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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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내린 눈으로 여우숲에는 눈이 쌓였습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에 당분간 이 쌓인 눈이 여우숲의 이불 노릇을 할 것 같습니다. 심어둔 산마늘들이 삼월에 제 싹을 틔우기까지 저 눈은 보온재로, 보습재로
한 몫 할 것입니다. 추워지니 진짜 겨울 같습니다. 오늘은
명절 뒤라서 그런지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하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종일 군청에 제출할 서류를
챙겼습니다. 자연스레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묵언의 한나절을 가져본 것도 참 오랜 만이었습니다.
산과 바다에게 밥을 주기 위해 마루로 나섰습니다. 한낮인데도 바람이 많이 차가웠습니다. “추우니 이제야 진짜 겨울
같구나! 안 그러냐 산아?” 눈 쌓인 숲의 허공과 산의 눈을
번갈아 보며 괜스레 혼잣말을 툭 던지고 홀로 기뻐 길게 미소지었습니다. 미소 끝에 갑자기 내 가슴에서
이런 질문이 일어섰습니다. ‘내 삶에 아로새겨진 부끄러움의 목록’은
무엇인가? 참 뜬금없는 현상이지만, 묵언의 몇 시간을 지내노라면
그 끝에 나는 종종 이런 종류의 짧은 질문과 마주하는 경험을 합니다. 어떤 때는 그 질문에 답을 하기가
참 아픈 질문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진한 그리움에 취하게도 하는 질문도 있습니다. 다른 어떤 때는 스스로 답을 구하기 어려운 질문이 반복해서 일어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할 수 있는 이 순간을 기쁘게 만나는 편입니다.
벼락같이 만난 네 부끄러움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나를 시간을
거슬러 오르게 했습니다. 무수한 부끄러움의 기억들이 휙휙 시간을 뛰어넘으며 나타나고 사라져갔습니다. 대부분의 소소한 부끄러움은 금새 다가왔다가 이내 멀어 져갔습니다. 하지만
어떤 부끄러운 기억들은 더 천천히 다가오고 또 천천히 물러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내 삶 속에 깃든
부끄러움의 목록을 만나고 보내며 남은 하루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여태 내 곁에 머물며 떠나지 않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은 내 삶에 가장 부끄러웠던 일인 모양입니다.
그 경험들이 지금보다 더 젊은 날의 시간대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어쩌면 여전히 이따금
반복하고 있는 행동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내 삶에 가장 부끄러웠던 일은 ‘나 아닌 존재를 부지불식간에 무시한
일’이었습니다.
올해는 더 자주 풀과 나무의 소리를 듣는 일에 몰두해야겠습니다. 말없는 그들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고부터 나는 그 부끄러움의 막중함을 자각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대에게도 왕왕 일어서고 또 오래 머물며 되새기게 하는 어떤 부끄러운 기억이 있으신지요? 그 기억을 어떻게 마주하고 다루고 계신지요? 술이나 사람이나 다른
것들로 다루기 힘든 날에는 숲으로 오세요. 숲에 머물며 천천히 숲을 거닐어 보세요. 숲은 그 자체로 삶을 치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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