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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8일 23시 07분 등록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순간]

 

“알겠다고. 나가면 될 거 아니야.”

엄마랑 싸울 때면 언제나 끝은 이렇다. 무엇 때문에 시작된 싸움인지도 모른다. 사소한 문제로 시작된 싸움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끝난다.

중학교때부터 엄마와 나는 많이 싸웠다. 부츠를 사겠다며 싸우고. 귀를 뚫겠다며 싸웠다. 그때마다 엄마는 그랬다. 스무살이 되면 나가서 니 맘대로 하라고. 제발 빨리 독립해서 나가라고. 스무살이 넘어서는 민소매를 입는다고 싸우고, 버스 손잡이만한 귀걸이를 한다고 싸웠다. 그때 엄마는 그랬다. 얼른 취직해서 나가라고. 안 보이는데서 니 맘대로 하라고. 지금도 우리는 싸운다. 아이의 양육 문제로 싸우고. 집안의 상태로 싸운다. 지금 엄마는 이런다. 이래서 손자는 안 봐준다 하는 거라고. 그러면 나도 지지 않고 말한다. 그러니까 나간다고. 아마 이 날은 엄마도 작정을 했던가 보다. 아니면 쌓인게 많았겠지.

“그래. 나가. 나가서 니가 하고 싶은대로 키우고 살아. 무슨 수로 나갈껀데?”

“걱정마. 임대 아파트라도 구할꺼니까. 하루 왼 종일 봐주는 어린이집도 찾아내면 될꺼아냐.”

하지만 알고 있다. 그리하지 못할 거라는건. 그냥 이대로 사는게 아이에게 좋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의 벌이로는 아이와 나 둘이 살기에 많이 버겁다는 것도 알고 있다. 둘이 좋다고 나가보았자 아이는 새벽같이 어린이집에 가서 밤늦도록 기다리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보다는 지금이 나은거다. 나는 집을 지키는 엄마가 되어 줄 수 없다. 아이는 형제도 없이 혼자 덩그라니 있어야 할 거다. 더군다나 나는 가진게 없다. 당장 집을 구해도 이불 한 채 서랍장 하나 가진 게 없다. 머리가 멍하도록 소리를 지르고 돌아서며 눈물이 나는 건 어떻게 해도 내가 독립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쓰읍. 서른인데 모아놓은 것도 가진 것도 없다. 진짜독립같은 소리한다.

 

독립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나만의 생활, 나만을 위한 생활, 나만의 공간. 내가 결정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이런 것들을 꿈꾸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시궁창 같아도 좋으니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나만의 성소를 원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도 스무 살이 되기를 꿈꾸고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순간을 꿈꾸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막막하기만 하다. 집값은 턱도 없고 생활비도 여력이 없다. 김칫국에 밥만 말아먹고 살기에는 부양가족도 있다. 숨이 막혀 오고 이런 날은 하늘도 우중충하다.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래, 한 부모 가정이니 어찌어찌하면 임대 아파트 한쪽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임대 비용은 없으니 부모에게 손을 벌린다 치자. 이런저런 살림은 없으니 집에서 조금식 빼돌린다 하자. 티비 없으니 티비는 안 보겠다 해보자. 컴퓨터도 없으니 필요하면 피씨방이라도 가보자. 어린이집도 분명 종일반이 있고 사정을 말하면 늦게까지 봐주는 곳도 있을 거다. 김치쯤은 집에서 얻어 먹는다 하자.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 종일반하기 싫다며 우는 아이를 어린이 집에 밀어넣어야 할지도 모른다. 고기 먹고 싶다는 아이에게 멸치도 고기라며 우겨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 어찌어찌 살아야 지겠지만 그게 과연 아이에게도 좋은 일일까. 결국 나는 내 욕심을 차리려 아이의 기회까지 빼앗고 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내 멋에 살아도 좋다 하지만 아이도 과연 그럴까. 이건 효율적이지 않을뿐더러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이런저런거 해주지 못한 못난 마음에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생활이 지긋지긋해질 수도 있지. 나가는 것 보다는 집에 붙어 있는 것이 좋다. 누가봐도 그렇다. 내가 봐도 그렇다.

 

동물도 때가 되면 독립해 나간다. 부모를 떠나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다. 그런데 사람인 나는 여전히 엄마 캥거루의 주머니 속이다. 그 주머니 속은 이제 비좁아서 뛰쳐 나가고 싶은데 나갈 수가 없다. 사람인데 동물보다 못하다. 철없이 아이는 낳았는데 아이는 커녕 제 몸하나 건사하지 못한다. 이렇게 간다면 몇 년 안에 독립이 가능할까? 5년 후에는 될까? 10년 후에는 될까? 그때 나의 나이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럼 그냥 포기하는게 나을까? 독립이라는 꿈따위는 깡그리 구겨서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는 것이 옳을까? 그것에 현명한 태도일까? 아니면 정신적으로나마 나는 독립했어. 나는 독립적이야. 라고 우겨볼까?

아니, 포기하고 싶지도 않고 이런 눈속임으로 독립했다고 위로하고 싶지도 않다. 해야한다. 독립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에 하나다. 자신만의 공간, 나만의 세계를 가지고 싶은 것은 공통적이다. 그리고 해내야 하는 일이다.

 

 

[나를 사랑하는 법]

1. 먼저 현실을 인정하자.

독립을 꿈꾸어보았다. 상상해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높이가 있고 매우 퐁신퐁신한 침대가 있고 약간은 빈티지한 느낌이 나는 가구들이 놓인 공간. 빽빽이 꽂힌 책들과 커다란 책상과 편안한 의자. 이제 막 내린 드립 커피를 마시며 글을 읽고 글을 쓰는 나를 상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얼마전까지 있던 낮고 평범한 침대는 싱글이라 누군가에 줘버렸고, 엄마 취향의 가구들이 가득하다. 꽂을 공간이 없어서 쌓여있는 책과 20000원 짜리 이마트 책상. 그나마 마음에 드는 식탁을 이용하려면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어수선한 상태에서 일을 해야 한다. 이게 현실이다. 눈을 감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지만 눈을 뜨면 이런 광경이 보인다. 마치 12시가 지나서 다시 누더기 옷으로 돌아온 신데렐라 같은 현실을 보게 된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아름다운 광경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마법사도아니고 요술쟁이도 아니다. 눈을 감고 요술봉을 휘둘렀으면 좋겠지만 그런 방법 따위는 없다. 눈을 뜨고 똑바로 보자.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 현실에서 우리는 시작하는 거다. 시작점을 알지 못하면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모른다. 지금을 바로 바라보고 나의 상상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내야 한다. 물론 상상과는 많은 것이 다르다. 이런 저런 모든 것이 다르다.

 

2. 공간을 비집어 내 공간을 만들자.

나는 가구를 옮기기로 했다. 내 방이라는 공간에서조차 내가 원한 구조가 아니다. 내가 꿈꾸던 방이 아니다. 커다란 침대랑 빈티지 가구는 백번 양보한다 치자. 그럴만한 능력도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방의 구조는 내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이리 저리 어찌하다 보니까 자리를 잡은 것들이다. 어느 날 엄마는 나의 방 구조를 바꾸고 싶어했고 나는 별다른 이견 없이 찬성했다. 그리고 안방이나 거실 혹은 다른 장소로 가지 못한 가구들까지 들어와서 내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을 한꺼번에 몰아낼 방법도 없고 내가 원하는 가구들을 한꺼번에 들여놓을 능력도 없으니 그저 조금의 변화를 꾀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중고샾에 가서 아주 저렴한 가격에 책꽂이를 구입했다. 당분간은 책을 사대도 수용할 수있을 정도의 커다란. 물론 그 책꽂이에 꽂아야 할 책들 중에는 내 것이 아닌 책들도 있지만 정리자의 재량으로 그것들을 구석으로 몰아버렸다. 내 손으로 장만해서 내 손으로 꾸민 하나의 책꽂이가 탄생했다. 아직은 텅텅비어 있지만. 이 집안 어딘가 내 스스로 이뤄낸 공간이 생긴 것이다. 넓은 집에 비해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다른 누구도 손대지 않을 공간이 생긴 것이다.

 

변화한 건 하나의 구석이다. 다른 어디도 아니다. 드넓은 집에 1평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꾸민 그 공간에서 나는 시작할 수 있다. 1평은 2평이되고 100평도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 1평이 없다면 100평도 그저 공상이고 상상에 불과할 뿔인다. 당신의 독립의지는 당연하다. 그것은 모든 이가 꾸는 꿈이다. 당신이라고 그 꿈꾸는 대열에 참여하지 마라는 법은 없다. 누군가는 “그것 가지고?”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별 차이 있냐며 웃어넘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오늘은 책꽂이를 가지고 있지만 나중에는 서재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진 것이 많아서 처음부터 좋은 집을 구하고 원하는 가구를 잔뜩 넣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뤄놓은 것이 많아서 걱정없이 아이와 가정을 꾸릴 수 있었으면 나도 좋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독립의 꿈까지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이 맞다. 나라고 왜 독립을 꿈꾸지 마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것은 작은 시작이다. 매우 작아서 다른 이의 눈에는 띠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작은 공간은 당신의 눈에는 보일 것이다. 오른쪽으로 한뼘은 더 움직일 것인지 그 자리에 둘 것인지 당신이 결정한다. 다른 이가 옮긴다면 다시 당신의 방법대로 정리하라. 그곳은 남들이 침범할 수 없는 내 영역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리 움직인다면 조용히 다시 당신의 스타일대로 정리하라. 오랜만에 놀러온 친구들 덕분에 어지러진 집을 치우는 집 주인의 마음으로 말이다. 책꽂이를 바라보며 흐뭇해 하는 나는 이제 커다란 책상을 꿈꾼다. 컴퓨터와 프린터를 올려 두어도 책을 읽고 필기를 하는데 하등의 지장이 없는 커다란 책상. 그 다음에는 빈티지 가구를 장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에는 높고 푹신한 침대를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가 원하는 가구들을 내가 원하는 공간으로 옮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번에 책상을 마련하고 컴퓨터 세팅을 끝낸다면 전화를 걸어서 당당히 외칠 것이다. “여기 짜장면이랑 탕수육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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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8:00:31 *.143.156.74

내 책의 휴식 방법 중 하나로 '나만의 성소'만들기가 있는데 루미의 글과 어떻게 차별화해야 할지 고민해 봐야겠구나.

루미 책이 대박이 나서 완전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만쇄를 찍어서 루미가 큰 집을 사서 부모님께 얹혀사는게 아니라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그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꼭 올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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