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닝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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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의 마지막장을 헉헉거리며 읽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황진이의 시가 등장했다.
'어? 황진이다!'
相思相見只憑夢 서로 그려 만나볼 길 다만 꿈길뿐이라
儂訪歡時歡訪儂 그대 날 찾아올 젠 나도 그댈 찾는다오.
願使遙遙他夜夢 원컨대 아마득히 다른 밤 꿈속에선
一時同作路中逢 한때에 길을 떠나 길 위에서 만나요.
안 되는 한문 실력으로 해석해 보고 있는데, 역시 정민 교수님은 친절히 해설에 나서셨다.
황진이黃眞伊의 한시〈상사몽相思夢〉이다. 양주동 선생의 번역으로 더 유명하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임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양주동 선생의 번역....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밖에 길이.... 없어??
갑자기 머릿속에서 아릿하게 멜로디가 번져 나온다. 나 이 곡 아는데?
진짜 이 곡이 황진이의 한시에서 가져온 거란 말야? 얼른 인터넷에 쳐본다. 가곡 '꿈'. Enter.
황진이 詩, 김안서 譯詩. 김성태 曲.
진짜네. 황진이 시였구나. 기분이 묘했다. 한시의 엄청난 무게에 눌려 숨도 못 쉬고 있다가
산꼭대기 청량한 공기 한 모금 마신 것처럼 숨이 탁. 하고 트였다.
나는 열세 살. 피아노 방에서 가곡을 노래하고 있는 소녀다. 피아노 앞에는 오혜선 선생님이 앉아 반주를 해주고 계신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밝은 미소가 아름답던 연대 성악과 대학생. "아 아 아~ 아아... 아이우에오... " 발성으로 목을 풀고, 청음 연습을 한다. 그리고 전 주에 배웠던 한국 가곡과 이태리 가곡을 복습하고 새로운 곡을 연습하면 한 시간이 지나 레슨 마무리.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일주일에 한 번 내지 두 번씩 이런 레슨을 받았으니 웬만한 동요나 한국 가곡은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예고에 가려던 꿈을 접고 이제는 연구원의 길을 가고 있으니 음악의 길과는 멀어졌지만, 나의 저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 웅크리고 있다. 그런 추억과 열정이 가끔씩 이렇게 생활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이번 8기 연구원 지적레이스의 주제가 '시'란 걸 알았을 때 들었던 생각은 '대략난감'이었다. 나는 시와 친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고등학교 때까지 국어시간에 배웠던 시 이외에 내가 자발적으로 시집을 찾아봤던 건... 연애편지를 쓰기 위해 들쳐봤던 몇 권의 시집이 전부였다. (얼굴이 화끈화끈. 부끄럽다 >.<) 그래서 마지막 주는 내게 가장 힘겨운 레이스가 될 예정이었는데... 무릎을 탁. 칠만한 해답이 생긴 것이다. 가곡! 아... 내게 사랑과 이별과 삶을 가르쳐준 가곡이야말로 '노래가 된 시'가 아닌가.
히히히, 너무 신난다. 답을 찾았다.
내게 시란 노래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음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