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 조회 수 2543
- 댓글 수 16
- 추천 수 0
시란 무엇인가
사랑니를 뽑고는 많이 아팠다. 그러나 그 고통 참아가며 한시미학산책을 펼쳐 읽는다. 찢어진 잇몸이 나 죽는다며 요동칠 때는 의사의 말대로 조그만 찜질팩을 얼굴에 갖다 대고 그 화를 식혔다. 자기와 놀아주지 않는 아들이 방에 들어와 얼음 찜질팩을 보더니 생전 처음 접하는 물건이라 덥석 집어 들었는데 그 차가움에 놀라 ‘윽’하며 얼른 내려 놓는다. 그리곤 하는 말이
“아빠, 여기 안에 겨울 있어!”
순간, 나는 읽던 책을 덮었다. 멍해져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들을 빠꼼히 쳐다 본다. 아들도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내가 신기한 듯 미소 지으며 고개 한 쪽을 까딱하며 나를 쳐다 본다. 한시 산책 은 그만두고 이 아이와 산책하고 싶어졌다.
또 다시 쳐다본 얼음 찜질팩은 더 이상 이전의 찜질팩이 될 수 없었다. 이제 그것은 나도 처음 접하는 세상에서 가장 조그만 ‘겨울’이었다. 새로운 시선으로 이미 확고하게 규정된 한 존재의 정의가 완전히 뒤바뀌는 순간이다. 이제 얼음 찜질팩은 아주 낯선 물건이 되었다.
5세 아이의 시선으로는 모든 것이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낯설다. 그 낯섦은 자기만의 시선을 통해 관점을 낳는다. 그 관점은 천지를 아는 듯 행세하는 어른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시각이다. ‘낯설게 하기’, 시선(視線)이 탄생하는 지점이며 다시 깊은 생각으로 가는 시작이다. "신묘한 빛이 엉겨 붙은" 바로 그 지점, ‘시’가 태어나는 순간이다.
국어학자 정민은 자신의 책 ‘한시미학산책’에서 이 낯섦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어떻게 볼 것인 것?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마주치면서도 그저 지나치는 일상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한 사물과 낯설게 만나 그 낯섦으로 그 사물을 새롭게 만나는 것.” 시가 탄생하는 지점에 대한 그의 통찰은 날카롭다. 시는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시는 구구절절이 사족이 붙은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다르게 걷어내고 또 걷어낸다. 대상과 ’시인’이 나체로 서로를 마주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그 걷어냄은 계속된다. "하나만 건드려도 나머지가 따라 움직이는 일동만수(一動萬隨)의 경락"을 찾아내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다. 우리는 그것을 ‘함축’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그 함축은 이해할 수 없는 비약으로 해석의 어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바로 그것이 시가 “문학적 아름다움의 가장 윗자리”에 있게 한 이유이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사람은 “시라는 아름다운 액세서리를 통해 그 볼품이 없는 몸뚱어리는 순식간에 우아함의 거푸집”으로 변한다. 우리의 삶이 그 미끈한 정신적 나체의 윤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밥벌이를 떠나 시를 읽고 시를 써야 하는 충분한 이유다. 시는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시는 귀로 듣는 것이다. 시가 산문성을 어느 정도 머금고 있기는 하나 시의 원형은 운율에 기반한 운문이다. 시는 오늘에 와서는 읽는 시의 위기와 선율 시의 배설적 소비로 나뉘어져 버렸지만 결국, 시는 인류가 부르던 노래가 아니었나. 주술의 형태로 시작되어 가장 오래되었고 그리고 가장 오래도록 살아남을 문학이 될 것임에도 틀림이 없을 터. 노래 없는 인간의 삶은 볼품 없기로 치자면 그 만한 것이 없으니 말이다.
시는 사물을 낯설게 바라보고 함축하고 노래하여 보잘것없는 개별의 삶에서 나오는 생의 고갱이를 인류에게 수여하는 작업이다. 시는 인류에게 수직으로 쌓아 올린 과학적 지식이 돌보지 못하는 생의 시원(始原)을 보듬는다. 물질로 삭막해진 삶의 한 켠을 시 한 줄 읊으며 맞버틴다. 이제 시집을 펴리라.
장재용님의 그 꼬마와 저도 산책하고 싶습니다.^^
사랑니가 나느라 아팠다니까 너도 이제 사랑할 나이가 되었다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제목의 시를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나서 검색해 보았어요. 정양 시인 저는 처음 이름 들어봐요.
저한테는 사랑니 뽑는 수술을 하면 안정을 취해야하는데 욱식욱신할텐데, 다섯 살 아들이 와서 아빠랑 놀자하는데도
바쁜 와중에서 열심히 책을 읽으셨을 장재용님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사랑니
정양
환갑 진갑 다 지나서
어쩌자고 사랑니가 난다
새로 나는 게 아니고
숨어 있는 게 드러나는갑다고
치과의사는 잠시 어이없고
나는 뭘 들킨 것처럼
욱신거리는 것도 계면쩍다
사랑니는 죽어서도 난다지만
이 늙발에 어쩌자고 드러나는가
눈물은 슬픔은 가슴에 묻어 두면
별이 되어 밤마다 글썽거릴 테지만
숨기고 감추고 묻어 두어도
사랑은 이렇게 욱신거리며 드러나는 건가
어차피 드러나도 이제는 괜찮은 건가
남이야 늙발에 욱신거리든 계면쩍든
야속하든 허망하든 말든
사랑니 그거 아무 쓸모없는 거라며
가끔씩 말썽만 피우는 거라 마침내는
뽑아 버려야 한다며
덤덤히 처방전을 뽑는 젊은 의사는
이 세상에 드러날 게 전혀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