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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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길다
난 긴 정적을 기다리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더는 싫다
그래서 점점 행동 반경이 줄어든다
다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기다림이 시작된다
오늘 오후 5시도 지독하게 길다
낮 2시의 그림자보다 더 깊이 그늘져 하루를 가린다
아니 그 때부터 짧아져야 할 그림자가 계속해서 자라고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고 하는데 때로 부작용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생각나게도 한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상대성의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가볍던 눈송이의 무게가 빙하처럼 가슴을 짓눌러온다
하늘에서 하늘 하늘 꽃잎처럼 떨어져서 차츰 쌓여 있는 눈의 무게가 이내 기다림의 무게 만큼이나 무거워져 있다 그때 울리는 문자 알림 소리에 가슴이 '쿵'하고 울리지만 결국 기다린 적 없는 광고 문자가 날 비웃듯이 정적이 흐르는 방안을 까르르 웃으며 지나간다.
눈은 언젠가 녹을테니 이 무게감 또한 줄어들 수 있겠지만 빙하가 지나간 자리는 분명히 생채기로 그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러면 기다림에 대한 두려움은 또 한층 두꺼워질 것이다. 그러다보면 다 표현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표현하는 법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라는 표현과 함께 기다림은 동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금요일 오후의 하늘은 모든 피로한 마음을 감싸안을 것처럼 포근하다. 그 푸른 겨울빛도 상큼하고 말이다. 이렇게 날씨는 마음의 분위기를 맞추지 못한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지 말았어야 한다. 그 안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난 그 과거와 미래 또한 함께 보아버렸다. 강물에 조각배를 띄워 보낸 순간처럼 이제는 그저 그 강물의 흐름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세상에 운명이라는 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의지처가 필요해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이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할 뿐, 실제로 그런건 없다. 모든 것은 인연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지금이 곧 모든 것이다. 기다림을 멈추던 이어가던 나의 선택이지만 그 다음에 이어져 오는 일들은 그 선택에 따른 반응들이라는 것이다. 순간의 선택 속에서 계속 순간이동하는 삶의 비밀이 때로는 신기하기도 무섭기도 하다. 수학 공식을 알아도 상대의 마음의 크기를 재는 법은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정확하지 못한 세계 속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는 필연의 움직임들로 얽혀 있다.
마음 깊이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와 눈을 없애려면 빛을 찾거나 온기를 찾아야 한다. 난 그래서 두 가지를 한 번에 날려버릴 벽난로에 불을 지펴보기로 한다. 그 환하고 따뜻한 불에 나의 마음을 맡겨본다.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 늘 상대와 나 사이의 자유를 꿈꾸면서도 그러한 사랑이 시작되려고하면 집착과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계속되는 확인과 질문들은 상대를 질리게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응급처치일 뿐이다. 감정적으로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말로라도 그 마음을 안정시키기고 싶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 당분간은 이어질 수 있겠지만 이렇게 기다림이 길어지다가는 결국은 그 골은 깊어져서 서로의 거리가 더 이상은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때로 기다림은 잔혹하리만큼 차갑고 빙하를 녹일만큼 뜨겁다.
늘 익숙하다 생각하지만 사랑은 늘 새롭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금 사랑에 희망을 걸고 다시금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리라. 마치 어머니들이 그 고통을 이겨내고 아이를 낳고는 다시는 안 낳아야 정상이거늘 둘째 셋째를 출산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사랑으로 품고 그렇게 이겨내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주의 섭리이다.
오후 5시까지 길어지던 그림자를 삼켜버린 겨울해가 저물어간다. 그래서 슬픔이 머물때는 밤이 기다려진다. 게다가 밤은 기다리지 않아도 와서 좋다. 밤의 품 안에서 위안을 찾는다. 흙탕물처럼 되어 버린 마음의 그늘을 송두리째 덮쳐버려서 슬픔과 밤의 차이를 가려버리기 때문인가보다. 그리고 내 곁에는 따뜻한 벽난로도 있다. 로맨틱하다. 마치 100년의 시간이 지난 것같은 생각이 든다. 한 생이 지나 버린 것 같다. 전생도 지나고 현생도 지나서 다음 생의 어느 밤인 것 같은 이 아득함은 무엇일까. 기다림이란 사람을 이다지도 아득하게 만들어 버린다. 무엇을 해도 시간은 표현한 그 순간에 멈춰서 있다. 광화문 한 복판을 아무것도 입지 않고 며칠째 달리고 있는 기분이 이런걸까. 그래서 이제는 아무렇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를 시선들이 반갑지는 않는 불편한 괴리감 정도랄까. 공기와도 분리되어 있고, 소리와도 멀어져있고 지금과 난 한참 떨어져 있는 나만의 알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 알몸인채로 데굴데굴 굴러서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채로 굴러다니고 있는 기분.
이 세상의 모든 노래들이 자신의 주제곡처럼 들리기 시작하면 사랑하고 있는 거라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일부러 제목없고 가사없는 클래식을 듣는다. 둥글게 말려져 있는 몸과 마음 사이사이로 그래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투명음표들에 대한 기회라고 할 수 있겠다. 인지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나의 방어막에서 해석되느라 이 가슴 깊숙한 곳까지 위안이되어 안착되지 못하니까 말이다. 기다림이 끝나는 건 언제일까. 기다리는 그것이 도착하는 순간 그리고 스스로 그만하자고 생각한 순간. 그 어느 것도 행복한 결말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기다리는 것이 도착했지만 원하던 내용이 아닐 수도 있고 스스로 그만하자고 선언하는 것은 좌절을 동반하니까 말이다. 늘 이렇게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는데 익숙해서 지금은 마치 게임을 즐기듯이 경우의 수를 따져보고 있다.
고등학교 때에 확률을 가장 못했었는데, 좀 더 열심히는 해둘 걸 그랬나보다. 의외로 실생활에서 유용한 학문 중에 하나인 것 같다. 그 모든 것이 정밀하게 떨어지지는 않지만 안도감을 동반하는데에는 가끔 유용하기도 하다. 모든 주의를 다시금 모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넓지도 않은 마음의 공간이 지금 팽창할 것 같다. 얼렸다 녹였다 팽창했다 수축했다를 반복하다가 보면 결국 지쳐서 잊고 잠으로 회복을 청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