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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17일 07시 38분 등록

38. 신화의 힘 조셉캠벨

 

1.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에게 영감을 준 사람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p263

 

1)     제임스 조이스

jamesjoice.jpg 

조이스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소설가,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조이스는 더블린 중심에서 남쪽으로 4km 떨어진 라스가의 브라이턴 서부 스퀘어에서 정치에 관심이 높으나 직업적으로는 사회 밑바닥을 전전한 아버지 존 스태니스라우스 조이스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10명의 자녀들을 가톨릭 신앙에 따라 키우고자 노력한 어머니 제인 머래이 사이에서 첫째로 태어났다. 대학 교육을 마칠 때까지는 가톨릭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철저하고 경건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와 달리 호탕하고 열정적인 기질로 술을 좋아하고 무분별한 성격으로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는 무척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조이스는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의 작품에 등장인물들이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존재라고 밝힌 바 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모범생이었던 조이스는 사춘기와 동시에 가족과 학교에 거부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또한 종교에 대해서도 회의적이 되어,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던 사제의 길은 뒤로한채, 그가 뛰어난 소질을 보이기 시작한 문학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대학졸업 후 초등학교 임시교사로 있던 1904 6 16일은 그가 노라 바나크르와 첫 데이트를 한 날로, 그의 최대 걸작인 <율리시스>의 배경 날자가 되어 문학사에 영원히 기억되는 블룸스 데이가 된다. 이 날이면 조이스의 애독자들이 더블린에 모여 블룸의 행로를 되집으며 행사를 치른다고 한다. 그녀와 조이스는 유럽으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고, 예술가로서의 그의 삶이 시작된다. 1920년 파리로 거처를 옮기면서 많은 작품을 썼다. 2차 대전 발발 후 취리히로 피난을 갔다가 1941 1 13일에 급사하게 된다. 그의 유명한 소설은 <율리시스>, <피네간의 경야>, 20세기 초 더블린 사람들의 냉소적이고 우울한 모습, 그리고 당시의 각박한 사회상을 그려낸 <더블린 사람들>, 그리고 반자전적 소설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 등이 있다. 특히 호머의 <오디세이아>를 연상시키는 <율리시스>는 하루 동안의 더블린 방황기를 보여주는데, 다채롭고 치밀한 문장과 문체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로 인해 그는 문장의 마술사, 문체의 마술사라 불리었던 조이스를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다.

모더니즘의 씨앗을 뿌린 조이스가 잠든 스위스 취리히의 묘지에는 오늘날도 그를 흠모하는 작가와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2)     토마스 만

thomasmann.jpg 

토마스 만은 독일의 평론가이자 소설가이다. 그는 사상적 깊이, 높은 식견, 연마된 언어 표현, 짜임새 있는 구성 등에 있어서 20세기 독일 제일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29년 노벨 문학상, 괴테 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토마스의 형은 급진적인 작가인 하인리히 만이고, 그의 자녀 중 3명인 에리카 만, 클라우스 만, 골로 만도 작가로 성장했다.

 

토마스 만은 뤼베크 체육관 기술 분야에 참가하면서 뮌헨 대학과 기술대학에서 역사 경제학, 미술역사, 문학등을 공부하며 언론계로의 커리어를 준비한다. 이탈리아 팔레스트리나에서 살았던 1년은 제외하고 1891년부터 1933년까지 형 하인리히와 함께 뮌헨에 거주한다. Simplicissimus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가의 길이 시작되는데, 그의 첫 책은 1898년에 출판된 꼬마 프리데만 씨이다. 1901년 부유한 상인의 집안이 4대에 걸쳐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부덴브로크스 가의 사람들>을 발표하여 문단에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그는 점차 낭만주의적 반지성주의를 벗어나, <프리드리히와 대동맹>,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 등 정치적 논설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휴머니즘을 가슴에 품기 시작한다. 그리고 12년간의 노력 끝에 1924, 장편소설 <마의 산>을 발표한다. 이는 손꼽히는 발전 소설로, 독일 문학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33년 나치 정권 성립으로 그는 남프랑스, 스위스 등을 거쳐 1938년 미국에 이르게 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업을 하게 된다.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때, 높은 휴머니즘의 이방에서 민주주의 옹호를 위해 싸웠다.

그의 작품으로는 <꼬마 프리데만씨>, <부덴브로크가>, <토니오 크뢰거>, <대공전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마의 산>, <요셉과 그의 형제들>, <Das Zauberberg>, <바이마르의 로테>, <Die vertauschten Kopfe-Eind indische Legende>, <파우스투스 박사>, <거룩한 죄인>,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등이 있다.

 

조셉캠벨을 여러 번 만났다. 그리고 그의 책이, 그의 말이, 그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문득 내가 이토록 좋아하고, 내게 깊은 영감을 가져다 준 그가 살면서 그에게 이와 같이 영향을 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졌다. 마침 <신화의 힘>이란 책에 그가 평생 배웠다는 사람들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들을 찾아보았다. 다음엔 이들의 책을 찾아 읽어봐야겠다.

 

<참고자료>

1)     위키백과 제임스 조이스 http://ko.wikipedia.org/wiki/%EC%A0%9C%EC%9E%84%EC%8A%A4_%EC%A1%B0%EC%9D%B4%EC%8A%A4

2)     http://www.unilecture.com/literature.asp?sCode=8&iNmbr=15&iPage=1&sSrchType=x&sSrchValu=

3)     위키백과 토마스 만

http://ko.wikipedia.org/wiki/%ED%86%A0%EB%A7%88%EC%8A%A4_%EB%A7%8C

4)     베짱이 세실의 도서관 http://bjcecil.tistory.com/95

5)     http://blog.aladin.co.kr/mramor/2452621

 

 

2.     내가 저자라면 내 책에 적용하기

-       대화와 대화체의 사용 : 나는 대담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글을 대화형식으로 쓸 수는 없지만, 글의 중간에 들어가는 대화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조금 더 생동감 있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

 

-       메시지의 이미지화 : 캠벨의 대화 중 일부를 인용해서 신화를 이미지화 한 그림들과 매칭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나의 일상의 기록과 그에 잘 맞아 떨어지는 신화를 함께 보여줌으로써, 이야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화된 모습도 보여주고 싶다. 아마 이 이미지에는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내가 깨달은 것들을 신화나 이야기를 통해 좀 더 명확하게 독자에게 전달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다양한 인용문의 활용 : 조셉 캠벨의 인생에 영감을 주었던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리고 책, 저자, 그리고 감명 깊은 신화들이 이야기의 속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다.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내 책에 활용하기

::: 빌 모이어스의 서문 :::

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

, 이그쥬가르쥬크 말이오? 북부 캐나다 카리부 에스키모의 샤먼이었소. 이 사람은 유럽 손님들에게, ‘참 지헤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을 했지요.” p9

è  불안에 쫄지 않기

 

자기 내부에서 자기 운명의 실을 풀어낼 힘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그렇게 합리적일 수 없는 것이지요.”

그는 박사 과정을 밟아 박사가 되는 것도 마다하고 책의 숨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그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양을 읽으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문화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역사 종교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 p12

 

그는 뉴욕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인디언의 토템 기둥과 가면에 매료당한다. 소년은 그런 것들을 보면서 상념에 잠긴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겨우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한다. 바로 이 공부가 그를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화끈한 스승으로 만든 것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그는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75년 전에 캠벨 소년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자리, 바로 그 자연사 박물관에서 거행된 영결식장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캠벨에 대한 추억에 경의를 표했다. p13

 

최근에 이르러 캠벨만큼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사람은 없다.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그는, 큰 스승들이 그러하듯 예증을 통하여 가르친다. p14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 텐데 말이오. “

è  내가 보았던 그 빛, 책을 통해 보았던 빛을 넌지시 독자들에게 보여주기만 해야겠다.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이다. p15

 

즉 곡물의 씨앗이 영원한 주기를 표상하는 고귀한 상징이 된다. 곡물은 죽고 땅에 묻힌다. 그러면 그 씨앗이 그 곡물을 재생시킨다. 캠벨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 모두 이 곡물의 씨앗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로써 영원한 진리(죽음에서 새 삶이 생긴다는 진리, 캠벨 자신의 말에 따르면 희생에서 지복의 삶이 빚어진다는 진리’)를 드러내는 데 매료당하고 만다. p17

 

그가 찾아낸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는 인종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것이 해방되지 못하면 세계의 종교는 (오늘날 동북과 북아일랜드에서 그렇듯) 타인에 대한 능멸과 공격의 수단밖에는 되지 못한다.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 p18

 

그는 오로지 가르치는 일,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p21

 

1.     신화와 현대 세계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남들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주제라고 해서 관심을 두는 것은 신용하지 않아요. 내가 신용하는 것은 어찌어찌 하다보니 사로잡히게 되는 주제입니다. p25

 

그래서 나날의 내면적 삶이, 우리가 전통으로 물려받은 분들, 말하자면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불릴 수 있는 분들인 플라톤, 공자, 석가, 괴테 등 우리 삶의 중심과 관련된 영원한 가치를 좇으라고 한 분들에 대한 관심과 상충되지 않았어요.

인류의 삶을 떠받쳐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 년 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적 문제, 내면에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길을 가는데 도로 표지가 없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는 도로 표지에 상응하는 걸 만들어서 길잡이로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신화라는 주제를 마음에 두게 되면 우리는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p26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에 나오는 토니오를 봅시다.

여기에서 토이노는 양극 사이에 놓이게 됩니다. 한쪽은 바로 토니오 자신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책임감이 강한 좋은 아버지이긴 합니다만, 자기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은 평생 한 번도 해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 한 쪽은 자기 고향을 떠났고, 고향 사람들의 삶에 대단히 비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토니오는 자기가 고향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토니오는 다시 고향을 떠난 이번에는 보헤미안들과 살게 됩니다. p27

è  미나와 신치, 현실과 이상이 경계에 서서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p29

 

신화를 읽었지요.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 하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랍니다.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p30

 

제대로 된 상대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것입니까?

가슴이 말 해줍니다. 반드시. p31

è  결혼에 대한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p32

 

내가 어릴 때, 우리 어린이들은 반바지를 입었어요. 아시지요? 무릎까지 오는 바지 말입니다. 긴 바지를 입게 되는 순간은 굉장한 순간이었지요. 요즘 아이들은 그런 굉장한 순간을 경험할 수 없어요. 내가 보니까, 심지어는 다섯 살배기까지 긴 바지를 입고 뛰어다니더군요. 이런 아이들에게 나는 이제 아이가 아닌 어른이다. 그러니까 유치한 장난은 그만 해야 한다. 이런 걸 깨닫는 순간이 올까요? p35

 

즉 위대한 신화가 젊은 남녀로 하여금 세계와의 관계를 알게 하거나, 가시적인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어야 했다는 것이지요.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균형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사항이 있어요. p36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삶의 지혜와는 상관없는 것이지요. p37

 

그래서 잡학가는 전문화한 문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p38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p41

 

즉 이들은 자기네야말로 페요테를 찾아 이것을 다시 인디언 종족에게로 몰고 오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은 사람들이라는 행세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임무에는 신비 여행의 전형적인 요소가 모두 고루 들어 있어요. 첫째, 거기에는 세속적인 삶과 유리되는 단계가 있어요. 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기가 실제 생활에서 저지른 과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백해야 한답니다. p45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영적으로 변모하면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고 있으면 전혀 다른 신비 여행이 되는 것이지요. p46

è  나만이 희열을 찾아서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까?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p47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p48

 

인간은 외부에서 들어온 권능에 복종하지 않아요. 다스릴 따름이지요. 문제는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거지요.

제 막내 아들 녀석이 <스타워즈>를 스무 범 아니면 서른 번쯤 본 것을 알고는, 제가 너 그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녀석 대답이, ‘이유는 아빠가 평생 <구약성서>를 읽는 것과 같지, 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막내아들은 새로운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p54

 

옛 전통을 가꾸는 유일한 방법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그것을 쇄신하는 길뿐입니다. p57

 

각기 새로운 신화가 필요하지요. 원수를 사랑하라. 열어라. 남을 평론하지 말라! 이것은 모두 불교에 있는 겁니다. 신화에 있는 겁니다. 옛날부터 있어 왔어요. p58

 

내가 아는 한, 지구라는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지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인식에 이를 것이냐 하는 겁니다. 문제는 만유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만유에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참여와 사랑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을 향하면 태도는 표변합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과는 한솥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거지요.

같은 옷을 입고 있지 않으면 동아리가 아니라는 것이군요.

신화학에서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회적인 신화가 있는 것이지요. 후자의 경우 한 인간은 한 자연인이 아니라 특수한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유럽의 신화학 역사를 보면 이 두 신화학 체계의 상호작용이 눈에 띕니다. 대개의 경우,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 민족의 체계입니다. 대신 자연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 민족의 것인 경우가 보통이지요. p62

 

기독교도 지역에 대한 회교도들의 공격……

이런 것을 하고 있는 자들은 종교의 관념을 저희가 사는 사회에만 적용시킬 줄알지, 이 시대의 삶에서, 이 시대의 인류에게 적용시킬 줄은 모르고 있어요. p63

 

인류는 기원전 5백 년경에 큰 전기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인도가 열린 것이지요. 그런데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지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 합니다. 우리가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지 않고 측면에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p71

 

이성은 생각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성이 작용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이성이 아니지요. 새앙쥐가 코를 내밀어 밖을 내다보고는, , 여기라면 나가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성이 아니지요.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거지요. p73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가집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신화의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p74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p75

 

신화에는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어요. p76

è  연구원 수업 초기, 사부님이 왜 나만의 신화를 만들어 보라고 하셨는지, 이제서야 이해가 조금 된다. 나에게 맞는 신화를 찾고, 어떻게 잘 살 것인지,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될 수 도 있는 것이 신화인 것이다.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p77

 

2.     내면으로의 여행

이 신화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말을 건단 말이야, 신화라고 하는 게 말이지. 내가 혼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 그러면서도 내가 진실일 거라고 믿던 것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단 말이야하고 대답합니다. p83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p85

 

그리스도와 시바 신만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궁극적인 과녁인 천국도 우리 안에 있지요.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전 9세기에 성립된 인도<우파니샤드>의 위대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 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p86

 

꿈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가령 시험에 붙을 것이냐또는 그 여자와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하는 꿈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꿈은 순전히 개인적인 꿈입니다. 다음에는, 시험에 붙느냐 마느냐가 그저 개인적인 문제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게 되는 단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다 어떤 종류의 문턱을 넘어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시험이 이러한 보편적인 것을 반영하게 될 경우에 이것은 개인적인 단계의 꿈이 아닙니다. 이런 꿈을 원형적인 꿈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개인적인 것 같은데 사실은 신화적인 테마가 나타나는 꿈이 있습니다. p88

 

신화는 왜 꿈과 다릅니까?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있습니다.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사적인 꿈이 공적인 신화와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라면 좀더 건강하게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러나 만일 개인의 사적인 꿈이 공적인 꿈과 발이 맞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 거지요. 억지로 체제에 적응하려고 하다 보면 신경증에 걸립니다. p89

è  사회라는 틀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p90

è  나만의 희열을 찾아서

말하자면 꿈이 그 사람 삶의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느냐, 그 개인의 문제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느냐, 이런 것을 알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내면에 있는 원형적인 인격, 우리의 본질인 원형적인 자기를 드러낸다는 것이군요? p91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p92

 

서아프리카 바사리족의 전설

<창세기> 2

<창세기> 1

<우파니샤드>

<창세기>

바사리 전설

, 어떻습니까? 같은 이야기이지요? p94

 

그게 바로 하나의 금제라고 하는 민담의 표준 모티프랍니다.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p106

 

무의식의 원형은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입니다. p107

 

하느님이 곧 창조 그 자체이고 개인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이 남자든, 여자든 바로 그 개인 안에 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한 신에게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플라톤의 <향에>에서 조사하고 있는 그리스 전설에서는 이야기가 좀 달라집니다. 아리스토파네스에 따르면, 태초에는 지금으로 보면 두 사람이 합쳐진 것 같은 형상을 한 인간이 있었어요. 이런 인간에는 세 종류가 있어요. 즉 남성과 여성이 합쳐진 것, 남성과 남성이 합쳐진 것, 여성과 여성이 합쳐진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이것들을 각각 둘로 갈랐어요. 하지만 이렇게 둘로 갈라진 것들은 끊임없이 그 짝을 찾아서 원초적인 합일 상태를 회복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금도 원래의 반쪽을 찾아내는 일에 평생을 진력한다는 겁니다. p112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내가 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는 행위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접하면 우리 자신이 우주론적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p113

 

이게 중국의 <도덕경>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신화에 관한 선생님의 작업은 저의 신앙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은 채로 제 믿음을 그때까지 갇혀 있던 문화의 감옥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나의 믿음도 해방시켜주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모든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가령 우리의 신화는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종교에는 윤리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와 화해, 정당함과 부당함을 정해놓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 쪽으로 사람들을 는 경향이 있습니다. P114

 

만일에 은유를 은유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를 가리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점에 가서 메뉴를 달라고 한 뒤, 그 메뉴에 비프스테이크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페이지를 씹어먹는 것이나 같지요. P116

è  나는 은유를 은유로 보지 못한다. 이것도 연습이 필요할 듯하다.

재림 혹은 환생이라는 관념은 무엇을 암시하는지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는 이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관념에는 우리의 존재 및 우리의 깨달음과 의식의 잠재력에 다른 차원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길이 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p119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p121

 

메시지, 메시지에 이르는 단서를 간취하기 위해서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어느 누가 진리를 말해도 귀에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è  서문에 활용하기

체험한 사람은 체험한 것을 최선을 다하여 이미지에 투사시켜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기술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언어의 현실보다는 이미지의 현실이 훨씬 풍부한데 말이지요. p124

 

이건 동양 특유의 방법입니다. 아무리 현자라도 질문을 받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않아요. 알고 싶어하지 않는데 억지로 입을 열게 하고 집어넣어 줄 수는 없는 거지요. p130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p133

 

영웅의 행동 반경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선악이 있는 시간의 장, 대극이 있는 곳입니다. p135

 

3.     태초의 이야기꾼

워즈워드의 시에 우리의 삶은 수면과 망각일 뿐. 영혼은 우리와 함께 떠오르는, 우리 삶의 별/ 영혼에게는 집이 있음인가?/ 그렇게 머리서 오는 것을 보면?”, 이러 구절이 있습니다. p141

 

공부하고 활동하는 삶을, 이 신비를 즐기고 감사하고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꾼 것이지요. p143

 

그 사람들의 기록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수중에 있는 것은 그저 의미심장한 구닥다리 출토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역으로 추정해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그건 위험합니다. p145

 

우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 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니까 사냥은 의례인 것이지요.

의례는 영적인 현실을 표현하는 것이겠군요.

의례는, 나의 개인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다,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지요. p147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 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랍니다. p156

è  실험하기,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그대라고 불러보기

형상은 부차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형상이 전하는 메시지이지요. p161

 

인간은 환경에 반응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환경에 반응하지 않는 문화 전통이 생겼어요. 이것은 약 1,000년에 다른 데서 온 겁니다. 이 문화전통은 우리 현대 문화와, 새 우주관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동화시키지 않아 왔어요.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p168

 

귀신을 몰아낸답시고 그대 안에 있는 가장 귀한 존재를 몰아내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런 말을 한 사람이 니체였지요. p173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일시적 체험에서 그 일시적 체험이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거야 말로 신화 체험인 것입니다. p175

 

4.     희생과 천복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p177

è  나의 희열을 찾아서. 천복 찾기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나의 삶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è  내 인생의 여백, 나의 성소

초원의 사냥꾼들에게는 세계 전체가 성소였어요. 그러나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 보면 우리는 늘 요구되는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에요. p180

è  나의 성소 찾기, 서문에 활용 -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기

하지만 모든 땅이 다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땅에서 삶의 에너지의 상징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의 전통은 그랬어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 땅을 성별했던 것입니다. p183

 

내게 감동을 준 것은 현재입니다. 대성당은 세계의 영적 정보에 관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줍니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걸어 다니면서, 앉아서,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면서 명상하는 곳입니다. p186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중략)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 주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됩니다.  p190

 

동물은 가죽에 싸여 있지요. 우리가 동물을 죽이면 이 동물은 영영 죽고 맙니다. 그 동물에게는 그것이 곧 끝입니다. 그러나 식물의 세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식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경우 대궁을 자르면 다른 순이 나옵니다. 가지치기는 식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식물의 생장에 도움을 줍니다. 식물은 영속하는 생명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p195

 

옥수수의 기원에 관한 알곤퀸 인더인의 민화  p197

 

성서를 보면 은 카인이고, ‘부싯돌은 아벨입니다. p200

 

놀라운 것은 말이지요. 죽음의 신이자 생성의 신이기도 한 이런 신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발견해간다는 것이에요. 하이티의 부두교 전승에 따르면 죽음의 신 게데는 섹스의 신이기도 해요.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는 사자의 신이자 사자의 심판자인 동시에 생명을 생성시키는 신이기도 해요. 이것은,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쇼펜하우어는

사심 없이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들의 고뇌와 고통에 인류가 참가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는 자연의 제일 가는 이법과 자기 보존을 기하는 일이 어떻게 함께 가능할 수 있는가?

4~5년 전 하와이에서 이 문제와 관련이 있는 별난 사건이 있었답니다. 하와이에는 팔리라는 곳이 있어요. 거대한 산협의 절벽인데 이 절벽 사이로 북쪽에서 불어온 무역풍이 지나갑니다.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이 절벽에 올라가기를 좋아하지요. 물론 자살하러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골든 게이트 브리지에서 펄쩍 뛰어내리는 식의 자살 있지 않습니까?

(중략)

그 젊은이를 놓아버리지 그랬어요? 당신이 죽을 수도 있었는데.”

신문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놓을 수가 없었어요. 만일 그 친구를 놓아버렸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있을 수도 없을 겁니다.” p210

è  세상을 떠난 친구가 내게 남긴 것.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자비가 있기 때문에 계속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불사를 획득한 존재이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의 슬픔에 참가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p212

 

시간이 존재하면 고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거 없이 미래를 맞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현재를 사랑해봐야 현재는 곧 과거가 됩니다. 상실, 죽음, 탄생…… 상실, 죽음, 탄생….. 삶은 이렇게 돕니다. p213

 

단테의 <신곡>이 다루고 있는 문제도 결국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 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이 숲에서, 각각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 세 마리를 만납니다. 그런데, 시적 통찰력의 화신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지옥의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지옥의 미궁은 자만과 욕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영원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의 지복 직관을 경험하지요. p217

è  나의 욕망과 공포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연민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p218

 

하느님이 순종치 아니 하는 모든 사람을 거두어 두심은 모둔 사람에게 궁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는 이 대목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아야 하느님의 자비가 소용에 닿게 됩니다. 순종하면 하느님에게 찬스가 생기지 않는 거에요. p220

 

싱클레어 루이스의 <바비트>를 읽어보셨어요?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이게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을 좇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p221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p222

è  나의 희열을 찾아서, 나의 천복, 흐르는대로 흘러가는 삶

가령 학생들과 독서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노라면 학생이 보이는 반응에서 뭔가를 느껴낼 수 있지요.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è  나의 눈빛이, 나의 낯빛이 달라지는 순간이 언제인가?? 나의 희열을 찾아서.. 프롤로그에 활용하기

<운명의 바퀴>, 프랑스, 14세기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p224

 

남학생들에게 교양 과목을 가르칠 당시, 나는 진로 때문에 고민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어요. 어떤 학생이 나에게 와서, “제가 이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저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어요.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나는 유럽에서 공부하다가, 1929, 월스트리트가 무너지기 3주일 전에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일자리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지요. 그런데 내게 그 시절은 정말 멋진 시절이었어요.

돈이 없다는 건 느꼈지만 가난하다는 느낌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어요. 그 당시 사람들, 좀 좋았어요? 나는 그 당시에 프로베니우스를 발견했어요. 문득 이 양반이다 싶은 거에요. 그래서 나는 프로베니우스가 쓴 것은 모조리 읽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돈이 있습니까? 나는 돈이야 어찌 되든, 뉴욕의 서적상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그 서적상은 내가 바라던 책을 모조리 보내면서 일자리를 구하거든 갚으라는 거에요. 자그마치 4년 뒤에나 갚았지만요.

뉴욕의 우드스톡에 아주 멋진 노인이 있었어요. 이 양반에게는 방이 아주 많은 집이 한채 있었는데, 그는 이 방을, 예술을 공부하는 가난뱅이 학생들에게 1년에 20달러 정도의 임대료로 빌려주었어요. 그런데 수도를 놓지 않는 이유가 걸작입니다. 수도를 설비해놓으면, 이 집이 수도가 있는 집에 살던 학생들의 관심을 끈다는 거예요. 나는 이 집에서 기본 독서와 공부는 거의 다 했어요. 정말 멋진 시절이었죠. 나는 내 천복을 좇고 있었던 겁니다.

è  희열을 찾아서, 천복을 따르는 삶의 자세, 방법,

지금 말하는 이 천복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배운 겁니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 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어요. 사트’, ‘취트’, ‘아난다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이 말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에서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우리도 그 진리를 알 수 있을까요? 그 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깊이와 경험과, ‘사트,취트,아난다와 관련된 존재의 확신과, 의식과 천복을 통한 나름의 존재 방식이 있어요. 종교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보기까지는 끝내 천복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주장하지요. 그러난 나는 살아있을 동안에도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게 곧 천복이라고 생각해요.

 

천복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것이군요.

천국에서는 하느님을 우러러보는, 생전 안 하던 경험을 하니 대단하긴 하지요. 하지만 우리 자신의 경험은 바로 이곳에서 하는 것이지, 천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선생님은 천복을 좇는 그 순간 순간에, 혹시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해 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늘 하지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잇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è  나만의 희열을 찾아서

 

5.     영웅의 모험

사람의 행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 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에 일종의 주기가 있지요.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오토 랑크는 <영웅의 탄생신화>라는 책에서 p230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p234

 

영웅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여행을 스스로 선택하는 영웅과 그렇지 않은 영웅이 있는 것이지요. 전자의 영웅은 모듬살이의 필요에 반응하여, 자진해서 그 일을 하러 떠납니다. p238

 

오르테가 이 가세트 <돈키호테에 관한 명상> p239

 

하지만 돈키호테는 스스로, 자기가 대적하려던 거인을 풍차로 만들어 버리는 마술사를 하나 발명함으로써 모험의 수고를 덜었어요. 거인을 풍차로 만들어 버리는 일, 약간의 시적인 상상력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가능해요. p240

 

T.S 엘리엇 <황무지>

고대 그리스 문화권의 최고 기술자였던 다이달로스는, 자기 손으로 만들었던 크레타의 미궁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기 손으로 만든 날개를 아들 이카로스에게 달아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아야 한다. 너무 높이 날아오르지 말아라. 너무 높이 날아오르면 태양의 열기에 네 날개의 밀랍이 녹을 터이니, 필경은 떨어지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낮게 날지도 말아라. 너무 낮게 날면 파도가 네 날개를 적실 것이야.”

다이달로스는 중간을 납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잔뜩 신이 나서 자꾸만 높이 날아오르는 이카로스가 보입니다. 결국 밀랍이 녹으면서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습니다.

 

힌두 경전에는, “위험한 길은 이러하니, 면도날과 같다는 말이 나옵니다. p242

 

아더왕 전설에서 기사 랜설럿이 포로가 되어 있는 귀네비어를 구하러 가는데, 이 때 랜설럿은 맨손, 맨발로 칼날 같은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다리 아래로는 급류가 흐릅니다. 과학기술상으로 약진을 이루는 일이든, 이웃의 도움 없이 혼자서 꾸려나가야 하는 삶의 문제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런 모험을 할 때는 늘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43

 

사회에 영웅이 필요한 겁니까?

필요할 것 같군요.

왜요?

분열 증세를 보이는 이 모든 경향을 한 곳으로 모아 바람직한 목표를 향하게 할 수 있는 별자리 같은 이미지가 필요한 거지요.

향한다는 것은 어떤 길을 따르는 것이겠군요. p245

 

대중의 영웅은 자기 시대의 필요에 대단히 민감한 법입니다. 비틀즈는 대중 음악에다 정신적인 깊이를 더했습니다.

오디세우스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배는 갈가리 찢기고, 선원들은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오디세우스만 파도에 실려 출렁거립니다. 부러진 돛대에 매달려 표류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해변에 닿은 그는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혼자 되고 말았구나. 결국은 혼자 되고 말았구나.”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간단하게 말해버리기에는 좀 복잡한 데가 있어요. 하지만 약간 설명을 해야겠군요. 배가 파선된 곳은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입니다. 태양의 섬이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섬, 광명의 섬입니다. 만일에 배가 파선되지 않았다면 오디세우스는 그 섬에 눌러앉아 요가 행자와 비슷한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로써 깨달음을 얻고 천복을 누리면서 그곳에서 살았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것은 드러내 삶에 유용하게 한다는 그리스인들의 정신은 결국 오디세우스를 돌아오게 합니다. p247

 

판다로스의 시

티아 경기의 씨름 대회에서 챔피언이 된 절음이를 판다로스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어요.

광명의 아들이 아닌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인간은 꿈같이 덧없는 존재. 그러나 하늘의 선물인 태양이 비치면, 광명한 일광이 머무르면, , 아름다워라!”

헛되도다,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p248

 

전설적인 영웅은 큰 일을 한 사람, 무엇을 세운 사람인 경우가 보통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 새 종교를 세운 사람, 새 도시를 세운 사람,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세운 사람인 것이지요. 이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땅에서 새로운 것을 싹 틔울 잠재력이 있는 씨앗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모든 종교의 교조들도 그런 것을 찾으러 살던 곳을 떠났지요. 석가는 출가하여 영원한 앎의 나무인 보리수 아래 좌정했어요. 바로 여기에서 그는 2 5백년 동안이나 아시아를 계몽할 수 있었던 위대한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 도시는, 살던 곳에서 탐색의 여행을 떠나, 무서운 시련이나 모험을 이겨낸 영웅들에 의해 세워집니다. 우리 삶(남의 삶을 시늉하는 것이 아닌 우리만의 삶) 역시 탐색의 여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p251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게. 자네같이 꽃 같은 아가씨는 몰라도 되는 일이니까.”

그래요.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작가 토마스 베리,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만물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 우리가 삶과 우주에, 우리의 기본적인 가정과 근본적인 믿음에 부여하는 줄거리라는 것입니다. p254

 

석가 역시 숲으로 들어가, 당시의 한다 하는 구루들과 논쟁을 벌여요. 그러다 이들을 떠나 한 철의 탐색과 시련을 겪은 뒤, 깨달음의 나무인 보리수 아래로 오는데, 그 역시 여기에서 세 가지 시험을 당합니다. 첫 번째 시험은 탐욕, 두 번째는 공포, 세 번째는 의견에 대한 복종에 관한 것이지요. …..(중략)

여기에 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은 세상을 향하여, 줄 것을 다 주어버린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명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니 그만두어라.”

사회적인 의무의 신을 태우고 있던 코끼리가 석가를 경배하자 마군의 무리는 꿈같이 사라집니다. 그날 밤 석가는 깨달음을 얻고 그로부터 50여년 간 인류의 스승으로서,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치지요.

욕망과 공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감정에 지배됩니다. 욕망이 미끼라면 죽음은 낚시바늘인 것이지요. p257

è  석가의 이야기, 욕망과 공포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모세, 석가, 그리스도, 모하메드)의 메시지는 다 다릅니다. 그러나 이들의 경험한 환상 여행은 동일합니다. 예언자의 소명을 받을 당시 모하메드는 무식한 대상의 우두머리였어요. 그런데 그는 매일 메카에 있는 집을 떠나 산 위의 동굴로 들어가서는 명상에 잠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목소리가 그에게, ‘받아써라!”하고 말합니다.

 

전통에 생명을 부여하는 영웅도 있어요. 이런 영웅은 전통을 재해석함으로써, 시대에 뒤떨어진 상투성에서부터 전통의 상징성을 해방시켜 당대의 살아 있는 경험으로 만들지요. 이런 작업은 모든 문화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p259

 

그런데 원 속의 가로 선 위에는 자아가 있어요. 나는 이 자아를 조그만 사각형으로 표시하지요. 이 자아는, 우리가 중심과 동일시하는 의식의 한 측면이에요. 하지만 보세요. 자아가 우리의 중심은 아니잖아요? 자아를 나타내는 사각형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나타내는 점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지 않아요? 우리는 자아가,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쇼를 연출하는 줄(주도권을 행사하는 줄) 알지만, 아니에요.

무엇이 쇼를 연출하는가 하는 것은, 가로 선 아래에서, 즉 무의식에서 무엇이 솟아오르느냐에 달려 있어요. 한 인간이, “쇼를 연출하는 게 나 자신이 아니구나”, 이런걸 깨닫는 시기가 바로 사춘기에요. 전혀 새로운 요구 체제가 우리의 의식 아래에서 자기 존재를 알리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나 사춘기 청소년에게는 여기에 아무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장악할 수 없어요. 그래서 소년들은 나를 이렇게 충동질하는 이게 대체 무엇일까?, 소녀들은 나를 이렇게 충동질하는 이 신비로운 것은 대체 무엇일까하고 의아해할 뿐 어떻게 해야 할 지는 전혀 모르지요. p261

 

우리가 아기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의 의식 아래에는 이미 어떤 기억이 분명히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군요.

신화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런 문제를 이해하게 하는 데 필요한 기본 교육 자료였어요.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적당한 신화 교육을 베풀고 있지 못해요. 그래서 젊은이들이 이 사회 안에서 행동 통일을 하는 데 그렇게 애를 먹고 있는 거지요. 어떤 젊은이가 모종의 장벽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특정 신화 대응물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이의 경우는, 문턱 넘기 의례와 관련된 신화 대응물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p262

 

신화는 어떻게 하면 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신화나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 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p263

è  나를 찾아 몸부름 치다, 오아시스 나의 점심시간

 

<스타워즈>의 등장인물들이 쓰고 있는 가면은 현대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진짜 괴물 같은 힘을 상징합니다. 다스 베이더의 가면이 벗겨졌을 때, 우리에게는 아직 완전한 개인으로 발달하지 못한 미숙한 인간이 보였지요? 말하자면 분화가 다 되지 않아 어쩐지 낯설고, 불쌍해 보이는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다스 베이더는 자기 인간성을 완전히 발달시키지 못했던 거지요. 그는 로봇입니다.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조직의 뜻에 따라 사는 관료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 삶에 대한 위협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이 조직은 우리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조직이 과연 우리 인류의 목적을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조직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이 조직을 더 이상 섬기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생각의 체계에 맞게 이 조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이 조직의 배후에 작용하는 역사적인 힘은, 그 정도의 행동은 의미도 없을 만큼 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만, 우리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요. p265

 

아시겠지만 그 영화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어요. 젊은이들 사이에서 통하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겁니다. 이건 중요해요. 너는 가슴으로 사는 사람, 인간성을 섬기는 사람이겠느냐, 아니면 음험한 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하며 사는 사람이겠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p266

è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서다,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기

 

소화작용이 일어나는 곳, 즉 새로운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뱃속은 어두운 곳이에요. 고래 뱃속에 들어가는 요나 이야기는 세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신화 테마의 본 같은 겁니다. 물고기가 삼키는 바람에 영웅이 물고기의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들어갈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말해서 변한 모습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세계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어요.

어둠(저승)으로 내려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심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고래는 우리의 무의식에 갇혀 있는 생명의 힘을 상징합니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물은 무의식이고, 수생동물들은 생명, 혹은 무의식의 에너지입니다. 고래가 나타났다는 상황은 이 무의식이 의식적인 인격을 압도하고 힘을 얻은 상태를 만들지요. 즉 이때부터는 무의식이 의식을 극복하고 의식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런 종류의 모험의 첫 번째 단계에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자기에게 버릇 들어 있는 곳, 일정한 수준의 힘을 행사하던 곳을 떠나 한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의 문턱에 이릅니다. 이 문턱이 말하자면 호수나 바다의 가장자리이지요. p269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제게, “그래, 조지 루카스의 상상력도 좋고, 조셉 캠벨의 신화학도 좋아. 하지만 그게 내 인생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내가 장담하거니와, 상관이 있어요. 이걸 깨닫지 못하면 그런 말을 한 사람도 다스 베이더 같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구체적인 프로그램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기 가슴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정신분열증적 해리의 위험이 있어요. 자기 중심에서 이탈해 있는 사람이기던요. 삶을 위한 프로그램에 맞게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육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다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p270

è  신화와 내 인생, 내가 행복한 순간을 찾아서, 나를 찾아 몸부림치다

 

하지만 이 새로운 진실의 도전에 맞서고, 자기 삶을 여기에다 맞추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아니겠습니까?

천만에요! 그렇지가 않아요. 스승이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야 소수겠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것에 반응하는 건 누구든지 할 수 있어요. 아이가 위험에 처할 경우,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나가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잠재력은 누구에게나 있지요? 이와 같아요. 이런 능력은 우리 안에 있어요. 나날의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는, 진자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이런 능력이 있어요.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잇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을 죽일 수 있습니까? 우리 개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선생님의 이른바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일입니까, 삶입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 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p272

è  나의 희열을 찾아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쫄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p273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에게, “미궁에서 나오는 방법만 가르쳐주면 영원히 사랑하리라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줍니다. 테세우스는 미궁으로 들어갈 때 이 실타래의 실을 풀었다가 그 실을 따라 무사히 미궁을 빠져나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실밖에 없었다고 하셨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것뿐인 것 같은데요.

그래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리아드네의 실뿐이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뿐인데도,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재물, 우리를 구해줄 권력, 우리를 구해줄 사상을 찾아 엉뚱한 곳으 ㄹ헤매지요.

그 실이라는 게 찾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만한 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p275

è  천복을 찾는 법, 스승, 사부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했지요. 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 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p276

 

어릴 때 읽은 인디언 이야기에서 참 인상적인 대목이 기억나는 군요. 커스터 장군의 부하들이 쏘는 총탄의 소나기 속을 뚫고 들어가던 용감한 인디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겁니다. 이게 그들의 구호 였지요.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만,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p279

 

거웨인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석가가 취한 방법을 택하건 거웨인이 취한 방법을 택하건 욕망과 공포라는 이 무서운 계곡을 벗어나야 성취의 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p283

아이의 자기 성취를 방해하는 것이면 모두 다 아이가 버려야 할 그대의 미래이지요. 낙타에게 그대의 미래는 낙타를 순치하는 수많은 강제인겁니다. 낙타는 이 순치를 통하여 인류의 동물에서 문명화한 인류의 동물로 변모합니다. 그러나 청년기는 자기 발견의 시대, 사자로 변모하는 시기입니다. 이 청년기에는 법률이 적용되기는 하되, 강압적인 그대의 미래에 복종시키는 방향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갖게 하는 방향으로 적용됩니다. p284

 

행복에 대해서 신화는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제가 만일에 젊은 사람이고 젊기 때문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신화는 이 경우 저에게 어떤 말을 합니까?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è  서문, 루카의 바람

 

아무리 신화라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행복을 좇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행복을 좇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러줄 뿐이지요.

아메리카 인디언 민화에는 내가 구혼의 거절이라고 이르는 모티프가 자주 나옵니다.

구혼을 거절하는 순간에,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에, 모험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이로써 주인공은 자기가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땅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바야흐로 소설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p287

 

여자가 물 속에 있었다는 것은, 결혼을 통하여 여자가 합리적, 의식적인 세계에서 무의식의 강박 충동의 세계로 들어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수중 여행 모티프는 거의 다 이런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지요. 결국 개성이, 의지로 통제가 가능한 영역에서 초개성적인 충동의 영역으로 함몰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것은 개인에 따라 통제가 가능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어요.

이 이로쿼이즈 인디언의 이야기는 꽤 깁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여자가 천상계의 권능자들을 섬기다가, 이들을 이용하여 심연의 부정적인 권능자들을 쳐부수고는 소낙비를 타고 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악마와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지요. 그러나 희망도 있어요. 우리를 부름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던짐으로써, 여행을 상상 밖의 영광으로 승화시키는 노인은 도처에 있으니까요.

그런 여행을 떠나지 않고 집에 가만히있으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으면 좋을 텐데요.

좋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그러면 자기 나름의 모험에서 공급되는 삶의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생명은 곧 말라버려요. p292

è  내 마음의 소리, 희열, 천복을 따르지 않을 경우….

 

거룩한 분입니다. 저분은 이 세상의 삶을 등졌기 때문에 욕망도 공포도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말을 들은 왕자는 돌아오면서 자기도 아버지의 궁전을 떠나 삶의 고통에서 놓여나는 길을 찾아보겠다고 결심합니다. p295

è  석가모니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 이야기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p296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삼켜버리는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 또한 그만큼 큽니다. p298

è  내 인생의 고통, 내 인생의 우드스탁, 불안은 영혼을 잠식할까?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 안에 정점이 있다는 건 거의 확인이 된 셈입니다. 우리는 이 정점을 찾아내어 우리 의지로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p299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예수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p301

 

결국 깨달음의 경험은 성자나 예술가에게만 가능한 게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군요.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잠재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잠재력은 기억이라는 튼튼한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이고요. 어떻게 하면 이걸 열 수 있습니까?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면 열 수 있지요. 가까운 친구, 혹은 훌륭한 스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요. 이런 깨달음을 촉발하는 자극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도 있고, 교통사고 같은 것으로 당하는 총격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역시 깨달음의 문제를 다룬 책에서 나온다고 해야겠지요. 내 경우, 대부분은 책에서 나옵디다. 정말 많은 선생님을 만나는 은혜도 누리기는 했지만요. p302

è  2011, 고통과 책, 내 인생의 깨달음, 깨달음과 삶의 상관관계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p303

 

6.     조화여신의 은혜

이집트의 어느 신전에서 누트의 이미지를 본 순간에 거기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p306

 

그런데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p307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자기 삶에 집착한 나머지 남의 먹거리가 되어주지 않는 것도 삶을 거부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그렇게 하면 생명의 흐름이 끊겨버립니다. 이 흐름을 타는 것은 매우 신비스러운 체험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먹거리가 된 동물에게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 자신을 주어야 할 거에요. p319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를 한 거에요.

말씀이 빛줄기로 들어갔다는 것이군요. p320

 

형상을 부여한 존재로서의 여성이지요. 여성은 생명에 형상을 부여했기 때문에 <베다>시대의 남성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었던 거지요. 이 세상 만물의 존재가 비롯된 곳은 남성과 여성이 분화되지 않은 곳, 그러니까 성 너머에 있어요. 그곳은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해 있어요. 그러니까 존재하는 곳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범주를 훨씬 초월해 있는 것이지요. p333

 

신화는 우리에게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약도까지 그려주고 있어요. 우리 주위에는 이런 약도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데 이 약도라고 하는 게 다 같지는 않아요. 약도 중에는, 자기네 무리 안의 일만 관심을 두라고 하는 것도 있고, 자기네 종족신만 섬기기를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주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계시가 담긴 약도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은 요구합니다. 이 약도는,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주기를 요구합니다. p335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사람은,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인식과 체험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군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p337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p345

è  결혼에 대한

 

그런데 단테는 무슨 사회학자처럼 프란체스카에게, “아가, 어째서 그렇게 되었느냐? 보아라, 이 꼴이 되지 않았느냐이렇게 묻습니다. 그러자 프란체스카가 그 내력을 잠깐 이야기하는데, 이 대목은 단테의 <신곡> 중에서도 명구로 꼽힙니다.

저와파울로는 정원의 나무 밑에서 기사 랜설럿과 귀네비어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 두 주인공이 첫 입맞춤을 나누는 대목을 읽다 말고 저와 파울로는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그러고 나서는 그날 그 책을 한 줄도 더 읽지 못했습니다.” 이 둘의 타락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지요. p348

è  결혼과 사랑에 대한 짧은 단상

 

바그너는 자기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런 말을 하지요?

이 세상에서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그래요. 바그너는 트리스탄에게 그런 말을 하게 되지요.

나의 사랑이 있어야겠다. 나의 인생이 있어야겠다”, 이런 뜻이겠지요.

그렇지요. “이거야말로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달게 견딜 수 있다이런 거지요. p349

 

음유시인들의 의도는 남의 가정을 부수거나 세상을 부스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사랑이나 욕망을 과녁으로 삼은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혼을 침묵시키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사랑의 경험 안에서 우리의 삶을, 인간의 정제하는 힘으로, 인간을 더 높은 존재로 승화시키는 힘이라고 대놓고 찬양했다. 그들은 그 힘이 사랑을 통하여, 개인의 고뇌와 기쁨을 통하여 마음을 인간 존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가락으로 여는 것이라고 믿었다.”

음유시인들의 가슴속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권력에의 의지에요. 그들의 가슴에 있었던 의지는 개인적인 경험에의 의지와 이 경험을 통한 자기 존재의 승화에의 의지에요. p355

 

상처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 고통과 고뇌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과 고뇌를 안긴 사람뿐이라는 뜻입니다. 중세의, 창의 상징적인 이미지와 관련된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지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창에 상처를 입지요? 이 세상에 그 상처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은 그 창을 상처에 문지르는 것뿐이다. p356

 

인간의 내적 관심이 떠나버린 땅, 곧 황무지 아닙니까? 황무지의 기본적인 성격이 무엇입니가? 사람들이 살기는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남이 하는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는 땅이 바로 황무지입니다. <황무지를 통하여 엘리엇이 표현하려고 한 것도 바로 이겁니다.

황무지의 거죽은 실제성을 표상하지 못합니다.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들어봤을 겁니다.

è  천복, 희열을 따라서내 인생의 황무지

그렇다면 성배는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성배는, 뭐라고 할까…. 참 삶을 산 사람들이 획득한 것, 혹은 깨달은 것을 표상합니다. 성배는 결국, 인간 인식의 가장 고귀한 영적 잠재성의 성취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이교도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에덴 동산 언저리에서 온 인간을 상징합니다. 이 이교도 기사는 자연인을 상징합니다. ? 이 기사의 창 끝에는 성배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까요. 무슨 뜻일까요? 자연이 성배를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이자 성취이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 전설의 상징적인 의미인 것이지요.

토마스 만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이 만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 말은 성배의 상징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까? p358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 p359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체험을 획득하기 위해 숲 같은 데로 운둔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최초의 성인이 바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이 분은 그리스도와 동등한 자리를 차지하는 분이자 육신의 세계에 현현한 성령입니다. p363

 

강요에 의해 부부가 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사랑이 자랄 수는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종류의 관계도 상당히 깊은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가족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 삶에 대한 그 수준의 사랑도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영혼의 나머지 한족을 발견 해 올 때, 여기에서 생기는 사랑과는 견줄 수 없지요. 음유시인이 찬양한 사랑, 오늘날 우리의 이상이 되어 있는 사랑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p364

è  연애와 결혼

 

결혼에서 연애 감정은 끝납니까?

어떤 결혼에서는 그렇고, 어떤 결혼에서는 안 그렇죠. 그러나 음유시인 전통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이었어요.

성실이라면요?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p365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p366

 

이 세상에도 지옥은 있습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옥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채 살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참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탄이 신의 애인이었다는 이 페르시아 신화를 좋아하는 겁니다. p371

 

페르시아 신화에는 최초의 부모 이야기도 있지요. 아마?

그것도 재미있지요. 이 부모가 태초에는 하나였어요. 하나가 일종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가 분리되고 나서 다시 화합하여 자식을 낳았지요. 그런데 자식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던 나머지 이들은 그만 자식을 삼켜버리지요? 그러자 신은 이런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되겠구나싶은 생각에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99퍼센트, 혹은 10분의 9쯤으로 줄여버렸지요. 부모가 자식을 삼켜버리지 못하게 말이지요. p372

 

8.     영원의 가면

여러 <우파니샤드> 중 하나에서 적절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어요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이미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 경험을 하지요. 즉 인간의 차원보다는 훨씬 위대한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p375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미지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떤 신의 이미지는 결정적인 장애, 궁극적인 장벽이 되는 수가 많아요.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소아병적 생각에 집착해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큰 체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보다 큰 체험이 접근해오는 순간에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이미지에 매달림으로써 거기에서 도망쳐버리려고 합니다. 이걸 사람들은 신앙으로 오해하고는 하지요. p379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오랜 명상을 경험하고 나오면 말이지요, 자기의 모든 것을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주어버립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이지요. p382

 

그런 삶이 본원은 무엇입니까?

남의 삶에서 의 삶을 인식하는 것, ‘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 하나의 삶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는 질문을 자주 던지지요. 사람의 현상을 놓고 자꾸만 그러한 현상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 하느님이 만드신 거야”, 이러고 말겠지요. 이런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본원인 겁니다. p387

 

돌고, 돌고, 또 돌 뿐이지요.

11, 12월 같은 만 도는 것이 아닙니다. 달도 이울었다가는 다시 차고, 해도 저물었다가는 다시 떠오릅니다. 시계에서 시간이 도는 것을 볼 때도 우리는 이런 느낌을 경험합니다. 어제와 같은 시각이기는 한데, 날은 다른 것입니다. p390

 

결혼 반지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는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상징이라는 말은 둘을 서로 엮는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반쪽과 또 하나의 반쪽이 서로 엮이어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반지를 보세요, 완벽한 원형이지요? 이 반지를 보고 있으면 원이라는 게 두 반원이 엮이어 하나가 되었다는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보는 결혼입니다. 둘로 이루어진 더 큰 하나, 여기에서 나의 개인적인 삶이 생겨납니다. 결혼 반지는, 우리는 원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p391

 

만달라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가 곧 입니다. 그러나 만달라의 원은 그냥 원이 아니고 다른 원과 상호 관계하거나 상징적인 문양을 이룸으로써 하나의 우주 질서를 상징합니다. 만달라를 그리는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작용하게 합니다. 가령 아주 정교한 불교 만달라를 보면 중심에 힘의 근원이자 깨달음의 근원인 신이 있습니다. 주변 이미지는 그 신의 드러남, 혹은 그 신이 지니는 빛의  측면이지요. p392

 

범용해 보이는 것에 깨달음의 촉매라는 가치를 부여하면 이때부터는 이 범용해 보이는 것이 상당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p393

 

나이지리아의 장난꾸러기 신 에드슈 이야깁니다. p396

 

이 순간이 바로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모이어스 씨,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주제인 존재를, 우리 나름의 표현법을 통해서 그려내려고 하는 일에 지나지 못합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가 안고 있는 이 주제는 아닌 것입니다. p410

 

그래서 시가 있는 거지요.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 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는 정수를 통해야 드러납니다. p411

 

이렇게 해서, 우리가 모르는 중에 만사가 만사의 구조를 결정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만사는 하나의 교향악단처럼 아귀가 척척 맞아들어 갑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 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질상 우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한 개인 의지의 동기 부여에 따라, 만사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p412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p413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제 믿음도 이족으로 기웁니다.

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은,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있어요.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p414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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