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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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강미영 2기 연구원의 글입니다 >
아침은 늘 전쟁이었어. 단추가 많은 블라우스를 입다가 아래서 두 번째 단추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면 하아~ 깊은 한숨이 몰아쳤지.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 착 소리가 나도록 현관에 던져 놓고 신발이 가지런히 떨어지지 않았다고 짜증을 내기도 했고. 현관문을 잠그는 순간 핸드폰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하루를 재수 없는 날로 못박고 혼자 궁시렁 거리기도 했어. 두 걸음을 세 걸음처럼 달려 도착한 정거장에서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막 떠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엔 아예 출근을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하지. 그렇게 출근길은 온통 지뢰밭이었어. 하나만 삐끗하면 바로 지각으로 이어지는 아슬아슬함의 연속이었지.
출근길에서 이탈하기만 한다면, 나의 아침에서 이 허둥거림은 모두 사라질 줄 알았어. 이곳을 떠나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유럽 사람들과 함께 아침을 맞는다면, 그들처럼 느긋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지. 런던의 공기로 호흡한다면 나도 저절로 느릿느릿 걷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며칠을 설레었어. 나에게도 그런 아침이 찾아온다는 사실에 두근거렸지. 커피향과 음악이 함께 하는 그런 아침 말이야.
그런데 왠걸. 런던 거리에 있는 나는, 거울 앞에서 목도리를 가지런히 둘러 맬 시간이 없어서 손에 분홍 목도리를 움켜쥔 채 달리고 있었어. 머리는 수건으로 휘감았던 모양 그대로 엉켜서 물이 뚝뚝 흘러 내리고 있고 말이야. 호스텔에서 챙겨온 사과 반쪽이 오른손과 함께 얼음이 되어가고 있었어. 장갑 낄 시간도, 가방을 가지런히 정리해 챙길 시간도 없었던 거지.
호스텔이 있는 거리를 지나 길을 살피기 위해 사거리에 멈춰 섰어. 그때였어. 왼쪽으로 뻗은 길에 카페가 하나 있었는데, 밖에 나와 있는 테이블에 젊은 남자가 앉아 있는 게 보였어. 출근하는 것이 분명한 그 남자가 카페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어. 어? 저거 내가 갖고 싶었던 모습인데… 출근길에 들르는 카페라니 너무 낭만적이잖아. 아이러니 하게도 그 남자의 여유로운 출근길 모습에서 허둥대고 있는 내가 또렷이 보였어.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고 허억허억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도록 정신 없이 뛰어가던 내가, 그 남자와 마주 서 있었어. 그 남자의 여유로운 일상과 나의 서두르는 여행이 동시에 머리를 쳤어.
여행을 시작하기만 하면 세상 모든 여유로움이 내 것이 될 것 같았던 것은 나의 완벽한 착각이었던 거야. 여유로움이 여행자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무릎이 꺾이는 느낌이었어.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아침의 여유가, 이 먼 곳까지 날아와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좌절했어. 아무것도 아닌 날, 출근길에 길 옆 카페에 잠깐 앉아 신문을 보거나 오늘 하루를 정리해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아침은 충분히 여유로울 수 있었던 거야.
아니, 그보다 내가 더 두려웠던 건 이 먼 곳까지 날아와서도 나는 여유로움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었어. 오랫동안 나를 지배해 온 허둥거림과 서두름이 여행에서도 완벽하게 나를 조종하고 있었어. 여유로움이라는 것은 어느 날 벼락처럼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어. 여행이라고 해서 갑자기 여유 모드로 전환되어 갑자기 느린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었던 거지. 그러니까 나에게 필요한 건 길고 긴 여행이 아니라 당장 오늘 아침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마음가짐이었어.
나는 오래도록 내 인생에 여유로움이 세팅 되길 기다렸어. 지금보다 돈을 더 많이 벌면… 시간이 좀 더 많아지면… 마음 맞는 사람을 찾으면… 내 생활에도 여유가 생기고 음악이 흐르는 아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말야. 여유로운 나의 아침을 위한 세팅은 이미 매일 아침 되어 있었어. 파랗게 빛나는 하늘도 내가 쳐다봐 주길 기다리고 있고, 카페도 매일 그 자리에서 내가 와서 앉아주길 기다리고 있어. 내 아침을 여유롭게 만들기 위한 모든 것들은 항상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잘 세팅 된 테이블에 앉아서 아침의 여유를 느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지. 나만 마음먹으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도 그걸 참 오랫동안 못 하고 살았어. 바보같이.
여유로운 아침을 만나고 싶다면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여유로운 아침은 끝까지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꼭 커피 한 잔이 아니어도 좋아. 서두르는 아침 걸음을 멈추고 공기가 얼마나 차가워졌나 깊은 숨을 들이마셔 보는 것, 꽃이 핀 길이 있다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세며 걸어보는 것, 카페에 앉아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을 남의 일 보듯 쳐다 보는 것, 좀 먼 길이지만 앉아서 갈 수 있는 길로 출근해 보는 것, 모두 내가 나의 아침에게 줄 수 있는 여유야. 꼭 이만큼이면 충분해.
자, 이번엔 네 차례야. 한 달에 단 한번만이라도, 아니, 평생에 내일 딱 하루만이라도 너의 아침에게 여유를 선물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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