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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이야기이다. 서울에 처음 상경해 지하철을 탔을 때 신기했던 광경중 하나가 신문을 파는 이들의 모습이었다.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그들은 두터운 신문을 한 움큼 품에 안고 동일한 멘트로 외치고 다녔다.
“신문이요, 신문. 신문 사세요.”
바쁜 출근길 필요성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동전을 주며 신문을 구매 하였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 듯 어젯밤 취기에 잠못이룬 밤의 졸음을 꾸벅꾸벅 청하였다. 물론 나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객차 사이의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무어 그리 자신이 있는지 도도한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
아줌마였다. 특이하다. 여자도 신문 파는 사람이 있구나.
힘겨워 보였다. 두꺼운 종이 종이들이 세상의 고달픈 무게인양 그녀의 여린 팔을 에워싸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무어 그리 당당한지 고개를 쳐든다. 그리고 단호한 일갈을 외쳤다.
“조선 사람은 조선일보.”
시방 무슨 소리야. 유관순 언니도 아니면서.
“한국 사람은 한국일보.”
어라~
“스포츠는 살아있다. 스포츠 조선.”
^*^
놀라움. 파격이었다. 붐비는 전동차 안이지만 갑자기 그 신신함의 물결은 고요함으로 몰아쳤다. 그러자 하나둘 반응이 이어졌다. 누군가 손을 들었고 나도 그 대열에 합류 하였다.
“여기 신문 하나 줘봐요.”
“나도.”
애초에 필요가 없던 욕구가 생겨났다. 멋있었다.
“조선 사람은 조선일보. 한국 사람은 한국일보. 스포츠는 살아있다. 스포츠 조선.”
기존의 이구동성 똑같은 신문팔이 멘트에 식상해 있던 사람들에게는 한줄기 시원한 자극제로 다가왔던 것이다.
엄청난 블루오션 이었다.
뭘 했던 여자 분일까. 어떻게 그런 멘트를 만들어낸 것일까.
그녀를 보았고 관찰을 하였다. 모습을 보았고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짧은 시간이지만 머리를 굴렸다.
아마도 그녀는 남과는 다른 이런 영업적인 멘트를 개발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상품 판매를 잘하기 위해 무언가의 방책을 강구하다가, 고민 끝에 이런 멘트를 발견하였고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세상은 이처럼 관찰을 통한 잘 보는 이들의 몫이다.
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전직이 초등학교 국어 교사였다. 강물이 흐르는 시골 고즈넉한 마을의. 선생님은 투철한 직업관과 사명감에 힘입어 아이들에게 시를 쓰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그 또래가 그렇듯 산만하게 주위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에게, 어쩌면 재미없게 느껴지는 시를 쓰게 하는 것이 쉽지 많은 않았기에 작전을 짰다.
“철수야, 네가 사는 동네 주변에 나무들이 많지.”
아이는 둥그런 눈으로 쳐다본다. 당연한 것을 왜 물어 보냐는 말투로.
“네.”
“그럼 그중에서 네가 친구로 삼을만한 나무 하나를 내일까지 선정해오렴.”
다음날 선생님은 숙제 검사를 하였다.
“철수야, 친구 나무 정했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니요.”
선생님은 다음날 그 다음날 다시 확인사살을 하였고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그 과정에 지친 철수는 드디어 회심의 미소를 짓고 학교에 등교 하였다.
“철수야, 친구 정했니.”
“예. 집 앞에 있는 느티나무요.”
자신 있게 대답 하였다. 하지만 끝날 줄 알았던 선생님의 과제는 이어졌다.
“그럼 그 느티나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듣고 이야기 해줄래.”
아이는 미치고 폴짝 뛸 지경 이었다. 느티나무가 무슨 이야기를 한단 말인지.
다음날.
“철수야, 나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하더니?”
“(당연한 듯이) 아무 말도 하질 않던데요.”
“아니야. 잘 들어봐.”
반복된 질문 속에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선생님, 드디어 나무가 나에게 말을 건넸어요.”
“그래, 무슨 말을 하던.”
“(천연덕스럽게) 철수야, 학교 잘 갔다 와. 그러던데요.”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잘했구나. 그럼 조금 더 귀를 기울여 나무가 다른 어떤 말을 하는지 듣고 그것을 글로 써보렴.”
성공이라는 월계관을 쓰는 이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이처럼 사물을 주의 깊게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세상은 세밀하게 잘 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부자는 돈이라는 속성과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에 대해서 주의 깊게 관심을 두고 지켜본다.
시인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또 다른 눈으로 음미하며 그것을 읊조린다.
세일즈맨은 고객의 성향과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그 고객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지속적 탐색을 한다.
음악가는 음의 세상에 뛰어들어 탐조등의 불을 켠다.
미술가는 사람들 혹은 세상의 숨겨진 속성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캔버스에 붓을 놀린다.
조각가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해 과외의 것을 깎고 다듬고 망치질을 해나간다.
과학자들은 세균과 세포증식의 미지의 세계를 현미경으로 끊임없이 들여다본다.
샐러리맨은 상사의 책상위에 어떤 책이 놓여있는지를 파악하고 그의 관심사에 동행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함께 살아가는 여성들 그들은 어떠할까. 그녀들은 남성과는 달리 일상 속에서부터 이와 같은 일들을 즐겨 해내는 것이 생활화 되어있다.
“엄마 어제 내 과제물 해놓은 것 어디 있어.”
“응, 건넌방 서재위에 얹어 놓았어.”
“여보, 내 양말 어디 있지. 빨리 출근해야 되는데.”
“장롱 세 번째 서랍 안에 있어요.”
“아참, 줄무늬 넥타이는 어디 있지.”
“선반위에 당신이 어젯밤 놓아두었잖아요.”
"어미야, 된장 뚜껑이 보이질 않는구나.“
“어머니, 가스레인지 옆에 있어요.”
오늘도 어김없이 또 하루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아이와 남편은 똑같은 수준의 정신등급으로 날마다의 레퍼토리를 지겹지도 않는지 끊임없이 지저귀어댄다. 잔소리를 하는 것도 한두 번이다.
“제발 취침 전에 챙겨놓고 주무세요.”
하지만 그때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되는데 왜 그것을 찾지 못하는지.
속이 상하다. 내가 무슨 찾아주는 기계도 아니고. 내가 없으면 식구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나란 존재가 있어 가정이 돌아간다는 안도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시부모 아침상을 차려드리는 와중에도 아이들 가방과 남편 출근길 챙기랴 정신이 없다. 과제물, 도시락, 출장가방, 와이셔츠와 넥타이 등. 그러면서도 이처럼 묻는 질문에 척척 이다.
얼마나 살아야 그들은 혼자서 자신의 것을 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다.
왜 내 눈에는 뻔히 보이는 것들을 그들은 보지 못하는 것일까. 정말 못 보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눈썰미가 있는 것인지.
이에 남자들은 어쭙잖은 답변을 늘어놓곤 한다.
“집에서 한가하게 살림이나 살기에 그런 물건들을 적재적소에 찾아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당연한일. 정말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럼 아래와 같은 실험에 함께 참여를 해보자.
노트와 펜을 준비한다.
자리에 앉아 편안히 눈을 감고 500원 동전을 한번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라.
잘 떠올려 지는지. 아니면 눈앞이 가물가물한지.
500 아라비아 숫자가 나와 있는 것이 뒷면인 반면 앞면에는 무언가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무엇일까?
연상이 되는 분들은 펜을 들고 노트에 그림을 그려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지가 잘 떠올려지지 않을뿐더러 동물 이름 자체도 기억하질 못하는 분들이 많다.
아직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이번에는 질문을 하나 드린다.
아침에 출근시 구두를 신을 때 당신은 오른쪽부터 신는지 아니면 왼쪽부터 신는지.
와이셔츠를 입을 때 왼쪽과 오른쪽 어느 쪽부터 손이 들어가는지.
기억나는가?
뭐라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한 일이냐고. 허허참~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흔하게 보아 왔음직한 500원짜리 동전의 모습을 우리는 왜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내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평소에 관심 있게 대상을 보질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것이 연말 승진에 관련 있는 프로젝트의 열쇠 이었거나 또는 신상품 개발의 원천 이었거나 하였다면 어떠했을까.
우리가 흔하게 지나치는 것들 그 가운데에서 인생의 해법이 삶의 비법이 생존의 비법이 숨어있다.
그래서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를 통해 일찍이 이런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강조하곤 하였다.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작은 것들 그것에서 발견이 나오고 발명이 창출된다.
누구 하나가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고 관찰을 할 때 그것은 새로운 생명이 되고 삶이된다.
학창시절 외웠음직한 김춘수님의 꽃이라는 시를 떠올려 보노라면 두 번째 마디에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 주었다는 것은 그 상징 자체에서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고 그 의미성에 본질을 꿰뚫어 호명을 하였다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시댁과 친정의 대소사와 작은 것 하나 하나까지를 챙기고 준비한다.
남자라면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을 세심히 무언가를 챙기고 끊임없이 그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신기할 정도로.
몇 년 전 조관일 님의 <비서처럼 하라>라는 책이 회자가 된 적이 있었다. 삼성그룹 사장단의 47%가 비서실 출신이라는 데이터를 내세우며 비서들의 행동방식에 주목한 것이었다. 저자는 CEO의 측근에서 그들의 마인드와 판단력, 업무습관, 생활태도까지 고스란히 카피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바로 '비서'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 비서라는 직함의 역할이 여성들에게서는 선천적인 DNA처럼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 자신의 사고와 주관보다는 상사를, 남편을, 시댁을, 아이들을 먼저 우선시하고 그들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처해 나간다. 놀랍지 않는가.
잘 보아야 한다. 형상과 생김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가까이에서 보이질 않으면 멀리에서라도 그 사물의 속성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을 하여야 한다.
하지만 때론 그것이 귀찮게 여겨질 때도 있다.
“자기야, 오늘이 우리 둘이 만난 지 며칠째 인줄 알아.”
이런 말하면 남자는 미친다. 할 일이 참 없다는 생각도 든다.
‘만났던 날짜를 헤아리고 있었단 말이야.’
그 정성과 그 세심한 기억력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성가시기도 하다.
“우리가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알아.”
암담해진다. 특히 나처럼 길치 이거나 예전 기억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대답을 하여야 하는지 가슴이 답답해진다.
“덕수궁 돌담길? 아니야, 광화문? 그것도 아닌데.”
“신촌 이구나.”
“땡.”
그런데 말이다. 혹시나 그것이 살아가는데 무어 그리 중요한지라고 아직도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