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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브레스트 감독의 <여인의 향기(1992)>라는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아름다운 탱고의 선율과 배경음악을 떠올리게 하는 명작중의 하나로 기억나게 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으로 출연한 프랭크 역의 알 파치노의 연기는 대중들에게도 각인을 시켜 그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도 하였다. 그는 이 영화에서 돈은 많지만 인생의 의미성을 찾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 역할로 출연을 한다.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삶에 염증을 느껴 생의 마지막 여행을 고려하던 중, 그는 자신의 길잡이가 되어줄 찰리라는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함께 떠난다. 화려한 곳을 방문하고 비싼 음식을 먹고 나서 그가 작정한 디데이가 드디어 다가왔다. 알 파치노는 찰리를 심부름 시켜 밖으로 나가게 하고 그사이 권총으로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지만, 느낌이 이상해 다시 돌아온 그로 인해 자살을 만류 당한다. 몸싸움이 이루어지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알 파치노는 다음과 같은 화두를 찰리에게 던진다.
‘Give me one reason.’
내가 살아야 할 존재 가치의 당위성인 이유를 제시해 달라는 마지막 절규와도 같은 이 메시지는, 영화 속의 당사자뿐만 아니라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에게도 해당되는 메타포(metaphor)로 다가옴은 나만의 생각일까.
오늘도 우리는 <모던 타임즈> 영화에서의 찰리 채플린처럼 하루의 일상을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며 바삐 살아간다. 차가운 공장의 기계부속물과 같이. 그러다 잊혀져버린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기도 한다.
내가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나는 지금 잘살고 있는지.
이렇게 사는 것이 내가 어린 시절 꿈꾸던 삶인지.
문득문득 돌아보는 가운데 후회와 아쉬움 짙은 회한들이 밀물처럼 습격을 해올 때면, <박하사탕> 영화 속의 배우 설경구가 ‘나 돌아갈래.' 라는 대사를 외치듯이 악다구니 소리쳐도 본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다시 도전할, 다시 시작하는 사람은 의외로 흔치않다.
자그마한 용기가 필요하지만 우리에겐 그것이 없다. 아니 없다라기 보다는 애써 그것을 내 작은 뱃속 끝자락 깊숙이 꾹꾹 누르고 숨겨놓을 뿐이다.
왜냐고.
이젠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삶을 죄고 있는 현실의 여러 굴레들이 너무 많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삶의 리츄얼(ritual)이 필요하다. 나중이 아닌 지금 바로 이 순간순간의 의미와 즐거움을 취하는 행위 그것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명절일.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 되었다. 여느 가정이 그렇듯 K부부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갈 채비를 차리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행위를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조금의 차이점이 있어 보인다.
난리도 아니다. 남편은 무슨 전쟁에 나가는 병사마냥 사전 준비에 한창이다. 군대에서의 독도법을 되새김질이나 하듯 커다란 대한민국 전도를 펼쳐놓고, 출발 지역과 도착 지역의 구간과 예상 시간을 추정하고, 장애물의 병목지역을 추정해 대비책을 강구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를 바라보는 아내는 어쩌면 철모르는 아이를 대하듯 물끄러미 보고만 있는 입장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마디를 거들면 무언가 숭고한 의식의 장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로 나올 수도 있겠다는 본능적인 직감의 덕분이다.
출발 당일.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남편은 완전군장을 하고 특유의 남성의 파워를 자랑하듯 승용차 트렁크에 커다란 아이스박스 등을 실으며 휘파람을 불며 손뼉을 쳐댄다.
OK. 이만하면 되었어. 이제 출발.
그런데 이런. 역시 아내와 아이들은 아직도 한나절이다.
출발 시간이 지났건만 내려올 기별을 보이질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한가치 담배는 어느새 꽁초의 숫자가 모여 모래성을 이룬다.
서서히 짜증이 오르고 용의 주둥이에서는 하얀 연기가 솟아오른다.
내 이놈의 여편네를.
그제야 아내는 헐레벌떡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관에 도착한다.
“미안. 아버님 드릴 선물을 미처 챙기지 못했어요.”
“그래서 내가 간밤에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그랬지.”
하여튼 여자들이란.
드디어 출발. 키로 시동을 걸자 금속성의 애마는 부드럽게 응답을 한다.
남자의 어깨는 절로 으쓱 거린다.
“이봐, 내가 장거리 운전 전에 미리 지난주 점검을 해놓았으니 망정이지 가다가 차가 퍼지면 어떡할래.”
남편은 자신의 행위에 자축의 박수를 보내며 자랑으로 입에 거품이 모인다.
하지만 서울 톨게이트에 들어서자 꼬리 문 차량은 끝이 보이질 않는다.
이런 제기랄.
서서히 남자는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내가 일찍 출발하자고 그랬잖아……. 라고 하며 역정을 내려고 돌아보는 순간 뒷자리의 아이들은 그렇다 치고 옆에 앉아있던 아내는 어느새 꿈의 삼매경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자기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저렇게 퍼질러 자고 있나.
씩씩대어 보지만 남자는 원초적인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다시 한 번 핸들을 움켜쥐며 죽을 둥 살 둥 전방을 주시한다.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군가를 떠올려 보며 이한목숨 바쳐 통일이 된다면 각오로 아이들과 아내를 돌아보며 심호흡을 해댄다.
나는 이집안의 가장이야. 최선을 다해서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되게 하는 것이 오늘 나의 맡은바 지상과제야.
두통이 서서히 밀려오지만 아랑곳하질 않고 결사적인 항전을 계속하고 있던 차 아내는 드디어 기지개를 편다.
“아웅~ 자기야. 여기가 어디야.”
울화통이 치밀어 오른다. 어디긴 어디야. 한마디를 내지르려고 하는 순간 눈치 빠른 아내의 역습이 이어진다.
“어머, 자기야. (침을 튀기면서) 하늘좀 봐. 저렇게 파랗다니. 하늘 올려다 본지도 참 오랜만이네. 그리고 저기 들녘의 꽃좀봐. 어머, 어머. 세상에 벌서 코스모스가 피었네. 역시 서울하고는 달라. 자기 알지. 내가 연애시절 하늘하늘 거리는 몸매가 코스모스 닮았다고 왜 자기가 얘기했었잖아. 그때 정말 잘나갔었었는데. 왜 자기도 알걸. 내 대학 동창이 나의 그런 모습 보고 얼마나 반해했었는지. 자기만 아니었으면 아유~ 아, 좋다! 밖에 나오니까 이렇게 좋구나. 자기야, 우리 명절 때뿐만 아니라 주말에 이렇게 야외도 나가고 앞으로 좀그래보자고. 우리가 살면 앞으로 얼마나 살겠어. 영희 있잖아. 왜 봄에 쌍꺼풀 수술했다는 친구. 얼마 전에 가족 모두 유럽여행 다녀왔다고 자랑을 얼마나 해대던지. 아, 부럽다. 맞다. 자기 운전한다고 피곤하지. 어깨 주물러 줄까. 아니, 방해될 수 있으니까 내가 노래 한 곡조 멋있게 뽑아줄게. 함께 불러야 맛이 나니까 얘들아 일어나. 아빠 운전하다고 얼마나 힘드시겠어. 우리 함께 멋있게 불러드리자.”
이 여편네가 정신이 나갔나. 내가 지금 가족들을 위해서 얼마나 힘들게 눈을 부릅 치켜들고 핸들을 잡고 노동을 하고 있는데. 격려는 못해줄망정 뭐 코스모스가 어쨌다고. 나 참 어이가 없네. 작업용 멘트였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지. 거기다 콧바람을 쐬러 나가자고. 허허~,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런데 잘리면 책임질래. 나 오랫동안 가늘고 길게 살아야 되거든. 내가 얘기를 안 해서 그렇지. 도대체 여자가 자기 남편이 얼마나 바깥에서 얻어터지며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지 몰라. 정말 속터지네. 아니 근데 차는 왜이리 안빠지는거야. 거기다 옆에 외제차는 왜 깜빡이를 켜들고 지랄이야. 뭐 끼어들겠다고.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네가 내 앞으로 오면 내가 성을 간다.
이런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아내는 작심한 듯 아이들과 노래를 합창한다.
“♫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그만해.”
한 소절이 끝나기도 전에 참다못한 남편은 드디어 역정을 낸다.
어안이 벙벙. 아내는 한마디를 한다.
“아니, 왜 그래요. 당신이 운전하느라 애를 쓰는 것 같아서 힘내라고 노래 불러주는데 칭찬은 못해줄망정 왜 아이들 기를 죽이고 그래요.”
뭐 힘내라고 노래를 불러준다고. 나 참. 제발좀 정신 차려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노래가 그노래인줄 모르니. 한 번씩 아이들이 그 노래 부를 때마다 나는 쭈뼛쭈뼛 머리카락이 치솟는다고. 뭐 아빠 힘내라고. 속이나 뒤집지 말라고 그래. 뭐, 우리가 있다고. 용돈 달라고 손만 내밀지 말고 거 뭐시냐. 케네디 대통령이 했던 말이 있잖니.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바라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라는 이야기. 그런 노래 부를 시간이면 영어단어 하나 더외워서 좋은 대학교 들어갈 생각이나 해. 노래 부른다고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승용차 안은 냉랭한 전시의 분위기가 감돈다. 적막이 흐르고 아무 말이 없다.
아직도 분이 안 풀리네. 운전 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염장을 지르고 있으니. 그런데 아직도 갈 길이 먼데 괜히 내가 성질을 냈나. 너무한 건 아닌지. 이미 떠나가 버린 버스지만 식구들에게 무안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아 분위기 전환을 시켜 주어야 겠다는 생각에 남자는 얼굴색을 바꾼다.
“얘들아 이번엔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노래하나 불러…….”
이런 XX. 이게 뭐하는 시추에이션이야. 조용하다 했더니 어느새 아내와 아이들은 다시 꿈나라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 미치겠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도 아니고 정말 어이가 없다. 어제 저녁에 나는 최대한 막히지 않는 길을 찾겠다고 고민하며 난리를 부리는 가운데에서도 일찍 코골며 잔 사람이 누구인데. 저렇게 잠이 올까. 정말 속터진다. 어떻게 저렇게 태평할까. 역시 가정은 내가 지킬 수밖에 없어. 다시 한 번 핏발선 눈을 부릅뜨며 군대시절 GOP 근무할 때의 기강으로 운전대를 다시 빡세게 움켜쥔다. 앞으로 끼어드는 놈 있으면 다죽었어.
그런데 아무래도 물은 좀 빼야 할 것 같다.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졸음도 쏟아지고.
“기상. 10분 내로 휴게소에서 볼일보고 탑승한다.”
이런. 그런데 왜 또 시간 내로 오질 않는 거야.
따르릉.
빨리 오지는 않고 왜 전화질이지.
“어머, 여보. 요새 휴게소에서는 그림 전시회도 하네. 조금만 보고가요. 어차피 길이 막힐 건데 여유 가지며 쉬었다고 천천히 가요.”
나는 뚜껑 열리기 직전인데 정말 여유 만땅이다. 어떻게 저런 생각이 나올 수 있을까. 갈 길이 구만리인데 한가하게 퍼질러 앉아 뭐 그림 구경하고 가자고. 정말 부아가 치민다.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정말 뇌를 해부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정말 보고 싶다.
끓는 마음에 남편은 담배를 다시 집어 든다.
내가 담배 끊는다고 연초에 약속했지만 도대체 도와주는 인간이 없네. 내가 폐암 진단 받으면 전적으로 이건 당신 책임이야. 알았지.
나와 같은 신세인양 몇몇 남자들도 오만상을 찌푸리며 담배를 피워 무는 모습이 보인다.
뭐 마른 강아지마냥 왠지 서글퍼 보인다. 아니, 내가 무슨 감정이 드는 거지.
정신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며 시계를 본다.
이젠 진짜 출발해야 하는데…….
동일한 환경의 세상을 바라봄에도 남성과 여성이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똑같은 코스를 가면서도 남자에게는 쟁취해야할 전방의 목표물만이 보일 뿐인데, 어떻게 여자들은 삶의 수채화의 다른 풍경들이 보이는 것인지.
그 또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힘이 어쩌면 부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너무 신경을 곤두세워서 그런가. 삭신이 다쑤셔오네. 나의 이런 노고를 그들은 알까. 애고 내 팔자야~
p.s
: (종교상의) 의식 절차 또는 (항상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과 같은 일을 뜻하나, 현대적으로는 스스로의 삶에 의미부여를 하는 것을 리츄얼(ritual)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