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키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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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삶에 더하기 – 그 순간을 살아라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말을 빌리자면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다. 우연히 만난 젊은 작가와 크레타 섬에 도착한 조르바는 오르탕스 부인(조르바는 그녀를 그리스 독립전쟁의 여걸 부불리나라고 부른다)과 약혼까지 하게 되었지만 부인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 후 일에 몰두하는 조르바에게 젊은 작가는 가엾은 부불리나 여사를 잘도 잊어버린다고 나무라자 조르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부불리나가 살아 있는 동안 말입니다. 어느 카나바로도 나(뼈다귀에 가죽을 입힌 이 조르바 말입니다.)만큼 이 여자를 기쁘게 해준 사람은 없습니다. 이유를 알고 싶어요? 이 세상의 모든 카나바로는 그 여자에게 키스하면서도 자기 함대나, 왕이나, 크레타나, 훈장이나, 마누라나… 이런 걸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걸 깡그리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이 늙은 것도 그걸 알고 있었어요. 자, 유식한 양반, 이 이야기는 하고 넘어갑시다. 여자에게 그 이상의 기쁨은 없는 법입니다. 진짜 여자에게는… 잘 들어 두시오,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데… 진짜 여자는 남자에게서 얻어내는 것보다 자기가 주는 데 훨씬 더 큰 기쁨을 누리는 법입니다.
지난 주말 나는 또 한 명의 조르바를 만났다. 충북 괴산에 위치한 여우숲에서 만난 그는 사실 소설 속 조르바보다는 훨씬 잘생겼다. 소설 속 조르바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움푹 들어간 뺨, 튼튼한 턱, 튀어나온 광대뼈, 주름진 얼굴, 고수머리, 눈동자가 밝고 예리하며 냉소적이면서도 불길같이 섬뜩한 강렬한 시선을 가진 60대 중반의 남자’ 1964년에 제작된 동명의 영화에는 성격파 배우 안소니 퀸이 조르바로 열연했다. 안소니 퀸이 소설에 묘사된 조르바와 가장 비슷한 배우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의 긴 속눈썹과 그윽한 눈을 보고 있자면 여성 관객들을 위한 감독의 배려를 눈치채지 않을 수 없다.
여우숲의 조르바는 어떠한가? 우선 그의 이력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는 30대를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보냈다. 잘 나가는 벤처기업의 사장자리까지 오르며 그는 도시의 빌딩숲에서 밤마다 축제를 벌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던 삶이었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여우숲의 조르바는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자 육체의 숲도 도시의 숲이 아닌 자연의 숲이 떠올랐다. 마흔을 앞두고 사표를 내고 도시를 떠나 숲에 산방 하나를 지어 산사나이로 살았다. 벌을 치고 산마늘을 심고 숲에 대해서 공부하며 매일이 행복한 사나이가 되었다. 이제 그의 외모를 살펴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꽁지머리 사나이였다. 그의 꽁지머리는 문명에 대한 반항이며 자연인으로 살겠다는 자존심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그의 헤어철학을 이해하는 헤어 디자이너를 만나지 못한 탓에 덥수룩한 고수머리로 살고 있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그의 꽁지머리를 다시 볼 수 있으리라. 그는 깊게 쌍꺼풀 진 눈에 검은색 뿔테안경을 쓰고 있다. 양쪽 눈가에 잡힌 주름과 햇볕과 바람에 그을린 얼굴이 잘 어울린다. 늠름한 콧대아래 하얀 이가 자리한 입에서는 중저음의 근사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의 목소리에 반해 박한 이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을 기꺼이 해주는 여자들이 부지기수다!) 무릎에 쓱쓱 닦은 사과를 별로 힘들이지 않고 반으로 쪼개 건네는 그의 손가락은 지식인의 섬세함과 산사나이의 야성이 함께 보인다. (주변에 남자가 있다면 사과를 쪼개달라 부탁해보라. 가능한 사람이 별로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언젠가 그가 장작을 패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무용 동작이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가볍게 내리 찍는 도끼를 맞은 장작은 그에게 반해 무장해제된 여인들처럼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조각난 장작을 그러모아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폈다. 여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듯. (다음엔 여름에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그러면 그의 탄탄한 근육들과 인사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여우숲 조르바 김용규와 그리스인 조르바 안소니 퀸
얼마 전까지 나의 삶의 큰 화두는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였다. 나는 내가 원하던 삶의 많은 부분을 이루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사회적 성공을 위해 승진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었고,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토끼 같은 아이들과 내 집에서 안락하게 살았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모두 이룬 후에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삶이었던가 하는 의심이 마음 속에서 매일 자랐다. 배 부른 소리 말라며,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사는 거라며 나를 아무리 달래도 의심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나? 돌이켜 보면 분명 나의 삶에 빛나는 성취의 순간들은 있었다. 대학에 합격하고, 취직을 하고, 좋은 회사로 이직을 하고, 승진을 하고, 업무에서 성과를 내어 인정을 받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장만한 그 장면에서 나는 분명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성취의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다음 단계를 계획하기에 바빴다. 몸은 가족들과 여행지에 머물러도 머리 속은 회사일로 분주했다. 항상 남들보다 빨리 성공하고 앞서가기 위해 더 빨리 더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끊임없이 계획하고 준비하고 동동거리다 나는 녹초가 되곤 했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그 순간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공지영의 소설 『즐거운 나의 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아저씨가 젊었을 때 어떤 유명한 스님을 취재하러 간 적이
있었어.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아주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삼천배를 하고서야 어렵게 뵈었지. 그리고 물었어.
스님,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습니까?하고.
그랬더니 그 스님이 대답하더구나.
앉아 있을 때 앉아 있고, 일어설 때 일어서고, 걸어갈 때 걸어가면 됩니다. 하는 거야.
아저씨가 다시 물었지.
그건 누구나가 다 하는 일 아닙니까?
그러자 그 스님이 아저씨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하더구나.
그러지 않습니다. 당신은
앉아 있을 때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일어설 때 이미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와 여우숲의 조르바, 그리고 스님의 말씀에서 나는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불타는 열정과 눈부신 환희을 본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여자와 키스하면서 이 세상에 오직 자신과 여자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여우숲의 조르바는 과거의 영화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뛰어 넘어 현재가 행복한 삶을 찾아 숲으로 들어와 자신의 꿈을 일구었다. 스님이 말씀하신 앉아 있을 때 앉아 있고, 일어설 때 일어서고, 걸어갈 때 걸어가는 사람이 잘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과연 누구란 말인가?
2012년을 시작하면서 나는 to do list를 만들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지난 해에 내가 저지른 게으름과 실수를 반성하고 다가오는 한 해의 시간을 잘게 쪼개고 할 일을 촘촘히 구상하기 바빴겠지만 올해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올해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할 일을 하며 단순하게 사는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이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살고 소소한 행복을 만끽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원하던 삶은 내 곁에 와 있을 것이다.
당신이 만약 과거를 곱씹고 미래를 그리느라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조르바처럼 살아보기를 권한다. 그러나 당신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면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계속 도전해보라. (나 역시 약 1년 여의 연습 끝에 이제 조금 가능해졌다.) 오늘 밤에는 포도주 한 병을 따서 축배를 들어라.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어라. 악기를 꺼내 신명 나게 연주하라. 세상에 오직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사랑을 나눠라. 내일을 생각하지 말고 맘껏 즐겨라. 그 순간이 행복하다면 당신은 잘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