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 조회 수 8950
- 댓글 수 8
- 추천 수 0
여기 시가 하나있다. 이 시의 제목은 '내 고추'다.
변소에 가서
오줌을 누려고 하는데
해바라기가
내 고추를 보려고 한다
나는 안 보여줬다
어느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의 시다. 열 살짜리의 시인데, 귀엽다. 그러나 원래의 시는 다르다. 원작은 이렇다.
변소에 가서
오줌을 눌라고 하는데
해바라기가
내 자지를 볼라고 한다
나는 안 보여줬다
제목도 '내 고추'가 아니고 '내 자지'다. 사투리도 표준말로 고쳤다. 학교 선생은 다른 학생들에게 원작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불편해서 교육적 차원에서 젊잖게 고쳐두었다고 한다. 강제 개작을 통해 이 시의 어린 작가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 날 수 없게 되었다. 표준화 되었고, 무난해졌다. 그러나 교육이라는 거름망을 지나오는 동안 '열 살짜리 남자 아이'라는 본질을 잃고 말았다. 생명을 잃었고, 진실을 잃었고, 시(詩)를 잃었다. 해바라기가 보려고 하여 숨긴 것은 내 고추가 아니라 내 자지인 것이다. 고추라면 숨길 필요도 없다. 오직 자지이기 때문에 숨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신화는 문명의 고치지 않은 원판이며 야생의 사유다. 모든 어른 속에 아이가 들어 있듯이, 인류는 그 사유 속에 원시를 품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문명은 원시로부터 시작되었다. 원시를 품지 않은 문명은 죽은 것이다. 야생의 사유가 없는 문명은 아스팔트며, 가면이며, 생명이 다했거나 애초에 생명이 없이 만들어진 조화(造花)에 불과하다.
신화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오래된 원시의 철학이다. 그때 그들은 이 사유의 틀로 사람을 이해했고 자연을 이해했고 우주를 이해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원시를 미신이라고 불렀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원시를 야만이라고 모멸했다. 그러나 신화는 이야기 속에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는 진리의 상징이다. 그것을 풀어내면 옷 속에 감춰진 인류의 은밀함에 접근해 갈 수 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603 | YWCA(1999. 2)-유산 [3] | 구본형 | 2002.12.25 | 5661 |
602 | 이것이 디지털이다 [2] | 구본형 | 2002.12.25 | 5675 |
601 | 비즈니스 미덕- 하나의 기본, 두 개의 원칙 [4] | 구본형 | 2008.04.04 | 5717 |
600 | 우리가 서로 강력하게 협력할 수 있는 방법 [2] | 구본형 | 2006.05.08 | 5721 |
599 | 년초에 세상의 변화를 엿보자 [2] | 구본형 | 2007.02.12 | 5722 |
598 | 임부가 생명을 품듯 [2] | 구본형 | 2002.12.25 | 5731 |
597 | 나를 캐리어 스폰서라 부르라 [2] | 구본형 | 2005.05.29 | 5733 |
596 | 창의력을 해방시켜라 [2] | 구본형 | 2006.02.28 | 5733 |
595 | 더 나은 자본주의를 위하여 [4] | 구본형 | 2011.04.07 | 5737 |
594 | 오늘 저녁때는 부디 특별한 마음으로 귀가하시길 [3] | 구본형 | 2002.12.25 | 5746 |
593 | 선수를 똑바로 보세요. 승리의 신화가 보일 테니 - HR 스코어카드 [2] | 구본형 | 2002.12.25 | 5747 |
592 | 새로운 비즈니스의 공간을 찾아라 [2] | 구본형 | 2005.05.29 | 5747 |
591 | 필부도 세상의 흥망에 책임이 있다(2000.여름) [3] | 구본형 | 2002.12.25 | 5748 |
590 | 우리는 약소국인가 ? [2] | 구본형 | 2004.08.12 | 5748 |
589 | ‘우리 속의 나’ [3] | 구본형 | 2005.08.30 | 5750 |
588 | '장성에 가면 사람 사는 것 같다' [3] | 구본형 | 2002.12.25 | 5751 |
587 | 설득 당하지 말고 설득하라 [2] | 구본형 | 2002.12.25 | 5752 |
586 | 강연 여행 [2] | 구본형 | 2003.11.12 | 5752 |
585 | 그 많은 기원과 그 많은 결심들 [3] | 구본형 | 2004.02.06 | 5756 |
584 | 지난 여름 피서지에서 생긴 일 [3] | 구본형 | 2004.09.11 | 57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