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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4일 17시 33분 등록

“더 이상 못 참겠어요. 이혼하는 게 낫겠어요.”

무슨 일일까. 아이가 두 명이나 있고 아직 나이도 어린데. 많이 힘들었던지 가깝게 지내는 후배 녀석이 답답한 마음에 나에게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평소에는 그렇게 다정하던 남편이 술만 마시면 행동이 180도 바뀌어져요.”

덜컹. 가슴이 내려앉는다. 나도 그런 족속의 한사람인데. 물론 그렇다고 누구처럼 만취 상태에서 장롱 안에다 볼일을 본다거나, 몰지각하게 무엇을 부신다거나 그런 행동은 하질 않는다. 단지 술을 마시면 말이 많아져 했던 이야기를 조금 반복하는 아주 사소한 버릇(?)이 있을 뿐이니. (혹자는 듣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이것도 고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이혼까지는…….”

어떡하든지 말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마디를 건네자 그녀의 반응은 더욱 뜨거워진다.

“(격분하며) 아이들 외식 시켜준다고 나간 자리에서까지 혼자 술 마시고 취해서 오는 게 그 인간 이예요. 그뿐인 줄 알아요. 거짓말을 얼마나 밥 먹듯이 해대는지. 내입으로 말하기에도 창피해요. 참을 만큼 참았지만 이제는 아녜요.”

괜히 한마디 건넸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오롯이 참고 사는 게 여성의 미덕이라고 여겼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서로 맞지 않으면 갈라서는 것이 나아가 싱글 맘이란 것이 예전처럼 더 이상 이슈꺼리가 되질 않는 작금의 시대. 존 그레이의 말대로 남자는 화성에서 왔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기에 태생적으로 다르다지만, 눈에 콩깍지가 껴서 만나 검은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살아간다는 것은 이젠 동화책속의 전설로만 남을 것인지.

그런데 경제적인 면은 어떡할까나~

 

 

아침 조회를 마치고 영업 사원들이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서서 수다의 꽃을 피우는 와중에 나도 늠름하게 그 대열에 합류 하였다. 그중에 한사람이 자랑삼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화제로 꺼낸다.

“(호들갑을 떨며) 세상에 세상에~ 지난주 그 사람에게 전화가 왔지 뭐예요.”

“누구 말이 예요?”

상황파악이 되질 않아 질문을 하였더니 옆에 있던 분이 살며시 귓가에 속삭인다.

‘첫사랑에게서 연락이 왔데요.’

첫사랑? 오십이 넘은 가정주부에게 첫사랑의 남자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허참. 나는 궁금증에 못 이겨 짐짓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그래 전화 와서 뭐라고 합디까. 만나자고 하지 않던가요.”

“어떻게 아셨어요. 나야 밑질 것 없으니까 만났죠.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호호호.”

동료들은 난리가 났다. 꿈 많던 단발머리 여고생 시절처럼 호기심이 도졌는지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라고 성화다.

“그래 뭐하는 분이래요.”

“경기도에서 치과 의사를 하고 있다는데 돈도 잘 버나 봐요.”

웃긴다. 속으로 미친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 잘 벌고 있는 멀쩡한 놈이 무엇이 아쉬워 첫사랑을 찾으러 그 먼 곳에서 이곳 지방까지 직접 내려 왔을까.

“그래 어땠어요. 만나 보니까.”

나는 뻔한 이야기인줄 알면서도 궁금증이 더해갔다.

“첫 남자를 만난다는 느낌 그거 묘하데요. 잠도 못 이루고 밤을 홀딱 새었지 뭐예요. 출근길에 남편이 저녁에 일찍 들어 오냐는 물음에 왠지 마음 한구석이 찔리기도 하였지만. 여하튼 마중을 하러 역으로 나갔어요. 두근반 세근 반으로 기다리고 있던 차 우린 만나자 마자 서로를 알아보았어요. 몇 십 년 만에 만났는데도 참 신기하데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할까.”

한순간에 알아보았다고. 허허~ 그녀처럼 나도 첫사랑을 만나면 금방 알아챌 수 있을까?

 

 

초등학교 6학년 시절. 같은 반이었던 그 애의 이름은 이경숙 이었다. 긴 생머리에 호리호리한 몸매가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던 아이였다. 덕분에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음에도 소심 많고 무엇 하나 잘하는 것 없었던 나는 먼발치에서 그 애를 바라다볼 수밖에 없었다. 하늘하늘 거리는 머리카락을 날리며 등교하던 그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짜하다. 마땅한 표현 방법이 없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긴 머리를 짓궂게 아주 가끔 잡아당기는 것뿐 이었다. 별명도 붙여 주었었다. 말꼬리라고.

어느 날 마늘님이 나의 사진첩을 뒤지다가 누구냐고 물었다. 당시 경주로 졸업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우연찮게 옆에서 찍던 그 애와 친구들 일행에 내가 찍혀 있었던 것이다.

“누구긴 누구야 내 첫사랑이지.”

떳떳하게 이야기하는 나와는 달리 마늘님은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첫사랑? 아이고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무슨 얼어 죽을 첫사랑은……. 왜 그녀가 잊지 못하고 있으면 찾아 가기라도 할래.”

“당연하지. 내 청춘을 돌리도 돌리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흥, 가라지. 누가 무서워 할 줄 알고.”

빛바랜 기억 속에 간직된 그 애의 모습. 무얼 하고 있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결혼은 당연히 했을 것이고 동창회 명부라도 뒤져볼까. 만약에 다시 만난다면 알아 볼 수는 있을는지. 혹시 그 애는 내가 좋아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그녀의 영웅담은 계속 되었다.

“그래 뭐하셨어요. 만나서.”

“호수 부근의 멋진 레스토랑에서 비싼 스테이크도 먹고 차도 마셨죠. 멋지게 차려입은 옷에 매너도 좋더라고요.”

참 잘하는 짓이다. 남편은 이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다음 이야기의 뜸을 들이고 있는 그녀가 괜히 얄미워진다.

“우린 이십대 중반에 볼링장에서 처음 만났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제가 그 당시에도 잘나갔었거든요. 옆 라인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그 사람이 내가 연속 스트라이크를 넣자 먼저 관심을 보이며 대시를 했었지 뭐예요. 몇 번 데이트를 하다가 콧대 높게 바람을 맞혔었는데 만약에 그때 잡았더라면…….”

그 멘트에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동료들이 더욱더 난리다. 다들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긴 치과 의사인 첫사랑의 남자와 현재 평범한 샐러리맨인 그녀의 남편이 객관적으로 비교 되는 건 사실이니까.

 

오래전 이휘재의 인생극장 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송에 방영되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하나의 상황에 대한 두 가지의 반응 장면을 연출해 놓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가 판이하게 다른 내용을 다루었었는데, 픽션이긴 하지만 당시 시청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었다. 아무래도 밑바탕 기저에 깔려있는 사람들의 ‘만약에’ 라는 심리적인 속성을 예리하게 건드린 탓이었으리라.

 

세상에 만약 이란에 없다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작은 상상을 꿈꿔 본다.

만약에 내가 다른 부모 밑에서 성장 하였더라면

만약에 내가 그때 첫사랑과 맺어 졌었더라면

만약에 내가 그 기차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내가 그 회사에 입사를 하였더라면

만약에 내가 재수를 하였더라면

만약에 내가 다른 남자랑 결혼을 하였더라면

만약에 내가 당시 빛을 내어서라도 아파트를 매매 했었더라면

만약에 고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을 선택 하기전 시킨 담배를 경호원이 거부 했었더라면

우리는 꿈을 꾼다. 돈이 들지 않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꾼다.

그 꿈의 주인공은 나이고 주변 인물은 나를 흠모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퇴짜를 놓아도 내가 모르는 체 상대를 하지 않아도 그들의 시선은 항상 나를 쫓는다. 이놈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우리는 그런 만약에 라는 환상 속에서 잠시나마 천상의 꿈이라는 영화를 찍는다. 시나리오에다 주인공, 각색, 감독까지 일인 다역을 한다. NG라는 용어도 없다. 그냥 액션이 ing로 진행 된다.

그러다 눈을 뜨고 정신 차리다 보면 피곤한지 뒤척이며 자고 있는 마늘님 한숨 소리의 현실이 들려온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을 맺어갈 즈음 가만히 듣고 있던 어르신 한분의 일침이 모두를 다시금 현재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담밖에 장미보다 내 집안의 채송화가 소중한 법이여.”

 

 

“어떻게 결정했니?”

궁금한 마음에 한주가 지난 후 후배 녀석과 전화통화를 나누었다.

“일단 별거하기로 합의했어요.”

“경제적인 부분은?”

오지랖 넓게 걱정되는 부분을 조심스레 물어 보았다. 먹고는 살아야 될 것이 아닌가. 요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하지만 나의 이런 걱정은 말 그대로 기우였다.

“당연히 남자가 아이들 양육비며 월마다 생활비를 줘야 하는 거 아녜요. 전셋집 하나도 얻어 주기로 했어요.”

 

 

정신 차려야 한다.

갈라서면 이해타산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절대적으로 남자의 허리가 휘어지는 불리한(?) 시대가 되었다.

거기다 여차하면 또 다른 사랑을 찾아갈 수도 있는 세태이고.

급기야 쪽박까지 쓰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로

정말로

지금은 담밖에 장미보다 내 집안의 채송화를 어떡하든지 보듬고 가꾸어야할 그런 때이다.

 

IP *.130.10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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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4 18:17:13 *.140.216.250

ㅋㅋㅋㅋ.. 잼있네요.. 담밖의 장미보다 내 집안의 채송화를 잘 보듬고 가꾸어야 한다.

 

유독 가족들 그 중에서도 엄마에게 온갖 짜증을 다 부리는 저에게도 와닿는 말이네요...

 

엄마가 늘 제게 말씀하시죠.

"너는 밖에 나가서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다며?? 근데 도대체 집에서는 왜그르냐??"

 

할말이 없지요.......ㅎ

프로필 이미지
2012.03.04 20:23:21 *.143.156.74

제 첫사랑은 벌써 머리가 많이 빠져 소갈머리없는 사내가 되어 있더군요.

역시 만나지 않는게 나아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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