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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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냐 넌?
새벽 3시 쯤. 감자탕 집에서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던 녀석이 갑자기 낯설어 보였어요. 아무리 뜯어봐도 친구 녀석이 맞는데 지금 내 앞에서 있는 녀석은 그 녀석이 아닙니다. <올드 보이>의 대사가 스쳐지나가는 군요. 누구냐 넌?
10년 가까이 알아 온 친구녀석이었습니다. 힘든 시절 같이 술을 마셔 주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은 날 묵묵히 내 노래를 참아주던 녀석이었지요. 늦은 밤에도 “무슨 일이야?” 라며 나와주기도 했고 엉엉 울던 나의 손에 화장지를 슬며시 쥐어 주기도 했던 아이입니다. 그런데 지금 앞에서 나와 다른 의견을 말하는 이 녀석이 갑자기 낯설어 보입니다. 얘가 이런 애였나? 내가 이만큼 너를 몰랐나? 나와 이렇게 다른 사람이었나? 많은 생각이 지나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에 씁쓸함이 한 가득 묻어납니다.
다들 그런 친구 녀석이 하나쯤은 있지요. 많은 사람들 중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 하나는 있게 마련이지요. 그것이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던 그런 이들은 우리에게 힘이 되어 줍니다. 언제나 나의 편이 되어 줄거라 생각하고 그래야 한다고 믿어지는 존재들. 말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서 척척 움직여 줄 것 같은 그런 사람들. 그런 이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더 아파집니다. 100명이 돌을 던지는 것보다 그 한 명의 어이 없다는 시선이 우리의 마음을 파고들지요. 중학생 때 친한 친구 녀석이 “나도 네가 이해가 안가.” 라는 말에 얼굴이 벌개져서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지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처럼 발등이 아파옵니다. 물론 발등이란 찍히면 다 아프게 마련이예요. 내 발등이 찍혔는데 아프지 않을리는 없지요. 하지만 믿는 도끼는 굳게 믿기에 더 힘껏 휘둘러 보잖아요. 그렇게 온 힘을 다해 휘둔 도끼가 우리의 발등을 찍을 때 우리는 당연히 더 아플 수 밖에 없겠지요. 나의 믿음의 힘만큼 돌아오니까요.
그녀와 나는 스무 살이 조금 넘은 나이에 만났어요. 그때부터 우리는 경험과 감정을 공유했지요. 이런 저런 과거의 이야기도 해가며 공감과 위로를 나누며 친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는 아니지요. 그녀 역시 내가 아니구요. 나는 죽어도 그녀가 되어 볼 수는 없겠지요. 틀리다와 다르다. 이 말의 차이점을 다들 알고 계실 거예요.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요, 다른 것은 그저 비교 대상 두 개가 같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예요. 사람은 누구나 고유한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이루어지고 때로는 생물학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지요. 그러기에 세상에는 누구 하나 나와 같은 사람이 없어요.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면 링컨과 케네디의 경우와 같은 평행이론이 신기한 듯 우리를 떠돌지도 않았겠지요. 그래요 사람은 다 달라요. 그렇다고 “그래. 사람은 다 다르니까.” 라고 말하기엔 조금 서글픈 느낌이 듭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와 다를 수 밖에 없으니 이런 저런 상황에 맞춰서 이해해 줄만한 사람을 그때그때 바꿔 만나야 하는 걸까요? 다른게 사실이니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일 뿐일까요? 그렇게 사람은 다 혼자일까요? 나를 진정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 뿐일까요? 이런 말을 되뇌이기에는 너무 서글퍼요.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외로워지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스스로 택한 외로움이 아닌 다른 점을 발견해서 체념하듯 외로워지고 싶지는 않다구요.
나는 그녀와 항상 즐기는 방식의 시간을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만나면 늘상 하던 유쾌한 일들을 했어요. 뭐 그리 대단하지는 않아요. 그냥 그날 우리를 잡아끄는 저녁을 먹고 시원한 맥주를 한 잔하며 평소때와 다름없는 잡담을 하는 거죠. 어느 노래를 들어 봤냐는 둥, 그 드라마의 남주가 너무 멋지더라는 둥. 뭐 그런 식의 이야기도 하고. 옛날 얘기도 하고 미래 얘기도 하고. 그렇게 깔깔 거리며 놀다가 헤어졌지요. 돌아오는 발걸음이 훈훈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이렇게 다름없이 함께 할 수 있네요. 다르지만 함께 할 수 있네요. 그 날의 기억이 우리에게 사라진 것은 아닐겁니다. 그날의 의견차가 좁혀진 것도 아니예요.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가 함께하는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는 여전히 함께 잔을 부딪히며 깔깔거릴 수 있는 걸요.
우리는 다른 점이 있지요. 맞아요. 우리는 달라요. 생긴 것부터 말하는 투도 다르지요. 많은 부분이 닮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글을 쓰면서 글을 쓰는 것에 맞는 생활을 갖게 되었고 그녀는 다른 꿈을 꾸면서 그에 맞는 생활을 갖게 되었어요. 그렇게 젊은 날을 함께 했던 우리의 관심사는 사회에 나와서 멀어졌지요. 시간이 한참 흐르고나면 우리가 함께 아는 사람들도 줄어들겠지요. 만남의 시간도 줄어들 지도 모르고. 그것이 우리가 멀어져야 하는 이유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라 다른 길을 걷고 다른 관심사를 가졌다고 우리가 멀어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녀는 여전히 나의 젊은 날 함께 울고 웃었던 나의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우리만의 놀이 방법이 있지요. 아주 많이 나이를 먹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고기를 씹지 못할 때 우리는 죽그릇을 두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때도 우리는 “야 십년 후에도 우리 이러고 있을 것 같지 않냐?” 라고 말할 거예요. 그녀는 나의 지금의 생활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언젠가 힘이 든 순간에 찾아갔을 때 여전한 미소로 답해 줄 겁니다. 나 역시 그렇겠지요.
사람 마다 차이가 있어요. 다 달라요. 그런 사실을 우리 머릿속에 억지로 집어 넣지는 말기오 해요. 그건 우리를 더 괴롭게 만들 뿐이예요. “그래 달라. 달라. 달라.” “사람은 모두가 다르지. 다르고 말고. 다른게 분명해.” 이런 말들을 나에게 주입시키지 말아요. 그렇게 우리에게 주문을 외듯이 말하는 것은 더 큰 스트레스와 반감을 가져오게 마련입니다. 차라리 다른 이와의 즐거운 하루 계획을 세워 보세요. 그 속에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들어요. 그 어느때와 다름없이 말이예요. 그 사람과 내가 다르다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그리 큰 일은 아니랍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예요. 우리 관계에 장애가 되는 일은 더더욱 아니지요. 다름을 애써 이해하려 하지 말아요. 그런 식으로 나를 압박하지 마세요. 다름 앞에서도 함께 즐거울 수 있음을 느껴 보기로 해요.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예요. 그때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다름을 어떻게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어요. 애써 하려 하지 않아도 우리를 찾아오게 할 수 있어요. “너와의 다름을 인정해 주겠어.”라고 생각한 순간 우리는 다르다는 시선으로 상대방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더 큰 다름을 찾아내지요. 점점 큰 다름을 발견해 나중에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 있을지도 몰라요. 다르더라도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해 보세요. 나와는 다른 그 녀석은 여전히 좋은 녀석일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빨간 스웨터를 모두가 좋아한다면 나는 그 색의 스웨터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야 할 지도 몰라요.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모두가 좋아한다면 나는 그 콘서트 티켓을 얻기 위해 얼마나 발을 굴러야 하는지 상상할 수 없어요. 다행히 세상에는 빨간색이 아닌 파랑, 초록, 노랑, 검정 등등의 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 외의 다른 가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요. 나는 편안히 빨간 스웨터를 살 수 있으며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내가 좋아하는 그의 공연을 맨 앞줄에서 볼 수도 있어요. 다행이예요. 천만 다행이지요. 길거리에 온통 빨간 혹은 파란 스웨터를 입은 사람들만 가득할지도 모른다니 이건 상상만 해도 “으악” 소리가 절로 나지 않나요? 더 다행인 사실 하나는 우리는 오늘 우리와 다른 부분을 가진 사람과 깔깔 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법을 하나 배웠지요. 우리나라 인구 오천만. 그 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우리가 오늘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배웠다는 것 이건 작은 것이 아니지요. 보세요. 달라도 괜찮잖아요.
월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가장 좋았던 때를 떠올려 보세요. 그 장소에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요. 우리가 언제 크게 웃었는지 떠오려 보세요. 그리고 그 시간을 다시 함께 나누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함께라는 부분이예요. 내가 혹은 네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그 시간 안에서 조금은 더 자란 우리가 새로운 추억을 만드는 거죠. 다른 부분은 어쩌면 정말 작을 지도 몰라요. 그렇게 함께 웃는 시간 안에 우리는 다른 이를 더 이해해 줄 수 있답니다. 그 다른 부분 보다는 내가 상대방을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큰걸요. 리와인드 웨딩과 비슷하다고 하면 이해가 더 빠를까요? 추억도 얘기하며 그 때보다 더 익숙해진 그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세요. 여전히 나는 내 앞에 있는 이 아이가 좋음을 느끼는 거죠. 우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