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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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헤로도토스에게 있어 역사란, 신의 의지로 끊임없이 변화해서 어제의 강성대국이 오늘의 소국이 되고, 오늘 안전하다 해서 내일 또한 그러리라 보장할 수 없는 거대하고 다이내믹한 흐름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삶을 살아가는 수 많은 피의사결정자들, 싸움에 시달리고 불안에 떨며 남루한 삶을 살아가는 개인이 소망할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은 행복하게 죽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운명의 수레바퀴에 묶여 깔렸다가 들어올려졌다 하는 삶을 반복하다가 이왕이면 올려진 상태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개인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일만큼 삶은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 운명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권력을 가진 누군가의 욕망과 두려움이었고 그러한 그들의 성향, 트라우마 등의 디테일한 개인의 이야기는 수 만명의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나에게 역사란 권력자와 피 권력자를 합한, 수 많은 개인사의 합이며 그렇기 때문에 영감의 원천이다.
삶이 때로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고 말하는 것처럼, 기록에 남겨진 메인 캐릭터들 뿐 아니라 한 줄 언급되고 마는 사람들도 후대의 작가들에 의해 재 창조된다. 메인 캐릭터들은 그 인물에 대한 저자만의 관점을 더해 새로운 이야기로 거듭나며, 무명의 캐릭터들은 저자의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곤 한다.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얽힌 소설 ‘천년의 침묵’은 ‘무리수를 발견한 히파소스를 피타고라스 학파가 우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기록에서 출발하였고, 드라마 ‘대장금’ 도 ‘조선왕조실록’의 몇 줄을 바탕으로 재창조해 낸 것이다. 튜더 왕조사를 전공한 필리파 그레고리의 책 ‘The Constant Princess’는 왜 그토록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가 헨리 8세와의 결혼유지에 집착하였는가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다.
인물에 대한 관심은 그를 중심으로 한 동시대의 다른 인물과 사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즉 사고가 확장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확장에 도움이 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만화책을 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글자로 읽을 때에는 이름도 헛갈리고 이 사람이 누구인지 잊어버려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문제도 가끔 발생하지만, 만화책은 비주얼로 나타나기 때문에 전체를 이해하기가 쉽다. 플러스 등장인물이 많을 때는 칸 아래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주면 그만이다. 마치 사극처럼.)
내가 ‘역사’를 읽으면서 특히 관심을 가졌던 인물 중 하나는 ‘크세르크세스’였다. 그가 주요 인물로 나왔던 팩션 성격의 만화를 통해 내게 그는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페르시아 전쟁은 백 그라운드로만 다루어졌었는데 ‘역사’에서는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 글을 읽다보니 훨씬 집중도가 높아졌다. 레오니다스와의 전투도 그런 맥락에서 인상깊을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크세르크세스도 ‘아는 사람’, 레오니다스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레오니다스는 그리스 여행과 영화 ‘300’을 통해 기억에 있는 사람으로 그게 아니었다면 그의 이름은 나에게 단지 초콜렛 브랜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의 역사도 그 자체로, 혹은 그 중의 한 부분을 활용한 스토리로 재 창조될 수 있을까? 이번에 연구원 지원을 위한 개인사를 쓰면서 삶의 주요 dot들을 중점으로 본 나의 이야기는 막연하게 이럴꺼야… 라고 생각했던 나와는 참 달랐다.
지금까지 나는 내 개인의 역사에서는 별로 이야기꺼리(정확히는 남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꺼리)가 될 만한 것이 없다, 라고 생각했었다. 도통 핵심 스토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연구원을 지원한 것도 수업내용을 보면서, 이런 자기 연마과정을 거친다면 불필요한 것들은 가고, 내 안의 가장 순수한 부분, 핵심 스토리만 남을 것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한 줄로 남은 무명의 인물에게서도 다양한 이야기가 창조되듯, 그렇게 한 줄로 남은 나의 역사가 나 스스로에게 영감이 되어 또 무한히 많은 스토리로 재생산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