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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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컬럼은 6기 최우성 연구원님의 글입니다.
병원의 시간은 원근(遠近)이 없다. 환자가 되어 누워 있으면 동일한 풍경이 펼쳐진다. 수술과 검사가 끝나면 같은 시각에 약을 먹고, 잠자고 다시 약을 먹고 처치를 하는 시간이 반복된다. 같은 의사와 동일한 복장의 간호사들이 시간에 맞춰 들어오고 나갈 뿐이다. 1주일이 1년 같이 느껴지는가 하면, 한달 전의 시간이 어제처럼 느껴진다. 어찌보면 오랜 직장생활도 마찬가지 느낌이다. 병원근무 20년이 가까워지면서 시간의 원경과 근경이 구별되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잘 버티고 다닌 내가 대견하기도 하고, 오랜시간을 보냈다는 지루함과,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들기도 했다. 기억력의 감퇴현상일까? 하릴없이 시간의 원근을 생각하다가, 바로 엊그제처럼 느껴지게 하는 환자가 떠 올랐다.
4년 전 지인을 통해 입원했던 OOO 씨는 베트남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활약한 분이었다. 태권도 도장과 함께 베트남에서 벌인 사업의 성공으로 베트남에서는 알아주는 상류층 인사였고 무도인답게 사나이였다. 그러나 갑자기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10kg 이 넘게 빠지더니 혈변이 보였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는, 귀국하여 진단을 받고, 우리병원 외과에서 대장암 말기로 판명되었다.
스위스 출신의 정신과 의사‘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는 말기환자를 중심으로, 임종의 심리상태를 분석한 5단계 모형을 제시했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5단계를 거치게 된다는 유명한 이론이다. 태권도 사범이었던 그를 통해 5단계 모형을 체감했다. 그에게는 부정과 분노가 동시였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까지 건강검진 한번 받지 않았을 정도로, 몸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다가 온 운명을 수용하지 못하고 부정하다가 분노를 터뜨리곤 했다. 결국 수술을 받기로 결정하고 수술이 진행되었다. 15시간이 걸린 대수술이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수술이 다음날 새벽 1시에 끝났다. 의사는 최선을 다했으나 대장암은 수술예후가 좋지 않은 대표적 인 암에 속한다.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우울과 수용의 단계가 혼재된 감정상태를 보였다. 안타깝게도 그는‘대장암 수술 후 생존율 30%’ 의 범위에 들지 못했고, 1년이 채 못되어 사망했다.
병원에 근무하긴 했지만 기획팀장이었던 시절이었다. 환자를 소개하는 일도 많지 않았고, 가까운 지인의 소개도 있었기에 열심히 그를 방문하였다. 수술 전에는 희망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수술 후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속 지켜보았다. 그는 고마웠던지 ‘내가 몸이 회복되면 같이 베트남에 가자. 끝내주는 관광을 시켜 주겠다.’는 말을 계속했었다. 그가 입원하던 기간에 환자를 위한 공연이 열린 적이 있었다. 통기타 가수로 유명한‘해바라기’듀엣이 자선공연을 했는데, 안내해서 공연을 보게 해주었더니 매우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병원에서 이렇게 좋은 공연을 볼 줄은 몰랐다, 내가 몸만 회복되면, 병원에 후원과 기부를 하겠다’는 약속도 했었다.
그러나 치료효과가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으면서,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분노도 사라졌고 우울과 침묵만이 남아있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그를 피해다닌 것은...정기적으로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병원일과 회의 등의 핑계를 대고 병실방문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연락을 하지 않고 3~4개월이 지난 후, 지인에게서‘장례를 치루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제서야, 성급한 희망을 말했던 나의 경솔한 행동이 후회되었다. 남편의 회복을 위해 너무나 헌신적이었던 그의 부인에게, 고생하셨다는 말조차 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낭패감마저 들었다. 우리는 죽음이 우리의 일부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한다. 죽음은 생각하기 싫은 주제이며, 정면으로 마주보기 싫은 운명이다. 난 죽음을 정면으로 앞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살아가면서 일상에 지쳐,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 때마다, 그의 말이 기억나곤 했다.
‘내가 몸만 회복되면...’
요즈음 들어, 죽음이 우리의 일부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해 준 것은 작년에 부임하신 병원의 신부님이다. 가톨릭 신학대학교 교수이면서 가톨릭 교회법원의 판사이기도 한 신부님은 대단한 경력을 지니셨지만 권위와는 거리가 먼 분이다. 욕도 잘 하시고 어찌나 웃기고 소박하며 유쾌한지, 교직원들에게 인기가 킹왕짱이다. 그 신부님은 호스피스병동의 환자들을 주관하신다. 신부님은 임종을 앞둔 환자들의 손을 꼭 잡고, 죽음에 대해 ‘편안하게 가시라’며 스스럼없이 말을 건내신다.
“붙잡지 마세요. 그냥 편안히 가세요. 대신 하늘나라에 가시면 소주집이 있을 거에요. 거기서 기다리세요. 제가 곧 따라갈께요.”
임종을 앞둔 환자가 “하늘나라에 소주집이 정말 있냐?”고 물으면 신부님은 정색을 하시고 이렇게 말한다. “그럼, 소주집이 없으면 그게 천국입니까? 걱정마세요. 편안히 가세요!”
천국에는 소주집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주 좋아하는 신부님과 술도 자주 먹었기 때문에, 나는 신부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또한 앞으로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게 경솔한 말도, 죽음을 쳐다보기 두려워 도망치는‘회피’방어기제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많은 환자들이 입원하고, 퇴원한다. 일상에서의 이탈이자, 일상으로의 회귀다. 퇴원하는 환자들은 자신들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입원하는 환자들은 어제까지 이어졌던 자신의 일상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입원과 퇴원 또한 일상의 반복일 뿐이다.
종종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노안이 찾아오면, 이제는 욕심을 버리고, 읽어야 할 책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는 것은, 질병이 나에게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느 날 문득, 예상치 못했던 삶의 질문을 받는 곳이 병원일지도 모른다. 입원을 하게 되면 질문을 받지만, 퇴원을 하면서는 대답을 하게 되는 곳...
질문은 모두 달라도, 대답은 동일하지 않을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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