중 ‘결혼 늦게 할거라’ 굳게 믿었던 친구 하나가 또 기혼녀의 세계로 떠나버린다는 것이 내게는 못내 아쉬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결혼을 함과 동시에 어쨌든 각기 다른 세계에 살면서, 관심사 역시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이니 말이다.
퇴근을 하고, 그녀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오늘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결혼 준비는 잘 되고 있을까? 이러저러한 생각들과 들뜬 기분으로 압구정역에 도착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커피빈으로 걸어갔다. 커피빈에 앉아 잡지를 보고 있는 그녀. 추운 날씨에 걸어오느라 지친 나는 털썩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오늘도 역시 우리의 첫 대화는.
“왔어??”
“응. 지친다.”
“나가자~~”
우리는 커피숍을 나와, 안주가 끊임없이,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나오는 근처의 이자카야로 향했다. 지난 5년간 일했던 나의 첫 직장의 동료로 만났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회사 동료를 넘어서 없어서는 안 될 친구가 되었다. 특히 회사에서 있었던 마지막 1년인 2010년, 내가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슬럼프로 바닥을 경험하고 있을 때, 옆에서 함께 술마셔주고, 술 사주면서 늘 내게 큰 힘이 되어 준 친구다. 2010년의 절반은 그녀와 함께 보낸 것 같다. 그녀가 없었으면 아마 2010년을 그렇게 버텨낼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항상 감사한 친구이다. 물론 당시에 나보다 한살이 많은 친구는 흔히 얘기하는 ‘아홉수’라서 무척 힘들었다. 그때는 내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친구가 아무리 힘들다고 얘길 해도 보이지 않았었다. 슬럼프로 괴로워하던 그 때 친구가 내게 했던 말을 나는 올 한해 늘 기억하며 살았다.
“야, 너 지금 이렇게 힘들지? 내년엔 아마 더 힘들거다. 나 지금 봐라. 20대 마지막, 아홉수라는 말이 그냥 있는게 아니라니까? 너는 정말 모를거야. 일단 되면 다시 얘기하자.”
설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럴 수는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야, 올 해보다 더 힘들 수는 없어. 야, 올해보다 더 힘들면 어떻게 살라고?? 그럴수는 없어. 내년은 분명히 올해보다는 좋을거라고!!!”
라고 호언장담했으나, 그녀의 예언은 적중했다. 2011년은 정말 2010년보다 훨씬 더 괴로운 한해였다. 더 많은 변화들이 있었고, 하려고 시도 하는 일마다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5년간 꾸역꾸역 버티면서 다녔던 회사를 나왔더니, 이번에는 1년 동안 회사를 4군데나 옮겨 다녔다. 이런 나를 보며 사람들은 얘기한다.
“넌,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회사를 잘 옮겨 다니냐? 어디 가도 굶어 죽진 않겠어!”라고.
엄청 힘든 한 때를 보내던 2011년은 2010년 만큼이나 그녀와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여름까지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얘기했던 것 같다.
“그래, 니 말이 맞다. 아홉수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난 정말 작년보다 힘들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왠일이니. 올해가 작년보다 훨씬 힘들어. 눈 앞은 깜깜하고, 도대체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당췌 알 수가 없다.”
이런 내게 그녀는 또 얘기한다.
“잘 견뎌봐. 서른 되면 좋은 일 생길거야. 나도 올 해 장난 아니거든? 진짜 좋은 일도 많았는데, 그만큼 진짜 힘든 일도 많았어. 근데 확실히 20대의 마지막 한해보다는 훨씬 좋은 것 같아.”
“그래? 알았어. 그럼 내년엔 좀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나보다 한살이 많은 그녀 덕분에 나는 많은 위로를 받는다. 이미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것들을 10여년 전에 겪은 기성세대들이 하는 이야기보다, 나보다 딱 1년 먼저 살아가고 있는 그녀가 하는 이야기가 내게는 오히려 더 큰 힘이 된다. 아마 그녀와 내가 그리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내게 하는 이야기는 조언이라기보다, 위로이자 공감이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나의 미래를 시뮬레이션해서 보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다 같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각자의 나이에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동질감이라는 것이 생기고, 서로 공감할 수 있게 된다.
회사 얘기에서 시작된 우리의 수다는 여느 소설이나 클래식음악에서처럼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오늘의 클래이막스는 ‘관계’라는 키워드였다. 관계는 ‘그물’이란 말로 대체 되었다. 그녀도 나도 보험영업을 하면서 인간관계가 한번 걸러졌음에 깊이 공감했다.
“그래, 내가 보험하면서 내 주변 관계들이 둘로 나뉘었지. ‘가입한 자’과 ‘가입하지 않은 자’로”
으하하하하하. 정말 그렇다. 보험 영업을 하면서 내 주변 관계도는 크게 내 고객이 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뉘었다. 물론 내 관계의 그물망은 꽤 넓다. 왠만해서 사람들을 잘 거르지 않는다. 내 그물의 그물코는 꽤나 촘촘해서, 내 관계에 일단 들어오면,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그녀는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이슈를 맞이하면서, 또 한번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했다. 나는 아직 겪어보지 못해서, 완전하게 공감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결혼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과 욕하면서 진심으로 축복해 주는 사람들. 이렇게 두 개로 나뉘었다고 얘기했다.
책을 참 좋아하고, 지금도 늘 틈만나면 침대에 들어가 책을 읽는 그녀를 통해 나는 많은 것을 간접적으로 배웠다. 책 뿐만 아니라, 나보다 한발 더 빨리 걸어가는 그녀의 궤적은 내게 여러가지 생각할 것들을 던져주고, 내가 가는 발걸음이 어떤 모습일지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늘 그녀를 만나면 즐겁고, 유쾌하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다. 언니가 없는 내게 언니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결혼식에도, 피로연에도 함께 하지는 못할테지만, 결혼으로 새롭게 시작될 그녀의 인생을 진심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