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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15일 23시 02분 등록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 황문수 역 / 문예출판사, 1976)

(The Art of Loving by Erich Fromm, 1956)


* 저자에 대하여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독일 태생 미국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이다. 1922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뮌헨대학교와 베를린의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정신분석을 연구했다. 1933년 나치 치하의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할 즈음 정신분석학자로서 높은 명성을 얻었으며, 미국에서는 정통 프로이트학파와 대립하기도 했다. 컬럼비아대학, 베닝턴대학, 멕시코 국립자치대학, 미시간주립대학, 뉴욕대학 등에서 정신분석학을 강의하면서 인간의 욕망에 의한 사회와 개인 간의 갈등에 주목하는 논문들을 발표했다. 프로이트주의,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 종교 등에 대한 비판적 저서와 인간본성, 윤리학, 사랑에 대한 프롬의 방대한 저작은 사회과학자들과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주요저서로는 <자립적 인간> <정신분석과 종교> <자유로부터의 도피> <건전한 사회> <사랑의 기술> <희망의 혁명> <인간의 마음> <소유냐 존재냐> 등이 있다.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사랑은 스스로 도달한 성숙도와는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가장 능동적으로 자신의 퍼스낼리티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한, 또한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주려고 한다. [5]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파라켈수스-


1. 사랑은 기술인가?

사랑은 기술인가?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혹은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 다시 말하면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이 작은 책은 사랑은 기술이다, 라는 견해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물론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다.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13]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 [13-16]

1.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남자들이 특히 애용하는 방법은 성공해서 ...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모으는 것이다. 여성이 애용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몸을 가꾸고 치장을 하는 등 매력을 갖추는 것이다.

2.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우리의 모든 문화는 구매욕에, 또한 상호간에 유리한 거래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랑하게 되었다는 느낌은 보통 자신의 교환 가능성 범위에 있는 인간 상품에 대해서만 나타난다.

자기 자신의 교환 가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서로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최상의 대상을 찾아냈다고 느낄 때에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시장지향적이고 물질적 성공이 현저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권에서 인간의 애정 관계가 상품 및 노동시장을 지배하는 교환 형식과 동일하다고 해서 놀랄 이유는 전혀 없다.

3.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사랑에 ‘머물러’있는 상태를 혼동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남남으로 지내오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들 사리의 벽을 허물어버리고 밀접하게 느끼며 일체라고 느낄 때, 이러한 합일의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유쾌하고 가장 격앙된 경험 가운데 하나다. 갑자기 친밀해지는, 이 기적은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 시작되는 경우, 대체로 더욱 촉진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친숙해질수록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권태가 생겨나며 최초의 흥분의 잔재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 그들은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정,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이러한 태도, 즉 사랑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는 태도는 반대의 경우에 대한 압도적 증거에도 아랑곳없이 사랑에 대한 일반적 관념으로서 지속되고 있다.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17]

*기술을 배울 때 거쳐야 하는 단계 [18]

1. 이론의 습득

2. 실천의 습득

이론적 지식의 결과와 실천의 기술이 합치될 것이다. 곧 나의 직관이 모든 기술 숙달의 본질이 될 것이다.

3. 기술 숙달이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사랑을 뿌리 깊이 갈망하면서도 사랑 이외의 거의 모든 일, 곧 성공, 위신, 돈, 권력이 사랑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리의 거의 모든 정력이 이러한 목적에 사용되고 거의 모든 사람이 사랑의 기술은 배우려고 들지 않는다.


2. 사랑의 이론

2-1. 사랑,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

인간의 실존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인간이 동물계로부터, 곧 본능적 적응의 세계로부터 벗어낫고 자연을 초월해 있다는 사실이다.

한번 자연과 결별하면 인간은 자연으로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일단 낙원-자연과의 본래의 합일 상태-에서 쫓겨나면, 다시 돌아가려고 노력해도, 불타는 칼을 가진 케루빔 천사(아홉 천사 중 둘째로서 지식을 맡은 천사)가 길을 가로막는다. 인간은 철저하게 상실한 전(前)인간적 조화 대신에, 이성을 발달시키고 새로운 조화, 곧 인간적 조화를 찾아내면서 오직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23]


인간에게는 이성이 부여되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동포를,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분리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 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의 인식, 자신의 고독과 자신의 분리에 대한 인식,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인식, 이러한 모든 인식은 인간의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 감옥으로부터 풀려나와 밖으로 나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과, 또한 외부 세계와 결합하지 않는 한 미쳐버릴 것이다.

분리 경험은 불안을 일으킨다. 분리는 정녕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인간적 힘을 사용할 능력을 상실한 채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무력하다는 것, 세계-사물과 사람들-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나의 반응 능력 이상으로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다. 게다가 분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으킨다. [24]


인간이 분리된 채 사랑에 의해 다시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 수치심의 원천이다. 동시에 이것은 죄책감과 불안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25]


인간-모든 시대, 모든 문화의-은 동일한 문제, 곧 어떻게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개체적 생명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내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26]

많은 대답-이 대답의 기록이 인간의 역사다-이 있지만 무수하지는 않다.

이러한 대답은 어느 정도는 개인이 도달한 개성화의 정도에 달려 있다. 유아는 여전히 어머니와의 일체감을 느끼고 어머니가 있는 한 분리감을 느끼지 않는다. 유아의 고독감은 어머니의 육체적 현존, 곧 어머니의 가슴과 피부를 통해 달랠 수 있다. 분리와 개성의 감각이 발달하면 이때는 어머니의 육체적 현존만으로는 이미 충분하지 못하고 다른 방식으로 분리 상태를 극복하려는 욕구가 생긴다.

*도취적 합일

온갖 종류의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27]

성적 오르가슴은 황홀경에 의해 발생하는 상태 또는 마약의 효과와 비슷한 상태를 발생시킬 수 있다.

비도취적 문화권에 살고 있는 개인이 선택하는 형태는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이다. 사회적으로 정형화된 해결에 참여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은 죄책감과 후회로 괴로워한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피난함으로써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도취 상태가 지나가버리고 나면 그들은 더욱 심한 분리감을 느끼며, 더욱 자주, 더욱 강렬하게 알코올이나 마약에 의존하게 된다.

성적 도취는 어느 정도 분리감을 극복하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형태이며 고립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이 된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분리 상태를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개인의 경우, 성적 오르가슴 추구는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기능을 떠맡게 된다. 이것은 분리에 의해 생긴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절망적인 노력이며 결과적으로는 분리감을 더욱 증대시킨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한순간을 제외하고는, 두 인간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 도취적 합일의 특징 [29]

1. 강렬하고 심지어 난폭하다

2. 퍼스낼리티 전체에, 몸과 마음에 일어난다

3. 일시적이고 주기적이다


도취적 합일과 정반대되는 것이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해결책으로 채택하고 있는 합일의 형태, 곧 집단-그 관습, 관례, 신앙-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다.

집단과의 합일은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아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 목적이 군중에 소속되어 있는 합일이다. 만일 내가 남들과 같고, 나 자신을 유별나게 하는 사상이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으며, 나의 관습이나 옷이나 생각을 집단의 유형에 일치시킨다면 나는 구제된다. 고독이라는 가공할 경험으로부터 구제되는 것이다.

분리되지 않으려는 욕구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이해한다면, 남과 다르다는 데서 느끼는 공포, 군중과 약간 떨어져 있다는데서 느끼는 공포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일치하도록 ‘강요받는’ 정도 이상으로 일치하기를 ‘바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치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구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사람들 대부분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만인과의 의견 일치는 ‘자신의’ 견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직은 어느 정도 개성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 있어서 이러한 욕구는 사소한 차이에 의해 만족된다. 사실상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경우에 ‘이것은 다르다’는 슬로건을 떠들어대는 것은 차이를 추구하는 애처로운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차이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이와 같이 강화되는 것은 가장 발달한 산업 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평등의 개념 및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평등은 개인 간의 차이를 존중해야 하며, 우리 모두 일체임이 사실이더라도 우리는 각기 독특한 실재이고 각기 하나의 조화로운 우주라는 것도 사실임을 의미한다. [31]

평등은 인간이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인은 각기 목적이고, 목적인 한에서만 동등하며, 서로 수단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평등을 착취의 폐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이용의 폐지로 정의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의 의미는 달라졌다. 오늘날 평등은 일체성보다는 오히려 동일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차이를 제거하려는 경향의 일부이다.

남자와 여자는 대립적인 극으로서 평등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비개성화된 평등이라는 이상을 설교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 대집단 속에서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하도록 서로 동일한 원자적 인간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모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량 생산이 상품의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이러한 표준화를 ‘평등’이라고 한다. [33]


일치에 의한 합일은 강렬하지도 난폭하지도 않다. 이러한 합일은 냉정하고 관례에 따라 지시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때로는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진정시키기에 불충분하다. 게다가 일치에 의한 합일은 주로 정신에만 관계되고 육체에는 관계되지 않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도취적 해결책과 비교하면 결함이 있다. 군중과의 일치에는 단 한 가지 이점이 있을 뿐이다. 곧 이것은 발작적이지 않고 지속적이다. [33]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으로서의 일치와 함께 현대 생활의 다른 요인, 곧 일상적인 노동과 일상적인 오락의 역할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인간은 ‘평균화’되고 노동력 또는 사무원이나 관리자의 관료적 힘의 일부가 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월요일부터 다음 월요일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활동은 일정하고 기성품화되어 있다. 이러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은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며,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 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것인가? [34]

 

합일을 이루는 세 번째 방법은 ‘창조적 활동’-예술가의 창조적 활동이든, 직공의 창조적 활동이든-이다. 어떤 종류의 창조적 작업이든 창조하는 자는 외부 세계를 나타내는 자료와 결합한다. 모든 형태의 창조적 작업에서 일하는 자와 그 대상은 하나가 되고 인간은 창조 과정에서 세계와 결합한다.

그러나 이것은 생산적인 일, 곧 ‘내’가 계획하고 만들어내고 내 작업의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에만 해당된다. [34]


생산적 작업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은 대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도취적 융합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은 일시적이다. 일치에 의해 달성된 합일은 사이비 합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합일은 실존의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한 해답은 대인간적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 곧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인간적 융합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갈망이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열정이고 인류를, 집단을, 가족을, 사회를 결합시키는 힘이다. 이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발광 또는 파괴-자기 파괴 또는 타인 파괴-가 일어난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성은 하루도 존재하지 못한다. [35]


*실존적 문제에 대한 신중한 해답으로서의 사랑

*‘공서적(共棲的) 합일’이라 부를 수 있는 미숙한 형태의 사랑


‘공서적 합일’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 피학대 음란증(마조히즘), 가학성 음란증(사디즘)

‘정신적’인 공서적 합일에서는 두 신체는 독립적이지만 심리적으로는 동일한 애착이 존재한다. [36]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사람, 말하자면 자신의 생명이고 산소인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됨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에서 도피한다. 그는 자신의 통합성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 또는 자신의 밖에 있는 어떤 것의 도구로 만든다. 그는 살아가는 문제를 생산적 활동에 의해 해결할 필요가 없다.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서 고독과 갇혀 있다는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37]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38]

  

어떤 사람은 깊은 불안감과 고독감에 쫓겨 끊임없이 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야망이나 돈에 대한 탐욕에 쫓겨 끊임없이 일한다. 이 모든 경우에 사람들은 열정의 노예이고, 그들은 쫓기고 있으므로 사실 그들의 활동은 ‘수동적’이다. 곧 그들은 ‘행위자’가 아니라 수난자이다. [39]


(스피노자) 감정을 능동적 감정과 수동적 감정, 곧 ‘행동’과 ‘격정’으로 구별한다. 능동적 감정을 나타낼 때 인간은 자유롭고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된다. [39]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준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는 오해다. 성격상 받아들이고 착취하고 혹은 저장하는 것을 지향하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준다’고 하는 행위를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한다. 시장형 성격의 사람은 주려고 하지만 단지 받는 것과 교환할 뿐이다. 그에게는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이다.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주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 대부분은 주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그들은 주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이유 때문에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덕은 희생을 감수한다는 행위에서만 성립된다. 그들의 경우,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낫다는 규범은 환희를 경험하기보다는 박탈당하는 것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는 의미이다.

생산적인 성격의 경우,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나는 나 자신을 넘쳐흐르고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서, 따라서 즐거운 자로서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41]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준다는 것은 부자임을 의미한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다. 그는 자기를 남에게 줄 수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생존에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빼앗긴 자만이 뭔가를 주는 행위를 즐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경험으로 보면 무엇을 최소한도의 필수품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사실상 그가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성격에 달려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정도 이상의 가난은 주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며, 가난은 직접 야기시키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자로부터 주는 기쁨을 빼앗는다는 사실 때문에 수치이다. [42]


그러나 준다고 하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역에 있다. 그는 자기 자신,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顯示)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그러나 그는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생명에 무엇인가 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생명에 야기된 것은 그에게 되돌아온다. 참으로 줄 때, 그는 그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나. 주는 행위에서는 무엇인가 탄생하고 이와 관련된 두 사람은 그들 두 사람을 위해 태어난 생명에 대해 감사한다.

이 말은 특히 사랑에 대해서는,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43]


주는 행위로서의 사랑의 능력이 그 사람의 성격 발달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성격이 생산적 방향으로 발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에서 인간은 의존성, 자아도취적 전능(全能), 타인을 착취하려는 욕망, 곧 목표 달성에 있어서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용기를 획득해왔다. 이러한 성질이 결여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주는 것, 따라서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랑의 능동적 성격은, 준다고 하는 요소 외에도, 언제나 모든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어떤 기본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이다.

*사랑의 요소 1 - 보호 (관심)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이러한 적극적 관심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45]

하느님은 요나에게 무엇인가를 위해 ‘일하고’, ‘무엇인가를 키우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며 사랑과 노동은 불가분의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노동의 대상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일하기 마련이다.


*사랑의 요소 2 - 책임

오늘날 책임이 흔히 의무, 곧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책임은, 그 참된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동이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의 요구-표현되었든, 표현되지 않았든-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응답한다.

어머니와 자식 관계에서 이러한 책임은 주로 신체적 욕구에 대한 배려와 관련된다. 어른 사이의 사랑에서 책임은 주로 상대방의 정신적 요구와 관련된다. [46]


*사랑의 요소 3 - 존경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이 아니다. 존경은 이 말의 어원(respicere=바라보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바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또는 그녀)와 일체감을 느끼지만 이는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이지,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독립을 성취할 때에만, 다시 말하면 목발 없이, 곧 남을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않아도 서서 걸을 수 있을 때에만 존경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프랑스의 옛 노래처럼 ‘사랑은 자유의 소산’이며 결코 지배의 소산이 아니다. [47]


*사랑의 요소 4 - 지식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보호와 책임은 지식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면 맹목일 것이다. 지식은 관심에 의해 동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공허할 것이다. 지식에는 여러 층이 있다. 사랑의 한 측면인 지식은 주변에 머물지 않고 핵심으로 파고드는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초월해서 다른 사람을 그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지식은 사랑의 문제에 대해 더욱 근본적인 또 하나의 관계를 갖고 있다. 분리하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융합하려는 기본적인 욕구는 또 하나의 각별히 인간적인 욕망, 곧 ‘인간의 비밀’을 알려는 욕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 ‘비밀’을 알게 해주는 길은 사랑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이러한 침투를 통해 알려고 하는 나의 욕망은 합일에 의해 만족을 얻는다. 융합하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고 나 자신을 알고 모든 사람을 안다-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오직 한 가지 방법에 의해서만 인간에 대해 살아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사고가 제시하는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일의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사랑은 지식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며 사랑은 합일의 행위를 통해 나의 물음에 대답한다. 사랑하는, 곧 나 자신을 주는 행위에서, 다른 사람에게 침투하는 행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아내고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우리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인간을 발견한다.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의 ‘행위’에 있다. 이 행위는 사상을 초월하고 언어를 초월한다. 사랑의 행위는 대담하게 합일의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를 통한 지식, 곧 심리학적 지식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 충분한 지식을 얻기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다. 다른 사람의 실상을 보려면, 즉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 곧 불합리하게 일그러진 상(像)을 극복하려면, 나는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인간을 객관적으로 알게 될 때에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궁극적 본질을 알 수 있다. [51]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고, 전지전능이라는 자아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52]


남녀는 그 자체 내에 받아들이는 요소와 침투하는 요소, 물질의 요소와 정신의 요소를 갖고 있다. 남자는-여자도 마찬가지지만- 그의 여성적 극과 남성적 극의 양극이 합일할 때에만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합일을 발견한다. 이러한 양극성은 모든 창조의 기초이다.

남녀 사이의 사랑을 통해 남녀는 각기 재탄생하는 것이다. [53]


2-2.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나는 현재의 나로서 사랑받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나이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리라.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이러한 경험은 수동적인 경험이다.

사랑받기 위해 나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다-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현재의 상태’, 곧 어머니의 자식으로 존재하는 것뿐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지복(至福)이고 평화이며, 획득할 필요도, 보상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사랑의 무조건적 성질에도 역시 부정적 측면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보답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획득될 수도, 만들어낼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어머니의 사랑을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아동발달의 이 단계(여덟 살 반부터 열 살 이전)에서 자신의 행위로써 사랑을 만들어내려는 새로운 감정적 요인이 생긴다.

어린이의 생활에서 처음으로 사랑의 관념은 사랑받는 것으로부터 사랑하는, 창조적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변한다. 이렇게 처음 시작할 때부터 사랑이 성숙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마침내 어린이는 이제 젊은이가 되어 자기 본위성, 곧 다른 사람들을 오직 자신의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극복한다. [61]


사랑함으로써 그는 자아도취와 자기 본위 상태에 의해 이루어진 고독과 고립이라는 감방에서 벗어난다. 그는 새로운 합일감, 참여감, 일체감을 느낀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른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62]


무조건적 사랑은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 가운데 하나다. 한편 어떤 장점 때문에, 다시 말하면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는 경우, 언제나 의심이 남는다. 내가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언제나 남아 있다. 언제나 사랑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상으로 주어지는’ 사랑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상대를 즐겁게 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분석해보면 사랑받는 게 아니라 이용당하고 있다는 쓰라린 감정을 쉽게 일으킨다. [63]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원칙은 ‘너는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너는 네 의무를 다하고 있기 때문에, 너는 나를 닮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보답을 바라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를 달성하지 못하면 사랑을 잃게 된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사랑의 소극적 측면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본성에는 복종은 주요한 덕이고, 불복종은 중요한 죄라는 사실이 가로놓여 있다. 따라서 (복종하지 않으면) 그 벌로 아버지의 사랑을 잃게 된다. 적극적 측면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부이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려고 무슨 일인가를 할 수 있고 노력할 수도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처럼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지는 않다. [65]


어머니는 삶에 대한 신념을 갖고, 지나친 걱정을 해서는 안 되며, 어머니의 걱정이 어린아이에게 전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생애 일부를 어린아이가 독립해서 마침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에 바쳐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원칙과 기대로 인도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위협적이고 권위적이기보다는 참을성이 있고 관대해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성장하는 어린아이에게 능력에 대한 확신을 증대시켜야 하고 마침내 어린아이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를 갖고 아버지의 권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결국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그는 어머니다운, 그리고 아버지다운 양심을 갖게 되어야 한다. 어머니다운 양심은 ‘어떠한 악행이나 범죄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 너의 삶과 행복에 대한 나의 소망을 빼앗지는 못한다’고 말하고, 아버지다운 양심은 ‘네가 잘못을 저지르면 너는 네 잘못의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하고 내 마음에 들고 싶다면 너는 너의 생활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숙한 사람은 외부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다. [66]


2-3. 사랑의 대상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믿고 있다.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지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는 것만이 필요하며, 그렇게 되면 그 밖의 일은 모두 저절로 될 것이라고 믿는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70]


-형제애(兄弟愛)

사랑의 모든 형태의 바탕에 놓여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랑은 ‘형제애’이다. 나는 형제애라는 말로 책임, 보호, 존경, 다른 사람에 대한 지식, 다른 사람의 생명을 촉진하려는 소망 등을 나타내고 있다.

형제애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형제애를 통해 사람들과의 결합과 인간적 유대와 인간적 일치를 경험한다.

내가 다른 사람을 주로 표면적으로 지각한다면 나는 주로 차이점을 지각하게 되고 이 차이점은 우리를 분리한다.

내가 핵심으로 파고들면, 나는 우리의 동일성, 곧 우리는 형제라는 사실을 지각하게 된다.

형제애는 동등한 자 사이의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인 한, 우리에게는 항상 도움이 필요하다. 무력상태는 일시적 상태고 스스로의 발로 서서 걷는 것은 영원하고 공통된 상태다.

그렇지만 무력한 인간에 대한 사랑, 가난한 자와 이방인에 대한 사랑은 형제애의 시작이다. 육친을 사랑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 아니다. 짐승도 새끼를 사랑하고 보호한다. 무력한 자는, 그의 생명이 주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주인을 사랑한다.

어린아이는 어버이가 필요하기 때문에 어버이를 사랑한다. 어떤 목적에 이바지하지 않는 사랑에 있어서만 사랑은 펼쳐지기 시작한다.

무력한 사람을 동정함으로써, 인간은 형제에 대한 사랑을 발달시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도 인간은 도움이 필요한, 곧 약하고 위태로운 자기를 사랑한다. 동정에는 지식과 동일시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71]



-모성애(母性愛)

모성애는 어린아이의 생명과 욕구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이다.

어린아이의 생명의 긍정에는 두 측면이 있다.

1. 어린아이의 생명 유지와 성장에 절대로 필요한 보호와 책임

   ‘젖과 꿀이 넘쳐흐른다’에서 ‘젖’, 보호와 긍정적 측면의 상징

2. 단순한 생명의 유지를 훨씬 능가하는 것, 어린아이에게 삶에 대한 사랑을 천천히 가르쳐주고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고 소년 또는 소녀인 것은 좋은 일이고 이 지상에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는 감정을 갖게 하는 태도다.

   ‘꿀’-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 살아 있다는 행복감 상징

 

대부분의 어머니가 ‘젖’을 줄 수 있으나 ‘꿀’까지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꿀을 줄 수 있으려면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73]


모성애는 연약한 갓난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라 성장하는 어린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에서 진정한 실현을 보는 것 같다. [74]


초월에의 요구

인간은 피조물로서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창조자, 창조된 자의 수동적 역할을 초월한 자로 느낄 필요가 있다.

창조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가장 쉬운 방법은 어머니로서 자신의 창조물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 어린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그녀의 생활에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아이는 결국 완전히 분리된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모성애의 참된 본질은 어린아이의 성장을 돌봐주는 것이며 이것은 그녀로부터 어린아이가 분리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다.

성애에서는 분리된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 모성애에서는 한 몸이었던 두 사람이 분리된다. 어머니는 어린아이의 분리를 관용할 뿐 아니라 바라고 후원해주어야 한다. 이 단계에서 모성애는 비이기성, 곧 모든 것을 주면서도 사랑하는 자의 행복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능력을 요구하는 어려운 과업으로 변한다.

자아도취적이고 지배욕과 소유욕이 있는 여자는 어린아이가 연약할 때에만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성공할 수 있다. 오직 참으로 사랑할 줄 아는 여자, 받기보다 주는 데서 더 많은 행복을 느끼는 여자, 그녀 자신의 실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여자만이 어린아이가 분리 과정을 밟고 있을 때에도 사랑하는 어머니일 수 있다. 자라나는 어린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곧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은 아마도 가장 달성하기 어려운 사랑의 형태일 것이며, 어머니가 연약한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기만적인 것이 되기 쉽다. [76] 


-성애(性愛)

형제애는 동등한 자들 사이의 사랑이고 모성애는 무력한 자에 대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각기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성애는 완전한 융합, 곧 다른 한 사람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성애는 흔히 사랑에 ‘빠진다’는 폭발적인 경험, 곧 그 순간까지도 낯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장벽이 갑자기 무너져버리는 경험과 혼동된다.

만일 상대방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경험을 한다면, 그의 퍼스낼리티의 무한성을 경험할 수 있다면, 상대방이 이와 같이 친밀해지는 일을 결코 없을 것이며, 장벽을 극복하는 기적은 매일 새로이 일어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친밀감은 우선 성적 교섭을 통해 확립된다.

(그 외) 자기 자신의 개인 생활, 자신의 희망과 불안을 말하는 것, 자신의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면을 보이는 것, 세계에 대해 공통된 관심을 확립하는 것, 이러한 모든 일은 분리를 극복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자신의 분노, 증오, 그리고 자제심의 완전한 결여를 드러내는 것도 친밀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형태의 친밀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희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타인과의 사랑을 추구하게 된다. 이 타인은 다시금 ‘친밀한’ 사람으로 변하고,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다시금 유쾌하고 강렬하지만, 이 경험은 다시금 차츰 덜 강렬한 것이 되고 마침내 새로운 정복, 새로운 사랑을-언제나 새로운 사랑은 이전의 사랑과는 다르리라는 환상을 품고- 바라게 된다. 성적 욕망의 기만적 성격은 이러한 환상에 많은 도움을 준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사랑은 성적 결합의 소망을 일으킬 수 있다. 이 경우, 육체적 관계에는 탐욕이나 정복하려는 또는 정복당하려는 소망은 없고 부드러움이 섞일 뿐이다. 육체적으로 결합하려는 욕망이 사랑에 의해 자극되지 않는다면, 성애가 동시에 형제애가 아니라면, 이러한 욕망은 도취적이며 일시적인 합일 이외의 합일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성적 매력은 순간적으로 합일의 환상을 일으키지만 사랑이 없는 한, 이러한 ‘합일’은 낯선 사람들을 이전과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져 있게 한다. [79]

 

우리가 흔히 서로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사랑은 사실은 두 사람 사이의 이기주의다. 그들은 서로를 동일시하는 두 사람이고, 그들은 단일한 개인을 둘로 확대함으로써 분리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들을 고독의 극복을 경험하지만, 그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는 분리되어 있으므로 여전히 서로 분리된 채로 있고 그들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곧 그들의 합일 경험은 환상이다. 성애는 배타적이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전 인류를, 모든 살아있는 자를 사랑할 수 있다. [80]


성애는, 만일 이것이 사랑이라면, 한 가지 전제를 갖고 있다. 나는 나의 존재의 본질로부터 사랑하고 있고, 다른 사람을 그의, 또는 그녀의 존재의 본질에서 경험하고 있다는 전제를.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80]


사랑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행위, 곧 나의 생명을 다른 한 사람의 생명에 완전히 위임하는 결단의 행위여야 한다.

우리는 성애의 중요한 요인, 곧 ‘의지’라는 요인을 무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다. 이것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만일 사랑이 감정일 뿐이라면,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 감정은 생겼다가 사라져버릴 수 있다. 내 행위 속에 판단과 결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내가 이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81]


-자기애(자기애)

나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인간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에 표현된 사상은 자기 자신의 통합성과 특이성에 대한 존경이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이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자신의 자아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83]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순수한 사랑은 생산성의 표현이고 보호, 존경, 책임, 지식을 의미한다. 순수한 사랑은 누군가에 의해 야기된다는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의 성장과 행복에 대한 능동적 갈망이며, 이 갈망은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근원이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할 줄 아는 힘의 실현이고 집중화이다. 사랑에 내포되어 있는 기본적 긍정은 본질적으로 인간 성질의 구현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향하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는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84]


‘우리 자신의 생명, 행복, 성장, 자유에 대한 긍정’은 ‘우리 자신의 사랑의 능력’, 곧 보호, 존경, 책임, 지식에 근원이 있다.  [85]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하며, 주는 데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받는 데서만 기쁨을 느낀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외부 세계를 본다. 그는 다른 사람의 욕구에는 흥미가 없고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통합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유용성을 기준으로 모든 사람과 사물을 판단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랑할 줄 모른다. [85]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한 것이기는 커녕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86]


‘비이기주의’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뿐이고’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조차도 원활하지 못하며 불행하다

그는 삶에 대한 적의로 가득차 있으며, 비이기주의라는 표면 뒤에는 미묘하지만 매우 강렬한 자기 본위가 숨어 있다.  [87]


우리는 자녀들에게 사랑, 기쁨, 행복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하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전도력이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88]


-신에 대한 사랑

앞에서는 분리의 체험과, 여기서 생기는 분리 상태의 불안을 합일의 경험에 의해 극복하려는 욕구가 사랑에 대한 우리의 욕구의 기반임을 검토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인류의 발달은 자연으로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와 땅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이 탈출한 데에 특징이 있다.

* 종교의 발달  [90]

1. 원시종교(동물, 토템)

2. 손수 만들어낸 것을 신으로 바꾸어 놓는다. 점토, 금, 은으로 만든 우상 숭배 단계

3. 신에게 인간의 형태 부여. 신인동형(神人同形)의 신을 숭배하는 단계.

   인간이 좀 더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세계에 있어서 인간이 최고의, 그리고 가장 고귀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두 가지 방향의 발달

   (1) 신의 본성에 대한 것 (남성적, 여성적)

   (2) 인간이 도달한 성숙도, 신의 본성과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의 본성을 결정하는 정도 


* 어머니 중심의 종교에서 아버지 중심의 종교로의 발달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모든 것을 보호하고 모든 것을 감싼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기 때문에 통제되거나 획득될 수도 없다. 어머니의 사랑이 있으면 사랑받는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

자녀들이 ‘착하고’ 순종하거나 어머니의 소망과 명력을 실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므로, 어머니의 사랑은 평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부성애의 본질은 아버지가 명령하고 원칙과 법칙을 수립하는 것이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아들의 복종에 달려 있다. 아버지는 가장 자신을 닮고 가장 잘 복종하고 자신의 재산상속자로서 자기 후계자가 되는 데 가장 적합한 아들을 가장 좋아한다(부계 사회는 사유재산의 발달과 병행한다). 그 결과 부계 사회는 계급 조직적이다. 형제로서의 평등은 경쟁과 상호 투쟁에 굴복한다. [91]


더 나아가 신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신의 원리, 곧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원리의 상징으로 변한다. 신은 진리이고 정의이다. 이런 발달에서 신은 이미 사람이나 남성이나 아버지는 아니다. 신은 현상의 다양성의 배후에 있는 통일 원리의 상징이고 인간 내면에 있는 정신적 종자로부터 피어날 꽃의 상징이다. [95]


일신론 사랑이 성숙해짐에 따라 그 결과는 결국 신의 이름을 말하지 말고 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은 일신론적 신학에 있어서 잠재적으로 가능한 것, 곧 현상적 우주의 기초에 있는 통일성, 곧 모든 존재의 근거를 가리키는 이름 없는 일자(一者),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침묵자가 된다. 곧 신은 진리가 되고 사랑이 되고 정의가 된다.  [96]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적 발달에서 이러한 유아적 단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은 매우 분명한 일이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신에 대한 신앙은 도움을 주는 아버지에 대한 신앙-유치한 환상-이다. [97]


모든 유신론적 체계에서는, 심지어 비신학적, 신비적 체계에서조차도, 인간을 초월해 있고 인간의 정신적 힘 및 구원과 내적 탄생에 대한 인간의 갈망에 의미와 타당성을 부여하는 정신의 왕국의 실재를 가정하고 있다.

사랑, 이성, 정의의 왕국은 오직 인간이 이러한 능력을 자기 자신 속에서 인간의 발달 과정을 통해 발달시킬 수 있기 때문에, 또한 그 정도에 따라 현실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이 스스로 삶에 부여하는 의미 외에는 삶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돕지 않는 한, 전적으로 외롭다. [99]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vs. ‘역설적 논리학’ [102]

역설적 논리학 (중국 및 인도의 사상,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

노자


사고의 세계는 역설에 사로잡혀 있다. 세계를 궁극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고가 아니라 행위에, 곧 일체성의 경험에 있다. 이렇게 해서 역설적 논리학에서는 신에 대한 사랑은 사고를 통한 신에 대한 지식이거나 인간의 신에 대한 사랑에 관한 사상이 아니라, 신과의 일체성을 경험하는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사상은 올바른 생활 방식을 강조하게 된다. 생활 전체, 사소하지만 중요한 온갖 행동은 신에 대한 지식에 바쳐지지만 올바른 사고에 의한 지식이 아니라 올바른 행위에 의한 지식에 바쳐진다.

브라만교에서는 불교나 도교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궁극적 목적을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에 둔다.

근대사에서는 동일한 원리가 스피노자, 프로이트, 마르크스의 사상에 표현되어 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강조점은 올바른 신앙에서 올바른 생활 방식으로 옮겨진다. 마르크스도 “철학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왔으나 과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동일한 원리를 제시했다. 프로이트의 역설적 논리는 그를 정신분석적 치료, 곧 더욱 깊어가는 자아의 체험으로 이끌어간다.

역설적 논리학의 관점에서 강조점은 사고가 아니라 행위에 놓인다. 이러한 태도에서 몇 가지 다른 결과가 생긴다.

1. 우선 이러한 태도에서 인도나 중국의 종교적 발전에서 볼 수 있는 ‘관용’이 생겼다.

올바른 사고가 궁극적 진리도, 구제에 이르는 길도 아니라면, 사고를 통해 다른 공식에 도달한 다른 사람들과 싸울 까닭은 없다.

2. ‘교의(敎義)’의 발달이나 ‘과학’의 발달보다 ‘인간 개조’를 강조하게 되었다.

인간의 종교적 과제는 올바르게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고, 또한 집중적인 명상 행위를 통해 일자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106]


서양 사상

올바른 사고에 의해서만 궁극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에, 올바른 행동도 동시에 중요시되기는 했지만, 중요한 강조점은 사고에 놓였다.

이러한 강조로부터 교의의 정형화, 교의의 정형화에 대한 끝없는 논쟁, ‘비신자’ 또는 이교도에 대한 비관용이 생겼다. 더 나아가 종교적 태도의 주요한 목적으로서 ‘신에 대한 신앙’을 강조했다.

신을 믿는 자는-비록 그가 신의 뜻을 좇아 살지 않더라도- 신의 뜻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신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탁월하다고 느꼈다.  


역설적 사고는 관용과 자기 개조를 향한 노력을 가져왔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은 교의와 과학, 가톨릭 교회와 원자력의 발견을 초래했다.

서양의 지배적인 종교적 체계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 본질적으로 신에 대한 신앙, 신의 존재에 대한 신앙, 신의 정의와 신의 사랑에 대한 신앙과 동일하다. 신에 대한 사랑은 본질적으로 사고상의 경험이다. 동양의 종교와 신비주의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 일체성의 강렬한 감정적 표현이며, 생활에 있어 모든 행위에 표현되는 이 사랑과 불가분의 관련을 갖고 있다. [108]


우리는 이제 어버이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의 중요한 평행관계로 되돌아올 수 있다. 어린아이는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린아이는 무력하다고 느끼고, 모든 것을 감싸주는 어머니의 사랑을 요구한다. 다음에 어린아이는 사랑의 새로운 중심으로서 아버지, 곧 사고와 행동의 지도원리인 아버지를 찾게 된다. 이 단계에서 어린아이의 행동 동기는 아버지의 칭찬을 받고 아버지의 불쾌감을 피하려는 욕구에 있다.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서 그는 보호하고 명령하는 힘으로서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해방된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원리를 확립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

인류 역사에서 우리는 동일한 발달을 보고 또 예상할 수 있다. 곧 어머니인 여신에 대한 무력한 애착으로서의 신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아버지인 남신에 대한 순종적인 애착을 거쳐, 신이 이미 외부적 힘이 아니고 인간이 사랑과 정의의 원리를 자기 자신 속에 흡수하여 인간과 신이 일체가 되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고, 마침내 시적, 상징적 의미로서만 신에 대해 말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109]


현대 종교에서 우리는 초기의 가장 원시적인 발달 단계에서 최고의 발달 단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가 현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개인도 자기 자신 속에, 자신의 무의식 속에 무력한 갓난아이 이후의 모든 단계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그가 어느 경지까지 성장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신에 대한 사랑의 본성이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본성과 대응하고, 더 나아가 그의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성질이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더욱 성숙한 ‘사고’에 의해 은폐되고 합리화됨으로써 흔히 의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10]


3. 현대 서양 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

사랑이 성숙하고 생산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능력이라면, 어떤 특정한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의 능력은 이 문화가 평범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달려 있다.

서양 생활에 대한 객관적 관찰자들은 누구든지 사랑이 비교적 희귀한 현상이며 여러 가지 형태의 사이비 사랑이 사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 근대 자본주의에서의 인간의 문제   [119-120]

주도권은 좋든 나쁘든 자본의 분야에서나 노동의 분야에서나 개인으로부터 조직으로 옮겨졌다.

노동이 철저하게 분업화되고 광범하게 집중화된 기업에서 노동은 조직화되고 개인은 개성을 잃고 소모적인 기계의 톱니바퀴가 된다.

근대 자본주의는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 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위나 원리, 또는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즐거이 명령에 따르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마찰 없이 사회 기구에 순응하는 사람들, 폭력 없이 관리되고 지도자 없이 인도되고 목적 없이-좋은 것을 만들어내고 계속 움직이고 기능을 다하고 곧바로 나간다는 목적 이외에는-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상품으로 변하고, 현재의 시장 건 아래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투자로써 자신의 생명력을 경험한다. 인간  관계는 근본적으로 소외된 자동 기계 같은 관계가 되고, 각자는 군중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따라서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에서 각자의 차이가 없다.

모든 사람이 되도록 타인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아주 고독하며, 분리 상태가 극복되지 못했을 때 필연적 결과로 생기는 깊은 확실성과 불안, 죄책감의 지배를 받는다.


* 우리 문화는 사람들이 이러한 고독을 의식하고 깨닫지 않게끔 도와주는 여러 가지 완화제를 제공한다.

1. 우선 제도화된 기계적 작업의 엄밀한 규격화,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곧 초월과 합일에 대한 갈망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노동의 규격화만으로는 이러한 일에 성공하지 못하므로,

2. 인간은 오락의 규격화에 의해, 곧 오락산업에 의해 제공되는 음향이나 구경거리를 수동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더 나아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사고 이것을 곧 다른 것과 교환하는 데 만족함으로써 자신의 의식되지 않은 절망을 극복한다. [120]


(현대인의 상) 잘 먹고 잘 입고 성적으로도 만족하지만 자아가 없고 가장 피상적인 접촉을 제외하고는 동료들과 어떠한 접촉도 없는. [120]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기는 데’ 있다. 즐긴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소비’를 말하고 상품, 구경거리, 음식, 술, 담배, 사람들, 강의, 책, 영화 등을 ‘입수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소비되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세계는 우리의 식욕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대상으로서 커다란 사과, 커다란 병, 커다란 유방이 된다. 우리는 젖을 빠는 자이고, 영원히 기대하는 자이고, 희망에 가득 찬 자이다-그리고 영원히 실망하는 자이다. 우리의 성격은 교환하고 받아들이고 싸게 팔아버리고 소비하는 데 적합하다. 모든 것은,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된다. [121]


* 사랑의 붕괴 1 - ‘팀워크’로서 고독으로부터 피난처로서의 사랑, ‘두 사람 만의 이기주의’

사랑에 관한 한 상황은, 당연한 일이지만, 현대인의 이러한 사회적 성격과 대응된다. 자동기계는 사랑할 수 없다. 자동 기계는 ‘퍼스낼리티라는 상품’을 교환할 수 있고 공정한 거래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소외된 구조를 가진 사랑, 특히 결혼의 가장 중요한 표현의 하나는 ‘팀’이라는 개념이다.

행복한 결혼에 대해 쓴 무수한 논문은 원활한 기능을 가진 팀이 이상적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원활하게 일하는 고용인이라는 관념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고용인은 ‘합리적으로 독립적’이고 협동적이고 관대하고 야심적이면서 동시에 공격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남편은 아내를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하고 아내의 새 옷이나 맛있는 요리를 칭찬해야 한다. 아내는 남편이 지쳐서 시무룩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해해줘야 하고, 남편이 사업상의 난점에 대해 말할 때 주의 깊게 귀 기울여야 하고, 남편이 아내의 생일을 잊었을 때도 화내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관계에 공통되는 것은 평생 동안 남남으로 남아 있고, 결코 ‘핵심적 관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서로 예의 바르게 대우하고 서로 더욱 호의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두 사람의 원활한 관계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러한 개념에서 중요한 강조점은 참아낼 수 없는 고독감으로부터 피난처를 찾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에서 마침내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안식처를 찾아낸다. 사람들은 세계에 대항하는 두 사람 사이의 동맹을 형성하고,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는 사랑과 친밀감으로 오해된다.

팀의 정신, 상호 관용 등에 대한 강조는 비교적 최근에 발달한 것들이다. [121-122]

현대 정신분석학자 설리반

성욕과 사랑의 엄격한 구별

“친밀감은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상황의 어떤 유형으로서, 개인적 가치의 모든 구성 요소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개인적 가치의 확인에는 내가 제휴(collaboration)라고 부르는 관계가 필요하다. 제휴라는 말은, 점점 더 동일해지는-다시 말하면 더욱더 가까워지는 상호 만족 추구에 있어서, 그리고 점점 더 유사해가는 안전성의 효과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상대가 표명한 욕구에 대해 명백히 정식화된 방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적응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사랑의 본질을 두 사람이 “우리는 자신의 명예와 우월감과 공명심을 유지하기 위해 게임의 규칙에 따르고 있다”고 느끼는 제휴 상태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 곧 공통된 이해 관계를 갖고 적대적이며 소외된 세계에 함께 대항하는 두 사람에 대한 기술이다.  [128]


* 사랑의 붕괴 2 - 상호간의 성적 만족으로서의 사랑

1차 세계 대전 이후 몇 년 동안은 상호간의 성적 만족을 만족스러운 사랑의 관계, 특히 행복한 결혼의 토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실패의 원인은 ‘올바른’ 성행위에 대한 무지, 곧 한쪽 또는 쌍방의 잘못된 성적 기교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실패를 ‘바로잡기’ 위해서, 또한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불행한 부부를 돕기 위해서 많은 책들이 올바른 성행위에 대해 가르침과 조언을 주면서 암암리에, 또는 공공연하게 행복과 사랑을 갖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러한 관념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사랑이 성적 쾌락의 소산이라는 것이고, 두 사람이 서로 성적으로 만족시킬 수 알게 되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리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올바른 기술을 사용하면 공업적 생산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온갖 문제 역시 해결하게 되리라는 당시의 일반적 환상에 부합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초적 가정과는 정반대되는 것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무시했다.

사랑은 성적 만족의 결과가 아니며, 성적 행복은 오히려 사랑의 결과다.

원인이 올바른 기술에 대한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억압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성에 대한 두려움 또는 증오는, 신체적 접합이라는 친밀하고 직접적인 행동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주지 못하도록,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성의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난점의 근저에 깔려 있다. 성적으로 억압된 사람이 공포나 증오에서 벗어난다면 그의, 또는 그녀의 성적 문제는 해결된다. [123]  


프로이트에게 사랑은 기본적으로 성적 현상이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사랑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현상이 된다. 프로이트에게는 비합리적인 사랑과 성숙한 퍼스낼리티의 표현으로서의 사랑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언제나 비정상적인 것으로 기울어지고, 언제나 현실에 대한 맹목성이 따르고, 강박적인 것이고, 어린 시절 사랑의 대상으로부터의 감정 전이다. 합리적 현상으로서의, 절정에 이른 성숙한 완성으로서의 사랑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프로이트는 자신의 탐구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프로이트는 근본적 현실은 인간 존재의 전체에 있다는 것,

1.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인간의 상황

2. 사회의 특수한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생활상의 실천에 있다는 것

을 알지 못했다. [124-126]


모든 본능적 욕구에 대한 완전한 만족은 행복을 위한 기초가 아닐 뿐 아니라 정상적 정신조차 보증하지 못한다.

어떠한 욕망이든 충족을 지연시키지 말라는 것이 모든 물질적 소비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적 분야에서도 주류가 되었다. [126]


* 사랑의 붕괴 기타

1. 어머니에 대한 유아적 애착을 벗어나지 못한 남자들

정답고 매력적, 표면적이고 무책임하다. 그들의 목적은 사랑받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정신의 본질이 자궁에서 나와 세상 속으로 성장하는 것이라면, 심각한 정신적 질환의 본질은 자궁에 이끌려 자궁 속으로 흡입되는 것이고, 따라서 생활로부터 제외되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집착은 흔히 이와 같이 삼켜버리고 파괴하는 방식으로 자식들과 관계하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일어난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구실로, 때로는 의무라는 구실로, 이러한 어머니들은 어린아이와 청년과 어른을 자기 자신 안에 묶어두려고 한다.

어느 누구도 어머니만큼 깊은 상처를 주지는 못한다. [131]

2. 아버지에게 애착을 느끼는 경우

3.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밖으로 표현하지 않으려는 부모 밑에서 양육된 경우


* 사이비 사랑의 형태 1  - ‘우상 숭배적 사랑’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힘의 생산적 전개에 바탕을 둔 동일성, 곧 자아를 인식하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화’하기 쉽다. 그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부터 소외되고 이 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최고 선, 곧 온갖 사랑, 온갖 빛, 온갖 지복을 간직하고 있는 자로서 숭배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힘에 대한 모든 감각을 박탈하고, 자기 자신을 찾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대체로 그녀를(또는 그를) 우상시하는 자의 기대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실망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보상으로써 새로운 우상을 찾게 되는데, 때로는 이러한 순환이 끝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우상 숭배적 사랑의 특징은 첫째로 강렬하고 갑작스러운 사랑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우상 숭배적 사랑은 흔히 참되고 위대한 사랑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의 강렬함과 깊이를 묘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단지 우상 숭배자의 갈망과 절망을 드러내는데 지나지 않는다. [135]


* 사이비 사랑의 형태 2  - ‘감상적 사랑’

사랑은 환상 속에서만 경험될 뿐, 실재하는 다른 사람과 여기서 지금 맺고 있는 관계에서는 경험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러한 사랑의 본질이 있다. 가장 광범하게 퍼져있는 이러한 사랑의 형태는 영화나 잡지의 사랑 이야기나, 사랑 노래의 소비자들에 의해 경험되는 사랑의 대상적 만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랑, 합일, 친밀감을 바라는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이러한 생산품을 소비하는 데서 만족을 찾는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분리의 벽을 허물 수 없었던 남자와 여자는 스크린 속 부부의 행복한 또는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에 참여할 때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많은 부부들이 스크린 위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이야기를 구경할 때 서로 사랑을 주고받지는 못하지만 함께 다른 사람의 ‘사랑’의 구경꾼으로서 사랑을 경험하는 유일한 기회를 갖는다. 사랑이 백일몽인 한, 그들은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실재하는 두 사람 사이의 현실적인 관계가 될 때, 그들은 얼어붙는다.

감상적 사랑의 또 하나의 측면은 시간에 의한 사랑의 추상화이다. 그들이 생활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이미 서로 싫증을 느끼면서도 얼마나 많은 약혼자, 혹은 신혼부부들이 미래에 있을 사랑의 축복을 꿈꾸는가? 현대인은 과거나 미래에 살지 오늘을 살지 못한다. 현대인은 감상적으로 어린 시절이나 어머니를 회상하고, 또는 미래에 행복한 계획을 세운다. 다른 사람들의 가공적인 경험에 참여함으로써 대상적으로 사랑을 경험하든, 또는 사랑의 경험이 현재에서 과거 또는 미래로 옮겨지든, 이와 같이 추상화되고 소외된 사랑의 형태는 개인의 현실적 고통과 고독과 분리감을 완화해주는 마취제로서 작용한다.  [136]


신경증적 사랑의 또 하나의 형태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고 그 대신에 ‘사랑하는’ 사람의 결함이나 결점에 관여하려고 ‘투사적 매커니즘’을 이용하는 것이다.

투사의 또 다른 형태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어린아이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실존의 문제를 자식의 문제에 투사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활에 의의가 없다고 느낄 때, 그는 자식들의 생활을 통해 의의를 느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어서나 자식들에 대해서나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다. 실존의 문제는 각자에 의해 스스로의 힘으로서만 해결될 수 있고 남이 대신 해결해줄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실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자식들로 하여금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인도하는 데 필요한 자질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어린아이에 대해서도 실패한다.  [136]


‘화목한 가정’ 안에 감도는 긴장과 불행의 분위기가 공공연한 결별보다도 자식들에게 더 해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공공연한 결별은 적어도 자식들에게, 인간은 용감한 결정에 의해 참을 수 없는 상황을 종결시킬 수 있음을 가르쳐줄 것이다. [138]


또 하나의 오류

사랑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환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갈등’이 사실은 ‘진짜’ 갈등을 회피하려는 노력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들이 말하는 갈등은 사소한 또는 피상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고, 이러한 불일치는 본질적으로 명료해지거나 해결될 수 없다. 두 사람 사이의 진짜 갈등, 그들이 속해 있는 내면적 현실의 같은 차원에서 경험되는 갈등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갈등은 명료해지고 카타르시스 작용을 하며, 이러한 카타르시스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힘을 갖게 된다.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오직 이러한 ‘핵심적 경험’에만 인간의 현실이 있고 오직 여기에만 생기가 있고 오직 여기에만 사랑의 기반이 있다. 사랑은 이와 같이 경험될 때에만 끊임없는 도전이다. 사랑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것이다.

조화가 있든, 갈등이 있든, 기쁨이 있든, 슬픔이 있든 이것은 두 사람이 그들의 실존의 본질로부터 그들 자신을 경험하고 그들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기보다는 그들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 일체가 된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이차적인 것이다. 사랑의 현존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증거가 있을 뿐이다. 곧 관계의 깊이, 관련된 각자의 생기와 힘이 그것이다. 이것은 사랑을 인식하게 하는 열매이다. [139]


종교 부흥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신에 대한 우상 숭배적 개념으로의 퇴행이며 신에 대한 사랑을 소외된 성격구조에 적합한 관계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매일의 생활은 어떤 종교적 가치에서도 엄격하게 단절되어 있다. 매일의 생활은 물질적 안락에 대한 갈망, 퍼스낼리티 시장에서 성공하려는 갈망에 바쳐지고 있다.

현대인은 세 살 난 어린아이, 곧 아버지가 필요할 때에는 아버지를 찾으며 울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놀이를 할 수 있는 한, 전적으로 자기 만족을 느끼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이러한 점에서, 다시 말하면 신의 원칙에 따라 생활을 바꾸지 않고 갓난아이처럼 신인동형적 신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중세의 종교적 문화보다는 오히려 우상 숭배를 하는 원시 부족에 더 가깝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퍼스탤리티 시장에서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고려하여 최고의 이익을 올려야 할 투자로서 경험하고 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동료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현대인의 주요 목표는 그의 기술, 지식, 자기 자신, 그리고 ‘퍼스낼리티라는 상품’을 다른 사람과 유익하게 교환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역시 공정하고 유익한 교환을 바란다. 생활에는 움직인다는 목표 말고는 아무런 원칙도 없고, 소비한다는 만족 말고는 아무런 만족도 없다.

최근의 종교의 소생에서는 신에 대한 신앙은 인간을 경쟁적 투쟁에 더 적합하게 만드는 심리적 책략으로 바뀌었다.

성공에 대한 우리의 지배적 관심, 이 최고의 목표를 결코 의심하지 않으면서 신에 대한 신앙과 기도를 성공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증진시키는 수단으로 권고하고 있다.

‘신을 당신의 반려로 삼으라’는 말은 사랑과 정의와 진리에 있어서 신과 일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사업에 있어서 신을 동업자로 만들라는 의미이다. [139-142]


4. 사랑의 실천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 혼자서 몸소 겪어야 하는 개인의 경험이다. [147]


* 기술을 배우기 위한 일반적인 요청 (조건)

1. (자기) 훈련

전 생애를 통한 훈련의 문제

현대인은 일을 떠나서는 자기훈련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은 일하지 않을 때에는 게을리 지내거나 빈둥거리고 싶어하며, 더 좋은 말을 쓴다면 ‘긴장을 풀고’ 싶어한다. 게으름을 피우려는 이러한 소망은 주로 생활의 규격화에 대한 반발이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목적을 위해, 자기 나름의 것이 아니라 일의 리듬에 의해 그에게 지시된 방식으로 어쩔 수 없이 하루에 여덟 시간씩 자기의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반항하며, 그의 반항은 유아적 자기방종의 형태를 취한다. 덧붙여서 권위주의에 맞서는 싸움에서 현대인은 모든 훈련을-스스로 부과한 합리적 훈련과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권위에 의해 강요된 훈련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이 없으면, 생활은 파괴되고 혼란을 일으키고 중심을 잃게 된다. [149]


2. 정신집중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필수조건

자기훈련 이상으로, 정신 집중도 우리 문화에는 드물다.

당신은 모든 것-그림, 술, 지식 등-을 삼켜버리는 데 열중하고 또 그럴 용의를 갖추고 있는, 입을 크게 벌린 소비자이다.

정신을 집중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기 홀로 있기 어렵다는 점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149]


3. 인내

현대인은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에는 무엇인가를, 곧 시간을 잃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해서 얻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지 못한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 말고는. [150]

  

4. 최고의 관심


우리가 어떤 기술에 숙달하려면 삶 전체를 이 기술에 바치거나 적어도 이 기술과 관련시켜야 한다. 자기 자신이 기술 훈련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기술에 대해서 이 말은, 이 기술 분야에서 명장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삶의 모든 국면을 통해 훈련, 정신집중, 인내를 ‘실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151]


어떻게 훈련을 하는가?

(우리 할아버지들) 아침 일찍 일어나고 불필요한 사치에 탐닉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훈련에는 분명히 결점이 있다. 이러한 훈련은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이었고, 절약과 저축의 미덕에 집중되어 있었고, 여러 가지 면에서 생활에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훈련에 대한 반발로서 ‘어떠한’ 훈련이든 의심하고 훈련을 받지 않을 채, 생활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여덟 시간 일하는 동안에 부과되는 규격화된 생활 방식과는 반대되는 것에 탐닉해서 균형을 잡으려는 경향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는 것, 하루의 일정한 시간을 명상, 독서, 음악 감상, 산책 등에 할당하는 것, 최소한의 시간 이상으로는 탐정소설이나 영화 같은 도피주의적 활동에 탐닉하지 않는 것, 과식하거나 과음하지 않는 것 등은 분명히 초보적 규칙이다.

훈련이 외부로부터 부과된 규칙처럼 실행되어서는 안 되고 자신의 의지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것, 훈련을 즐겁게 생각하고 훈련을 그만두면 결국 실패하게 될 행동에 천천히 익숙해지는 것이 본질적인 일이다. 훈련은 어쨌든 고통스러운 것으로 가정하고, 고통스러운 훈련만이 좋은 훈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서양의 훈련에 대한 개념의 불행한 한 측면이다.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에게-心身에- 좋은 것은, 비록 처음에는 약간의 저항을 극복해야 하더라도, 역시 즐거운 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152]


정신집중 배우기

가장 중요한 단계는 독서를 하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고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사실상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의 불가결한 조건이다.

내가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집착한다면, 그 또는 그녀는 생명을 구조하는 자일 수는 있지만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된다. 홀로 있으려고 해본 사람은 누구든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침착하지 못하고 조바심을 느끼며 심지어 상당한 불안까지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훈련은 가치 없고 어리석으며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그는 훈련을 계속하기 싫은 자신의 마음을 합리화하기 쉽다.

편안한 (다정치 못하거나 딱딱하지 않은) 자세로 앉아서 눈을 감고 눈앞에 있는 흰 스크린을 보려고 하며 마음속에 떠오르는 온갖 상념과 생각을 제거하려고 하며 자신의 호흡을 맞춰나가는 것, 그러나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또 강요하지도 않고 단지 호흡을 따라가는 것-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호흡을 느끼는 것, 더 나아가 ‘나’, 곧 내 힘의 중심으로서의, 나의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나-나 자신을 느끼는 것 등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매일 아침 20분 동안(가능하다면 더 길게), 그리고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러한 정신 집중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습 외에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곧 음악 감상, 독서, 사람들과의 대화, 경치 구경 등에 전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바로 이 순간 하고 있는 활동이 유일하게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하고 이 일에 몰두해야 한다. 만일 정신 집중이 되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일이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나, 우리의 충분한 주목을 받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현실성을 갖게 된다.

정신집중을 배우려면 되도록 쓸데없는 대화, 다시 말하며 순수하지 못한 대화를 피해야 한다. (이야기하는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대화)

쓸데없는 대화를 피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나쁜 친구를 피하는 것도 중요하다

(악의가 있고 파괴적인 사람들, 생활 궤도가 불쾌하고 음울한 사람, 육신은 살아있으나 정신은 죽은 자, 사상과 대화가 보잘것없는 자,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껄이는 자, 생각하지 않고 상투적인 의견을 주장하는 자...) [152-154]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신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은 경청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체하고 심지어 충고까지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들 자신의 대답조차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대화는 그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정신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에,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지금 무엇인가 하고 있으면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신 집중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행해야 한다. 관습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도피하지 말고 서로 친밀하게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156]

 

인내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면 걸음마를 배우고 어린아이를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어린아이는 계속 시도하며 조금씩 고쳐나가서 결국 어느 날인가는 쓰러지지 않고 걷는다. 만일 어른이 중요한 일을 추구하면서 어린아이와 같은 인내와 정신 집중에 도달한다면, 무슨 일인들 성취하지 못하랴! [156]


‘자기 자신에게 민감함’

그의 정신은 긴장을 푼 경계 상태고 그의 정신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과 관련된 모든 타당한 변화에 대해서 개방되어 있다.

어머니의 어린아이에 대한 민감성과 재빠른 반응을 보라. 어머니는 불안하거나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보내는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빈틈없는 균형 상태에 있는 것이다. [157]


도피적 행동

이러한 일을 알아차리고, 이러한 일을 합리화하는 무수한 방법이 있더라도 결코 합리화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는 왜 내가 불안하고 우울하고 조바심내는가를 말해줄 것이다. [158]


자신의 정신적 상태에 대한 동일한 민감성은 훨씬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바람직한 정신적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58]


우리는 지식을 가르치지만, 인간의 발달에 가장 중요한 가르침, 곧 성숙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어질 수 있는 충분한 가르침을 상실하고 있다. [158]


선생은 일차적으로 지식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의 기능은 어떤 인간적 태도를 전달하는 데 있었다. [159]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생활과 역사적 인물에 친숙하게 하는 많은 가능성 [159]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이다. 반면 외부 세계의 현상은 그 자체로서는 현실성이 없고 오직 이러한 현상이 자아도취적 인간에게 유익한가 위험한가에 따라 경험된다.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160]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 객관적이라는 것, 곧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었을 때, 어린아이로서 꿈꾸고 있는 전지전능의 꿈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겸손과 객관성은 사랑이 그런 것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 객관적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내가 객관성을 잃고 있는 상황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객관성과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면 사랑의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 가는 길을 절반은 걸어온 셈이다.  [162]


사랑의 능력은 자아도취나 어머니나 가족에 대한 근친상간적 애착으로부터 벗어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사랑의 능력은 성장하는, 곧 세계와 자신에 대한 관계에서 생산적인 지향을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탈피, 탄생, 각성의 이러한 과정은 필수적 조건으로서 한 가지 성질, 곧 ‘신앙’을 요구한다. 사랑의 기술의 실용은 신앙의 실천을 요구한다. [163]


비합리적 신앙이라는 말을 나는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을 바탕으로 하는 믿음이라고 이해한다. 합리적 신앙은 자기 자신의 사고나 감정상의 경험에 뿌리박고 있는 확신이다. 합리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이다. [163]


비합리적 신앙은 오직 어떤 권위자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와 같이 말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합리적 사고는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생산적 관찰과 사고에 기초를 둔 독립된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165]


인간관계의 영역에서도 신앙은 의의 있는 우정이나 사랑에 불가결한 성질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그의 기본적 태도의 불변성, 그의 퍼스낼리티 핵심의 불변성, 그가 가진 사랑의 불변성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어떤 사람이 의견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본적 동기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그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 존중은 자기 자신의 일부로서 변화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신앙을 갖고 있다. 우리는 변화할 수 없고 여러 가지 환경에도 불구하고, 또한 의견과 감정의 변화와 관계없이 생애를 통해서 지속하는 자아, 곧 우리의 퍼스낼리티의 핵심의 존재를 알고 있다. ‘나’라는 말의 배후에 있는 실재는 바로 이러한 핵심이며 우리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확신은 이러한 실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아의 지속성에 대해 신앙을 갖지 못하면 동일성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위협받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며, 이때에는 다른 사람의 찬성이 동일성에 대한 우리 감정의 기초가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만이 미래에도 오늘과 같을 것이며, 따라서 그는 지금 기대하는 바와 같이 느끼고 행동할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165]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의 조건이고, 니체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에 의해 규정될 수 있으므로, 신앙은 인간 실존의 한 조건이다. 사랑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 곧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능력과 그 신뢰성에 대한 신앙이다. [166]


사람에 대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의 또 한 가지의 의미는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관계된다.

가장 중요한 조건의 하나는 어린아이의 생활에 대해 중요한 인물이 이러한 가능성을 믿어주는 것이다. 교육은 아동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도와준다.

교육과 반대되는 것이 조작이며, 조작은 이러한 가능성의 성장에 대한 믿음의 결여, 그리고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억압해야만 비로소 어린아이가 올바르게 되리라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167]


‘인류’에 대한 신앙

적절한 조건만 주어지면 인간에게는 평등, 정의, 사랑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 질서를 수립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상이다.

비합리적 신앙은 압도적으로 강하고 전지전능하다고 느껴지는 힘에 굴복하고, 또한 자기 자신의 능력과 힘을 포기하는 데 뿌리박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의 성장, 자기 자신의 성장이라는 현실, 우리 자신의 이성과 사랑의 능력의 힘을 경험했기 때문에, 또한 어느 정도로 이러한 경험을 했는가에 따라, 다른 사람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인류에 대해 신앙을 갖게 된다. [168]


* 소망적 사고 : 현실적 사고에 근거를 두지 않고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에 바탕을 둔 비현실적 사고를 말하는 정신분석학 용어 [167]


신앙을 가지려면, ‘용기’, 곧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조차도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 생활의 일차적 조건으로서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는 자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격리와 소유를 자신의 안전책으로 삼는 방어 기구에 칩거하는 자는 누구든 자기 자신을 죄수로 만들게 된다. 사랑받고 사랑하려면 용기, 곧 어떤 가치를 궁극적 관심으로 판단하는-그리고 이러한 가치로 도약하고 이러한 가치에 모든 것을 거는-용기가 필요하다. [169]


곤란과 좌절과 슬픔을 ‘우리’에게 일어나서는 안 될 부당한 처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극복해야 할 도전으로써 받아들이려면 신앙과 용기가 필요하다. [170]


우리는 신앙을 배반하는 경우 언제나 약해지며 우리가 약해지면 점점 더 새로운 배반을 하게 되고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170]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뜻한다. 사랑은 신앙의 작용이며 따라서 신앙을 거의 갖지 못한 자는 거의 사랑하지 못한다. [170]


활동은 사랑의 실천에 대해 기초적인 것

활동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활동, 곧 자신의 힘의 생산적 이용을 나타낸다.

사랑은 활동이다.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그나 그녀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에 놓여 있다.

잠자는 것만이 비활동에 적합한 상태다. 각성 상태는 게으름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상태다. [171]


완전히 깨어 있다는 것은 싫증을 느끼지 않기 위한, 또는 싫증내지 않기 위한 조건이다. 사실상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 싫증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생활의 주요 조건의 하나이다. [171]


사랑의 능력은 긴장, 각성, 고양된 생명력의 상태를 요구한다. 이러한 상태는 여러 가지 다른 생활 분야에서 생산적이고 능동적인 방향을 취할 때에만 생길 수 있다. 다른 분야에서 비생산적이라면, 우리는 사랑에 있어서도 생산적일 수 없다. [172]


사랑한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 대해 사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라면, 사랑이 성격의 특성이라면, 사랑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관계에 반드시 있을 뿐 아니라, 일이나 사무나 직업을 통해 접촉하게 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있어야 한다.  [172]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 ‘분업’은 있을 수 없다. 반대로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조건이 된다. 이러한 통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사실상 자신의 사회 관계에 있어서 관습적 변화가 아니라 극적 변화를 겪게 된다. 우리의 관계는 기껏해야 현실적으로는 ‘공정성’의 원리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받은 만큼 준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인 윤리적 격언이다.

“다른 사람들이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하라”는 격언은 본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웃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이웃과 하나가 되라는 것이고, 반면 공정성의 윤리는 책임이나 일체감을 느끼지 말고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것이다. [173]


만일 우리의 온갖 사회적, 경제적 조직이 각자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바탕을 두고 있다면, 이 조직이 공정성이라는 윤리적 원칙에 의해서만 조절되는 이기주의적 원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현존하는 사회의 틀 안에서 활동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

사랑의 실천은 우리의 모든 세속적 관심을 포기하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174]


인간은 잘 먹고 잘 입고 있지만 각별히 인간적인 자신의 자질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조금도 궁극적 관심을 갖지 못한 자동인형이다. 인간이 사랑할 줄 알게 되려면 그는 최고의 위치에 놓여야 한다. 인간이 경제적 기구에 이바지하지 않고 경제적 기구가 인간에게 이바지해야 한다. 인간은 기껏해야 이익을 나누어 갖는 데 그치지 말고 경험을 나누고, 일을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사회는, 인간의 사회적이고 사랑할 줄 아는 본성이 그의 사회적 존재와 분리되지 않고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사랑만이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건전하고 만족스러운 대답이라면, 상대적으로나마 사랑의 발달을 배제하는 사회는 인간성의 기본적 필연성과 모순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 존재의 궁극적이고 현실적인 욕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 내가 저자라면

  이 책 <사랑의 기술>은 1956년 발행된 후,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34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최소 250만부 이상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사랑’의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책이자, 읽은 지 몇 년이 지나도 다시 찾아 읽는다는 평가가 나에게도 무색하지 않았다. 물 흐르듯이 논리적인 전개를 통해 인간에 대한 저자의 깊이 있는 이해와 주장이 전달되었고 지금 내가 고민하거나 궁금한 많은 부분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과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굳이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이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존재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저자 에리히 프롬이 지적하고 있듯이- 현대 사회가 시장의 교환원칙에 지배받고 있고, 따라서 인간의 가치도 결국 경제적 교환 가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평가받지 못하고 그 사람의 이용가치에 따라 평가되는 현실은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인간관계의 황량함, 사랑이 없는 사회의 붕괴, 진정한 사랑이 없는 부부 관계의 허상 등은 더 이상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개인의 무의식층까지 파고들어가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이유를 밝힌다. 그는 인간이 참된 자아를 상실한 것이 사랑을 상실한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인간이 분리로 인한 고독이라는 실존 문제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하고 진실한 길은 사랑뿐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고 자신과 세계 전체와의 관계에 대한 ‘태도’이자 ‘능력’이요, 사랑에 ‘빠지는’ 것이나 ‘받는’ 것이 아니고 ‘참여하고’, ‘주는’ 능동적 것이라는 주장과 진정한 사랑에는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이 필요하다는 주장 등 하나하나 마음을 파고드는 내용이었다. 제1부는 사랑이 배우고 익히고 실천해야 하는 기술이라는 서론이 시작되고 제2부에서 사랑의 의미와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이론적 전개를 거쳐 제3부에서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 붕괴되는 이유와 현상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 펼쳐진다. 마지막 제4부에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훈련과 집중 등을 주장한다.


  제1부 <사랑은 기술인가?>에서는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이 아니요, 배우고 익혀야 하는 ‘기술’이라는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하고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사랑할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를 혼동한다. 저자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말한다. 사랑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론과 실천을 습득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제2부 <사랑의 이론>에서는 사랑의 의미부모의 사랑사랑의 대상을 이야기한다.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분리와 고독이라는 실존문제를 극복하는 것이며, 인간은 이를 위해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성적 도취 같은 도취적인 합일부터 관습과 신앙 같은 집단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 일상적인 노동과 오락에 있어서 ‘평균화’와 ‘기성품화’를 통한 일치, ‘창조적 활동’을 통한 합일 등을 시도해 왔다는 것. 그러나 인간의 실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완전한 해답은 대인간적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 곧 ‘사랑’일 뿐이라는 핵심주장이다.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며, 사랑은 능동적인 힘으로서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의 공통적 요소를 지닌다는 것이다. 또한 성숙한 사람은 외부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며, 사랑은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기 때문에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그 밖에 타인과의 동일성을 지각하기 위해서는 핵심으로 파고들어야 하며, 생명유지와 성장에 필요한 ‘젖’과 삶에 대한 사랑이라는 ‘꿀’을 함께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인상 깊었다. 가장 마음속에 파고들었던 주장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요,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라는 주장이었다.

  제3부 <현대 서양 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에서는 시장지향적이고 물질적인 성공이 현저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권에서는 인간의 애정 관계 또한 교환가치의 극대화에 입각한 상품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결국 현대인은 잘 먹고 잘 입고 성적으로도 만족하지만 자아가 없고 가장 피상적인 접촉을 제외하고는 동료들과 어떠한 접촉도 없는 인간이며, 이런 사회에서 사랑은 필연적으로 붕괴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붕괴는 ‘상호간의 성적 만족’이 전부이거나 ‘두 사람 만의 이기주의’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데, 특히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는 사랑과 친밀감으로 오해되며 ‘팀워크’로서 고독으로부터 피난처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 외 사이비 사랑의 형태로 ‘우상 숭배적 사랑’과 대중문화나 과거로부터 대리만족을 얻는 ‘감상적 사랑’이 있다는 등의 내용이다.

  제4부 <사랑의 실천>에서는 사랑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의지 표현인 자기 훈련과 정신집중, 인내를 ‘실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사랑의 능력의 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설명이며, 또한 정신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에,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지금 무엇인가 하고 있으면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랑은 자아도취와 전지전능의 착각에서 벗어나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고 한다. 타인에 대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그의 기본적 태도의 불변성, 그의 퍼스낼리티 핵심의 불변성, 그가 가진 사랑의 불변성을 믿는다는 것이며, 또 하나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궁극적이고 현실적인 욕구를 발달시킬 수 없는 사회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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