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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23일 01시 03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답이 없는 일상 속에서 내 삶을 찾았다’ 인터뷰 중

 

 책을 내기 전까지의 그의 삶은 ‘모범생’ 그 자체였다. 대학에 갈 때도 가고 싶은 학과가 없어 부모님 뜻대로 의대에 진학했다. “예정된 삶, 주어진 삶만 살아온 거죠.” 그렇게 이끌려 온 ‘의사의 길’에서 고민과 의심이 내내 끊이지 않았다. “6년에 마치는 의대를 8년 동안 다녔어요. 이 길이 나의 길인가 고민을 하면서 2년 정도 휴학을 했죠. 정신과를 택한 것도 이런 저를 분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고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면서 자연스레 책 쓰기로 이어졌다. “내 인생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때는 언제일까 생각하며 제 과거를 돌아봤어요. 생각해보니 제가 중3, 고3 올라갔을 때 친한 10여명의 친구들에게 ‘열심히 공부하자’는 격려 편지를 썼더라고요.” 고2 때에는 다른 곳에서 전학 와 적응 못하던 짝을 격려하려고, 그 친구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흉내 낸 소설이었는데, 그때도 뭘 바라지도 않고 일주일 내내 몰입해서 썼었죠.”

첫 책 내기를 꿈꾸는 이들에게 그는 “작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솔직히 내가 책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심리적인 장벽이 진짜 큽니다. 준비되지 않았는데, 내가 책을 쓸 수 있을까? 전문성을 가지고 쌓아나가야 하는 거 아닐까? 조건들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미루게 되는데, 제 얄팍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전문가라 책을 쓰기보다는 책을 써서 전문가가 되는 마음가짐이 필요해요.”

 

그는 책을 썼기 때문에 삶이 바뀌었다기보다는, 삶이 바뀌었기 때문에 책을 쓴 것 같다고 말했다. 생각에 갇혀 있던 내용들이 책을 통해서 그동안 확인할 수 없었던 삶의 축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독자들로부터 첫 책에 대한 피드백이 와요. 그럴 때마다 제가 쓴 글이 누군가의 삶에 힘이 된다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보람이 있구나, 내가 잘 살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작은 부분이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 자체가 의미죠.”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아직은 절대로 손에서 무기를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게으름을 규탄하고 맞서 싸워라. 그게 무엇이든 저절로 좋아지는 법은 없다.” [12] 역사학자 에릭 홉스본

게으름은 선택이다

‘아뿔싸!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도 또 하나의 선택이었구나!’ [17]

선택을 회피한 선택! 이것이 바로 게으름인 것이다. (...) 똑같이 하루를 반복하고, 중요한 일을 뒤로한 채 사소한 일에 매달리고, 결정을 끊임없이 미루고, 능력이 됨에도 불구하고 도전하지 않는 등 게으름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17]

다 타버린 잿더미 속에도 불씨가 남아 있듯, 스스로 끝났다고 선언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는 가능성이 늘 함께 한다. 삶이란 가능성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한 가닥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들은 인생의 어느 순간, 삶을 뒤흔드는 내면의 목소리와 마주하게 된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이게 나의 전부인가?’라고 묻는다. [18]

Ⅰ 새로 쓰는 게으름

01 천의 얼굴을 한 게으름

위장된 게으름은 대부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매달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장 내일이 시험인데 공부는 않고 게으르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운동량을 기준으로 게으름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즉, 움직임이 많으면 부지런하고, 가만히 있으면 게으르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게으름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태도, 즉 능동성에 의해 구분된다. 아무런 물음이나 생각 없이 반복적인 일상을 바쁘게 사는 것도 삶에 대한 근본적인 게으름이다. 반면, 움직임 없이 쉬고 있더라도 그 자체를 온전히 즐기고 있다면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다. 마음과 행위가 유리될 때 우리는 게으른 것이다. [30]

핵심은 모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32]

오늘과 내일을 연결할 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게으르지 않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들에게 내일은 오늘의 반복일 뿐이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연결할 끈이 없거나, 있더라도 너무 부실한 사람들이다.

능동적인 선택이란 선택에 따른 위험성을 감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택해도 좋고 저것을 택해도 좋은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선택이라 볼 수 없다. [37]

살다보면 매순간 선택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삶은 ‘선택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것’으로 나뉘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해 삶에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능동적인 선택)’과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수동적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는 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철학자 요다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하거나 하지 않는 것만 존재할 뿐, 하려고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선택 회피는 결국 수동적 선택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기에 게으름은 본질적으로 ‘선택을 피하기로 한 선택’이다. [37]

02 게으름을 꾸짖을까, 찬양할까

여유는 능동적 선택에 의한 것이고, 게으름은 선택을 피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이다. 여유는 할 일을 하면서 충분히 쉬는 것이지만, 게으름은 할 일도 안 하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 시간을 보내고 나서 재충전이 되었다면 여유이지만, 후회와 오히려 피로만 더 쌓였다면 이는 게으름이라고 할 수 있다. [61]

03 게으른 사람들의 변명

모든 형태의 미룸은 기본적으로 ‘내일의 환상’을 갖고 있다. 그 미룸이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 것이고, 지금 미룬 것은 나중에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에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잘못된 희망으로 현실을 오도한다. 그러나 미루는 습관을 가진 사람에게 그런 미래는 일어나지 않는다. -윌리엄 너스, <미룸의 심리학>에서 [65]

자기비난 역시 자기합리화만큼 병적이라는 사실이다.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스스로 게으르지 않다고 변명하는 것과, 게으름을 피우는 자신을 비난하면서도 계속해서 게으름에 빠져 있는 것은 별 차이가 없다. 둘 다 게으름에서 벗어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점마저 똑같다. [70]

자기비난도 큰 범주에서 보면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게으르다고 욕하며 자기비난에 빠져 있는 사람은 사실 자기 자신을 가장 잘 방어하고 있는 셈이다. 비난으로 비난을 방어하는 고차원적 전략인 것이다. [71]

➜ 자기비난을 함으로써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

04 모든 게으름엔 이유가 있다

바람직한 ‘완벽’의 기준은 ‘과정에서의 최선’에 있다. 그러나 게으른 완벽주의자들에게 ‘완벽’은 ‘흠 잡을 데라고는 없는 완벽한 상태’, 즉 무결점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들은 최상의 선택, 최상의 노력, 최상의 결과를 한꺼번에 추구하기에 삶이 괴롭다. 이들이 지향하는 것은 ‘실수 없는 깔끔한 성공’이다. 그렇기에 하고 싶은 무언가를 앞에 두고도 그 가능성보다 위험성을 먼저 본다. 이들은 ‘내가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뿐 ‘어떻게 하면 잘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73]

➜ 할 수 있다, 없다 로만 나누었을 뿐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 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결국 하기 싫은 것을 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하기 싫은 것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었던 건가 보다.

이들은 왜 이렇게 실수나 결점을 두려워할까? 그것은 이들 중 다수가 성취지향적인 부모 아래에서 자라나 존재 자체로서 사랑받지 못했고, 변함없는 사랑을 받으려면 완벽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믿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일들의 마음속에는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여 성공해야 하는 최상의 시나리오와,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 두 가지밖에 없다. 이들은 이 두 가지 관점에서만 상황을 바라볼 뿐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은 미처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들의 선택은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하는 것’과 ‘차라리 안 하는 것’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는 것을 이들은 상상조차 못한다. 결국 이러한 극단적 사고는 선택을 회피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라도 지키자!’는 안주의 길로 몰아간다. 그래서 이들의 삶에는 높은 목표만 있고 도전은 없다. 끝없는 준비만 계속될 뿐이다. 이들은 ‘다음에’라는 달력에도 없는 날로 실천을 미루며 의미 없는 하루를 반복해서 살아간다.

➜ 언제 주어질지 모르는 얼마나 많은 다음을 혼자 기약하며 선택을 회피하며 살았던 건지

이들은 어렵게 선택을 내린 다음에도 준비에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 붓느라 본격적인 진행이 더디다. 이들은 늘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강박적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이 준비에 매달린다. 결국 시작도 하기 전에 제풀에 지쳐버리기 쉽다. 그렇기에 이들의 현실은 늘 불만족스럽다. 사실 완벽주의와 회의주의는 일맥상통한다. 대부분의 완벽주의자는 동시에 회의주의자이다. 결함이 있기 때문에 완벽해져야 하지만, 반대로 결함이 있기 때문에 완벽에 대한 도전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의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74]

낙관성의 바탕 위에 불신과 회의가 더해질 때 비로소 창조적 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긍정과 부정의 두 세계를 아우르는 사람만이 복잡한 삶을 헤쳐 나갈 힘을 가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현실적 판단을 흐리게 할 정도로 과잉된 낙관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적 낙관주의이자 실천적 낙관주의임을 잊지 말자. [81]

선택의 기회가 많다는 말은 곧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기회가 주는 보상은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기에 그만큼 후회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우리는 결국 최상의 선택을 하려고 애쓰지만 그럴수록 선택은 미루어질 수밖에 없다. 보다 많은 대안과 정보를 찾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고민 끝에 어느 하나를 택했다고 치자. 과연 선택의 가짓수가 적었을 때보다 결과에 더 만족할까?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선택의 가짓수가 많을수록 만족의 줄고 후회는 늘 확률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후회는 선택의 다음 과정인 실행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만다. 선택을 최선의 결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아쉬움과 후회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게으름이다. [100]

Ⅱ 게으름과의 결별

05 게으름 탈출을 위한 마음가짐

삶에서 희망을 떠올리지 않는 그 순간, 우리는 게을러지기 시작한다. 이제 게으름의 잡초들은 시들어가는 삶을 옭아매며 무성하게 자라난다.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게으름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다. [110]

그러나 이러한 게으름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섣부른 포기와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으름 자체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게으른 우리의 모습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싶고, 생산적인 결과를 내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다. 우리 안에는 타고난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내려는 창조적 본성이 숨 쉬고 있다. 우리 안에는 나무들처럼 각자의 열매를 맺을 유효한 자질이 여전히 내재되어 있다. 그것이 생명의 본질인 것이다. [110]

비전을 세워 놓고도 ‘이 길이 정말 내 길일까? 하는 회의가 든다면 그것은 진짜 비전이 아니다. 믿음을 주지 않는 비전은 가짜 비전이다. 자신의 강점과 재능, 그리고 내적 동기에서 출발하지 않고 남의 비전을 빌려왔다고밖에 볼 수 없다. 가짜 비전은 현실과 접촉하는 순간 빛을 잃는다. 암흑 같은 두려움이 비전을 삼켜버리고 만다.

하지만 진짜 비전은 두려움을 넘어설 용기를 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간절해지고 뚜렷해진다. 그래서 진짜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실패란 말이 있을 수 없다. 진짜 비전은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과 제로섬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답게 살아가는 길에 실패나 파멸이란 말이 어떻게 따라 붙겠는가! 실패는 승자독식의 피라미드 체제 속에서 경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자기실현을 위해 네트워크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상처는 있지만 실패는 없다. 그리고 그 상처는 자기실현이라는 ‘영광의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부여되는 훈장일 뿐이다. [116]

초점을 벗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과감히 단념할 줄 알아야 한다.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이 아무리 높아도 우리의 에너지는 제한되어 있고 할 일은 많다. 게으름은 할 일이 없다고 느낄 때도 나타나지만,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느낄 때도 찾아오는 법임을 명심하라. 많은 일이 뒤죽박죽 섞여 있을 때 ‘경중완급輕重緩急’에 따라 일을 배분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엉켜버린다.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게으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큰 것과 작은 것을 나누는 것이 비전임을 잊지 말라. [118]

‘나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과연 내가 바라는 인생의 모습일까?’ ‘이 모습이 나의 전부인가?’ 등등, 이러한 질문을 나는 ‘삶을 깨우는 질문’이라 부른다. [126]

나는 누구에게나 삶을 깨우는 질문은 찾아온다고 본다. 그 질문을 수신하느냐 수신 거부하느냐는 물론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그러나 한두 번은 피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삶의 어느 길목에서 결국엔 마주칠 수밖에 없다. [128]

06 나로서 살아가라

나의 일생은 무의식을 실현해가는 과정이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말라버릴 꽃뿐이다. 그러나 숨어 있는 뿌리는 마르지 않고 언제나 살아 있다. [141] -칼 구스타프 융

‘자기로서 살지 못하는 삶!’ 나는 이를 세상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아닌 남이 되고 싶어 했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늘 부러워했다. 어제와 오늘의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려 들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 열등하거나 뒤쳐졌다고 생각했고, 앞서가는 누군가를 붙잡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뒤쫓아 가는 삶은 자신의 강점과 열정을 살리기보다는 상대의 강점을 흉내 내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 흉내 내는 삶은 우리를 주저앉게 만든다. 게을러지고 마는 것이다. 반대로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를 수 없다. 그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어제의 자신과 경쟁할 뿐이다. 우리는 이제 추격전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느끼는 열등감은 허위의식일 뿐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허위였다. 진실은 이렇다. 나는 열등하지도 우월하지도 않다. 그저 ‘나’일 뿐! [145]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면 우리는 게을러지기 쉽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주위의 요구와 기대에 이끌려 살아가지 때문이다. [147]

07 게으름에서 벗어나는 10가지 열쇠

‘상위의 관점에서 접근하라!’ 이것이 바로 문제해결의 원리이다. 즉, 문제를 벗어나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행하다면 불행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게으르다면 게으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171]

우리는 흔히 문제에 부딪히면 문제에 매몰되어 문제에서 벗어나는 데만 급급하기 쉽다. 그게 어떤 일이 되었든, 중요한 것은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왜 해야 하는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그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상태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 [172]

➜ 삶의 장애물 앞에 주저앉고 마는 것은 왜 그것을 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인가 보다.

늦었다고 생각할수록 몰입의 대상을 찾아야 한다. 몰입만이 뒤쳐진 시간을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게으름과 그냥 치고받고 싸우지 말라. 우리의 가슴을 덮고 있는 재를 뒤엎어서 남아 있는 불씨를 되살려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아야 가속도가 붙는다. [173]

설렘이 들어 있지 않는 비전은 비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비전을 세우고도 여전히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 비전이 가짜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비전에도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다. 진짜 비전은 두려움도 있지만, 그 두려움도 넘어설 용기와 설렘을 함께 준다. 그러나 가짜 비전은 두려움과 망설임만을 줄 뿐이다. 그러므로 비전을 세우고도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비전을 다시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진정한 비전은 실천지향적인 희망이며, 쉼 없이 정신적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정신의 심장’인 것이다. [173]

인생의 목적(사명)은 비전으로 생생해지고, 비전은 다시 목표로 궤도화 될 때 역동성과 구체성을 갖게 된다. [183]

우리의 뇌는 반복해서 물어보면 답을 하게 되어 있다. 추상적으로 물어보면 추상적인 답이, 구체적으로 물어보면 구체적인 답이 나오는 것이 우리의 뇌이다. [185]

경영학의 대부인 피터 드러커는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고, 관리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고 말했다. [185]

비전은 목표로 세분화되어야 하고, 그 목표는 시간제한과 달성 여부를 판별할 측정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186]

불만과 비난은 어떻게 다를까? 불만은 특정 행위, 모습, 특성, 자질 등 한 사람의 일부에 대한 미흡한 느낌을 말한다. 하지만 비난은 한 인간의 가치와 본질에 대한 공격이다. 총체적 인격을 무너뜨리는 보이지 않는 공격 행위인 셈이다. 예를 들어 옷을 갈아입고 아무데나 벗어놓은 아이가 있다고 해보자. 엄마가 아이에게 “아무데나 옷을 벗어놓는 것이 엄마는 싫어!”라고 했다면 불만이 된다. 하지만 같은 행동에 대해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니? 너라는 인간은 도대체 왜 그 모양이야!” 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난이다. [199]

세상을 살면서 나만의 재능이 있고 나의 몫과 쓰임이 있다고 믿자. 오직 나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고, 오직 나만이 출 수 있는 춤이 있으며,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다고 믿자. 그리고 이를 계발하려고 노력하자. 그러한 태도를 견지할 때 상처받은 가치감도 서서히 아물 것이며 게으름도 물러갈 것이다. [204]

삶의 발전은 결코 노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노력한다고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노력이라고 다 같은 노력이 아니다. 편의상 노력을 ‘값진 노력’과 ‘헛된 노력’으로 나누어보자. 먼저 헛된 노력이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하거나 잘할 수 없는 것을 잘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억지로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노력은 우리를 한없이 지치게 만들고 비참하게 하고, 결국 게으르게 만들어버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값진 노력이다. 이는 자연스럽다.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잘하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노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성에 충실한 것이다. [215]

게으름에서 벗어나는 데 있어서 종자돈이란 일상의 작은 승리를 뭉치는 것이다. 게으름에서 벗어나려면 상승곡선을 탈 수 있는 구름판이 꼭 필요하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게으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학습된 무력감’을 가지고 있다. ‘난 해도 안돼!’ 라는 뿌리 깊은 마음이 있다. 이 무력감을 ‘어? 나도 하니깐 되네!’라는 도전의식으로 바꾸는 것이 관건이다. 특히 게으름이 만성화된 사람들은 자신이 관념적으로 정해놓은 한계 밖으로 한 발짝만 벗어나면 무슨 큰일이 벌어질 것처럼 생각한다. 때문에 무력감과 게으름이 클수록 아주 작은 계획을 세워 첫 시도를 승리로 장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자축하고 좀더 영역을 넓히거나 다른 영역으로 그 기술을 확장시켜야 한다. 그래서 일상의 작은 승리들로 물결치게 만들어야 한다.

‘일상이 작은 승리고 물결치게 하라!’ 이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목표를 더 세 번화해야 한다. 절대 첫 시도에 무리해서는 안 된다. 마치 첫 걸음을 뗀 아이처럼 나아가야 한다. 오늘 한 걸음을 걸었으면 그 다음은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두 걸음을 걷는 것이다. 근사함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꺼이 옹졸함을 선택해야 한다. 실속을 따지지 말라. 제일 가벼운 것을 들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하려는 일은 게으름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신기록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앞으로의 긴 여정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하는 작은 전리품을 획득하는 것이다. 변화의 눈뭉치는 몇 개의 ‘작은 선택’과 ‘작은 승리’로 만들어진다. 중요한 것은 이를 바탕으로 추가적인 성취를 이뤄나가는 것이다. [216]

우리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계속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서로 주고받는 말과 행동은 다시 말하면 에너지를 주고받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부정적인 사람들과 같은 환경에 놓여 있으면 우리들의 마음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기 쉽다. 반대로 긍정적이고 꿈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우리들의 마음 역시 긍정적이고 꿈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우리들의 마음 역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기 쉽다.

한번 돌아보자. 주위의 사람들과 환경으로부터 계속 부정적인 에너지를 건네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게으름에 깊이 빠져 있을수록 부정적인 사람들과 환경에 처해 있기 쉽다. 게으른 사람들은 부정적인 에너지가 강한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부터 유유상종이란 말을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비슷한 정서 색깔을 가진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경험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다. [227]

삶의 에너지는 순환된다. 당신이 보다 발전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말 그대로 발전적인 사람들과 환경에 연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연결이 많아질수록 당신의 긍정 에너지 수위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사실 선택하는 것도 능력이고 훈련이다. 안 하다보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게 된다. 선택을 남에게 맡기다보면 나중에는 정말 혼자서는 어떤 선택도 못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고민해도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능동적으로 선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뜻이다. 능동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당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선택을 하면서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점 알아가고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243]

<나니아 연대기>를 쓴 작가 C.S 루이스는 “당신이 선택할 때마다 당신의 내면 중심부, 즉 선택의 주체가 되는 당신의 일부가 예전과는 조금씩 다른 무엇으로 변화되어 간다”고 말한다. [243]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은 선택에 따른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사실 책임은 선택을 할 때도 주어지지만 선택을 하지 않을 때에도 주어진다. 즉, 자신이 미루고 회피한 것 역시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게으름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라면 일반적인 책임감이 아니라 역설적인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아무것도 책임지기 싫어 선택을 피하고 게으름에 빠졌지만 결국 선택하지 않아서 잃게 된 많은 기회와 경험들에 대해서도 스스로 책임감을 느껴야만 한다. [244]

이제 우리는 능동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선택했을 때만 선택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책임 때문에 한다고 하면 그때의 책임감은 부담이지만 스스로 선택해서 하는 책임감은 삶의 긍정 에너지이다. 예를 들어 팀에서 분담해야 할 과제가 있을 때 꼭 남들이 다 선택하고 회피하는 셈이다. 책임지기 싫어 나서서 무언가를 하겠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주어진 것만 할 뿐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쉽다. 물론 변명은 있다. 현재의 일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현재의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태도가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자신의 정신태도로 굳어지고 다른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수동적인 태도가 굳어져서 좋아하는 일을 만나기 어렵지만 설사 만난다 하더라도 적극성을 회복하기란 쉽지 않다. [244]

책임감은 부담이 아니라 에너지라는 것을 상기하라. 책임감이 없이 우리는 결코 최선을 다할 수 없다. [245]

남들이 부여한 책임은 짐이지만 스스로 짊어지는 힘이라는 사실을. [245]

세상에 후회 없는 선택이란 없습니다. 최상의 선택은 결코 선택의 순간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최상의 선택은 자신이 선택한 것을 잘 즐기고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을 때 말할 수 있습니다. [248]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위하여

나는 그 불행한 상황 너머에 있는 의미를 발견하고 무의미한 고통으로 보이는 것을 진정한 인간적 성취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모든 상황은 그 안에 의미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 수용소에서. 이 생생한 실험실이지 시험장에서, 나는 동지를 중 일부는 돼지처럼 행동하고 일부는 성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목격했다. 사람은 자신 안에 그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갖고 있다. 어느 것이 활성화 될 것인지는 조건이 아닌 우리가 하는 결정에 달려 있다.

우리는 배우기 위해 고통을 겪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서 교훈을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정말 무의미해진다. 우리가 우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삶에 의미를 더해줄 수 있다.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을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278] -빅터 프랭크

행복은 길 위에서 피어나는 꽃이어야지 목표에 도달한 뒤 받는 트로피가 되어서는 안 된다. 행복이 만일 목표라면 그곳에 도달하기 전의 삶은 불행으로 물들 수밖에 없다. [279]

삶은 과정이다. 육체의 성장에는 끝이 있지만 삶의 성장에는 끝이 없다. 끝났다고 믿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281]

우리는 모두 씨앗인 채로 세상에 태어났다. 삶이란 우리가 갖고 태어난 씨앗들을 가꾸고 꽃을 피우고 다시 씨앗을 뿌리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삶은 성공이란 꽃을 피우느냐 피우지 못하느냐의 문제이지 무슨 꽃을 피우는지, 몇 개의 꽃송이를 터뜨리는지, 언제 꽃망울을 터뜨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른 꽃을 부정하거나 다른 꽃과 경쟁하는 꽃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어쩌면 피어난 꽃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며 자신의 삶은 피지도 못한 채 시들어간다고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꽃은 봄에만 피는 것이 아니고, 한 해만 피는 것도 아니며, 멋진 꽃밭에서만 피는 것도 아니다. 가을에 피는 국화도 있고, 10년 만에 피어나는 행운목도 있고, 진흙에서 피어나는 연꽃도 있다. 우리 인생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자신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으로 나아가라. 그 자리에 서 있을 때 우리의 삶은 하나의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282]

 

 

3. ‘내가 저자라면’

 

1부는 게으른 사람들의 유형과 게으름이 나타나는 양상과 게으름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2부는 습관적인 게으름을 고쳐 나가기 위한 마음가짐과 10가지 실천방법을 알려 주고 있다.

사람은 정신적으로 게으르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고 하며, 그 게으름을 깨우기 위해 각자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데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게으른 것이 아니라 한다. 열심히 움직이고 활동해도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무의미한 행동만 하고 있다면 그 역시 게으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일을 할 때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여 정말 중요한 일부터 먼저 처리하는 것이 부지런한 것이라 말한다. 게으름을 판단할 때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성이 있는가 없는가?’로 보고 있다. 게으름에 대한 정의는 새로웠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게으르다는 것을, 나만이 특별나게 게으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위로가 되었다.

삶의 방향성을 가지고 스스로 세운 비전을 위해 살아간다면 게으름뿐 아니라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삶의 방향성을 잡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적을 잡지 못하고 하루하루 일상에 파묻혀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여러 문제들과 자신의 발목을 깊게 잡고 있는 문제점의 해결 실마리는 나 자신을 얼마나 깊게 알고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폭에 달려 있다. 문제의 답은 내 안에 있는 것임을 자꾸 외부에서 답을 찾으려고만 하는 것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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