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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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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0일 08시 33분 등록

조금 많이 지난 과거지만 내가 대학의 역사 교양과목 첫 수업을 듣는다고 하자. 강의실에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들어오신 교수님은 으레 멋진 역사학자들이 그러하듯이 검은 폴라티에 정장자켓, 그리고 날카로운 느낌의 안경테를 쓰고 있다. 그는 자신의 카리스마에 눌려 순식간에 조용해진 교실을 고개만 살짝 돌려 쌩 돌아본 후, 아니나 다를까 가장 준비가 덜 되어 보이는 나를 지목한다.

 

“학생, 역사가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바짝 얼었지만 이내 태연한 척하며 빨리 이 순간이 해결되길 바라면서 가장 무난하고 “짧은 답”을 고르기로 마음 먹는다. 나는 기존의 상식대로 “과거의 일을 사실에 입각하여 기술한 것, 입니다.”이라고 대답한다. 교수님이 아무 말이 없다. 선방했나? 괜시리 내뱉은 아까의 대답을 복기해본다. 교수님은 아직 시선을 내게서 거두지 않은 채 후속 질문을 하신다(망했다).

 

“그렇다면, 학생 본인에게 역사는 무엇인가?”

 

“나에게” 역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이건 그야말로, 나의 주관이라는 자유 앞에 역사에 대해 제멋대로 말해도 된다는 뜻인가? 혹시 마음대로 떠벌렸다가 알지도 못하면서 잘난 척이나 해대는 진상 학생으로 찍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정작 문제는 마음대로 떠벌릴만한 그 어떤 멋드러진 주관도 결코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카메라 플래시에 벙찐듯 눈 앞이 하얘진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확 아무 말이나 던지고 보려는 심산으로 내가 입을 벌리려는 순간 교수님이 말한다.

 

“다음 시간까지 숙제로 해와. 1 페이지 이상.”

 

결국, 나는 책상 위에 다소곳이 단 한 장의 종이를 올려놓고 머리를 쥐어짜는 신세가 되었다. 참담하리만치 빈곤한 사상이다. 겨우겨우 떠올린 주관적 정의들을 일단 쓰고 읽어본다. 그리고 좌절한다. 교과서적으로 말하자니 너무 상투적이고, 솔직하게 말하자니 무슨 소리인지 심히 엉뚱하기 때문이다.

 

먼저 교과서처럼 상투적인 대답을 살펴보자. 역사란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이며, 어디로 가는가? 에 대한 대답이다. 이것이 아마도 사명감을 가진 모든 역사학자들의 도그마가 아닐까 한다. 특히 역사의 목표는 마지막의 “어디로?”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에 있다고 보는 학자가 많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의 어깨는 무겁다. 그들은 현재와 미래 세대에게 비전을 제시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대외적이고 숭고한 역사의 효용이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사실 역사가 당장 나의 내일, 혹은 1년이나 5년 앞의 일을 해결하는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미리 앞선 길을 간 선배의 조언을 듣거나 매체를 확인한다. 조금 더 중요한 장기 플랜은 컨설턴트의 조언을 따르기도 한다. 개인 사업 개업 문제를 헤로도토스를 읽어서 결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불확실한 미래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영적 도움이나 데일 카네기, 그리고 정신과 의사가 아닐런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해 역사에게 조언을 구할 순간이 있다면, 그건 매우 은연중에 깨닫게 되는 교훈이 아닐까. 가령,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도덕이나, 역사란 돌고 돈다는 긴 호흡의 인식, 개인사는 새옹지마라는 진리, 그리고 인생에 대한 다양한 태도 등이다. 내가 과거 2500년 전의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알거나 2000년 전의 예수의 행적, 심지어 100년 전의 검은 목요일에 대해 안다고 해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고위험형 펀드를 해지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데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경기침체가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면서 뒤늦은 측은지심을 느낄 수는 있다. 그러면 경기침체의 원인이 궁금해지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그와 비슷한 상황으로 몰리는 듯할 때, 과거를 간접 경험으로나마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보다 확신을 가지고 방향키에 손을 얹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역사란, 인생의 내공이랄까?

 

하지만 인생을 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역사책을 효용론에 입각해서 꺼내 들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심지어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역사책을 보더라도 만화 영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보고 예쁜 드레스에 동해서 읽게 된다거나, 역사책이 만화로 그려져 있어서 봤다거나, 혹은 그냥 친구네 집에 꽂혀 있는 책이었거나, 부모님이 역사책을 전집으로 사주시는 바람에 할 일 없을 때 꺼내드는 게 보통이다. 매우 기쁘고 의기양양하게도 버트런드 러셀은 단지 역사 그 자체의 재미를 높이 평가한다. 역사 자체를 음악과 미술을 즐기듯이 여가 시간에 즐길 거리로 여길 수 있으며, 역사의 효용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굳이 역사를 공부나 교훈으로 받아들여 의무감으로 짓누르는 순간, 흥미는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순수하게 역사가 주는 즐거움을 음미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역사란, 순수학문의 즐거움 중 하나인가?

 

동시에 자연과학도인 나는, 이런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한다. 나는 가끔, 정보가 곧 생명이라는 개념에 매혹되곤 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역작, <이기적 유전자>에서 도킨스는 생명체는 DNA를 운반하는 운반체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번식의 주체는 DNA라는 충격적인 발상을 개진하였다. DNA는 알다시피, A, T, C, G라는 네 개의 용어로 치환되는 염기서열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염기서열은 실체이고 내가 자판에 두드리는 A, T, C, G는 관념속의 단어다. 둘은 명확히 다르다. 그러나 어차피 당신이 당신 손가락 세포의 염기서열을 만지지 못하는 것과 문자 A, T, C, G를 만지지 못하는 것은 같지 않은가? 물리학에서, 혹은 철학에서 차이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은 등가로 볼 수 있다. 또한 생물학에서는 가장 간단한 염기서열을 가진 바이러스를 만드는 것까지 연구 중이다. A, T, C, G를 마치 블록처럼 조립해서 생명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생명체는 정보로 치환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와는 반대편에서, 오로지 이론적 프로그래밍으로 생명체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아이폰 게임처럼 스크린 안에서 설정된 생명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장 단순화된 프로토콜로 스스로 번식하는 생명체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생명체의 가장 큰 특징은 번식하고 생존하는 것에 있다. 유와 무의 이진법 안에서 유의 편으로 우연히 편중된 정보의 산물들이 결국 시간이 지나면 진화한 개체라고 불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생명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생명체가 곧 정보이고, 정보가 곧 생명인 것이 도대체 역사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앞서 도킨스가 말했듯이, 생명체의 몸이 곧 DNA라는 정보를 운반하는 운반체에 불과하다면, 인간의 몸은 역사라는 정보를 운반하는 운반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뉴튼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였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알려진 자식이 없다. 그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완전히 도태되었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반영구적으로 남게 된다. 영원한 생존권을 획득한 셈이다. 헤로도토스는 2500년 전의 사람이지만 <역사>라는 매우 가치 있는 저서를 남겼기 때문에 역시 영원히 그 이름이 기억된다. 아울러 그가 쓴 역사 역시 생명을 부여받았다. 헤로도토스는 그 역사가 자신에 대한 정보는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우리는 그가 자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알 수 없다. 대학에서 학문만을 연구하느라 번식 시기를 놓친 한 대학 교수는, 노력과 운의 결실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업적은 국가 최초의 노벨상이었고 그는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지폐에 얼굴이 들어가도록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정자를 정자 은행에 기부할 생각은 없다. 분명히 수요가 꽤 있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즉, 이런 식으로 우리 인류는 생물정보(DNA)를 세대를 거쳐 보존하려 노력해온 것과 동시에, 역사의 정보를 두고도 생존 투쟁을 해왔다. 왜냐하면, 생물정보가 한정된 자원환경 안에서 개체 간에 경쟁해야 하듯이, 인간이 역사로 기억하고 전달할 수 있는 뇌용량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보화 시대로 접어든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의 발전으로 우리는 뇌용량을 외부로 확장시킨 듯 보이지만, 결국 정보를 소비하는 것은 뇌이고 뇌의 속도는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선택된 역사만을 취한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 인류는 우리의 역사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인생을 건 성전을 치러왔으며 앞으로도 이 추세는 전략만 더욱 다양화될 뿐,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결국 나에게 역사란,

1. 인생의 내공

2. 순수학문의 즐거움

3. 내가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성전

 

여기까지 쓰고 나서 나는 이 셋을 통합해보려 이리저리 묘수를 써본다. 결국 순수한 마음으로 즐겁게 역사를 읽다보면 인생의 내공도 쌓이게 되고 그리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면 그 역사에 다시 내 이름도 올릴 수 있게 된다. 이거 뭔가 그럴싸하다고 생각이 든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빙그레 짓는다(그러나 더 만족스러운 것은 1페이지를 넘게 채운 숙제의 분량이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과제를 스테이플러로 묶는다. 제발 이 과제가 내 성적의 역사에 오점이 되지를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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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등인가요?-_- 퇴고를 한다고 하는데 머리에 안들어옵니다. 혹시 오타나 이상한 부분 있다면 마감 시간 전에 최대한 발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보는 자리에 제 글을 올린다는 게 참 부끄럽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네요.^^;;

IP *.116.2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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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0 17:35:48 *.211.45.166
재밌어요~ 과학도다운 글이네요^^
프로필 이미지
2012.02.20 19:19:36 *.187.211.82

레몬님~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경쟁자로서 살짝 긴장도 되지만, 그리 길지않은 각 문단마다

미소를 짓게하는 요소들이 있네요! 한달간의 지적 여정을 훌륭히 마쳐

면접여행에서 만나뵙게 되길 바랄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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