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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일 20시 24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저자 한병철은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1994년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피로사회』(2010)를 통해 독일에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가장 주목 받는 문화비평가로 떠올랐으며, 한국에서는 2011년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하이데거 입문』『죽음의 종류- 죽음에 대한 철학적 연구』『죽음과 타자성』『폭력의 위상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중앙일보 기사 - [책과 지식] 『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도올 김용옥 만나다

 

한병철(53)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의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가 요즘 화제다. 너나없이 달려가는성공시대의 강박증과 부작용을 성찰한 책이다. 한 교수가 최근 도올 김용옥(64) 원광대 석좌교수를 방문했다. 두 철학자는 동·서양의 사유를 넘나들며 현대사회의 안팎을 진단했다.

 한 교수는 고려대 금속공학과를 나왔다. 도올이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해 고려대 교수로 부임하던 1982년 당시 학부를 마치고 좀 더 큰 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30년간 국내에 거의 들어오지 않고 독일에서 박사학위와 교수자격을 취득했다.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날 기회는 없었다. 언론과 책을 통해 도올을 접했던 한 교수가 이번 책이 국내 번역된 것을 계기로 도올을 찾게 됐다
.

 『피로사회』는 독일에서 2010년 출간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두 철학자는 만나자마자사소한 대화는 생략하고 곧바로 철학담론으로 들어갔다. 인사하러 간 자리가 예정에 없던 철학대담으로 이어졌다
.

 한병철=안녕하세요.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된 제 책을 갖고 인사차 왔습니다.

 김용옥=독일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고요.

 한=페터 슬로터다이크라고 독일에서 유명한 철학자가 총장인 대학교에서 가르칩니다. 슬로터다이크는독일의 김용옥이라고 할 수 있지요.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강의 한 번 하면 3000명씩 모이는 등 독일 사회를 굉장히 자극하는 사람이에요. 도올 선생님은 동양사상을 서양에 알리는 노력을 하지 않으십니까
.

 김=한 교수가 독일어로 『피로사회』같은 책을 쓴다는 건 독일 정신세계(German mind)로 들어가서 독일인으로서 써야 되는 거잖아요. 그래야 독일 사람한테 읽히지, 나는 『논어』 『대학』 『중용』 『효경』 같은 동방 고전 한글번역 시리즈를 내고 있어요. 『맹자 한글역주』가 곧 나옵니다. 그런데 내 책을 독일어로 번역하면 독일 사람들이 못 읽어요
.

 한=독일어 잘하는 사람이 번역해도 못 읽을 겁니다. 이해가 안 되는 거죠. 동양사상을 서양에 소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양철학 얘기를 하지 않는 겁니다. 서양의 언어로 서양과 다른 사유의 상황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피로사회』를 쓰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피로사회』에서 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게 『장자』의무용지용’(
無用之用·쓸모 없는 것의 쓸모)이에요. 장자 얘기 안하고 서양작가들 이야기 하면서 결국 장자의무위’(無爲·함이 없음)무용지용의 의미를 전달하는 거죠.

 김=그게 유일한 통로일 거요. 한 교수는 독일어 속에 살고 있고, 나는 한국어 속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한=동양철학의 번역서를 서양인은 그들 방식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하이데거가 『도덕경』을 번역한 게 있는데 노자의 ‘Tao’(
·)를 기독교의으로 연결시켜요
.

 김=『도덕경』에도를 도라고 말하면 상도(
常道)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는 구절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조차 상도(常道)영원한 도’(Eternal Tao)라고 번역해요. 영원불변이란 개념은 전통적 동양 사유와는 거리가 멉니다. 동양인에게 모든 도는 시간 속에 있는 것이거든. 시간 속에서 항상스러운 도, 항상 시간과 더불어 가는 도라는 의미지요. 이런 얘기를 내가 평생 했는데 잘 이해되지 않는 걸 보면 오늘의 한국인과 한국말이 얼마나 서양화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한=저는 하이데거 연구로 박사학위를, 데리다 연구로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한 서양철학자이고 15권 정도의 책을 독일에서 펴냈지만 늘 동양적 사유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

 김=동서양을 떠나서 인류의 가장 큰 과제상황은 막스 베버가 이야기했듯이 초월적 신화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희랍 사람들이 하는 대화라는 것도 거의 신화를 빌려서 하는 것뿐이지요. 근데 공자, 맹자 이런 것은 신화가 아니란 말이야. 아주 리얼한 역사적 상황일 뿐이지. 적나라한 인간의 이야기지요. 이데아적 전제가 없어요
.

 한=서양철학을 보면 현대까지 와서도 신화를 극복 못해요. 서양의 포스트 모던, 해체주의조차도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

 김=영국 철학자 화이트헤드의피로(Fatigue)’ 개념을 접해본 적 있어요
.

 한=어느 책에서 피로를 이야기 합니까
.

 김=『이성의 기능』에서 화이트헤드는 이성을 서양 전통의 기하학적 이성이 아니라 넓은 생물학적 의미로 다시 정의합니다. 인간이 더 잘살기 위해서 하는 노력은 다 이성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에게서 이성의 반대 개념이 피로입니다. 이 사람이 말하는 이성이란 것은 삶의 엔트로피를 줄여주는 생명의 약동같은 겁니다. 그와 반대 방향으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 피로라고 본 거죠
.

 한=우리 사회가 이성적 사회가 아니라 피로를 생산하는 사회라는 게 제가 『피로사회』에서 하려는 말인데,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성과사회라고도 규정하는데, 성과사회는 삶을 좋게 가꿔나가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과만 많이 내는 데 중점을 둔다는 것이지요. 지난 세기 인간을 착취하는 힘은 타인의 강제와 규율이었지만, 현대사회는 자기가 자신을 착취하는 사회로 변했다고 봅니다. 우울증은 성과사회의 질병입니다.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 시대의 질병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한 교수의 파워는 서양 속에서 서양의 언어로 동양철학의 의미를 해석한 데 있을 겁니다. 앞으로 더 노력해서 하이데거를 뛰어넘는 대가가 되세요.

 

[참고자료]

피로사회 저자 소개

중앙일보 기사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7703653&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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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사진을 찾아보면 긴 머리에 우수에 찬 표정의 중년 남자가 등장한다. 공학을 전공하고 독일로 건너가 철학, 문학, 신학을 공부한 그의 이력도 특이하지만 독일사회에서 외국인인 그가 독일어로 쓴 책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 또한 놀랍다.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했지만 단어 몇 개 조차 떠오르지 않는 형편없는 전공자인 나는 그가 참으로 존경스럽다이 책을 내면서 출판사에서 한국 언론사 기자들을 초청해 저자와의 대화시간을 마련한 모양인데 인터뷰 기사에서 느껴지는 그는, 책과는 달리 직설화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우리 모두가 피해자라고 목청 높여 외치는 모습이다. 나의 성과주의 성향 분석에 열쇠를 던져 준 그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문구

 

한국어판 서문

 

P6 이러한 예상 밖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이 책이 소진증후군,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등과 같은 정신 질환의 역사적 위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이 책의 테제였다. 자기 착취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로서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올린다. 그러한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신경성 폭력

 

P11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P22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과 같은 신경성 질환은 바이러스성 폭력과 같이 여전히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면역학적 도식을 따르며, 시스템에 적대적인 특이한 개벌자나 이질성을 전제하는 개념으로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다.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P23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P24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è  알랭 드 보통 역시 그의 책 불안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계급사회에서 평등사회로 옮겨오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로 인해 신분 상승에 실패한 다수의 사람들 사이에는 우울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P26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 그렇게 본다면 소진증후군은 탈진한 자아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에랭베르에 따르면 우울증은 규율사회의 명령과 금지가 자기 책임과 자기 주도로 대체될 때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 근대적 노동사화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è  , 이 구절이 마음에 속속 박힌다. 나의 우울증 역시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했다. 일과 능력에 피로를 느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믿는 사회에서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느껴지니 우울증은 더 심해졌다. 자책과 자학이 이어졌다. 나 자신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깊은 심심함

 

P30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 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è  멀티태스킹에 대한 새로운 통찰! 여러 책에서 멀티태스킹은 사실 일의 능률을 떨어뜨린다는 자료는 자주 접했지만 멀티태스킹을 진보가 아닌 퇴화의 산물로 해석하는 저자의 통찰력이 놀랍다.

 

P32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학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짜지도, 잣지도않는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è  내가 깊은 심심함을 견디지 못해 단순한 분주함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거라 위안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발터 벤야민의 표현이 정말 멋지지 않은가?

 

P35 존재를 의지로 대체한 니체조차 인간에게서 모든 관조적 요소가 제거된다면 인간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끝나고 말 것임을 알고 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 받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하는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활동적인 삶 Vita active

 

P43 오늘날 진행 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P44 이러한 강제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P45 “사유의 체험에 관해 잘 아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카토의 경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

è  한나 아렌트의 활동적인 삶이란 책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저자는 독일의 다양한 철학자들의 견해에 동의 또는 반대하며 자신의 의견을 전개해나간다. 가토의 경구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보는 법의 교육

 

P47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배움의 목표는 니체에 따르면 고상한 문화이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눈으로 하여금 깊고 사색적인 주의의 능력,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 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적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이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저 긍정하는 수동적인 자기 개방이 아니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인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è  니체가 깊은 사색의 능력을 강조했구나. 나 같은 활동과잉자들은 새겨 들을 것!

 

P49 <활동적인 인간의 주된 결함>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쓴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음에 걸맞게 굴러간다.”

è  , 나 활동적인 사람. 저차원적인 활동을 하는 것인가?

 

P50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제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과 구별된다.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불안은 현존재 전체를 붙들고 흔들어댄다.

 

P51 사회의 긍정성이 증가하면서 불안이나 슬픔처럼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 즉 부정적 감정도 약화된다.

 

P52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P53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è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지 않을 힘도 있어야 한다.

 

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P54 이에 반해 긍정적 힘만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맡겨진 신세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바틀비의 경우

 

피로사회

 

P66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P68 한트케는 이런 근본적 피로위에다 활동성을 절대화하는 경향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져버린 모든 생존과 공존의 형식을 모아 들인다. “근본적 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 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근본적 피로는 오히려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피로의 영감은 무위에 관한 것이다.

 

P71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 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인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è  저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피로 사회를 위한 대안으로 장자의 무용지용를 제시했다. 쓸모 없는 것을 쓰고, 하지 않는 것을 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우울사회

 

P83 오늘의 사회는 날이 갈수록 금지와 명령의 부정성을 철폐해가며 자유로운 사회를 자처하는 성과사회다. 성과사회를 규정하는 조동사는 프로이트의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이다.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부인할 일이 거의 없다. 그는 긍정의 주체다.

 

P92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와 같은 오늘날의 정신 질환은 심적 억압이나 부인의 과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즉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 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비롯된다.

 

P94 소진은 자주 우울증으로 귀결되거니와 이때 우울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는 오히려 과도한 긴장과 과부하로 파괴적 특성까지 나타내는 과잉 자기 관계를 들 수 있는 것이다. 탈진과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지치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간다.

 

P97 알랭 에랭베르는 멜랑콜리와 우울증 사이에 단지 양적인 차이만이 있을 뿐이라고 가정한다. 뭔가 엘리트적 분위기를 풍기는 멜랑콜리가 대중화되어 우울증이 되었다는 것이다. “멜랑콜리가 비범한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었다면 우울증은 비범한 것이 대중화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울증은 멜랑콜리에 평등을 더한 것이며, 민주적 인간의 전형적 질병이다.”

 

P98 우울증에 자주 선행하여 나타나는 소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힘이 빠져가는 주권적 개인의 증상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자기 착취의 병리학적 결과이다.

 

P101 문제는 개인 사이의 경쟁 자체가 아니고 경쟁의 자기 관계적 성격이다. 그로 인해 경쟁은 절대적 경쟁으로 첨예화된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è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경쟁을 해야 한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이 나가 성장했다면 그만이다.’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파괴적 강박에 빠지게 된다고? 그럼 어찌해야 하는 거지?

 

P103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è  자본주의의 심화로 인해 자본가의 노동자 착취에서 자기 착취로 이환. 자기 착취를 인한 소진과 자살. 암울한 이야기다.

 

이상 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로 나타난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모든 외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 자기 강제의 덫에 걸려든다.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이 수 있다.

 

P109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착취한다. 자기 착취는 기만적인 자유의 느낌을 동반하는 한에서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기도 하다. 착취는 지배 없이 관철된다. 여기에서 자기 착취의 효율성이 생겨난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더욱 가속화된 발전을 위해 타자에 의한 착취에서 자기 착취로 전환된다. 이러한 역설적 자유로 인해 성과주체는 가해자가 희생자이며 주인이자 노예가 된다.

 

우리 모두를 호모 사케르로 만드는 저주는 성과의 서주이다. 자기가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성과주체, 호모 리베르, 자기 자신의 주권자, 자기 자신의 경영자를 자처하는 주체는 바로 이러한 성과의 저주에 빠져 스스로를 호모 사케르로 만든다. 그러니까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P112 니체라면 활동과잉의 인간을 역겨워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강한 영혼평정을 유지하고 천천히 움직이, “지나친 활발함에 대해 거부감을 품기 때문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 기다리지도 못한다. – 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

è  , 니체가 나에게 호통을 치는 듯 하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나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이때 삶과 죽음의 엄격한 분리는 삶 자체마저도 섬뜩한 경직성을 띠게 한다.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의 히스테리에 밀려난다. 생물학적 생존의 과정으로 환원된 삶은 벌거벗은 생명이 된다. 삶을 감싸던 서사성은 완전히 벗겨졌고 삶은 생동성을 잃어버렸다. 생동성이란 단순히 생명력이나 건강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것이다. 건강에 대한 열광을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다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모든 목적론, 건강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든 목표 의식을 지워버린다. 건강은 자기 관계적으로 되며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

 

역자후기

 

P119 한병철은 이 책에서 과감하게 그만의 독특한 개념을 제시하고, 그 개념으로 거장 철학자, 사상가들의 논리를 비판하며 이 시대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독일 철학계와 문화계에서 영향력있는 목소리로 울리고 있다.

 

이 책의 핵심적인 테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를 지배해온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자에 대한 거부 등. 한병철은 이를 면역학적 패러암이라고 부른다)이 적어도 20세기 말부터 긍정성의 패러다음(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타자의 소멸 등등)으로 전환되었거나 전환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회가 푸코적 의미의 규율사회이고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복종적 주체라고 한다면, 오늘날은 그 자리에 성과사회, 성과주체가 대신 들어선다. 이러한 테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근대 이후의 세계, 포스트모던한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한병철이 말하는 성과사회, 긍정성 과잉의 사회는 흔히 얘기되는 후근대적 사회, 즉 포스트모더니즘적 사회의 다른 이름이다. 냉전의 종식, 다문화주의, 바이러스성 질병의 효과적 퇴치, 규제와 억압의 철폐와 개인적 욕망의 긍정 등 다양한 차원에서 관철되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병철은 바로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마치 늘어나는 자기 자신의 지방질에 병들어가는 사람처럼,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모시켜간다. 그 결과 스스로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가 넘쳐나고, 성과를 위해 약물을 불사하는 도핑주체로 증가하고 있다. 이는 금지, 강제, 억압의 철폐, 타자에 대한 관용의 확대가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로 이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P127 성공학 개론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한병철은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자본가이며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 성공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한 사람들의 열망

과 실천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착 인간 자신은 소진되고 마모된다.

 

한병철은 시스템이 이상적인 자아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다면, 개개인이 그러한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각성하는 데서 비로서 시스템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3. 내가 저자라면

 

참으로 오랜만에 읽은 불친절한(?) 책이다. 철학서라는 것이 대개 그렇고, 독일어 번역서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이 이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저자가 사용하는 용어도 난해하고 주장하는 바는 명확하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그리 친절하지 않은 탓이다. 그래도 나의 책 주제와 관련해 건져낸 보물 같은 책이다. 이 책은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나의 극단적인 성과주의 경향의 원인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작년 1년 간의 자아탐구를 통해 나는 나의 문제가 개인적인 성향 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다년간의 학교 교육과 독서, 그리고 사회 분위기도 큰 몫을 한 것 같다. 남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하다 소진된다니!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를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회사나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이 얼마나 오싹한 사실인가?

 

이 책을 읽으며 아쉬웠던 점은 이러한 피로사회에서 우리가 어찌 해야 할지에 대한 해결책이 뚜렷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물론 약간의 힌트는 나온다. 저자는 안식일을 예로 들면서 쓸모없는 것의 쓸모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언론 인터뷰에서 장자의 무용지용을 언급하는 것과 연결해 생각해보면 성과를 위해 필요한 일만 하지 말고 필요 없는 일도 하는 여유를 가지라는 의미인 것 같다. 이러한 이야기는 최근 많이 등장한다. ‘재미란 책이 등장해 관심을 끌기도 했고, 모 문화심리학자는 21세기에 꼭 필요한 창의력의 개발을 위해서는 놀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내가 저자라면 보다 친절하게 쓰겠다.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고 목차 또한 기승전결에 맞게 풀어 놓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예를 들면 한나 아렌트)들에 대해서도 약간의 설명을 곁들이겠다. 독일에서만 유명한지, 내가 무식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에 대한 정보가 더 있으면 좋겠다. 또한 책의 내용 중 중복되는 부분을 걷어내고 핵심 메시지 위주로 깔끔하게 정리하겠다. 책을 읽다 보면 비슷한 맥락이 이야기가 반복되는 경우가 있다.

 

쉼표 북리뷰의 첫 번째 책이다. 저자의 충고대로 다음 주에는 책 쓰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마음을 닦을 수 있는 책 한 권을 만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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