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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13일 18시 11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박지원(朴趾源, 1737 ~ 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사상가, 소설가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는 연암(燕巖),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 계열로, 상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있다.

 

박지원은 1737(영조 13) 한양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 야동(冶洞))에서 박사유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에 조부가 사망했다.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갔다.

 

22세 때부터 원각사 근처에 살 때 박제가·이서구·서상수·유득공 등과 이웃하여 깊은 교우를 맺었다. 홍대용과도 사귀면서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으며(30세 때), 북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법을 토론하였다. 29세 때 과거에 낙방한 이후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박지원은 청년 시절에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하여 불면증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璚閣外傳)≫이란 이름으로 편찬했다. 1777(정조 1) 권신(權臣) 홍국영에게 벽파(辟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이듬해 황해도 김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다. 연암이란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때 그는 개성유수로 부임한 교우 유언호에게서 생활하는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1780(정조 4) 44세 때 삼종형 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북경을 갔다. 이때 건륭제가 열하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박지원은 일행과 함께 청나라 황제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까지 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달된 사회를 보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는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이용후생에 관한 그의 구체적 견해가 담겨 있다.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실학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의 실학 사상은 ‘이용후생’을 한 다음에 정덕(正德)을 할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 도학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근본(도덕)보다 말단(실용)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1786 50세 때 음보로 처음 출사하여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 감역(監役)에 제수되고, 1789 사복시 주부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제릉령(齊陵令), 1791(정조 15) 한성부 판관을 거쳤다. 이후 안의(安義) 현감 · 면천(沔川) 군수(1797) · 양양(襄陽) 부사(1800) 등 지방 수령으로서 자신의 이용후생론을 실험하고 그 경험을 지식으로 구체화하였다.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 풍요하게 하기 위한 이용후생론을 제시하며, 조선 사회의 편견과 타성의 폐단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그 개선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배청의식 속에서 수용되기는 어려웠다. 정조 15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직접 응하지는 않았다. 정조 21(1797)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책을 지어 정조에게 바쳤으며, 1801 치사(致仕)하고 물러났다.

 

순조 5(1805) 10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이 있는 장단(長湍)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그의 묘는 장단군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있다. 우의정을 지냈던 그의 손자 박규수는 그의 실학 사상을 계수하여 개화 사상을 열어준 인물로 비중이 크다. 그의 문집 《연암집(燕巖集)》은 1900에 비로소 초록 형태로 처음 서울에서 공간될 만큼 간행이 늦었다. 1910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의 시호를 받았다.

 

박지원의 문학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그만의 독특한 글투를 지향했다. 이러한 그의 글쓰기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연암체’라고 불렀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일러 ‘조선풍(朝鮮風)’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노래’란 뜻이다.

 

그는 자신의 실학 사상을 소설을 통해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 자신이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 양반들이 실속 없이 허울 좋은 이름만 내세우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10편의 한문 소설을 지어 독특한 해학으로써 이들을 풍자하였다. 양반전〉은 조선 왕조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사() 계급의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으며, 허생전〉은 북벌론의 허위의식을 배격하면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또한 〈광문자전(廣文者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등은 양반 계층과 도학자의 도덕적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여 사회 개혁 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로운 성정(性情)을 표현하기 위해 신문체를 수립함으로써 이덕무, 박제가 등의 한학신파의 4가를 낳게 했으며 문학을 통해 양반계급의 해체를 통찰하고 이를 비판, 새로운 현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문학은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사실주의 문학을 수립했다. 청나라 문학인들과 사귀며 정치·음악·천문·경의(經義) 등에도 관심을 갖고 연경에 갔다온 기행을 쓴 《열하일기》의 대문장 26권을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마장전>,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의 단편소설을 창작하였는데, 비록 그 표기가 한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빛나는 걸작들이다. 그는 <양반전>을 통해 몰락해 가는 조선 사회를 풍자했으며, <호질>에서 유학자의 전형적인 위선을, <민옹전>에서 몰락해가는 무인들의 울분을 반영하여 당시 사회의 이면사(裏面史)가 되어준다. <허생전>에서는 전시대의 허균이 쓴 《홍길동전》과 함께 현실과 유토피아 세계를 교착시키며 날카로운 사회비판의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은 근대적 비판의식의 소산으로, 여러 가지 인간 유형을 통해 리얼리즘의 전통을 이룩하였고, 독특한 풍자와 해학으로써 양반계급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등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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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고전평론가. 1960년 강원도 정선군 함백 출생. 가난한 광산촌에서 자랐지만, 공부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신 부모님 덕분에 박사학위까지 무사히 마쳤다. 대학원에서 훌륭한 스승과 선배들을 만나 공부의 기본기를 익혔고, 지난 10여 년간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에서 벗들을 통해 ‘삶의 기예’를 배웠다. 덕분에 강연과 집필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1 10월부터 ‘수유+너머’를 떠나 또 다른 공부와 공동체를 실험 중이다. 향후 활동할 공간은 〈감이당〉이다. 〈감이당〉은 ‘몸, , 글’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인문의역학’을 탐구하는 ‘밴드형 코뮤니타스’다.

 

그동안 낸 책으로, 근대성 3종세트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2001, 책세상), 『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2006, 휴머니스트), 『이 영화를 보라』(2008, 그린비) 등과 『열하일기』 관련 3종세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2003, 그린비),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2007, 아이세움),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상, (김풍기/길진숙 공역, 2008, 그린비), 달인 3종세트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2007, 그린비),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2008, 그린비),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2010, 그린비), 그리고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2009, 사계절),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2011, 그린비) 등이 있다.

 

[참고자료]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C%A7%80%EC%9B%90_(1737%EB%85%84)

네이버 책 저자 소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51024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문구

 

개정판을 내며

 

P6 연암은 서재에 앉아 머리로 사유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길이 곧 글이었고, 삶이 곧 여행이었다. 연암이 지나갈 때마다 중원천지에서 침묵하고 있던 단어들이, 문장들이, 그리고 이야기들이 잠에서 깨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연암은 그것들을 무심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절단, 채취했다. 걸으면서 쓰고, 쓰기 위해 다시 걸었던 연암, 그리고 그의 분신이기도 한 열하일기. 나는 두 번의 여행을 통해 책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열하일기를 만난 셈이다. 그런 까닭에 내게 있어 열하일기는 여전히 가슴벅찬 설레임의 대상이다.

 

P9 연암 박지원은 천재다. 내 지적 범위 내에선 그 견줄 바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지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매혹시켰다. 다름 아닌 그의 유머 때문이다. ‘유머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가슴에서 나온다. 말하자면, 그는 천재인데도 가슴이 따뜻한 천지간에 보기 드문 사람인 것이다.

 

프롤로그_여행, 편력, 유목

 

P20 이질적인 마주침과 신체적 변이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떤 화려한 여행도 타인에게 과시하기 위한 패션혹은 레저이상이 되기 어렵다. 하나의 문턱을 넘는 체험이 되지 않는 여행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여행에 대한 나의 평가는 대충 이렇다.

 

여행이 주로 지리적 이동을 통해 낯선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면, 편력은 삶의 여정 속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이 부딪히는 것을 말한다. 고대 희랍 철학자 에피쿠로스식으로 말하면, 직선의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편위, 이른바, 클리나멘이 그것인 셈. 돌연 발생하는 방향 선회, 그것이 일으키는 수많은 분자적 마주침들, 편위란 이런 식으로 정의될 수 있을 터, 내가 열하일기를 만나기까지의 과정도 이런 우발적인 편위들을 통해서였다.

 

P26 거기에 담긴 것은 스쳐 지나가는 여행이 아니라, 이질적인 사유들이 충돌하는 장쾌한 편력이자 대장정이었다. 파노라마적 관광도 아니고, 정처없이 떠도는 유랑도 아닌, 마주치는 것마다 강렬한 악센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공간적 편력. 그래서 그것은 더 이상 여행이라는 이름으로도, 편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릴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것은 오직 유목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릴 수 있는 것이었다.

 

P27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 신비주의 스콜라 철학자 빅톨 위고

 

 

P28 그러나 열하일기는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이라는 장을 전혀 다른 배치로 바꾸고, 그 안에서 삶과 사유, 말과 행동이 종횡무진 흘러다니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흐름 속에서 글쓰기의 모든 경계들, 여행자와 이국적 풍경의 경계, 말과 사물의 경계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카프카라면 아마 이런 경지를 이렇게 표현했으리라.

 

인디언이 되었으면! 질주하는 말잔등에 쨉싸게 올라타,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거듭거듭 짧게 전율해 봤으면, 마침내는 박차를 내던질 때까지, 실은 박차가 없었으니까, 마침내는 고삐를 집어 던질 때까지, 실은 고삐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눈 앞에 보이는 땅이라곤 매끈하게 풀이 깎인 광야뿐일 때까지, 이미 말모가지도 말대가리도 없이.

-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 전문

è  내가 카프카의 이 소설을 읽었면 이런 통찰을 할 수 있었을까?

 

P29 박차와 고삐, 말모가지와 말대가리의 경계가 없는 인디언의 말달리기. 인디언과 말, 그리고 광야의 경계조차 사라진 고요한 질주’! 유목민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강렬한 액션의 흐름뿐이다. 그 흐름 속에서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아니, 한 시인의 말을 빌리면,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따라서 열하일기는 일회적이고 분석적인 독서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읽을 때마다 계속 다른 장을 펼쳐 보인다. 계속 다르게 사유하도록 독자들을 부추긴다. 그래서 열하일기를 읽을 때마다 내 지적 편력기에는 계속 새로운 이정표들이 그려진다. 나도 이제 편력이 아니라, 유목을 하고 싶다! 내 글쓰기도 유목적 지도가 되었으면! 삶과 지식의 경계가 사라져, 삶이 글이 되고 글이 삶이 되는 노마드가 되기를! 어느덧 내 욕망의 배치는 이렇게 바뀌고 말았다. 열하일기가 준 가장 큰 선물

 

1나는 너고 너는 나다

 

P40 지난 계유, 갑술년 사이에 내 나이는 열에 일고여덟 살이었다. 병에 오랫동안 시달리어 음악, 서화 혹은 칼, 거문고, 골동 등 모든 잡물을 제법 좋아했을 뿐더러 더욱이 지나는 손님을 모아놓고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옛이야기로써 마음을 여러 모로 위안시켰으나, 그 깊숙이 스며든 울적한 증세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민옹전>

 

P41 이 우울증은 사나흘씩 잠을 못 이루는 불면증에다 음식만 보면 거부반응을 보이는 거식증까지 동반하는, 한 마디로 중증이었다. 음악, 서화, , 거문고 등에 탐닉하거나 재밌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달래보아도 별반 효과가 없을 정도로 병의 뿌리가 깊었다. 사춘기의 통과재의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젊은 날의 이유 없는 방황이었을까. 원인이 뭐든 중요한 건 청년 연암의 내부에 참을 수 없는 동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입신양명이라는 제도적 코스와의 격렬한 마찰음이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듯 질병은 다른 삶을 살라는, 문턱을 넘으라는 몸의 신호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è  주류 가문의 촉망받는 천재가 혈기왕성한 시절에 우울증을 앓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나의 우울증도 다른 삶을 살라는 신의 메시지였을까?

 

글씨기를 치료의 방편으로 삼은 건 그렇다 치고, 글의 소재들이 주로 시정의 풍문, 그것도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야담들이라는 건 정말 희한하기 짝이 없다. 성인들의 말씀이나 현자의 지혜를 찾아 다니는 게 아니라 시정에 떠도는 개그를 통해 마음을 수양하다니. 이런 발상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P43 그는 자신이 밟아 가야 할 홈 패인 공간이 주는 무거움 때문에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그런 중력장치에서 벗어난 존재들과 접속함으로써 치유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닐지.

 

P64 명말 양명좌파의 기수였던 이탁오는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라며 배움과 우정의 일치를 설파한 중세 철학의 이단자다.

 

P66 이덕무의 다음 글은 동서고금을 관통하여 친구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아포리즘에 속한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 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 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선귤당농소>

 

 

P82 열하일기에는 열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강희제 이후 역대 황제들이 거처했던 하계별궁의 하계별궁의 소재지로, 북경에서 약 230킬로미터 떨어진 하북성 동북부, 난하지류인 무열하 서안에 위치한다. 열하라는 명칭은 이 무열하 연변에 온천들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한 것. 이 곳은 한족과 이민족 간의 격전지로 유명한, 장성 밖 요해의 땅이자 천하의 두뇌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황제의 열하행은 두뇌를 누르고 앉아 몽고의 목구멍을 틀어막자는고도의 정치적 포석의 일환이었다. 건륭환제의 치세에 이르러 국경도시로서 융성번화의 극치를 달렸던 바, 황제는 피서산장이라 불리는 장대한 별궁을 지어 놓고는 매년 순행하여 장기 체류하곤 했다.

 

 

P84 변방의 외부자 연암, 만주족 오랑캐가 통치하는 중화, 그리고 열하라는 낯선 공간 - 열하일기는 이 상이한 계열들이 접속해서 만들어 낸 하나의 주름이다.

 

P88 열하일기가 당대 지식인들을 당혹스럽게 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보다 무수한 흐름이 중첩되는 유연성에 있을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언제 어디서나 물음을 구성할 수 있는 도저한 열정. ‘산천, 성곽, 배와 수레, 각종 생활도구, 저자와 점포, 서민들이 사는 동네, 농사, 도자기 굽는 가마, 언어, 의복 등등에서 역사, 지리, 철학 등 고담준론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는 박람강기

 

P97 잠깐 덧붙일 사항 하나. 연암처럼 태생적으로 밝고 명랑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슬프도록 아름다운 장송곡을 썼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언뜻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 그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슬픔의 밑바닥을 본 자만이 유쾌하게 비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빛나는 명랑성과 깊은 애상은 상통하는 법, 니체의 아포리즘을 빌리면 산정과 심연은 하나이다’.

 

P101 짜증나는 업무를 축제의 장으로 바꿔버리는 능력! 여기서도 그의 빛나는 명랑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고을을 다스리는 그의 통치철학은 지극히 단순명료하다. 첫째, 비록 내일 당장 그만두고 떠날지라도 늘 1백 년 동안 있으면서 그 고을을 다스린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둘째, 그러나 뜻에 맞지 않는 바가 있으면 헌신짝 버리듯 흔쾌히 그만두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머무름과 떠남에 집착과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2 1792, 대체 무슨 일이? - 열하일기와 문제반정

 

P111 사실 명청문집의 유행과 서학의 유포는 정조시대의 두 가지 뇌관이었다. 전자가 주로 연암그룹 및 노론 경화사족과 관련된 반면, 후자는 다산이 속한 남인 경화사족과 깊이 연계되어 있다. 그런데 정조는 일관되게 후자를 비호하는 한편, 전자에 대해서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과민반응을 보였다.

 

P115 서학으로 향하는 시선들을 계속 패사소품에 묶어 놓음으로써 노론 벌열층을 길들이고, 그에 기반하여 남인과 노론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정조의 정치적 포석이었던 것이다.

 

P117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이나 광해군을 실각시킨 인조반정, 그리고 문체반정. 조선사를 장식하는 반정은 이 세 가지가 전부다. 물론 앞의 두 가지와 나머지 하나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다. ‘유혈의 쿠테타무혈의 문화혁명’(?)이라는 점 말고도,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은 권력 밖의 집단이 거사를 일으킨 데 비해, 문체반정은 국왕이 직접 나서서 사건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P118 그렇다면 대체 문체가 통치와 무슨 연관이 있길래 국왕이 손수 검열을 진두 지휘한단 말인가? 문체는 한 시대가 지니는 사유체계 및 인식론의 표현형식이다. 그것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이나 매개가 아니라 내용을 선규정하는표상의 장치다. (중략) 말하자면, 문체는 사유가 전개되는 초험적 장인 셈이다.

 

P120 육경의 문장과 사마천과 반고로 대표되는 선진양한의 문장 및 한유와 소식 등 당송 팔대가의 문장이 바로 거기에 해당된다. 이것은 사대부들의 사유 및 신체를 이 표상의 범위 안에 묶어 놓는다는 점에서 체제를 유지하고, 지배적인 담론을 재생산하는 유효한 장치로 기능하였다.

 

P123 결국 정조가 반정, 바른 곳으로 되돌린다할 때의 정()의 의미는 간단하다. 우주와 역사에 대한 깊고도 원대한 사유, 중후한 격식을 갖춘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경학의 고문이 바로 완벽한 모델이다. 소품은 경박한 스타일 때문에, 소설은 황당무계한 허구성 때문에, 고증학은 쪼잔한 시야 때문에 고문의 전범들을 와해시킬 우려가 있다.

 

P130 고문으로 표상되는 거대담론이 사라진다면, ()계급은 대체 무얼 의지해 통치이념을 구축한단 말인가. 그의 안목을 틀리지 않았다. ‘작은 것들의 향연; 속에서 고문의 권위는 차츰 해체되어 갔다.

 

P133 글이란 읽는 이들을 촉발하는 공명통이어야 한다. 찬탄이든 증오든 공명을 야기하지 못하는 글은 죽은 것이다.

 

그의 글이 언제나 거센 회오리를 몰고 다닌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1만 길이나 되는 빛이 뻗어나와 가슴을 툭 트이게 한다.” 이런 열렬한 예찬자가 있는가 하면, 격식에 사로잡힌 고문주의자들은 궤변으로 세상을 농락한다며 격렬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P156글자는 비유컨대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이고, 전장(전거를 인용하는 것) 고사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 운으로 소리를 내고, 사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이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어 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올라가 적을 사로 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 잡지 않는 것이고, 여움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병법을 잘하는 자는 버릴 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한 글자가 없는 것이다….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과 장의 높고 낮음을 노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소단덕치인>

 

글쓰기를 전쟁의 수사학에 빗대고 있는 이 글이야말로 동서고금을 가로질러 단연 독보적인 문장론이다. <소단적치인>이란 제목도 흥미롭다. ‘소단은 문단이란 의미고, ‘적치는 붉은 깃발이란 뜻이니, 우리 말로 옮기면 문단의 붉은 깃발을 논함정도가 된다. 병법에는 고정된 룰이 따로 없다. 병법을 달달 왼다고 전투에 승리하는 건 결코 아니다. 아니, 도리어 그러다 망한 케이스가 더 많다. 승패를 좌우하는 건 병법이 아니라, ‘를 파악하는 능력일 뿐이다. 글을 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문장에 어떤 종류의 규범이나 초월적 체계가 있을 리 없다. ‘합하여 변하는 기미’, 곧 때에 맞는 용법이 있을 뿐이고,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 곧 효과와 울림이 있을 뿐이다.

 

P138 ‘연암체가 과연 그러하다. 그의 글을 소설과 소품, 고문과 변려문 등이 자유자제로 섞이는 한편, 천고의 흥망성쇠를 다룬 거대담론과 시정의 우스갯소리, 잡다하고 황당한 이야기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하나로 분류되는 순간, 그 그물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곤 한다. 순식간에 얼굴을 바꿔버리는 변검처럼. 그리고 그 변화무쌍한 얼굴들의 각축장이 바로 열하일기.

 

P141 『열하일기』는 서울대 규장각 소장본이고, 『연암집』은 단국대 박물관 소장본이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그리고 촌살살인의 아포리즘과 우주적 비전으로 가득찬 『연암집』.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의미있는 책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이 둘을 선택할 것이다. 나아가 이 난만한 포스트모던시대를 용감무쌍하게 돌파할 수 있는 동력 또한 그 속에 있다고 굳게 믿는다.

 

P143 그런 점에서 『열하일기』는 텍스트 전체가 미완성의 벡터를 지닌다. 그러나 여기서 미완성은 결여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완결된 체계를 넘어 무한히 뻗어간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니체가 차라투스투라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완결된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다고 할 때, 그 찬사는 『열하일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3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P167 연암은 달밤을 사랑했다. 달빛 속에서 친구를 만났고, 달빛을 받으며 술잔을 기울였고, 달빛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춤을 추기도 했다. 고독한 잠행자 연암에게 있어 달빛보다 더 든든한 은 없었을 터, 때론 그 자신이 달빛의 일부이기도 했다.

è  나의 스승도 달빛을 사랑하신다. 여행 날짜를 정할 때는 특히 달의 차고 기움을 가리신다. 스승도 달빛의 일부인 것일까?

 

P200 황대경씨의 글이 사모관대를 하고 패옥을 한 채 길가에 엎어진 시체와 같다면, 내 글은 비록 누더기를 걸쳤다 할지라도 앉아서 아침 해를 쬐고 있는 저 살아 있는 사람과 같다.

 

P201 달이 지새면 온 하늘에 총총한 별들이 모두 깜박거리고 마을 닭이 서로 홰를 친다. 몇 리를 못 가서 안개가 보얗게 끼어 큰 별이 삽시에 수은 바다를 이루었다. 한 떼의 의주 장삿군들이 서로 지껄이며 지나는데, 그 소리가 몽롱하여 마치 꿈속에 기이한 글을 읽는 것처럼 분명하지는 않으나 그 영검스러운 경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조금 뒤에 하늘빛이 훤해지며 길에 늘어선 수많은 버드나무에서 매미가 한꺼번에 울기 시작한다. 저들이 그처럼 알리지 아니한들 이미 낮더위가 몹시 뜨거운 줄을 모르랴. 들에 가득했던 안개가 점차 걷히고 먼 마을 사당 앞에 세운 깃발이 마치 돛대처럼 보인다. 동쪽 하늘을 돌아보니 불빛 구름이 용솟음치며 붉은 불덩이가 옥수수 밭 저편에 솟을 듯 말 듯 천천히 온 요동벌에 꽉 차게 떠오른다. 땅 위에 오가는 말이며, 수레며, 나무며, 집이며, 털끝같이 보이는 것이 불덩이 속에 잠기기 시작했다. <성경잡지>

 

P206 니체가 말했던가? 인간은 은유적 동물이라고. 니체의 의도는 인간의 말은 원초적으로대상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그렇다면 수사학이란 언어의 본래적 특질이 가장 빛나는 영역이라고 해야 할 터, 이처럼 연암은 변화무쌍한 중원의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은유적 동물로서의 능력을 맘껏 발휘했던 것이다.

 

P208 뜻을 얻은 곳에 두 번 가지 말고, 만족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라.

 

P224 벼슬살이도 역시 이와 같아서 바야흐로 위로 자꾸만 올라갈 때엔 일계, 반급이라도 남에게 뒤떨어질까 보아서 혹은 남을 밀어젖히고 앞을 다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곳에 이르매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기니 외롭고 위태로워서 앞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길이 없고, 뒤로는 천길 낭떠러지인 까닭에 다시 올라갈 의욕마저 끊어졌을 뿐더러 내려오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법이니 이는 고금이 없이 모두들 그러한 이가 많을 것이다.

è  연암이 부와 명성을 향해 질주하는 눈먼 현대인들에게 한 말. 나 또한 명심!

 

P225 “이 금은 반드시 길 옆에서 굴러다니다가 또 다시금 딴 사람이 주워 얻게 되었을 것이요, 이렇게 주워 얻은 자는 가만히 하늘에 감사를 드리면서도 이 금이 무덤 속에서 파내었고, 독약을 먹은 자들의 유물이며, 또 앞사람 뒷사람을 거쳐 몇 천 몇 백 명을 독살했을지 몰랐을 것이다.” 문득 이 대목에서 나는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를 묻히고 출현한다는 맑스의 전언이 떠올랐다. 연암이 보기에도, 돈이란 원초적으로 피투성이를 한 유령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부에 대한 연암의 메시지는 이렇다. “원하건대 천하의 인사들은 돈이 있다 하여 꼭 기뻐할 것도 아니요, 없다고 하여 슬퍼할 것도 아니다. 아무런 까닭 없이 갑자기 돈이 앞에 닥칠 때는 천둥처럼 두려워하고, 귀신처럼 무서워하여 풀섶에서 뱀을 만난 듯이 머리끝이 오싹하게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232 “세상에 착한 마음을 지닌 형제들에게 말하노니, 헛세상에 꿈 같은 몸과 거품 같은 금과 번개 같은 비단이 인연을 맺어서 기운에 따라 잠시 머무를 뿐이니, 원컨대 이 거울을 표준삼아 덥다고 나아가지 말고, 차다고 물러서지 말며, 있는 돈을 흩어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지어다.” 몸과 금과 비단은 잠시 머무르는 것일 뿐이니, 헛된 집착을 버리고 세상을 위해 두루 베풀라는 것이다.

 

P238 ‘달라이라마지혜의 바다란 뜻으로 특정 개인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일종의 제도적 명칭이다. 달라이라마가 단순히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통치권자로 임명된 것은 명나라 때부터인데, 그것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건 환생이라는 믿음이 제도적으로 승인되었기 때문이다.

 

연암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이 제도가 운용되는 방식은 이렇다. 티베트의 다른 지역에는 승왕들이 처자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오사장에서만은 법승들이 서로 이어가며 통치를 했다. 명나라 중엽부버 중국으로부터 봉호를 받지 않고, 항상 대법왕(달라이라마), 소법왕(판첸라마)이 있어 대법왕이 죽을 때는 소법왕에게, ‘아무데 아무개의 집에 아이가 태너날 때 이상한 향기가 날 것이니 그것이 곧 나다하고 예언을 한다. 대법왕이 죽고 나면 과연 그 아이가 태어나게 되고, 그러면 궁중에서 온갖 예물을 갖추어 그 아이를 수건에 싸서 맞아온다. 그 아이가 성장해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는 소법왕이 대신 통치를 한다. 그런 식으로 계속 그 제도가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참고로 지금 달라이라마인 텐진 가쵸는 14대째로, 그 또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여러 가지 시험을 겨쳐 13대 달라이라마의 환생자로 결정되어 5살 때 왕위에 올랐다. <쿤둔>이라는 영화에 그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4장 범람하는 유머, 열정의 패러독스

 

P249 연암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음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간다. 당쟁에 연루된 사람들은 이 기회를 놓치치 않고 연암을 자기 당파에 끌어들이려고 다각도로 접근을 시도했다. 그럴 때 마다 연암은 우스갯말로 얼버무리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듯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교묘하게 그 파장으로부터 벗어나곤 했다. 만약 꼿꼿한 자세로 시비를 논하거나 아니면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을 경우, 안 그래도 비방이 끊이지 않았던 그가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을 터이다.

è  스승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 일은 명료하게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모호하게. 연암 또한 그러한 태도로 위기를 벗어났었나 보다. 매사를 너무 철저하게 선을 그으려는 내가 배워야 할 태도.

 

한 지인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연암처럼 매서운 기상과 준엄한 성격을 지닌 사람에게 만일 우스갯소리를 해대며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세상에 위태로움을 면하기 어려웠을 게야그러니 유머야말로 그에게는 난공불락의 정치적 전술이었던 것이다.

è  나의 유머도 전술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할텐데!!

 

물론 당파간 경쟁에만 그것을 활용한 건 아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인데도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힘은 들면서도 매듭짓기 어려운 경우에는 문득 우스갯소리를 하여 상황을 완화시킴으로써 분란을 풀곤 했다. 또 일반 백성을 계발할 때, 심란해 하는 친구를 위로할 때도 그는 유머를 다채롭게 구사했다.

è  심각한 상황을 완화하는 데는 유머만한 특효약이 없다. 나의 스승이 이를 잘 하시고, 한 모임의 회장님 또한 잘 하심을 보았다.

 

언젠가 한 고을의 원님이 되었을 때, 싸움질을 일삼는 평민이 있었다. 한 아전 하나가 몽둥이를 쥐고 들어와 그 평민이 몽둥이로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호소하자, 연암은 웃으며 각수장이를 불러오라고 한 뒤, 몽둥이에 이런 글을 새겼다.

 

P250 오호라, 이 큰 몽둥이 / 그 누가 만들었나? 아무개가 만들었지 / 주정과 행패 / 너에게서 나왔으니 / 너에게로 돌아가야지 / 이 이치는 피할 길이 없으니 / 상해죄로 다스릴 일/ 이 몽둥이 걸어두세 / 저 마을 문 곁에다가 / 회개하지 않는다면 / 함께 이 몽둥이로 때려주세 / 사또가 그걸 하락함을 / 이 글로 증명한다.

 

그에게 있어 유머는 중세적 엄숙주의를 전복하면서 매끄럽게 옮겨 다니는 유목적 특이점이자 우발점의 기법이었다.

 

P252 그가 웃음을 만들어내는 원리는 지극히 간단하다. 보다시피 웃음이란 단조로운 리듬을 상큼하게 비튼 불협화음이요, 고정된 박자의 흐름에 끼여드는 엇박이다. 판소리로 치면, 적재적소에 끼어드는 추임새;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연암은 말의 리듬, 삶의 호흡을 기막히게 터득한, 일종의 예인이다.

 

P254 그의 유머 능력은 <호질>에서 특히 돋보인다. 그의 상점의 벽 위에 한편의 기문을 발견하고 그것을 베끼기 시작한다. 동행한 정군에게 부탁하여 그 한가운데부터 베끼게 하고 자신은 처음부터 베껴 내려간다. 주인은 당연히 이상스럽다.

 

선생은 이걸 베껴 무얼 하시려오.”(주인)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 번 읽혀서 모두들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 하려는 거요. 아마 이걸 읽는다면 입 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갈 것이며, 튼튼한 갓끈이라도 썩은 새끼처럼 끊어질 것이외다.”(연암)

 

P258 반대 케이스도 있다. “역졸이나 구종군 따위가 배운 중국말가운데 고린내, 뚱이 등이 있다. 고린내는 냄새가 심하다는 뜻인데, 고려 사람들이 목욕을 하지 않아 발에서 나는 땀내가 몹시 나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고, 뚱이는 동이의 중국음으로 물건을 잃었을 때, 동이가 훔쳤다는 의미로 쓴 것이다. 그런데 조선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한 채 나쁜 냄새가 나면, ‘아이, 고린내하고, 어떤 사람이 물건을 훔쳤다고 생각될 때에는, ‘아무개가 뚱이야’”한다. 이처럼 대개의 여행기가 그렇듯이 『열하일기』에는 이질적인 언어들이 일으키는 충돌이 곳곳에서 속출한다.

 

P259 처음 배울 때는 그저 사서삼경의 장구만 배워서 입으로 외고, 외는 것이 능숙해진 다음 스승께 다시 그 뜻을 배우는 걸 강의라 한다.

 

P273 육상산은 주자와 동시대 철학자로 훗날 양명학이라 불리는 학설을 창시한 인물이다. 주자의 성리학에 맞서 을 테제로 표방한 까닭에, 그의 학문을 심학이라고도 부른다. ‘반은 주자요, 반은 욕상산이라는 말은 서로 입장이 대립되는 두 학설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당시 유학자들의 얄팍한 처세술을 나름대로 짚고 있는 셈이다.

 

P282 이런 식의 유영이 가능하려면 자신을 아낌없이 던질 수 있는 당당함이 요구된다. 자의식 혹은 위선이나 편협함이 조금이라도 작용하는 한, 이런 식의 대도는 불가능하다. 웃음이란 기본적으로 자아와 외부가 부딪히는 경계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에서 말했듯이,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웃음이야말로 그 꽃들 가운데 하나다.

 

P283 따라서 이 유쾌한 유머 행각들은 어떤 대상과도 접속할 수 있는 유목적 능력, 혹은 자신을 언제든 비울 수 있는 무심한 능동성의 소산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그는 비어 있음으로 해서 어떤 이질적인 것과도 접속할 수도 있었고, 그 접속을 통해 홈패인 공간매끄러운 공간으로 변환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그 위에서 종횡무진 뛰어 놀았던 것이다. 마치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처럼.

 

P284 무엇보다 그의 유머에는 언제나 패러독스가 수반된다. 주지하듯이 패러독스, 곧 역설은 통면의 두 측면인 양식(bon sens)과 상식에 대립한다.

 

봉상스, 그것은 한쪽으로만 나 있는 방향이며, 그에 만족하도록 하는 한, 질서의 요구를 표현한다. 그에 반해 역설은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는 두 방향 혹은 알아보기 힘들게 된 동일성의 무의미로서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패러독스란 봉상스의 둑이 무너진 틈을 타고 범람하는 앎의 새로운 경지이다. 의미와 무의미의 사이 혹은 의미의 전도, 그것이 바로 패러독스다.

 

P285 드넓은 평원을 보는 순간, 그 엄청난 스케일에 압도당하여 연암을 이렇게 독백한다. “내 오늘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 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라고. 삶의 통찰이 담긴 멋진 멘트다.

 

P290 소리와 빛은 외물이니 외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바고 듣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 이 같거든, 하물며 인생이 살아가는데 있어 그 험하고 위태로운 것이 강물보다 심하고,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이 되는 것임에랴.

 

P291 “눈이란 그 밝은 것을 자랑할 것이 못 된다. 오늘 요술을 구경하는데도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해서 속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는 자가 제 자신을 속인 것이다라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알게 된다, 혹은 자신보다 더 큰 적은 없다, 자신이 보는 것이 곧 자신의 우주다, 등등. 곱씹을수록 삶에 대한 다양한 지혜가 산포되어 간다.

 

P303 청문명의 핵심은 기왓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

 

P315 요컨데 북벌은 단지 명분으로만, 이데올로기로만 지탱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망상일수록 더더욱 견고해지는 것이 도그마들의 숙명이다. 연암은 그 숙명적 공허함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것이다. 내부 깊숙이 파고 들어 그 몸통을 먹어치우는 수법을 통해.

 

5장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P319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을 아껴 여룡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 또한 여의주를 가지고 스스로 뽐내고 교만하여 저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선귤당농소>

 

이 글은 연암의 벗이자 제자인 이덕무의 것으로, 연암이 재인용하면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회자된 아포리즘이다. 요점은 척도를 고정시키지 말라는 것. 진리 혹은 가치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놓이는 자리, 곧 배치에 따라 달라지는 까닭이다.

 

P322 한 마디로 용맹과 지혜를 두루 갖춘 셈인데, 그래서 불교에서 코끼리를 가장 높은 수행의 상징으로 삼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P236 세계를 주재하는 외부적 실체란 없다. 고정불변의 법칙 역시 있을 수 없다. 부상하게 변화해 가는 생의 흐름만 있을 뿐! 그런데도 사람들은 백로를 보고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보고서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절로 괴이할 것이 없건만 자기가 공연히 화를 내고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온통 만물을 의심한다. 이거야말로 번뇌를 자초하는 꼴인 셈이다.

 

P331 “자기가 혼자 아는 것은 언제나 남이 알아주지 않아 걱정이고,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은 남이 먼저 앎을 미워한다. 이명은 병인데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고, 코골기를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 주는 것에 성을 낸다. 그러므로 이명을 듣지 않고 내 코골기를 깨닫는다면 작가의 뜻에 거의 가까워질 것이다

 

사이의 은유들을 통해 그가 의도하는 바는 어떤 해결책이나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계속 물음을 구성해내라는 것, 어떤 대상이든 입체적으로, 다층적으로 사유하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이면에 숨겨진 성격을 보려 하고, 그것을 인접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이 있기 때문이다.

 

P341 하지만 주자가 자신의 학문을 구성하는 과정은 실로 역동적이다. 불교의 선에 깊이 침잠했으나 과감하게 그로부터 몸을 돌리고 북송 도학의 계보를 집대성하면서 유학의 거대한 체계화를 시도하는 과정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숱한 지적 고수(!)들과의 만남, 1천 명에 달하는 제자들과의 공동생활, 논적 육상산과의 치열한 논쟁 등 주자학은 하나의 거대한 지적 운동 속에서 생성되었던 것이다.

 

P342 당시 청왕조의 국가 이념 역시 주자주의였다. 강희제는 주자를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유학 십철의 다음에 모시고, 국가학으로 적극 장려하였다. 그 점에서는 조선과 하등 차이가 없었다. 문제는 주자학 외부에 대한 태도가 조선과는 전혀 달랐다는 사실이다. 주자를 정통으로 표방하면서도 청왕조는 주자학과 대척적인 것들이 공존할 수 있는 영역을 상당 부분 확보해 두었던 것이다. 유목민의 유연함 때문인지 아니면 오랑캐의 근성 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P347 그는 내부도 외부도 아닌 경계에 서서 이단들과의 강도 높은 접속을 시도했던 것이다.

 

P350 연암을 둘러싼 동양의 엘리트들에게 있어 서구는 나름대로 과학적 진보를 이룬, 그러나 아직 그것이 동양보다 월등한 위력을 발휘할 수준은 아닌 낯선 문명권 정도로 인지되었다.

 

P357 움직이지도 않고, 돌지도 않고, 생명도 없는 덩어리가 어떻게 썩지도 부서지지도 흩어지지도 않고 그대로 견딜 수있단 말인가? 이것이 그의 지전설의 기본전제이다. 그러니 서양 사람들이 벌써 땅덩어리를 구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가 구르는 데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으니, 이는 땅덩어리가 둥근 줄은 알면서 둥근 것이 반드시 구를 수 있음은 모르는격인 셈이다.

 

P369 삶의 무상성, 이름의 허망함에 대해 연암만큼 깊이 체득한 인물도 드물기 때문이다. 권력의 포획장치를 계속 무력화시키는 한편, 끊임없이 새로운 경계를 펼치는 삶과 사유의 궤적들,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과 소통하는 강렬도는 무상한 연기의 장속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열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P370 연암은 이처럼 이름은 무상한 것이라고, 이름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거듭 말한다.

 

강물로 옷을 삼고, 몸을 삼고, 성정을 삼는다?’ 이 경지는 대체 어떤 것일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 이렇게 태평할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의 내공(!)이 필요할까? ‘박차도 없이, 고삐도 없이, 말모가지도 말대가리도 없이광야를 질주하는 인디언의 말달리기’(카프카) 같은 것일까? 나로서는 실로 가늠하기 어렵다. 연암에게서 구도의 흔적을 느끼게 되는 건 이런 여유에서이다.

 

P371 『열하일기』가 발산하는 강렬도는 바로 이름의 중력에서 벗어나 무상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성할 수 있는 노마드적 여정의 산물일 터, 이제 그 천의 고원을 나오면서 나는 다시 묻는다. 대체 연암은 누구인가? 물론 나는 아직도 그을 알지 모한다. 하지만 미래의 포말인 나에게 그의 묘비명을 쓸 자격이 주어진다면, 나는 다만 이렇게 쓰리라.

 

살았노라. 그리고 『열하일기』를 썼노라.”

 

보론 연암과 다산 중세 외부를 사유하는 두 가지 경로

 

P378 그런데 어째서 둘은 마치 인접항처럼 간주된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둘을 비춘 렌즈의 균질성이 차이들을 평면화했기 때문이다. ‘중세적 체제의 모순에 대해 비판했고, 조선적 주체성을 자각했으며, 근대 리얼리즘의 맹아를 선취했다는 식으로. 실학담론으로 불리는 이런 평가의 저변에 근대, 민족, 문학이라는 트라이앵글이 작동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P388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연암이 표현형식을 전복하는 데 몰두한 데 반해, 다산은 의미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P390 다산은 그와 달라서 지배적인 담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거대한 의미체계를 새롭게 구축한다. 연암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문장학의 타락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과거학의 폐해를 이단보다 심하다고 분개해 마지 않았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제시한 대안은 그것을 잃어버린 원초적 의미들 혹은 역사적 가치들을 다시 복원하여 역동성을 불어놓는 것이었다.

 

P393 아이로니컬하게도, 경세가인 다산이 엄청난 양의 시를 쓴 데 비해, 정작 문장가인 연암은 시의 격률이 주는 구속감을 견디지 못해 극히 적은 수의 시만을 남겼다. 전자가 시에 혁명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면, 후자는 시의 양식적 코드화 자체로부터 탈주하고자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신체의 파동을 지녔던 셈이다.

 

연암의 미학적 특질이 유머와 패러독스라면, 다산은 비장미를 특장으로 한다. 앞에서 음미한 <양반전> <애절양>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유머와 패러독스가 공통관념을 전복하면서 계속 미끄러져 가는 유목적 여정이라면, 비장미에는 강력한 대항의 미를 통해 자기 시대와 대결하고자 하는 계몽의 파도스가 담겨 있다.

 

P394 먼저 말과 사물의 관계. 조선 후기 비평담론에 있어 언어와 세계의 불일치는 핵심적인 논제였다. 언어를 탈영토화하기 위한 다양한 모색이 이루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크게 보면, 언어를 탈영토화하는 방향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낡은 상투성의 체계로부터 탈주하여 예측불가능한 표상들을 증식해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통사법을 뒤덮고 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최대한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연암이 전자의 방향을 취한다면, 다산은 후자의 방향을 취한다.

 

P401 윤리학 태도에 있어서도 그들은 전혀 달랐다. 연암이 우도’(友道)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데 비해, 다산은 효제’(孝悌)를 일관되게 주창한다.

 

3. 내가 저자라면

 

역사책에서나 만나보았던 우리나라 옛 학자 중 내 관심을 끄는 사람이 둘이 있다.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언젠가는 그들의 책을 읽어 보고 싶었다. 간혹 마주치던 고미숙이란 지식인 또한 관심을 끌었다. 수유너머라는 지식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생활하며 공부하는 모습이 멋스럽다. 고미숙이 말하는 연암이라면 읽어 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고미숙은 나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그녀의 톡톡 튀는 문체(그가 연암의 문체를 연암체라고 했듯, 나는 그녀의 문체를 고미숙체라 이름 붙이고 싶다.)와 군더더기 없는 설명이 산뜻하다. 고어와 영어를 함께 구사하는 그녀의 문장은 특별한 향을 풍기는 퓨전요리같다. 주절주절 말하지 않고 핵심을 찌르며 순식간에 이야기를 전개하는 장면 전환 솜씨는 마치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하다. 무엇보다 연암이란 한 사람을 그토록 깊게 몰두하고 천착하게 되었음이 부럽다. 고운기가 삼국유사에, 김원중이 사기열전에 오랜 시간 몰두해 큰 성과를 이루어 냈듯이 고미숙은 열하일기와 사랑에 빠졌나 보다. 나도 평생을 천착할 그 무엇 하나를 꼭 만났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으며 새로운 용어들을 많이 만났다. 저자가 개정판을 내면서 뒤쪽에 용어 사전을 덧붙여 놓았지만 여전히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좀 어렵다. 봉상스, 홈패인 공간, 노마드, 주름 등의 생소한 용어는 고미숙의 세계를 반영하는 듯하다. 그녀는 또한 아름다운 우리말에 일가견이 있는 듯하다. 범박한, 오라지게 등은 요즘 글에서 잘 볼 수 없는 단어들인데 연암을 설명하기에는 꼭 들어 맞아 보인다. 아울러 이 책은 달라이라마의 탄생 등 티베트 불교에 관한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해주어 좋았다.

 

이 책은 5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1장은 연암에 대한 소개가 주를 이룬다. 2장은 연암의 문체, 3장은 열하로 가게 된 경위와 에피소드, 3장은 열하일기에서 발견한 유머와 패러독스, 마지막 5장은 열하일기에서 찾을 수 있는 연암의 사상과 철학에 대해서 논한다. 보론에는 연암과 다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다루는데 다소 논문의 느낌이 든다. 나는 이 책에서 연암의 유머에 주목하려 했는데 익숙치 않은 고어체 때문인지, 연암과 나의 유머 코드가 다르기 때문인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고미숙은 연암의 언행 하나하나에 포복절도하는 듯 보이는데도 말이다.) 내가 저자라면 연암의 유머에 대해 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해 집중 탐구하고 싶다. 특히 요즘 사람들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코드로 설명해주고 싶다.

 

연암이 괴짜 천재라면 다산은 성실한 우등생으로 보인다. 법정스님이 추천한 다산의 유배지에서보낸 편지도 읽어봐야겠다. 아울러 고미숙의 최신작 특히 동의보감에 대한 책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도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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