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키 제동
- 조회 수 2352
- 댓글 수 8
- 추천 수 0
지난 14년간 하이힐을 신고 달렸다. 나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심볼인 하이힐을 사랑했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걷고 있자면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잡지에 나오는 모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직장에 다니면서부터는 하이힐의 굽높이가 약간은 낮아졌지만 속력은 더 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챙기랴 일하랴 시간은 항상 부족했고, 직장과 가정에서의 책임은 점점 무거워졌고, 내 삶은 언제나 복잡하고 분주하기만 했다. 거기에 나를 괴롭히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취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 그 때문에 나는 한시도 쉴 수가 없었다.
얼마 전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 탐구를 하면서, 나는 이러한 성취욕구와 성과주의가 나의 기질(유전적 요인)과 성장 환경(후천적 요인)에 기인한 것이라는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에 목말랐다. 동생들에게 더 큰 기대를 했던 아버지에게 나의 성취와 성과를 보여주는 것은 나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네가 그걸 할 수 있겠니’ 싶어하는 일에는 더 악착같이 매달렸다. 그러면서 기대 수준과 만족의 잣대를 점점 높아졌고 도전과 성취는 끝을 알 수 없는 게임 같았다. 그러다 최근 또 다른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내가 수없이 읽어 온 ‘책’과 내가 살고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었다.
30대 초반, 다국적 제약사에 입사하면서 신입사원 교육에 참여하게 된 적이 있었다. 의사를 대상으로 의약품을 판매해야 하는 직업의 특수성으로 인해 제약회사의 신입사원 교육은 혹독하기로 이름이 나있다. 4주 동안 강도 높은 수업을 받고, 매일 아침 시험을 보고, 성적에 따라 거래처 배치가 이루어진다. 성적이 좋은 신입사원은 서울의 주요 병원, 주요 지역을 맡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출발선부터 약간 뒤쳐지게 되는 시스템이다. 나는 홍보팀 대리로 입사했지만 팀장님의 권유로 기초 의학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첫 주만 참여했는데 하루 3~4시간 밖에 자지 못하고 계속되는 강행군을 따라가기가 너무 벅차고 힘들었다. 아무튼 그 과정이 끝날 때쯤 부사장님의 지시로 책 한 권이 내려왔다.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자기 경영 시대의 최고의 지침서’라는 빨란 광고 띠가 붙은 앤서니 로빈스의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진정으로 결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현재의 결혼생활이 마음에 안 들거든 그것을 바꾸겠다고 결단하라. 현재의
일이 마음에 안 든다면 바꿔라.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불만이라면 그것도 바꿔라. 신체적으로 더 높은 활력과 건강을 원한다면 그것도 지금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역사를 이루어낸 사람들과 같은 능력을 지금 당장 확보할 수 있다.
신입사원들에게 꼭 맞는 책이 아닌가? 결단만 내리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니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의 미래를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당장 해야 할 것들의 목록을 만들었다. 그리고 당장 시작했다. 이후에도 나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공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소위 성공학 서적들을 탐독했다.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책도 있었고, 끌어당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 주파수의 파장을 전송하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책도 있었다. 이런 책들을 읽고 있자면 ‘나도 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잠시도 쉴 수가 없다. 꿈꾸고 생각하고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데 정성을 보여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책들은 마약과 같은 속성이 있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 약효가 떨어지고 나면 다시 공허한 마음을 부여잡고 새로운 책을 찾아 헤매는 악순환을 만들곤 하니까.
재독 철학자 송병철은 그의 책 『피로사회』에서 내가 하이힐을 신고 끝없이 달려야 했던 또 하나의 이유를 제기한다. 그는 21세기가 ‘~해서는 안 된다’가 지배적인 부정성의 규율사회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성과사회로 변모했음을 지적한다. 규율사회에서는 ‘NO’에 좌절한 광인과 범죄자가 생겨났지만 성과사회에서는 ‘YES’를 맹신하다 좌절한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들이 양산된다. 개인은 성과의 주체로서 외적인 억압을 받거나 노동을 강요당하거나 착취의 희생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과를 위해 자신을 착취한다. 이러한 착취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신에 의해 실행되므로 더 효율적이다. 이로써 개인은 가해자이자 희생자이자 주인이자 노예가 된다. 이제 경쟁은 타자와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와의 것으로 변모한다. 경쟁은 첨예화되고 개인은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강박과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은 소진(Burnout)되고 우울해진다. 이러한 자발적인 자기 착취의 결과는 자학성이 생겨나고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이러한 주장은 알랭 드 보통의 책 『불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보통은 불안의 세 번째 원인인 ‘기대’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18세기와 19세기의 위대한 정치 혁명과 소비자 혁명은 인류의 물질적 운명을 크게 개선시키는 동시에 심리적 고뇌도 안겨주었다. 특별하고 새로운 이상, 즉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하고 누구나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평등주의 사상 때문이었다. 보통은 이 책에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의 ‘왜 미국인은 번영 속에서도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라는 장의 일부를 소개한다.
“출생과 운에 따른 모든 특권을 폐지했을 때, 모든 사람이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릴 때, 야망이 큰 사람은 위대한 일을 쉽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자신이 비범한 운명을 타고 났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을
통해 금세 교정되고 마는 망상이다.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신분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지위를 받아들였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 대해서 반감을 품거나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신이 정해준 운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평등주의가 사회의 주요 가치로 자리잡으면서 이론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해졌지만 이것을 물질적 평등으로 이어가기는 힘들어졌다. 무제한의 기회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처음에는 명랑한 분위기가 조성되지만 다수가 신분 상승에 실패하게 되면 사람들은 침울해졌다. 울화 때문에 생기를 잃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를 외치는 평등 긍정 사회에서 개인은 끊임없는 도전을 강요당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화려한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한 번 해볼까?’하는 마음에 시작하지만 모두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시스템은 점점 더 공고해지고 성공의 가능성은 점점 더 낮아지지만 성공한 일부는 더욱더 과장되게 상품으로 포장되어 광고되고 소비된다. 그 와중에 실패한 다수는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이러한 사회적 꼼수에 넘어갈 수 없다며 팔짱 끼고 뒷방에 앉아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답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어야 할 점은 바로 ‘균형’이다. 한병철은 그의 책에서 약간의 힌트를 독자들에게 던져준다. 그는 안식일을 언급하며 ‘쓸모 없는 것의 쓸모’를 언급한다. 그의 힌트를 확대 해석해보면 성과를 위해 해야 하는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쓸모 없는 일을 통해 쓸모 없는 것의 쓸모를 찾아보라는 뜻이 아닐까? 인터뷰 기사에서는 좀 더 친절한 설명도 붙여 놓았다. 성과사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타자’의 존재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정성 등을 다시 불러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마흔이 다 되도록 성과주의적 사고에 매몰되어 ‘해야 하는 일’과 ‘쓸모 있는 일’만 하고 살았다. ‘타자’보다는 ‘나’에 집착했고 항상 ‘아니다’보다는 ‘그렇다’고 대답하려 애썼다. 그렇게 살다 보니 한병철의 말대로 나 자신을 착취해 번아웃되고 말았다. 이후 우울증이 나를 찾아 왔고 극심한 피로감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는 이제 운동화를 신고 천천히 걷는다.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꽃길을 걷는 일은 참으로 근사하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하니 말이다. 예전엔 시간낭비라 생각했던 일도 마음을 다해 해본다. 그런 일을 하는 재미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다시 하이힐을 신을 준비를 하고 있다. 안식년을 마감하고 사회 복귀를 준비 중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하이힐을 신고 전속력으로 질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굽이 높지 않은 적당한 구두를 신고 주변을 돌아보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쉬엄쉬엄 걸어갈 것이다. 그러면서 일과 삶을 즐기며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