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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일의 여성 실학자인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 그녀는 부녀자들을 위한 생활 경제 백과사전인 <규합총서 閨閤叢書>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엔 음식과 술, 옷 만들기, 옷감 짜기, 염색은 물론 양잠과 문방구에 관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그중 다음과 같은 문구가 후대에 전해져 내려오는데,
"밥 먹기는 봄과 같이 하고, 국 먹기는 여름과 같이 하며, 장(醬) 먹기는 가을과 같이 하고, 술 먹기는 겨울과 같이 하라."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선뜻 와 닿지 않을 수 있으나 곱씹어보면 선조들의 지혜가 서려있는 운치 있는 문장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계절의 시기와 때에 맞게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의미인데 즉 밥은 봄처럼 따뜻하게 해야 하고 갱羹, 즉 국은 여름처럼 더워야 하며 장醬은 가을처럼 서늘해야 하고 마실 것은 겨울처럼 차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기후에 따라 먹는 음식이 바뀌듯 남과 여의 사랑도 그때그때의 적절한 흐름에 따른 사계절의 변화를 겪는다.
밥은 봄처럼 따뜻하게 해야 한다.
아가씨란 존재를 동물들중 고양이에 비유하곤 하는데, 이는 몸집이 가볍고 날렵하며 간드러지게 우는 것이 어찌 보면 외적으로 연약해 보이는 여인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듯해서이다. 추운 시련의 겨울이 지나고 모두의 마음에 보일 듯 말 듯 수줍은 봄이 찾아왔다. 아직은 차가운 얼음장이 사람들의 외투를 여미게 하지만, 살포시 생명의 기운이 움트는 대지의 여신이 시샘하듯 기지개를 펴는 집집마다 뽀얀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오른다.
“엄니, 밥 줘요. 배고프당껭.”
“아따, 시방 솥에 밥하니까 쪼개만 기다려.”
성질 급한 호순이는 빈 밥그릇을 쳐다보며 군침과 더불어 연신 숟가락을 두드린다. 이윽고 어머니의 정성으로 도착한 찰진 밥은 단내를 풍기며 아이들의 마음에 사랑의 불씨를 부채질 한다.
“엄니, 고마워유. 잘 먹을게요.”
“그래, 어여 먹어. 배고플 테니.”
“그런데 엄니 밥은 시방 어디있는겨.”
“엄니는 부엌에서 쪼깨 먹었으니께 어영 먹어.”
밥풀이 볼에 붙는지도 모르게 게눈 감추게 먹다보니 어느새 배가 부르다.
식탐이 지나고 낮잠이 쏟아지던 중 무언가 생각이 났다.
그런데 엄니는 진짜 밥을 드셨을까.
어느 신혼부부의 집.
“자기야, 이제 나와도 돼.”
새벽부터 일어난 아내는 남편을 위해 부스럭 소리를 내며 서툰 솜씨지만 도시락을 애써 준비한다.
‘내가 해준 이밥을 먹으면 우리 그이가 얼마나 좋아할까.’
상상의 나래 속에 미술이라고는 학창시절 좀체 취미가 없었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작품도 준비하였다.
“이게 뭐야! 우와 역시 우리 자기가 최고야.”
급한 마음에 뚜껑을 열어보니 콩으로 연출된 멋진 하트 모양의 퍼포먼스가 깨가 쏟아지는 냄새를 절로 나게 한다.
‘이래서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구나.’
하지만 이러하였던 부부도 살아가는 연수가 반복되다 보니 모습이 변하여 간다.
결혼기념일도 잊어버리고 여지없이 술에 절어 들어오던 남편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아차, 오늘이 그날이잖아. 어떡하지. 꽃이라도 사들고 들어가야 되는데.’
하지만 이미 동네 근처 화원은 퀭한 바람 속에 전등불이 꺼진지 오래다.
고민하던 남편은 변칙이지만 꼼수를 생각한다.
‘어쩔 수 없지. 주인 분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늘은 날도 날이기에…….’
누가 볼세라 두리번거리며 화원 앞에 전시되어 있던 커다란 나무의 줄기를 꺾어 의기앙양 승리의 월계수를 머리에 두른 것처럼 집으로 향하는 남편.
“자기야 나 왔어. 오늘 결혼기념일 축하해.”
기세 등등 선물을 내밀었으나 이를 본 아내는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한다.
“이거, 사거리 화원에 전시된 나무 꺽은 것 아냐. 아이고, 못살아. 이 화상아.”
봄은 사람의 마음을 시샘하는 모양이다.
변치 않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허상일까.
변해 가는 건 사람이지만 따듯함의 속성은 기어코 찾아오는 봄의 진리처럼 처음 그 자리이었으면 좋겠다.
갱羹, 즉 국은 여름처럼 더워야 한다.
밥이 남자라면 국은 여자와 같다.
밥은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지만 똑같은 국의 메뉴가 날마다 밥상에 올라온다면 누구나 싫증을 낸다.
그렇기에 보리, 콩, 조, 현미 등 밥의 종류는 가짓수가 제한이 되어 있지만 국의 종류는 여자의 속성처럼 현란함을 자랑한다.
향내 나는 토란국
담백한 근대국
입맛 돋우는 냉잇국
속풀이에 좋은 북어국과 콩나물국
은은한 고향의맛 시래깃국
소고기와 다시마와의 조화 탕국
제주도 바닷가 연애 시절의 추억이 어려 있는 성게 미역국
섬진강 시가 떠오르게 하는 맑은 제첩국 등.
다양한 재료와 향미로 삶에 지친 사람들을 유혹한다.
식어버린 밥이 따뜻한 국과의 조화를 이루면 그 차가운 기운은 상쇄가 된다.
식어버린 마음이 국을 만나면 온화함으로 변화가 된다.
얼어붙은, 싸늘해진, 삭막한 도시의 현실에 그 불꽃은 새로운 기세로 다시금 되살아나게 한다.
여자는 그런 존재다.
지쳐있는
무기력해져버린
의미를 잊어버린
일어설 힘조차 없는
삶에 힘겨운
꺼져가는 연탄에 불을 다시금 지피게 하여 의욕을 일으키게 하는 국과 같은 존재이다.
장醬은 가을처럼 서늘해야 한다.
서로의 노력과 계절 땀 흘린 작업의 대가로 이루어진 열매를 맺기 위해 사람들은 한껏 추수에 여념이 없다.
가을은 결실을 거두는 계절이다. 그리고 또한 겨울을 대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따뜻하지도 춥지도 않은 어쩌면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여인네의 마음처럼 뜨뜻미지근하다. 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은근한 구들장의 모습을 닮았다.
이시기는 설익은 감이 되질 않게 제대로의 풍미가 배어나는 단감의 맛으로 탄생되게끔 더욱 영글고 성숙 되게끔 해야 한다.
그래서인가. 신은 완숙의 이시기에 서로가 힘을 합치게 만들어 놓았다.
남자는 땅을 파서 양식이 들어갈 저장소를 만들고 여자들은 김장거리 등의 재료들을 찾아 장을 본다.
그렇다고 이시기에 화합만이 있는 건 아니다. 때때로 갈등과 여성 특유의 기세와 의욕으로 인한 소란스러움도 함께 한다.
주말 쇼핑센터에 장을 보러갔다. 물품을 고르는 와중에 갑자기 어디선가 메가폰의 큰소리가 들려온다.
“자, 지금부터 반짝 세일을 시작 합니다. 불포화 지방산과 오메가 쓰리 성분이 가득하여 성인병과 수험생 자녀분들에게 최고인 등 푸른 생선, 싱싱하고 펄떡펄떡 뛰는 고등어를 딱 10분간만 파격 가격 인하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뒤의 광경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느릿느릿 세월아 내월아 하던 아줌마들의 움직임은 갑자기 총알 탄 사나이 우사인 볼트가 된다. 그녀들의 눈초리는 올빼미가 저리가라다. 쇼핑카를 팽개친 채 야구에서 기습 번트를 하고 1루에 죽을 둥 살 등 달려가는 주자처럼 목표점을 향해 힘차게 세이프를 시도한다. 나도 웬일인가 싶어 뒤늦게 대열에 합류를 해본다. 가격이 다운되었다는데 이게 웬 횡제람 쾌재를 부르며. 하지만 그 횡재는 재수가 나쁘면 악재가 되기도 한다.
“아줌마 비키세요. 제가 먼저 왔잖아요.”
“아니 이 아저씨가? 무슨 말 이예요. 내가 먼저 줄을 섰는데.”
“아까부터 저는 여기 서있었거든요.”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새치기 하지 마세요.”
애꿎은 삿대질이 오간다. 밀고 밀치는 몸싸움이 시작되며 언성이 높아진다. 목표물을 향해 손을 내민다. 빨리 달라고 서로 아우성이다. 어느새 쌓여있던 물품이 금세 동이 났다. 그리고 목적 달성이 끝나면 거짓말 같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마트는 평온을 회복하고, 각기 조신한 중년의 여인으로 변신하여 갈 길을 가는 그녀들. 강산이 한번 변한 세월동안 나도 한 여자랑 살고 있지만 아직도 좀체 그녀들의 이 같은 행동들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그녀들은 나름의 항변을 할 것이다.
“나도 처녀 때는 부끄럼 많고 그랬어. 하지만 당신도 아이 둘을 한번 낳아봐. 무서운 게 없어져.”
“나도 편하게 장보고 싶어. 누구처럼 비싼 유기농 매장 가서 품위 있게 쇼핑하고 싶다고. 하지만 쥐꼬리 같은 남편 월급을 쪼개서 장을 봐야하고, 치솟는 물가와 학원비는 감당을 못할 지경이야.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가을은 사람과 사람의 계절이다.
마실 것은 겨울처럼 차야 한다.
봄이 감성의 계절이라면 겨울은 이성의 계절이다.
감성으로 뭉쳐진 마음은 어느 시기가 지나면 인생사가 그렇듯 시무럭해 지고 들뜬 마음도 가라앉게 된다.
‘도대체 내가 저 인간하고 왜사는 걸까?’
‘왜 하나에서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내가 입이 닳도록 잔소리를 하는데도 바뀌지를 않네.’
퇴근 후 돌아온 남편은 옷을 갈아입는다.
“여보 오늘은 제발 양말을 뒤집어 벗지 말고 바구니에다 넣어줘요. 세탁할 때마다 일일이 펴려고 하니 힘들어요. 알았죠.”
하지만 남편은 오늘도 듣는 둥 마는 둥이다.
‘저인간은 귓구멍을 막아놓았나. 이날 이때까지 이야기 하는데도 도무지 들어먹지를 않으니.’
봄 존재의 고양이 이미지였던 그녀는 이제 씩씩한 호랑이로 어쩔 수 없이 돌변한다.
야옹 소리로 예쁘고 섹시하게 웃음 짓던 그녀도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는 없는지, 이제는 목에 주름이 생기고 그동안 감추어 놓았던 기세를 떨쳐 보인다. 어흥~
뜨거울 때가 있으면 차가울 때도 있는 법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고 이치이다.
일본식 정종인 とっくり(도꾸리)를 따뜻하게 데워먹곤 하지만 차갑게 음미하며 마시기도 하는 것이 사람 사는 방식이다.
다만 전제되는 사항으로 겨울철 수도관이 동파에 얼지 않게 따뜻한 옷가지 등으로 사전에 관리를 해주어야 하는 것처럼, 함께 시린 손을 호호 불면서도 놓지 말아야 하는 명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