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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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냐고 물어라. (나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나는 바람에 쓸려갈 덧없는 것들이 눈물겨운 삶을 살아내는 사태를 설명하지 못한다. 저절로 태어나 비루한 생을 살아가는 70억의 각 사태에 대하여 우리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을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 스스로도 ‘덧없는 것’이 되어서 비에 젖어 쓸려가지 않겠는가. 우리 어깨에는 자신의 전후를 설명해내야만 하는 책임이 각자가 짊어진 운명의 무게만큼 얹혀져 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인’이듯 또한,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역사가다.
역사와 사회에 빚지지 않은 者 없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분 개념은 대륙을 달리하여 동시대에 나왔다. 교류가 없던 두 학자의 같은 개념의 발견은 역사와 사회가 이미 그 가치를 만들어 내도록 내면화하고 있었고 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출될 때를 기다린 것이다.(그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 같은 ‘사실’을 놓고 자기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사회과학적 인과관계를 들이대며 눈을 내리깔고 냉소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역사는 그 ‘사실’을 놓고 따뜻한 시선으로 다시 ‘왜냐’고 물어온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첫머리에 그리스인과 이방인들의 행위에 관한 기록을 보존한다는 것, ‘그리고, 특히 그들이 서로 왜 싸우게 되었는가의 원인을 밝힌다는 것’이 그의 목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위대한 순간을 목도한다. 바로 ‘왜냐’를 물어오는 목적 있는 역사 서술의 첫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기록하고 남긴 투기디데스의 업적에 대해 이견을 달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두고두고 비판 받는 ‘뚜렷한 관념이 없는’ 그의 역사관은 뼈아픈 것이었다. 헤로도토스가 아쉬운 부분이 있음에도 이리도 탐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로써 충분해진다. 바로 역사라는 큰 벽 앞에 꿀리지 않고 목적을 부여해버린 최초의 희랍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역사는 자신 그리고, 사회 나아가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갈수록 꺼려진다.순수를 바탕한 관념이 非순수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졌던 장면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의 존재가치를 끊임없이 반문하는 행위다. 그래서 ‘왜냐’와 ‘어디로’를 쉬지 않고 물어대며 제 존재의 방향성을 잡아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택시 운전사의 시선’과 역사가의 시선은 다르지 않다. 합리적 의문을 품고 기록하는 자(길 찾는 자)의 관점(준법)에 대한 엄격함을 유지하고 거기에 자기검열을 더한다는 면 말이다. 이로 인해 그것이 자신이든 사회든 국가(라는 단어도 쓰기가 꺼려지지만 까칠한 인간으로 낙인 찍힐까 두렵다)든 제 존재의 가치는 높여지게 되겠다. 잠시 원론적인 사족을 보태면 존재의 가치는 그 존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의 불편함과 같고 역사의 가치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 가치는 나의 존재가치와 질량을 같이하는 것이다.(내가 없으면 역사도 없으므로, 그래서 우리는 역사적 동기, contemporaries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는 부재의 잠재태임을 우리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는 것(기록의 눈물겨움을 보라)이며 또한, 인정하지 않는 것(영원히 살 것 같이 군다)이다.
들리는가, ‘우리’가 존재하는 한 역사는 끝없이 재잘댄다. ‘왜?’, ‘어디?’
다시, 시선을 나에게로 돌린다. 새벽 출근 길, 현관을 열자 달려드는 겨울 승냥이와 마주친다. 떨어지지 않는 발은 아직 현관 안을 어슬렁대고 머리 속은 이미 통근버스 타는 곳으로 달려가 있다. 조급하다. 이 와중에도 해는 어김없이 떠서 일 순간 대지를 붉게 삼킨다. 나는 ‘일’하는 직장인이다. 왜냐고 물어라. ‘직장인’ 아이덴티티는 온전히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지난 밤, 우주의 골디락 영역에서 지구와 유사한 행성이 발견 되었다는 소식. 빛의 속도로 600년, 인간의 기술로는 2,200만년을 날아가야 도착할 수 있는, 아니다. 상상으로도 발 붙일 수 없는 그 곳의 시간과 공간을 가늠했다. 그래서, 나는 우주인의 한 사람으로서 저 광막한 우주와 시간의 역사를 사랑하리라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난 밤의 일이다. 우주도 좋고 지구도 좋다. 어제 끝내지 못한 업무가 출근하는 길 내내 머리에 싸이렌을 울려댄다. 애써 완성해 놓은 내 우주인 아이덴티티는 이로써 멀찍이 빅뱅의 시원(始原)으로 달아난다. 나는 지금 회사에 ‘일’하러 가는 중이다. 다시 묻는다. 그리하여 어디로 가는가.
나는 ‘일’을 위해 천금 같은 하루의 반을 할애하는 직장인이다. 왜냐고 물어,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서 온 길은 아님에 확실하다. 출근하기 위해 일어날 때 에이스 침대에서 자고 일어났음에도 땅으로 꺼질 듯한 묵직한 몸과 마음이 ‘내 길’이 아님을 다시 확인한다. 그러나, 나는 모든 직장인의 잠재태가 자유인임을 찰떡같이 믿고 있다. 이것은 내가 직장인으로 살아갈 ‘임시성’에 대한 정의이기도 한데 바로 이 ‘임시성’이 역사 앞에서의 내 태도를 설명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유인의 나는 임시의 삶(그러나 이 임시는 단절의 임시는 아닐 것이다. 억압에 기반하지 않은 자유가 있겠는가. 따라서 임시는 분노와 바꾸어 불러도 좋겠다)을 사는 나에게 매번 묻는다. 고통스러운 출근길에서 나를 채근하고 전쟁 같은 사무실에서 추근대듯 속삭인다. 생의 구절양장 어디든 관여하며 부추긴다. ‘자유’로 방향 지어진(다시 바뀔지도. 변덕이 밥 먹듯 한다) 나에게는 이 모든 눈물겨운 발버둥의 기록들이 스스로의 역사가 될 것이다. 그 끝에 ‘자유’(거창하고 구체적이지 못한 이 단어를 목표로 하는 만큼 나는 현실의 디테일에 아둔하다. 어쩌랴)가 있든 없든 중요치 않다. 나에게로 당당히 걸어 나오기 위한 그 역사만 존재한다면 말이다.
그 눈물겨움을 견디며 비루한 생을 살아가는 순간을 목도하는 일은 그래서 위대한 것이 아닌가. 2500년 전, 노새가 토끼를 낳은 사실만큼, 다레이오스의 어미가 오른 쪽 젖으로 그를 먹여 키운 사실만큼이나 오늘 아무것도 아닌 내가 몸서리 치게 되는 사소한 발버둥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