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힘
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대담집 이윤기 옮김
1. 저자에 대해서
조셉 캠벨은 1904년 뉴욕 주 화이트틀레인스에서 태어났다.
캠벨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로마가톨릭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을 자주 방문했다. 박물관에서 인디언의 토템 기둥과 가면에 매료당한 그는 겨우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했다.
다트머스 대학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했지만, 나중에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27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유럽으로 건너가, 2년 동안 파리대학과 뮌헨대학에서 공부했다. 파리대학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프로방스어, 음유시인들의 시를 공부했다. 그리고 현대예술의 거장인 제임스 조이스, 피카소, 몬드리안 등을 발견했다. 독일 뮌헨애서는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면서 힌두교에 관심을 가졌고, 이때 융을 발견하여 미래에 대한 계획을 바꾸었다.
1929년 미국으로 돌아온 캠벨은 영문학 대신 인도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려 했지만 컬럼비아대학 측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박사학위취득을 포기하고 학교를 떠났다.
학교를 떠났을 때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불황을 맞이하게 된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5년 동안 뉴욕 주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서 칩거하며 독서와 사색에만 몰두한다. 캠벨은 이곳에서 그저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노트필기를 했다.
그는 칩거의 5년 동안 8개월 정도 미국을 여행하면서 방랑생활을 하였다. 캠벨은 그때의 방랑에 대해 “주위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니는 기회, 또한 여기라면 정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에 대한 느낌을 얻는 기회”였다고 한다. 그 시절 러시아어를 배우기도 했다. 당시 28살이었던 캠벨은 캘리포니아에 일 년쯤 머물면서 소설가 ‘존 스타인벡’을 만났고 함께 ‘존 듀이’를 공부했다. 캠벨은 카멜도서관에서 우연히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두 권짜리 <서구의 몰락>을 꺼내들었는데, 이 책이 캠벨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1934년 미국의 명문여자대학인 새러 로렌스칼리지에 문학담당교수로 부임하여, 1972년 퇴직할 때까지 38년 동안 재직했다.
1938년 새러 로렌스칼리지에서 제자였던 현대무용가 ‘진 에드먼’과 결혼했다. 캠벨은 아내를 만났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계속 강의를 들었고,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마침내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냈고, 그야말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나는 한참 뒤에야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아주 은근한 표시를 했다. 곧 졸업할 그녀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한 것이었다. 바로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이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의미심장한 것이기도 했다.”
캠벨은 어려서부터의 관심사였던 인류학과 민속학을 바탕으로 비교종교학과 분석심리학 등의 이론을 이용하여 신화와 종교 연구를 계속하여 명성을 얻게 된다. 그는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최고의 스승으로 추앙받게 된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라고 한다.
저서로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4부작 <신의 가면>, <신화와 함께 하는 삶>, <신화의 이미지>, 5부작인 <세계신화지도>등이 있다.
캠벨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pbs방송국에서 제작한 대담 프로그램 <신화의 힘>이었다. 그의 생애 막바지에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되었다. 책 <신화의 힘>은 저명한 방송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정리한 책이다. 신화가 현대에 지니는 의미를 주제로 하여 대담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신화의 힘>은 오늘날까지도 신화에 관한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캠벨은 대담을 하면서 “여기 있는 나는 여든을 헤아립니다. 그런데도 나는 몇 권은 족히 될 책을 쓰고 있어요. 이 일을 마칠 때까지 살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내게는 일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거예요.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욕망이 없다면 죽는거야 언제 죽어도 좋아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캠벨은 그로부터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1987년 10월 30일 83세의 일기를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에 아내 ‘진 에드먼’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조셉캠벨 재단’을 설립했다. 캠벨의 유고와 대담집 그리고 강의 록 등을 정리하여 출간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조셉캠벨의 인생에 관해 알고 싶다면 <신화와 인생>을 권하고 싶다.
2. 내 마음을 무찌르는 장절
빌 모이어스의 서문(8페이지)
***그리스의 신들 따위가 오늘날의 우리 인간 조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 신들 따위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잇느냐는 것은 우리에게는 익숙한, 대단한 현대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은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10페이지)
*** 캠벨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모이어스 “그 직관이라는 것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이성으로부터 후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는지요?”
캠벨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11페이지)
***캠벨은 언젠가, 인류는 ‘자기의 내부에 식인종적이고 색정적인 열정’을 지니고 있는데도 이러한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탄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열정을 인류의 전염병이라고 불렀다.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 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을 하지 않습니다.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 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하여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12페이지)
****조셉캠벨은 인생을 모험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박사 과정을 밟아 박사가 되는 것도 마다하고 책의 숲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그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양을 읽으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문화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역사, 종교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12페이지)
****조셉캠벨은 뉴욕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인디언의 토템 기둥과 가면에 매료당한다. 소년은 그런 것들을 보면서 상념에 잠긴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무슨 듯일까? 그는 겨우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한가. 바로 이 공부가 그를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화끈한 스승으로 만든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라고 한다.(13페이지)
***그는 독서와 삶에서 엄청난 기쁨을 누리고 살았는데, 이것을 슬쩍 내비치는 솜씨 또한 절묘했다. 매튜 아놀드는 최상의 비평은 ‘이 세상에 기왕에 알려진 것, 기왕에 사유된 것을 알고, 다음에는 이 지식을 참되고 신선한 사상의 흐름으로 창조하는 행위라고 갈파한 바 있다. 바로 캠벨이 그렇게 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의식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고 상상력이 심층에서 솟아나는 놀라운 경험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15페이지)
***그(캠벨)는 자기의 직업을 관류하는 ‘중심사상’이 ‘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는 일’임을 인정한 바 있다. 그가 보기에 ‘세계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시에 이르려는 인간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그래서 “나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군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캠벨은 “그게 아니지. 살아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이지요.”라고 했다.
캠벨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추을 추는 ‘우리의 노래’ ‘천구(天球)의 가락’이다 우리는 그 노래와 가락의 후렴을 듣는다.(15페이지)
***그(캠벨)의 말에 따르면 신의 이미지는 무수하다. 그는 이것을 ‘영원의 가면’이라고 이름한다. 이 영원의 가면은 그 ‘영광의 얼굴’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그는 세계의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신들이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까닭을, 이 수많은 문화의 가지에서 서로 비슷한 이야기-창세, 처녀수태, 신자성육, 죽음과 부활, 재림 그리고 최후의 심판이야기-가 생겨나는 까닭을 알고자 한다. 그는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賢者)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言表)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신화 역시 신의 가면이다. (18페이지)
1. 신화와 현대 세계
*** 인류의 삶을 떠받쳐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 년 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적 문제, 내면에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26페이지)
***모이어스: 그러니까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하고, 읽는다는 말씀이군요?
캠벨: 내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소설(위대한 소설)이라는 것은 놀랍도록 교훈적입니다. 20대와 30대에, 심지어는 40대에도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만은 나의 스승이었어요. 이분들이 쓴 것은 죄다 읽었으니까요. 이 두 분이 슨 작품들은 신화적 전통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 대단히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26페이지)
***모이어스: 완전한 것은 보고 있으면 조금 싫증이 난다, 이 말입니까?
캠벨: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게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거든요.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28페이지)
*** 캠벨: 고통은 불완전한 존재만 체험하는 것이다. (29페이지)
*** 캠벨: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29페이지)
캠벨: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29페이지)
***모이어스: 신화의 정의란?
캠벨: 삶의 경험이다. 마음은 의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답니다. 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선(禪)이야기에는 꽃과 관련된 석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석가는 그저 꽃 한송이를 쳐듭니다. 그런데 좌중에 딱 한 사람이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석가를 향해 웃어보입니다. 석가라는 분 자신은 ‘이렇게 해서 오신 분(여래如來)이라고 불립니다. 여기에는 의미가 없어요. 우주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벼룩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외적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30페이지)
☆☆☆ 꽃 한송이를 들고 있는 석가를 가섭이 웃었다는 에피소드를 불가에서는 염화미소(拈華微笑)라고 부른다. 캠벨은 여래를 이야기하기 위해 염화미소를 예로 들은 것일까? 여래에 대한 캠벨의 해석은 심플하다. 우리 모두는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그저 있을 뿐인 가운데서 삶의 황홀을 느껴보라고 한다.
모이어스: 선생님께서는 그런 것을 어떻게 경험하실 수 있었습니까?
캠벨: 신화를 읽었지요.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자, 결혼이란 무엇입니까? 결혼은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연애하는 것과 달라요. 연애와는 이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오랫동안 연애하던 사람이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결혼하고 나서는 얼마되지 않아 갈라서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왜 갈라설까요? 이른 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異性)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만일 상대의 관능적 관심에 이끌려 결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번지수를 틀리게 찾은 거예요.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肉化)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31페이지)
☆☆☆현대인들이 왜 불행한지를 알았다. 결혼을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건이 맞아야 결혼이 이루어지는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는 한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다. 조건대문에 결혼했는데, 그 조건이 깨어지면 유리와도 같이 얄팍한 사랑은 깨어지는 것이다.
***모이어스: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습니까?
캠벨 :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 (31페이지)
****모이어스: 결혼이 ‘자기’와 ‘자기’의 재회, 우리의 뿌리가 되는 남성 혹은 여성과의 만남이라면 우리의 현대 사회에서 결혼이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이루어지고 깨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캠벨: 그건 결혼이 아니라니까요.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 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肉)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는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가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둘은 실제로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깨닫게 됩니다.(32페이지)
***캠벨: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33페이지)
***캠벨: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 번 빠져볼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41페이지)
***왕이나 여왕에 대하여 반응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인격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지닌 신화적인 역할에 따라서 반응합니다. (42페이지)
캠벨: 입대해서 군복을 입는 것을 들 수 있겠지요. 입대해서 군복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삶을 방기하고 자기가 속한 사회를 섬기기 위해 사회적으로 조직된 삶을 받아들인다는 듯입니다. 어떤 개인이 전시(戰時)에 한 일을 상식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전시에 그 개인은 개인으로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 개인보다 훨씬 상위 개념인 어떤 무리, 바로 그 자신이 섬기기로 한 무리의 대리자로서 행동한 것 아닙니까? 따라서 그런 사람의 행동을 개인으로서의 행동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부적당한 것이지요.(42페이지)
***신화는 바로 지금 이 시각에 우리가 사는 삶과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 줍니다. 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시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43페이지)
***캠벨: 의식을 머리가 지닌 특수한 기능으로 여기는 것은 데카르트식 사고방식의 일부이지요. 데카르트파 사람들은 머리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의식에 영향을 미쳐 어떤 방향, 혹은 어떤 목적에 맞게 작용하게 하는 기관이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은 아니지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온 몸에 두루 존재합니다. 이 의식은 의식을 하는 주체에게 살아있는 세계의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
나는 의식과 에너지는 어떤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 숲 속에서 많이 지냈습니다만, 숲 속에 살다보면 서로 각기 다른 이런 의식이 상호 관계 속에서 뒤엉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숲 속에는 식물의 의식도 있고 동물의 의식도 있는데, 우리의 의식은 이런 의식들과 상호 작용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담즙은 우리가 먹은 음식에, 우리 의식에 도움이 도리만한 게 들어있는 지 없는지를 압니다. 이 모든 작용이 곧 의식입니다. (46~47페이지)
****모이어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까?
캠벨: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지요. 명상이라는게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그 명상의 대부분이 비의도적(非意圖的)인 명상이기는 하지만요. 많은 사람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 데, 돈이 나갈 데에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영적인 의식이 없는 사람이 자기 자식과 그것을 어떻게 나눕니까? 그러면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신화는 영적인의식의 차원에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47페이지)
☆☆☆밥벌이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영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 현실적인 고민-자식걱정, 돈걱정, 집걱정 등등-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영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 현실적인 걱정과 고민을 버리지 않는 한 신화의 주인공처럼 될 수 없다. 나는 지금 무엇을 결정해야 하나? 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 집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출가를 해야 하나? 출가! 좋은 일이다. 결단만이 남았다.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수준을 오르락내리락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잇는 것입니다. (48페이지)
***캠벨: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48페이지)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56페이지)
***태초에는 하느님도 많은 하느님 중 가장 힘이 센 하느님에 지나지 않았어요. 당시의 하느님은 어떤 동네의 종족신이었답니다. 그런데 6세기에 유태인들이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문득 이 세계의 구주(救主)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성서의 신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돋움합니다.
옛 전통을 가구는 유일한 방법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그것을 쇄신하는 길 뿐입니다. 구약시대의 세계는 근동(近東)을 중심으로 겨우 몇 백마일 되는 크기의 3층자리 케이크에 지나지 않았어요. 당시 사람들 중에는 아즈텍 문화라는 게 있는 줄을 안 사람은 물론 심지어 중국이 있는 줄 안 사람도 없었답니다. (57페이지)
***나는 현대의 진정한 공포의 도가니를 베이루트(레바논의 수도)에서 봅니다. 거기에서는 서양의 3대 종교,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치고받고 합니다. 왜? 성서에 나오는 깉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지 못해요. 메타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참 의미는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그들은 자기네를 둘러싸고 있는 고리를 열어본 적이 없어요. 말하자면 그 고리는 폐쇄 회로인 것이지요. 각기 “우리야말로 선택된 백성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시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58페이지)
***신화 자체가 노래이다.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禪師)가 설법을 하기 위해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새 한 마리가 끼여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59페이지)
***내가 아는 한, 지구라는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지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인식에 이를 것이냐 하는 겁니다. 문제는 만유(萬有)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만유에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61페이지)
*** 자연 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자연이 악마로 간주되는 순간부터 사람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대신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긴장과 불안이 조성되면서 산림을 베어내고 토인을 몰살시키는 등의 일이 일어납니다.(62페이지)
***성서에서는 영원은 물러나고, 자연은 부패하고 타락해 있어요. 성서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우리는 추방된 채 살고 있지요.(63페이지)
***기독교도 지역에 대한 회교도들의 공격, 회교도 지역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공격, 기독교도들에 대한 기독교도들의 공격.......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자들은 종교의 관념을 저희가 사는 사회에만 적용시킬 줄 알지, 이 시대의 삶, 이 시대의 인류에게 적용시킬 줄은 모르고 있어요. 이것은 우리 현대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종교의 실패를 증명하는 무서운 본보기입니다. 베이루트에서 치고받는 세 신화학은 결국 현대 세계를 때려눕히고 있어요. 이들은 저희의 신화학이 미래를 이글 자격이 없다는 걸 보여주었어요.(63~64페이지)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이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은 진정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권위나 앞으로는 이러저러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특별한 계시 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지요.(65페이지)
***예수의 최후의 만찬자리에는 열두 사도와 곧 죽어서 재생하게 될 그리스도가 있었지요. 13은 구속의 장에서 초월의 장으로 넘어가는 것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12궁도(宮圖)역시 12궁과 태양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던가요. 13이라는 숫자가 부활과 재생과 새 생명을 상징한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어요. (66페이지)
***아홉, 9라는 숫자는 이 세상에 내린 신의 힘을 상징합니다. 삼종기도시간을 알리는 카톨릭 교회의 종은 아홉 번 울립니다.(68페이지)
***캠벨 솔로몬의 인장에 대해서: 열세개의 별로 이루어진 솔로몬의 인장, 나는 이 별들이 그리는 삼각형들이 바로 피타고라스 철학의 ‘테트라키스’라는 걸 알았어요, 테트라키스는 열 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을 말합니다. 자 네 개의 점으로 한 변을 만들고 나머지 점을 이어서 정삼각형을 만들면, 점은 모두 9개가 들어갑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점 하나를 가운데에 둡니다. 그러면 열 개의 점이 삼각형을 이룹니다. 삼각형 세 변에 있는 점을 세어볼까요? 하나, 둘, 셋, 넷/다섯, 여섯, 일곱/여덟, 아홉.... 그리고 가운데 잇는 하나를 합하면 점은 열 개가 됩니다. 이게 바로 상호관계하는 신화학적, 우주론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해석의 의미를 숫자로 나타낸 피타고라스 철학의 중심 상징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각형의 한가운데 잇는 점은 창조적 중심을 상징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주와 만물이 생성합니다.
모이어스: 창조적 에너지의 중심이군요?
캠벨: 만물을 태동하게 한 최초의 소리, 빅뱅(우주 대폭발), 초월적 에너지의 분출 및 시간의 장(場)으로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69~70페이지)
***캠벨: 앞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
모이어스: 그럼 신화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캠벨: 개인은 자기 삶과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신화의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ㄱ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대문입니다. 신화의 기능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시대착오적이지요. 예를 들면 도덕률을 말하는 겁니다. 좋은 사회라면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고 믿어지는 우리 삶의 법 같은 것 말이지요. 선사시대에 믿어지던 야훼의 책을 보세요. 페이지, 페이지, 페이지마다 무엇을 입어라, 어떻게 처신하라는 잔소리가 잔득 실려 있지요.
신화의 네 번째 기능은 오늘날 우리가 한 번 음미해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 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 줄 수 있어요. (75~76페이지)
***캠벨: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하면, 만유신론이라고 매도합니다. 하지만 이 만유 ‘신론‘이라는 말은 사람을 오도하는 말입니다. 만유신론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다르면 오로지 인신(人神)만이 이 세상에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이라는 관념은 그게 아닙니다. 이 관념의 진정한 의미는 초 ’신학적‘입니다. 이것은 정의 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신학,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이자 살아있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입니다. (76페이지)
***캠벨: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 가치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사상입니다. (77페이지)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83페이지)
***캠벨: 우리는 3만 년 전에 살았던 크로마뇽인의 몸과 그 기관이 똑같고 에너지도 똑같은 몸을 지니고 있어요. 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동굴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우리는 똑같은 삶의 단계를 거칩니다. 즉 아기 시절을 거치고 성숙한 청년이 되고, 어린 시절의 의존적인 시기에서 독립적인 한 남성 또는 여성으로 변모하는 시기를 거치고, 결혼하고, 그러다 몸이 기울고 점차 힘을 잃어가고 그러고는 주근ㄴ 단계를 거친다는 겁니다. (84페이지)
***용의 신화: 뱀이라고 하는 것은 땅에 붙박혀 사는 동물입니다. 독수리는 영적인 비상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이 양자가 하나가 되면 놀랍게도 용(龍)의 이미지가 됩니다. 용이라면 날개 달린 큰 뱀이 아니던가요?(84페이지)
***모이어스: 신화의 이미지는 아득한 옛날부터 앞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전수된 것이겠군요.
캠벨: 우리와 관련된 모든 사상의 심오한 신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걸 이 방면의 학문에서는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 파시키난스’라고 합니다.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라는 듯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까닭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부수기 때문이고, 이것이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85페이지)
***캠벨: 꿈은 우리의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끔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89페이지)
***캠벨: 나는 마음 말고는 꿈의 원천이 될 만한 것을 알지 못해요. 꿈은 상상력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겠어요. 상상력은 우리 육신의 각 기관 에너지에서 흘러나옵니다. 인류공통이지요.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은 생물학적 근거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특정한 주제를 지닙니다. 꿈은 어디가지나 꿈인 것이지요. 누가 꾸든 꿈이라는 것은 알람표 같은 것으로 작성될 수 있는 어떤 특정을 지닙니다.(90페이지)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식물 역시 살아있는 것이니까요.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 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서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91~92페이지)
***캠벨: 뱀은 과거를 벗어던지고 계속해서 새 삶을 사는 생명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흡사 달이 그 그늘을 벗듯이 말이지요. 달이 다시 차기 위해서 그 그늘을 벗듯.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이 양자는 대응하는 상징입니다. 때로 뱀은 제 고리를 물고 있는 동그라미 꼴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삶의 이미지이지요. 삶 역시 한 세대에서 이울면서 다음 세대로 넘겨져 거듭납니다. 뱀은 끊임없이 죽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삶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문득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뱀 역시 삶에 대한 놀라움과 섬뜩함 같은 이미지를 지닙니다.
더구나 뱀은 주로 먹는 것과 관계되는 삶의 아주 원초적인 기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을 먹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어요. (96페이지)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96페이지)
***캠벨: 하느님이라는 말은 우리 언어에서 상당히 모호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기왕에 알려진 개념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월한 존재는 기왕에 알려진 바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결국 ‘하느님’이라는 아름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이름과 형상 너머에 있는 존재인 것이지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궁극적인 떠남, 최고의 떠남은, 하느님을 위한 하느님으로부터의 떠남, 모든 개념을 초월하는 경험을 위해 하느님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제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
모이어스: 왜 우리가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합니까?
캠벨: 달리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101~102페이지)
***모이어스: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는 말이 무슨 듯입니까?
캠벨: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적 관념이 바로 영원입니다. 신은 하나여도 속세에 내려와서는 여럿으로 나뉘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지요. 인도에서는 내 안에 있는 신을 육체에 ‘사는 자’라고 한답니다. 이 신을 우리의 영원불멸하는 측면과 동일시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그 신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영원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동양의 대종교에서 이러한 관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싶어하지요. 하느님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102페이지)
***구약성서를 보면 하느님은 하나의 금제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106페이지)
☆☆☆복종과 순응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살아온 나에게 충격적인 말이다. 난 이제껏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죽은 것처럼 살아왔다. 이제부터 금단의 열매를 따먹을 궁리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멋지게, 죽을 만큼 격렬하게,
****모이어스: 유사성의 과실모티프가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캠벨 :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박사의 이른바 원형(原型)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107페이지)
☆☆☆캠벨의 글을 읽다보면 칼융의 책도 읽어야 할 것 같다. 도전해봐야지 하면서도 못했고, 칼융의 자서전이 내 책장에 꽂힌 지가 벌써 2달이 넘었다.(반성)
***인도에는 참 아름다운 인사법이 있어요. 두 손을 모으고 상대에게 고개를 숙이는 겁니다. 손바닥을 서로 붙이는 것은 내 안에 잇는 신이 상대방 안에 잇는 신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믿으니까요. 인도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가는 손님 신으로 대접받는 답니다.(109페이지)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서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내가 시(詩)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113페이지)
***모든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죄와 화해, 정단함과 부당함을 정해놓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 족으로 사람들을 모는 경향이 있습니다. (114페이지)
***라마크리슈나는 늘 죄만 생각하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토요일마다 신부님께 고해를 했습니다. 그러자니 토요일만 되면 한 주일동안 짓지 않을 수 없었던 시시콜콜한 죄를 모두 생각하게 되지요.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115페이지)
***종교라는 것은 제 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115페이지)
***근동아시아의 종교 체계에서는, 선은 악과의 투쟁과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악과 투쟁하는 것은 선한 것이지요.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서적 전승은 모두 이른바 자연종교의 타락이라는 문맥에서 논의되고는 합니다. 자연종교가 사회적 종교로 변질하면 자연과의 관계를 제대로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115페이지)
***우리는 예수가 정말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에 물리적인 존재를 수용할 만한 물리적인 하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광속(光速)으로 승천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은하계 안을 맴돌겠지요.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은 예수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미지는 외향적입니다만 그 본뜻은 내향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내면을 향함으로써 그의 승천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알파요, 오메가인 우리의 바탕자리로의 되돌아옴, 육신의 껍질을 버리고 육신 자체의 역동적인 바탕자리로 되돌아옴을 뜻하는 은유적인 것입니다. (117페이지)
***현실의 개념을 넘어서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라는 범주도 초월합니다.
세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117페이지)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바로 이 외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이,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입니다.(118페이지)
***모이어스: 그리스도의 승천 이야기는 누군가가 닿아 본 적이 잇는 해변에서 흘러내려온 병속의 메시지와 같은 것이군요. (118페이지)
***모이어스: 재림 혹은 환생이라는 관념은 무엇을 암시하는지요?
캠벨: 우리는 이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관념에는 우리의 존재 및 우리의 개달음과 의식의 잠재력을 다른 차원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깊이 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119페이지)
***모이어스: 선생님께서는 어느 책에선가 사회의 엘리트가 신화를 만든다.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 샤먼이나 예술가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신화를 만든다고 쓰신 적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어떻습니까?
캠벨: 쓸 수는 있지만, 신화는 아니지요. 보통사람은 신화의 단층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예언자와 인도 사람들이 말하는 ‘리쉬스’는 신의 음성을 듣고 경전을 썼다지요. 귀를 여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만 귀라고 해서 다 경전을 불러주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120페이지)
***캠벨: 창조적인 글을 써 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샤먼이나 선견자와 그 사회의구성원들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상호작용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 사회의 구성원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듣는 선견자는 선견자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121페이지)
***산스크리트어로는 ‘마르가(marga)라고 하는데 이것은 길(path)이라는 뜻입니다. 이 길은 곧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데, 이 길은 신화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되돌립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신화를 가르치는데, 이 마르가는 개인을 신화에서 데어내고 명상을 통해서 곧바로 ’길‘을 좇게 합니다. (122페이지)
***신화는 문화와 시간, 장소와 정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만일 상징과 은유가 예술을 통해 되살아나지 못한다면 삶은 신화에서 떨어져 나가 버립니다. (123페이지)
***사제와 샤먼의 차이는, 사제는 기능적이지만 샤먼은 경험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의 종교 전통에 따르면 이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수도사입니다. 사제는 사회를 섬기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이고요.(124페이지)
***카톨릭수도사와 불교의 스님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이 두 종교의 사무직 성직자들은 서로 도저히 꼴을 못 보더라면서 웃더군요.(124페이지)
***캠벨: 가톨릭 의례에서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성찬식입니다. 이 성찬식에서 신도들은 ‘이것은 구세주의 살이고 피’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내면을 향합니다. 그 내면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역사(役事)하는 거지요. 교회는 이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명상을 가르칩니다. 바로 이 명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체험하는 거지요.(125페이지)
***기독계 신학에서 초월적인 존재라는 말은 자연계너머 혹은 자연계 밖에 있는 존재로서의 하느님을 뜻합니다. 이것은 초월적인 존재를 표현하는 말로는 지나치게 유물적입니다. (126페이지)
***칸트는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시공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은 어떤 공간 안에서, 어떤 시간대에 생기는 것이지요.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이것은 사물이 아닙니다)는 갇혀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초월자는 사유의 모든 카테고리를 초월합니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이것은 카테고리입니다. ‘하느님’이라는 말은 모든 사유를 초월해 있는 존재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하느님’이라는 말 역시 사유를 통해서 생긴 것입니다. (126~127페이지)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이에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일을 낙관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 일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 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133페이지)
***선악의 관념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관념이었는데, 이것이 유태교와 기독교로 흘러들어왔어요. 다른 종교의 전승에 따르면 선악은 우리의 입장에 따라서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는 약한 것이지요. 인생이라는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날 수 있어요.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이것은 석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잇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으니까요.(133~134페이지)
***의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행위에 무리를 지어 참가하지요. 은밀한 행위가 무엇일까요?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행위이지요. 우리는 이런 짓을 무리지어서 합니다. 그게 삶인 것이죠.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
영웅의 행동 반경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선악이 있는 시간의 장, 대극이 잇는 곳입니다. (135페이지)
**헤라이클레이토스는 신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고 옳고 의로우나, 인간에게는 어떤 것은 옳아 보이고 어떤 것은 옳아 보이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의 이 인간은 시간의 장, 결정의 장에 놓입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이라는 것은 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35페이지)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至福)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직관에서 끊임없는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138페이지)
3. 태초의 이야기꾼들
지복의 석기 시대 수렵민의 삶과 삶의 양식이 우리 육신을 형상 짓고 우리 마음의 얼개를 짜놓았는데도, 그 수렵민의 세계는 우리 육신에도 남아있지 않고 마음에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수렵민들의 동물사절에 관한 기억은 우리가 광야로 나갈 때마다 깨어나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으로 보아 우리 안에 잠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 기억은 우리가 천둥소리에 놀랄 때도 잠을 깬다. 우리가 암벽화 동굴로 들어설 때도 이 기억은, 그림을 알아보는 듯 잠을 갠다. 이 동굴의 샤먼이 탈혼망아(脫婚忘我) 상태에서 내려가던 우리 내면의 어둠이 어떤 어둠인지는 나도 모르rpt다. 그러나 우리가 꿈속에서 더러 찾아가는 것으로 보아 우리의 내부에도 있는 것이 분명하다.
-조셉 캠벨의 <금수의 권능을 찾아서>에서(141페이지)
*** 우리 육신의 신경은 우리의 기억을 운반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 신경계통의 조직을 일정한 상태까지 빚어낸 것이 바로 우리의 기억입니다. (141페이지)
☆☆☆새로운 것을 알았다. 육신의 신경세포가 기억을 운반하고 기억을 빚어낸다는 것이. 정신만이 기억하는 것이 하니라 몸도 기억하는 것이다. ‘네 몸은 알고 있다’가 진짜네.
***모이어스: 우리의 혼은 고대의 신화에 어떤 빚을 지고 있습니까?
캠벨: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들어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잇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모이어스: 그래서 이런 신화와 옛 이야기가 우리 안에 살아남아 있는 것이군요, (141페이지)
☆☆☆신화와 의례가 몸과 마음을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 도한 놀랄만한 새로운 지식이다. 고대에는 생존하기 위해서도 자연에 순응해야만 했고 그래서 의례가 필요했던 것이다.
***모이어스: 신화는 다른 사람들은 그 내적인 삶의 길을 어떻게 갔고, 나는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캠벨: 그렇습니다. 그 길에서 어떤 것이 선한지도 가르쳐 줍니다. 마지막 순간을 향해 가고 있는 나에게도 그게 느껴집니다. 신화는 나에게도 어느 길로 어떻게 가야 할지 일러줍니다. (142페이지)
***캠벨: 육신이 그 힘의 정점에 올랐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중년의 문제는, 자기 자신을 그 나이의 육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그 나이의 의식과 동일시하는데 있어요. 중년에 이르면 육신은 내리막길로 들어서지만 육신이라는 수레에 실리는 의식은 그렇지 않아요. 나는 이 문제의 해답도 신화에서 배웠어요.
나이를 먹어갈 때 생기는 심리적인 문제는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죽음의 문을 한사코 거부해요. 그러나 육체는 수레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의식의 수레인 육신이 낡은 자동차처럼 부서져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범퍼가 내려앉고, 다음에는 타이어... 그런 식을 하나씩 무너져가다 보면 이윽고 의식이 의식과 다시 만나는 대목이 옵니다. 이렇게 하나씩 무너져가다 보면 이윽고 의식이 의식과 다시 만나는 대목이 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더 이상은 살아있는 상황이 아니지요.(143페이지)
***모이어스: 신화의 대부분은 아름다운 청년의 시대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아요.
캠벨: 그리스 신화가 특히 그렇지요. 우리는 신화 하면 그리스신화와 성서신화를 떠올리지요. 이 두 문화권의 신화에는 신화의 인간화 경향이 있어요. 인가에게 아주 큰 엑센트가 주어지지요. 특히 그리스신화는 인간성과 젊음의 아름다운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어요.(143페이지)
***캠벨: 매장의례는 가시적인 삶 너머에 잇는 다른 삶의 존재에 대한 관념, 가시적인 차원 너머에 잇는 다른 존재의 차원이라는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어디에선가 가시적인 우리 삶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 불가시적인 삶이 잇을 것이다.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테마를 이루는 관념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군요.
모이어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아는 것을 버티어주는군요.
캠벨: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라는 관념은 보이지 않는 사회와도 밀접한 간계를 가집니다. 그 사회는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 자신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조화, 다시 말해서 부족신화는 우리에게 우리가 현실의 조직보다 훨씬 더 큰 조직의 한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심습니다. 의례의 중심적인 목적은 한 개인을 그 개인의 육시보다 훨씬 큰 형태론적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입니다.
태고의 사냥꾼들에게는 동물신이 있었어요. 사냥의 신화를 보면 동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계약을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물은 사냥꾼에게 기꺼이 목숨을 내어줍니다. 그냥 내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삶이 육신의 한계를 초월하면, 회생의례(回生儀禮)를 통해 흙으로 돌아오든지 아니면 어머니의 뱃속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내어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희생의례는 그 부족이 주식(主食)으로 하는 동물에 대해서만 치러집니다. (145~146페이지)
***삶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사냥꾼입니다. 사냥꾼은 맹수와 마찬가지입니다. 신화를 보면 사냥하는 맹수와 사냥감이 되는 짐승이 어울려 의미심장한 역할을 연출해 냅니다. 이 양자는 삶의 두 측면을 암시하지요. 즉 공격적이고 죽이고 정복하고 창조하는 삶의 측면과 대상, 혹은 객체가 되는 삶의 측변을 암시하는 것이지요.(146페이지)
***짐승이 화살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면 사냥꾼은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않는다는 시의 자기희생적인 금제(禁制)를 지킵니다. 그 동물의 죽음에 대해 일종의 신비에의 참여를 하는 거지요.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 짐승의 죽음은 자기네들로 인한 것이고, 도 그 짐승의 고기가 자기네들의 음식이 될 터이기 대문입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동일시, 신화적인 동일시가 개입합니다. 다라서 죽임이라는 것은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의례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니까 사냥은 의례인 것이지요.
의례는 나의 개인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다. 이런 뜻을 나타나내고 있지요. (147페이지)
***캠벨:주식이 되는 짐승에 대한 태도가 존경과 숭배에 이르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주식이 되는 짐승에 대한 영감에 사로잡히기까지 합니다. 이런 짐승은 인간에게 은혜를 주는 짐승, 즉 담배나 신비로운 파이프 같은 선물을 가져다주는 짐승이 되기도 합니다.
모이어스: 옛날 사람들은 신, 혹은 신의 사자인 짐승을 죽였던 셈인데, 이것대문에 괴로워하지 않았을까요?
갬벨: 그래서 의례가 있었지요. 사냥한 짐승에게 감사를 드림으로서 그 짐승의 영혼과 화해하고자 하는 의례지요. (149페이지)
***캠벨:인디언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敵國)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랍니다.(156페이지)
**캠벨: 때로는 ‘그대’ ’그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관계를 모르지요. 인디언과 짐승의 관계와 우리와 짐승의 관계는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인디언들과는 달리 우리는 짐승을 하등한 생명으로 봅니다. (156페이지)
***캠벨: 고대의 암벽화가 잇는 동굴에 들어가는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하지요. 이러한 이미지를 그려내면서 이들은 대체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저 높은 곳까지 어떻게 올라갔을까? 무엇으로 암벽을 비추면서 그렸을까?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라고는 일렁거리는 횃불밖에는 없었을 텐데....
그 다음에는 아름다움이라는 문제에 생각이 미칩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도한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일까? 새들의 노래가 아름다운 것은 새들에게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새들이 지닌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 것일까? 암벽화를 볼 때마다 예술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하고는 있지요. 어느 단계까지가 우리가 미학이라고 부르는 예술가의 의도이고, 어느 단계까지 아름다움을 간직한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지, 어느 단계까지가 그들이 습득한 바를 드러내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겁니다.
거미가 아름다운 거미줄을 만들 때 그 아름다움은 거미의 심성에서 오는 것 이겠지요. 거미줄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거미가 지닌 본능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삶이 지닌 아름다운 중에 어느 정도가 살아있음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일까..... 어느 정도가 의식적이고 의도한 것일까....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지요.(158페이지)
☆☆☆ 내면의 아름다움은 외면의 아름다움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거미는 본능적으로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
***캠벨: 사원굴, 사원은 우리 영혼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성당으로 들어감으로써 사실은 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로 들어갑니다. 성당은 우리 영적인 삶의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교회인 것이지요. 주위의 모든 형상은 모두 영적인 삶의 의미를 지닙니다.
***원시 사회입문 의례인 하례 - 원시 입문 의례에서 아이는 소년시절에서 격리됩니다. 바로 이렇게 격리된 상태에서 아이는 할례를 당하든지, 몸의 한 부분에 상처를 입는데, 이러한 시련은 곧 아이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이 치러지면 입문자의 몸은 어른의 몸이 됩니다. 이런 의례를 치른 이상 옛날로 되돌아갈 수 는 없습니다. (163페이지)
***모이어스: 암벽화 시절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이었을까요? 죽음이었을까요?
캠벨: 죽음의 신비도 가장 중요한 테마 중 하나였겠지요. 바로 이 죽음의 신비가 있어야 삶의 신비에 균형이 잡힙니다. 먹을 것을 손에 넣는 일이중요하다. 여자와 외계인 자연의 관계가 바로 이것과 밀접한 관련을 지닙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아이를 어른으로 변모시키는 일일 테지요. 모은 사람의 의례적 삶에서 변모라는 주제는 상당히 근본적인 관심을 환기시킨 문제였던 것을 보여요. 원시사회도 문제아를 사회의 일원으로 통합시키는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어요. 별 수를 다 썼지요. 사회는 규칙에 따라오지 않는 문제아들을 견디지 못했어요. 그래서 사회가 그들을 죽여버렸던 겁니다. (165페이지)
***캠벨: 문제아, 사회라는 몸을 병들게 하는 암같은 존재라는 것이지요. 부족사회는 늘 아슬아슬한 가장자리의 삶을 살았던 겁니다. ((165페이지)
☆☆☆ 문제아를 다루는 데에는 원시사회가 더 엄격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회의 암적인 존재는 죽여버린다. 간단한 방법이다. 어쩌면 나도 전전생에 반항아였기에 몇 번의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순종하는 인간보다 반항아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68페이지)
***모이어스: 초기 자연 문화시대에는 어떤 사람들이 오늘날의 시인에 대응하는 일을 했습니까?
캠벨: 샤먼이겠지요. 샤먼은 남자든 여자든 소년기 후반, 혹은 청년기 초반에 심각한 심리적 격동을 경험하고 이로 인해 완전히 내면화 버린 사람입니다. 이 격동은 일종의 정신분열증적 해리현상(解離現象) 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샤먼의 무의식은 늘 열려있습니다.
모이어스: 접신상태에 드는 것이군요. 망아황홀(忘我恍惚)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부시맨 사회의 춤판도 그런 것일 테지요. (169페이지)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靜寂)이 함께 하는 점입니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 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시적 체험에서 그 일시적 체험이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거야 말로 신화체험인 것입니다. (174페이지)
***수많은 철학자에 의해 되풀이된 신에 관한 정의가 있습니다.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 구체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지키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잇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175페이지)
4. 희생과 천복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기다리던 질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177페이지)
***사는 곳을 성화(聖化)시키는 것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연기는 천정에 뚫린 환기구를 통하여 하늘로 오르는데 이것은 향연(香煙)이 신의 콧구멍으로 독바로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지요. 주거 환경이 빚어내는 풍경자체가 아이콘(聖畵)노롯을 하는 겁니다.(177페이지)
***모이어스: 변모의 중심은 현세의 벽이 무너지면서 우주의 경이가 그러나는 관념적인 성소(聖所)라고 하셨습니다. 성소라는 말은 어떤 뜻으로 쓰셨는지?
캠벨:성소는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흑백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朝刊)에 어떤 기사가 실려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179페이지)
***초원의 사냥꾼에게는 세계 전체가 성소였어요. 그러나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天福)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서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179~180페이지)
***모이어스: 우리는 풍경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풍경에 미치는 영향은 어떻습니까?
캠벨: 사람들은 동물과 식물을 신화함으로써 땅을 창조의 성소로 요구합니다. 이들은 땅에다 영적인 힘을 투자합니다. 그래서 이 땅은 신전 같은 곳, 말하자면 명상의 자리가 됩니다.
가령 나바호 인디언은 동물을 신화화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나바호족의 모래그림을 보세요. 각기 나름의 가치를 지닌 조그만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동물들을 있는 그대로 그린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들이 양식화(樣式化)시킨 것이죠. 양식화 작업에는 그들의 육체적 특질이 아닌 정신적 특질이 반영되고 있습니다.(180페이지)
***모이어스“나바호족의 그림에서 파리 등을 등장시킨 목적이 무엇입니까?
캠벨: 땅의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함이지요. 자기네가 사는 땅을 영적인 인연이 있는 곳으로 바꾸기 위함이지요.(180페이지)
***캠벨: 기독교도들에 의한 연고권 주장, 기독교도들은 다른 신전이 잇던 자리에 자기네 신전을 세움으로써 한결같은 풍경을 바꾸어버린다.(181페이지)
***가령 우리는 성지관광을 하고는 하지요. 우리 종교가 비롯된 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땅이 다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땅에서 삶의 에너지의 상징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의 전통은 그랬어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 땅을 성별(聖別)했던 것입니다.(183페이지)
**캠벨: 성당에 가는 것, 그게 바로 신화에 속하는 일입니다.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 잡아줍니다. (186페이지)
***옛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항상 영적인 원리를 의식하고 사는 삶이었어요. 아시리아 궁전에는 머리는 사람머리, 몸은 사자 몸, 날개는 독수리 날개, 발은 황소 발로 된 혼성 괴물이 있어요. 12궁 가운데 네 가지 동물이 모인 이 이미지는 궁전문지기를 상징하지요. 이 네 동물은 에제키엘의 호환상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기독교 문화에서는 이 네 동물이 네 복음사도의 상징이 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시여, 제가 자는 이 침대를 축복하소서.”하는 기도 기억하시는지요? (187페이지)
**모든 궁극적인 영적 암시는 침묵에 담겨져 잇지요. 이 침묵은 소리 너머에 있어요. 육(肉)이 된 말씀은 최초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 너머에 잇는 것이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 불가지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침묵, 혹은 공(空) 혹은 초월적인 절대자로만 표현도리 수 있습니다.(187페이지)
***자연 위에서, 자연에 군림하는 것으로서의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관념은 정말 몹쓸 것입니다. 중세에, 이 세상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린 것이 바로 이러한 관념입니다. 초자연적인 법률이 백성들에게 관리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을 요구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 삶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결코 하지 못하는 채 살아가야 했던 중세는 바로 황무지나 다름없어요. 황무지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불가항력의 법이 설정한 목표를 좇았습니다. 초자연이라는 관념이 과연 이런 것이라면 이거야말로 사람을 죽이는 관념 아닙니까?
애인에게 아양이나 떠는 12세기의 서정시도 알고 보면 초자연적으로 정당화되어 삶의 환희에게 가해지던 저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반작용 아니었습니까?(188페이지)
***정신이라는 것은 살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신(母神)을 섬기는 종교는 적어도 이것을 바로 보고 있어요. 모신을 섬기는 종교에서는 세상이 곧 여신의 몸이자 여신 자체이지요. 이 여신의 신성이라는 것은 타락한 자연 위에 군림하는 그런 신성이 아니었다고요. 중세의 성모 숭배신앙 체계에도 이 정신이 있었어요. 바로 이 정신에서 13세기 프랑스의 성당 문화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을 다른 우리 이야기는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어요. 바로 이러한 신화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세계를 부패시키고 있는 겁니다. 자연 자체를 부패의 상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죄악이고 다라서 타기되어 마땅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다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189페이지)
***모이어스: 오늘날 자연의 본성인 신성은 누가 해석합니까? 누가 우리의 샤먼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캠벨: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난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모이어스: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캠벨: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일고 도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사람이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189~190페이지)
☆☆☆ 보통사람의 접신의 방법, 참 쉽네요. 내가 골방에서 책을 읽은 것은 신을 만나기 위한 행위였음을 가르쳐 준 캠벨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나름 골방에서 책을 읽었는데, 왜 신을 만나지 못했을까? 내 안의 신을 만날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까닭이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삶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이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됩니다.
☆☆☆ 내가 수십 년 동안 독서를 했는데도 내 안의 신을 왜 만나지 못했는지 이제야 알았다. 깊이 없는 독서, 수박 겉껍질 핥기 식의 독서였기 때문이다. 이제야 독서의 방법을 알은 것만도 다행이다. 이제 캠벨의 독서법을 실천해보아야겠다.
****캠벨: 샤먼과 사제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어요. 사제가 한 사회에서 맡는 일은 기능적입니다. 어떤 사회가 어떤 신을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섬길 경우 사제는 의레를 집행하는 기능인으로 서품(敍品)을 받습니다. 그 사제가 섬기는 신은, 그 사제가 태어나기도 전에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 보통이지요. 그러나 샤먼의 권능은 그가 거느린 천교영신 즉 샤먼 자신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신들로 상징됩니다. 샤먼의 권위는 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사회가 부여한 성직의 권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이어스: 샤먼은 우리가 보지 못한 곳을 다녀온 사람들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곳의 소식을 전해줍니다.
캠벨: 샤먼은 자기가 본 환상을 자기 부족을 위한 의례 행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내적인 경험을 외적인 경험으로 확대재생산할 수 있는 것이지요. (191페이지)
***모이어스: 지리학은 우리의 문화와 종교관념의 모양을 빚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막의 신은 초원의 신이 아닙니다.
캠벨: 단수로서의 우림(雨林)의 신도 아니지요. 우림에는 복수로서의 신들이 있었어요. 사막으로 나오면 하늘도 하나요, 세상도 하납니다. 그러니 신이 하나일 수밖에 없지요. 세상도 하나입니다. 그러니 신이 하나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정글에는 지평선은커녕 10야드 앞을 보기도 어렵습니다. (192페이지)
****캠벨: 사회라는 것은 언제나 부계적(父系的)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항상 모계적(母系的)입니다. (193페이지)
***모이어스: 인류의 농경화로 고대 사회의 지배와 수확에서 맡게 되는 여성의 몫이 커짐에 다라 여신 숭배 종교가 대두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캠벨: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여성에게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 마력이란 바로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의 마력이 대지의 마력을 버티어주게 된 거지요. 고대의 전승에 다르면 최초의 경작은 여성의 손에서 이루어집니다. 좀더 고급한 문화 체계에서 쟁기가 발명되는 것은 훗날의 일입니다. 쟁기가 만들어지면서 남성이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되지요. 이렇게 되자 쟁기가 대지를 가는 말하자면 남녀의 성적 결합 시뮬레이션(의태(擬態))도 신화 이미지가 됩니다. (193~194페이지)
***캠벨: 상징체계를 통하여 어떤 시대의 정상적인 인간조건이 상징되고 조직되고 나타나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상징체계는 어떤 것을 평가합니까?
캠벨: 가치, 즉 평가의 결과는 삶을 지배하는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령, 사냥꾼의 의식은 늘 의계의 동물에게로 쏠립니다. 그의 삶은 동물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래서 사냥꾼의 신화는 외계 지향적입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시가 죽고, 여기에서 새 식물이 움트는, 말하자면 식물의 경작과 깊은 관계가 있는 농경신화는 내계지향적입니다.
사냥꾼에게는 동물이 신화를 촉발합니다. 권능(權能)과 지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숲으로 들어가 금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 동물이 나타나 권능과 지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농경문화에서는 식물의 세계 자체가 스승노릇을 합니다. 식물의 세계는 생멸의 반복이라는 의미에서 사람의 삶과 동일시됩니다. 그래서 내계지향적관계가 이루어지지요.
모이어스: 인류의 생활 양태가 동물 사냥에서 식물경작으로 바뀌면서 신화적 상상력에는 어떤 변화가 생깁니까?
캠벨: 대단히 극적이고 전반적인 변화가 생기지요. 신화만 변한 것이 아니라 정신자체에도 변화가 있었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완벽한 개체입니다. 동물은 가죽에 싸여있지요. 우리가 동물을 죽이면 이 동물은 영영 죽고 맙니다. 그 동물에게는 그것이 곧 끝입니다. 그러나 식물의 세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식물은 스스로의 생명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경우 대궁을 자르면 다른 순이 나옵니다. 가지치기는 식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식물의 생장에 도움을 줍니다. 식물은 영속하는 생명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숲과 농경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여기에서는 개체하고 하는 것은 완전한 개체가 아니라 식물의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예수는 이 이미지를 이용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하고 말합니다. 이 포도나무 이미지는 동물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농경문화는 먹이가 될 식물을 끊임없이 추켜세웁니다. (194~195페이지)
***캠벨: 이렇게 신을 죽이면 바로 이 신, 바로 이 구세주에게서 먹을 것이 나오는 것이지요. 미사의 성찬식에서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 곧 구세주의 피요, 살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은 내면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살과 피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되어 역사하는 것이지요.(202페이지)
***캠벨: 삶의 모습 자체는 반드시, 삶의 행위를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수렵문화권에서 공희제가 치러질 경우 제물 자체는 거기에 임재(臨齋)한 신에게 바치는 선물, 혹은 뇌물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드시고 우리에게도 뭘 주십사 하는 거지요. 그러나 농경문화권에서는 어떤 것이 재물로 희생될 경우는 다릅니다. 그 제물은 곧 신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땅에 묻히고 거름이 됨으로써 거름이 되어 곡물을 기름지게 가꿈으로써 곧 우리의 양식으로 돌아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났지요. 바로 그의 육신에서 영적인 양식이 나옵니다. (203페이지)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 나무 아래 앉아 잇는 부처...이것은 같은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문 앞에는 그룹이 있는데, 이게 뭡니까? 절에 가보면 두 문지기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이것은 두 대극(對極) 즉 공포와 욕망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 두 문지기가 우리를 위협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무사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善)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204페이지)
***모이어스: 낙원, 궁극적 실재, 천목, 환락, 완전성 그리고 신으로부터 추방당한 상태를 산다는 느낌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었습니까?
캠벨: 삶이 모든 사람에게 환희의 연속인 때도 있었지요. 일상의 삶과 이 환희의 순간이 다른 점은 전자는 낙원 밖에서 사는 삶이고 후자는 낙원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포와 욕망이라는 이 한 쌍의 대극을 극복해야 합니다.(204페이지)
***캠벨: 대극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초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모든 깨달음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육(肉)으로는 죽고 영(靈)으로는 다시 나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의식과 동일시합니다. 이런 삶에서 육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아요. 수레로는 죽고 의식과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은 동일시해야 합니다.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 그것이 곧 신입니다. (204페이지)
***이 모든 드러남의 이면에는 빛으로 만물을 비추는 하나의 광원(光源)이 있어요. 예술의 기능은 창조작업을 통해 이 광원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잘 짜여진 예술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아, 하고 감탄하고는 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까닭은 이 작품이 우리 삶의 질서를 드러내고 종교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겠지요.(205페이지)
☆☆☆ 예술의 역할이 우리 삶의 질서를 드러낸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종교가 회복하자는 것은 인간성 회복과 신에게로의 귀환이 아니겠는가. 예술은 이 두 가지의 기능까지도 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캠벨: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는 사자의 신이자 사자의 심판자인 동시에 생명을 생성시키는 신이기도 해요. 이것은,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210페이지)
***우리의 진정한 실체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211페이지)
***동양의 종교에는 보살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존재가 있어요. 대자대비로 표상되는 이 보살의 손끝에서 떨어지는 불사약은 지옥계 바닥에까지 이른답니다. 보살은 자비의 원리를 상징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치유(治癒)의 원리에 다름 아닙니다.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자비가 있기 때문에 계속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불사(不死)를 획득한 존재이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의 슬픔에 참가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자진해서 이 세상에 참가한다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212페이지)
***모이어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속량전 혹은 벌금을 무는 행위가 아니라 화해 즉 하나 됨의 행위라고 한 12세기 철학자 아벨라르의 견해에 동의하시는군요?
캠벨: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까닭,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기를 선택한 까닭에 대한 해석치고는 가장 세련된 해석입니다.
아벨라르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에다 삶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이 세상의 물질에 멀어버린 인간의 눈을 열어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救主)가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견해가 바로 불치의 상처로 고통을 당한다는 중세의 성배왕 관념에 반영됩니다.(213페이지)
***캠벨: 시간이 존재하면 고통이 잇게 마련입니다. 과거없이 미래를 맞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현재를 사랑해봐야 곧 과거가 됩니다. 상실, 죽음, 탄생.... 상실, 죽음, 탄생.... 삶은 이렇게 돕니다. 십자가를 명상한다는 것은 곧 삶의 신비의 상징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213페이지)
***자살 역시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떤 시간대에 처하게 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시간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위가 곧 자살인 것입니다. 하지만 융박사의 말마따나 상징적인 상황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213페이지)
***캠벨: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단테의 <신곡>이 다루고 있는 문제도 결국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 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 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이 숲에서, 각각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 세 마리를 만납니다. 그런데 시적통찰력의 화신(化身)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지옥의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지옥의 미궁은 자만과 욕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영원으로 들어가지 멋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의 지복 직관을 경험하지요. (217페이지)
***중세 신화에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이 연민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성배 전설에 나오는 상처입은 성배왕에 대한 사람들의 연민이 바로 이러한 변모를 드러냅니다. 바로 여기에 아벨라르적 관념이 태동합니다. 아벨라르는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하지요. 즉 인자(人子)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이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연민 쪽으로 열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인간의 추잡한 관심을 고통을 나누기 위해 자길ㄹ 희생하는 인간만이 지닌 가치의 세계 쪽으로 쏠리게 하기 위함이다. (218페이지)
☆☆☆ 연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것. 불교에서의 자비의 마음에는 연민의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남의 고통과 불행과 아픔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품을 때 너와 나는 분리된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죽고 나서 9백 년 뒤에, 중세의 한 위대한 수피 신비주의자는 ‘나와 내가 사랑하는 자는 하나’라고 했다가 역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는 십자가로 가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에게 가르치셨으면 이들에게도 가르치셨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르쳤으면 이들이 저를 이렇게 대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에게 가르치시지 않았어도 오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 주님과 그분 하신 일에 복 있을진저.”(221페이지)
***영적인 문제에 관한 한 다수라는 것은 항상 먹을 것, 살데, 자식들, 재물 이상의 경험을 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요,(221페이지)
***싱클레어 루이스의 <바비트Babbitt>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오지요.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이게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天福)을 좇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은 결혼과 동시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버렸다. 안락한 가정을 위해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들은 자신의 천복을 몰랐기에 하고 싶은 것을 버린 것일까? 의문을 가진다. 자신의 천복에 대해 그만큼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가장 절실한 것부터 해결하고 얻으려는 경향이 있다. 천복 대신 결혼을 선택한 사람들은 결혼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캠벨을 비난하기 위해 쓴 것인데, 몇 초 사이에 생각이 바뀌어져버렸다.
***중세의 필사본에 여러 문맥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가 바로 행운의 바퀴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대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222~223페이지)
***모이어스: 천복이 있는 영생의 샘을 찾는 이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시겟습니까?
캠벨: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223페이지)
***모이어스: 부모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천복을 찾게 해줄 수있습니까?
캠벨: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아이에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도와 줄 수 있지요. 대학에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이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223~224페이지)
***천복거리를 찾는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자기가 전적으로 관심을 쏟지 않던 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방향 전환의 계기를 기다리는 능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225페이지)
***어떤 학생이 나에게 찾아와서 “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들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지금 말하는 천복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배운 겁니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 세가지가 잇어요.
사트sat, 취트chit, 아난다ananda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이말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햇지요.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처방에 영험이 있었던 것 같군요. (226페이지)
☆☆☆‘크게 버린 자는 크게 얻는다’는 말이 있다.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했으니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조셉캠벨도 박사학위라는 제법 큼직한 것을 박차고 나왔기 때문에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노력한 것이 아닐까 싶다.
***캠벨: 종교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보기까지는 끝내 천목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주장하지요. 그러나 나는 살아 있을 동안에도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천복이라고 생각해요.
모이어스: 천복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것이군요. (227페이지)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천복을 쫓으면 나는 창세때 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잇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227페이지)
*** 캠벨: 보이지 않는 손, 영원한 생명수는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227페이지)
5. 영웅의 모험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229페이지)
☆☆☆내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문득 스님, 신부, 수녀, 목사 등 출가 수행자와 성직자들은 영웅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 인류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붓다, 예수에게 자신을 바친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이 가는 길이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길이며, 신념이 없다면 결코 갈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으니 영웅임에 틀림없다.
***사람의 행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사움에서나 남을 구하는데서 용기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정신적인 행적은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사람으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멥니다.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에 일종의 주기가 있지요.(230페이지)
***우리는 보통 누군가의 보호의 감독 아래 의존적인 상태로 줄잡아 14년에서 20년 동안이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냅니다. 박사학위를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기간이 35년쯤으로 늘어날 수도 있겠지요. 이 기간 동안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만 대신 벌이면 벌, 상이면 상을 받아야 하는 복종적인 예속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이야기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던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230페이지)
☆☆☆자식을 계속해서 품에 안고 있으려는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나쁜 부모이다. 영웅으로 거듭나려는 아이의 날개를 잘라버리고 발톱을 뽑아버리는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것과 같다.
***오토 랑크는 <영웅의 탄생 신화>라는 작은 책에서 양수(羊水)에서 수생동물 상태를 지나고 공기를 호흡하는 포유동물 상태를 지나 호로서기까지는 엄청난 심리적, 육체적 변모 과정을 거치기에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영웅이라고 주장하지요. 아닌게 아니라 엄청난 변모이기는 합니다 (230페이지)
☆☆☆오토랑크의 이론에 박수를 보낸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영웅이다. 영웅신화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살아가면서 주변환경에 의해 영웅신화가 점점 약화되어져 가는 것 같다.
***오토랑크는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를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존경을 받고 보호를 받아서 마땅한 영우적인 행위로 본다고 지적하고 있어요.
***처녀에서 어머니가 되자면 변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변모라는 것은 많은 위험을 거치는 굉장한 변화이지요.(232페이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233페이지)
***영웅은 생소한 여행을 경험하지만 사실 영웅에게는 그런 여행을 할 준비가 사전에 다 되어 있어요. 여행은 그러니까 그를 등장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인 것이지요. 환경의 상황이나 조건도 영웅에 맞게 예비되어 있는 겁니다.(238페이지)
캠벨: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239페이지)
***우리 문명권에서 중년의 문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 겁니다. 나는 중년을 훨씬 넘긴 사람이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 게 있어요. 우리 좌식(座式)생활권 사람들에게는 지적인 흥분이 다소 있거나 잇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몸은 그렇지 못해요. (241페이지)
***엘리엇의 호아무지가 그리고 있는 것이 무기력한 삶과 강요된 삶으로 빚어지는 사회학적인 침체 상황입니다. 이런 삶은 우리의 영적인 삶, 우리의 잠재력, 우리의 육체적인 힘을 촉발 할 수 없지요. 세계대전이 무엇이던가요? 이런 삶이 지배하는 분위기가 빚어낸 전쟁아니던가요?(242페이지)
***고대 그리스 문화권의 최고 기술자였던 다이달로스는 자기 손으로 만들었던 크레타의 미궁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기 손으로 만든 날개를 아들 이카로스에게 달아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아야 한다. 너무 높이 날아오르지 말아라. 너무 높이 날아오르면 태양의 열기에 네 날개의 밀랍이 녹을 터이니, 필경은 떨어지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낮게 날지도 마랄. 너무 낮게 날면 파도가 네 날개를 적실 것이야.”
다이달로스는 중간을 납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잔즉 신이 나서 자꾸만 높이 높이 날아오르는 이카로스가 보입니다. 결국 밀랍이 녹으면서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이달로스 이야기보다는 이카로스이야기를 더 많이 합니다. 문제는 이카로스가 아니라 이 우주인을 바다에 추락시킨 날개 속에 들어있는 태도인데요, 산업이나 과학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엾은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지만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았던 다이달로스는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 해변에 착륙하지 않았습니까?
이 위험은 우리가 너무 열광한 나머지 과학기술적인 측면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면 언제든지 이런 위험에 빠질 수 있지요. 이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면 추락합니다. 위험한 길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모이어스: 선생님이 학문적인 자세 중에서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과학과 신화는 전혀 갈등하지 않는다고 믿으시는 것에 있는 듯한데요? (243페이지)
☆☆☆무모한 도전을 한 이카로스를 나는 이제까지 찬양하고 받들어왔다. 이 대목에서 캠벨은 이카로스처럼 무모한 도전은 무모한 도전일 뿐, 어떤 결과를 얻지 못하면 안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도전하고 시도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찬사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나의 생각에 금이 간다. 이카로스는 날개에 담겨있는 정보 즉 기술과 과학을 무시하고 천방지축 날뛰었다. 그 댓가는 참혹했다.
다이달로스는 기술자였기에 날개에 담긴 정보에 따라 행동했기에 자신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캠벨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영웅이 되려 하다면 방종하지 말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 목표를 달성하고 귀환하라는 것이다. 다이달로스의 위대함은 목표를 달성하고 무사히 귀환한 것에 있다. 아, 그러면 영웅의 신화에서는 ‘세상은 1등만이 기억한다’는 오래전의 삼성의 광고가 맞는 것일까?
모이어스 역시 캠벨에게 ‘과학과 신화는 갈등을 빚지 않는 다면서요’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갈등을 빚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의 길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다투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캠벨은 분명 과학과 신화를 대립시키고 갈등하게 만들고 있다.
***캠벨: 갈등하지 않아요. 과학은 바야흐로 신비주의의 차원으로 넘어 들어오고 있어요. 과학은 머지않아 신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세계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벼랑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벼랑 이쪽에 있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벼랑 아래에 있는 것은 인간에게서 탐구 가능한 범위를 초월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절대로 알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벼랑은 이 양자가 만나는 곳이지요. (244페이지)
***모이어스: 존레논은 영웅이었습니까?
캠벨: 신화학적 의미에서 존레논은 개혁자였어요. 비틀즈는 우리 사회가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잇는 음악을 만들었어요. 하여튼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오나벽하게 들어맞았지요.....대중의 영웅은 자기 시대의 필요에 대단히 민감한 법입니다. 비틀즈는 대중음악에다 정신적인 깊이를 더했습니다. 명상적이고 동양 음악적인 분위기를 더한 거지요. (246페이지)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간단하게 말해버리기에는 좀 복잡한 데가 있어요. 배가 파선된 곳은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입니다. 태양의 섬이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섬, 광명의 섬입니다. 만일에 배가 파선되지 않았다면 오디세우스는 그 섬에 눌러앉아 요가행자와 비슷한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로써 깨달음을 얻고 천복을 누리면서 그곳에서 살았지, 인간세상으로는 돌아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가치있는 것은 드러내 삶에 유용하게 한다는 그리스인들의 정신은 결국 오디세우스를 돌아오게 합니다.
태양신의 섬에는 금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태양신 헬리오스의 황소를 잡아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하도 굶주린 참이라 태양신의 황소를 잡아 구워먹어 버립니다. 이래서 배가 파선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영적인 빛의 신이 사는 이 섬에서도 인간의 비천한 의식은 그런 식으로 가능했던 겁니다. 광명이라는 존재 앞에서 “아 쇠고기 샌드위치나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고 방식, 이게 얼마나 참람(僭濫)한 겁니까? 그 광명을 내적으로 체험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그것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거나 읽을 능력이 없었던 겁니다. (247페이지)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귀환해야 한다. 기회는 준비되어 있는 자에게만 온다.
***무덤에서 끝난다고 해서, 인생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핀다로스이 시에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대목이 있어요.
“광명의 아들이 아닌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인간은 꿈같이 덧없는 존재. 그러나 하늘의 선물인 태양이 비치면 광명한 일광이 머무르면, 아 아름다워라!”
승리의 순간에 맞게 되는 이 완전성의 정점에 가해지는 악센트, 대단히 그리스적이지 않습니까?(247~248페이지)
***많은 영웅이 목숨을 내어놓지요. 그러나 신화는 목숨에서 새 생명이 비롯된다는 메시지도 전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영웅의 목숨이 아니라 새 생명, 새로운 존재, 혹은 육화(肉化)의 길일 겁니다.9248페이지)
***캠벨: 전세계적으로 공통되는 모티프 중에 괴물을 죽이는 모티프가 있어요. 이러한 신화는 광야에서 위험한 삶을 살아가면서 나름의 세계를 꾸미던 선사 시대의 경험에서 빚어진게 아니겠어요? 그 시대의 인류는 실제로 괴물을 죽이러 가야 했던 거지요.
모이어스: 많은 개념이나 관념이 그렇듯 신화도 시대에 따라 진화하는 것이군요.
캠벨: 문화가 진화하는데 맞추어 진화하지요. 가령 모세는 영웅의 이미지입니다. 모세는 산으로 올라가 꼭대기에서 야훼를 만나고는, 새 사회를 모양 짓는데 필요한 법을 가지고 내려옵니다. 출발, 성취, 귀환.... 이것이 영웅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적이지요.
☆☆☆영웅의 전형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모험을 떠난다, 고통과 고난의 시간을 보내면서 목표를 성취한다, 달성한 결과물을 가지고 자신의 땅으로 돌아온다.
***캠벨: 하나의 원형적인 영웅상이 많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모든 지역에서까지 베껴졋다는 것이지요. 전설적인 영웅은 큰 일을 한 사람, 무엇을 세운 사람인 경우가 보통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 새 종교를 세운 사람, 새 도시를 세운 사람,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세운 사람인 것이지요. 이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땅에서 새로운 것을 싹 틔울 잠재력이 있는 씨앗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251페이지)
☆☆☆새롭지 않으면 영웅이 될 수 없다. 2류, 아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새로운 것을 창출한다는 것은 한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한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 답은 명상에 있다. 광야에서 명상......
***여기 있는 나는 여든을 헤아립니다. 그런데도 나는 몇 권은 족히 될 책을 쓰고 있어요. 이 일을 마칠 때까지 살 수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내게는 일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거예요.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욕망이 없다면 죽는거야 언제 죽어도 좋아요. (258페이지)
☆☆☆노학자의 학문에 대한 욕망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 나도 육십 전까지 20권의 책을 쓰겠다는 목표를 페기하지 말고 발효시키자.
***그리스도와 석가는 죽음 너머에 있는 구원을 찾아서는 광야에서 돌아와 제자들을 뽑고 가르칩니다. 이들의 메시지는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에 전해집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9모세, 석가, 그리스도, 모하메드)의 메시지는 다 다릅니다. 그러나 이들이 경험한 환상 여행은 동일합니다. (258페이지)
***전통에 생명을 부여하는 영웅도 있어요. 이런 영웅은 전통을 재해석함으로써 시대에 뒤떨어진 상투성에서부터 전통의 상징성을 해방시켜 당대의 살아있는 경험으로 만들지요.(259페이지)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꼭 새로운 것을 창출할 필요는 없단다. 기존의 것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재해석하여 생명을 부여하는 것도 창조와 다름없다.
***우리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막연할 때는 이웃의 충고나 영향력이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요. 나는, 엄격하고 군위주의적인 사회상황에서 자라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그만큼 모르는 상태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262페이지)
***아이들이 달력을 보면서 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휴일이 되어야 저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263페이지)
*** 신화가 암시하는 첫 번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신화나 영적인 지도자 스승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이 두 사람은 기초적인 신화 테마를, 현대 젊은이들이 경험하는 개인적인 문제, 어려움, 깨달음, 관심의 해석에다 응용하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문제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소설가의 작품에서 신화 모티프를 선택해서 길잡이로 삼는 것도 좋겠지요. (263~264페이지)
☆☆☆캠벨은 나를 열광하게 만든다. 좋은 스승이 없다면 좋은 책도 스승이 될 수 있음을 강력하게 말하는 그가 너무 좋다.
***심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고래는 우리의 무의식에 갇혀있는 생명의 힘을 상징. 고래가 나타났다는 상황은 이 무의식이 의식적인 인격을 압도하고 힘을 얻은 상태를 만들지요. 즉 이때부터 무의식이 의식을 극복하고 의식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고래는 영웅을 삼키지만, 영웅은 고래의 뱃속이라는 심연에서 되살아나옵니다. 즉 죽음과 부활의 테마가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의식적인 인격은 통제 불가능한 무의식적인 에너지의 충전을 받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영웅은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련을 겪으면서 무서운 밤바다를 여행해야 합니다. 이 무서운 밤바다 여행에서 이어둠의 에너지를 극복할 방법을 깨닫게 되면 마침내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의 유형에서 영웅은 어둠의 힘과 만날 경우 그것을 죽여버립니다. (269페이지)
***모이어스: 조셉의 신화학이 내 인생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하고 묻습니다.
캠벨: 내가 장담하거니와 상관이 있어요. 구체적인 프로그램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기 가슴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정신분열증적 해리(解離)의 위험이 있어요. 자기중심에서 이탈해 있는 사람이거든요.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270페이지)
***캠벨: 모든 종교는 그것의 시대에는 진리였어요. 영적으로 우리를 지탱하는 것을 위하여 육체적 욕망과 공포를 희생시키는 일, 바로 이거 아닙니까?(271페이지)
***스승이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야 소수겠지요. 하지만 잠재력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우리 안에 있어요. 나날의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는, 진짜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이런 능력이 있어요.(271~272페이지)
☆☆☆ 일상생활에 함몰되지 않아야 한다. 돈도 모르고 경제도 모르고 육신의 안락을 추구하지도 않았는데 왜 나는 영웅이 되지 못했을까? 천복은 제대로 찾은 걸까?
***캠벨: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모이어스: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잇는 괴물을 죽일 수 있습니까?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란 무엇입니까?
캠벨: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모이어스: 우리의 일입니까? 삶입니까?
캠벨: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 나 스스로가 용을 가두어 놓고 사육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용이란 천둥과 번개가 칠 때 큰 소리를 내면서 하늘로 승천해야 생명력을 얻는 것인데, 용을 내 안에 가두어놓은 채 뱀 혹은 토룡으로 만들어버렸다.
모이어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나 예수같은 이들과는 달리, 우리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캠벨: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 우리 자신을 구원하면 세상도 구원되듯이,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캠벨: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제 바로 용입니다.
모이어스: 우리의 자아는 무엇입니까?
캠벨: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이건 아주 조그만 것일 수도 있는데도 어떨 때는 우리를 아주 꼼작 못하게 합니다. 이웃의 말에 따라 행동하다보면 조만간 꼼짝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이 경우 이웃이 바로 우리의 내면에 비치는 용일 수 있어요.(273페이지)
☆☆☆ 우리는 갇혀 있는 용을 탈출시키는 것이 목표이다. 우리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주변의 소리, 광고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인다. 그러다 보니 천복을 찾지 못하고 평생 헤매다 죽는 것이다. 나와 더불어 살면서도 ‘내가 누구인지’모르고 남이 규정해놓은 것에 끌려 다닌다.
***모이어스: 저는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신하에 대한 선생님의 해석을 좋아합니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에게, ‘미궁에서 나오는 방법만 가르쳐주면 “영원히 사랑하리라”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줍니다. 테세우스는 미궁으로 들어갈 때 이 실타래의 실을 풀었다가 그 실을 따라 무사히 미궁을 빠져나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실밖에 없었다”고 하셨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것뿐인 것 같은데요.
캠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리아드네의 실뿐이지요.
모이어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뿐인데도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재물, 우리를 구해줄 권력, 우리를 구해줄 사상(思想)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매지요.
캠벨: 그 실이라는 게 찾기가 쉬운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 데 필요한 시마리가 될만한 것을 가르쳐 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 서구인들은 ‘나’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위대한 서구의 진실이라고 믿어요. 우리가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줄 수 잇을 때도 주어지는 것은 어는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 개개의 경험과 우리 개개인이 지닌 잠재력의 발현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적인 사회, 거의 모든 전통 사회를 보면 개인은 기계로 찍어낸 것 과자 같아요. 이런 사회 구성원의 의무는 정확한 용어로 정확하게 정의되어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지요.
학생들은 자기 나름의 자기 길을 찾아야 하지요. 그러니까 그 길은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을 향한 잠재력, 다른 사람은 체험해보지 못한 것, 다른 사람에 의해서는 체험될 수 없는 것일 수 밖에 없지요. (277페이지)
**햄릿의 문제는 자기의 운명에 깨어있지 못했다는 거지요. 햄릿은 운명을, 너무 커서 도저히 다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운명이 햄릿을 다스려버렸던 거지요. 이런 일은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지요.(278페이지)
***캠벨: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278페이지)
***캠벨: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인간이 사는 한 살이(유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고, 나이를 먹고는 세상을 떠나는)의 이미지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죽음을 직면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받아들일 때,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뿐 아니라 스핑크스의 저주도 풀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거지요.(278페이지)
***신화는 우리에게 나이 몇 살에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까지 가르쳐 줍니다. 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짐작케 해주는 좋은 기준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개인차가 엄청나게 납니다. 사람들 중에는 대기만성형이 있어서 아주 늦게야 빛을 보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어요.(286페이지)
***캠벨: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야간의 자기 분석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286페이지)
****모험이라는 것은 위험해요. 모험에는 긍정적인 가능성도 있고 부정적인 가능성도 있는데, 둘 다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악마와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지요. (291페이지)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297페이지)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賞) 또한 그만큼 큽니다. (298페이지)
***내 여자 친구는 늘 “하느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이렇게 생각햇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천만에,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잇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것이 당신의 내부 어디쯤인지 알아야 한다.(298페이지)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가령 우리 부모가 서로 눈이 맞는 것부터가 우연이지요. 우연 혹은 인연이라고 합시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걸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生起)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299페이지)
***인생은 슬픈 것이라고 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과 슬픔으로 부터의 탈출구가 있는데, 이게 바로 니르바나입니다. 니르바나는 우리 마음, 혹은 의식의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천당처럼 어떤 곳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니르바나는 인생이라는 소용돌이 바로 그 안에 잇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니르바나 상태는 욕망이나 공포나 사회적인 인연에 쫓기면서 살지 않게 될 때, 자기 안에서 내적인 평화의 중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중심에서 나온 자발적인 행위, 이것이 바로 보살의 길, 말하자면 이 세상의 슬픔에 기꺼이 참여하는 삶인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어떤 것에 붙잡힌 상태를 벗어납니다. 욕망, 공포, 의무 같은 우리를 붙잡는 것에서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을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성취한 사람,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통치자입니다. (300페이지)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잇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300페이지)
***모이어스: 그런데 그런 희한한 재능이 보통 사람에게는 없지 않습니까?
캠벨: 나는 보통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통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북해지곤 하는데, 그 까닭은 내가 보통사람, 보통여자, 보통 아이 같은 걸 도무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이어스:이런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예술뿐인가요?
캠벨: 내가 추천하고 싶은 두 방법이 종교와 예술을 통해 이르는 방법입니다. 삼엄한 철학으로는 이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학문이라는 것은 개념이 정교하게 얽힌 숲 같은 것이니까요. 그러나 타인에게 자비의 문을 열고 온 가슴으로 사는 삶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요.(302페이지)
☆☆☆자비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보통이상의 재능이다.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보통이상의 사람임을 기억하라. 이 구절을 통해 캠벨이 따뜻한 분, 온기가 느껴지는 학자라고 생각한다.
***모이어스: 어떻게 하면 이러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캠벨: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면 열 수 있지요. 가까운 친구, 혹은 훌륭한 스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요. 내 경우 대부분은 책에서 나옵니다. 정말 많은 선생님을 만나는 은혜도 누리기는 했지만요.(302페이지)
☆☆☆캠밸은 또 한번 독서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화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03페이지)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캠벨: 대지를 상징하는 십자가는 어머니 상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어머니에게서 얻은 자기 육신을 남기고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신비의 근원인 아버지에게로 갑니다.(306페이지)
***캠벨: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 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문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308페이지)
***캠벨: 화해는 곧 ‘하나되기’ 랍니다.
***철학적으로 관점으로 옮겨가면 여성은 ‘마야’를 상징하게 됩니다. 바로 인도의 여신 숭배종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잇지요. 인도에는 아직까지도 여신의 상징성이 두드러집니다. 여성은, 칸트 철학의 입장에서 우리가 ‘감각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표상합니다.
여성은 시공 그 자체인데, 이 여성너머에 있는 신비는 곧 한 쌍의 대극을 초월하는 신비인 것입니다.
이 신비의 형상에 이르면 그것은 남성도 아니요, 여성도 아닙니다.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만물’은 이 안에 있지요. 그래서 여성은 그 여성이 낳는 자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여신이 낳은 것입니다. (309페이지)
***캠벨: 수렵민은 죽이는 민족입니다. 유목민도 죽이는 민족입니다. 왜냐? 이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만나는 문화는 모조리 정복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침략적인 민족에서 제우스나 야훼같이 벼락을 주무기로 쓰는 호전적인 신들이 나오는 겁니다.(312페이지)
***캠벨: 모이어스씨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320페이지)
***캠벨: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을 잉태를 한 거예요. 예수는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지 육체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320페이지)
***캠벨; 이 세상 만물의 존재가 비롯된 곳은 남성과 여성이 분화되지 않은 곳. 그러니까 성(性)너머에 있어요. 그곳은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해 있어요. 그러니까 존재하는 곳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범주를 훨씬 초월해 있는 것이지요.(332페이지)
***의례의 집전은 곧 신화의 연출입니다.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335페이지)
***여신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336페이지)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까지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 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깨달음에 이르는 단서가 되기는 합니다.(336페이지)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337페이지)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에로스적 사랑은 생물학적 충동에서 나와요. 이성에 대해 충동을 느끼는 사랑입니다. 미개인적인 사랑이지요.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식의 영적인 사랑이에요. 이웃이 누구이든 전혀 상관없이 사랑해야 한다. 이것도 개인적인 것일 수 없지요.
아모르적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이다. 음유시인들은 아모르를 가장 고귀한 정신적 경험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341페이지)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획일적인 체계는 기계적인 체계입니다. 기계라고 하는 것은, 같은 공장에서 나온 다른 기계와 똑같은 기능밖에는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개인주의가 대두되면서 그것이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343페이지)
***캠벨: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모이어스: 사랑을 선택하는데도 그래야 합니까?
캠벨: 사랑을 선택하는 데도 그래야 하지요.(347페이지)
☆☆☆자신의 재능을 알고 나아갈 길을 결정했다면, 어떤 풍랑에도 흔들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강한 의지력을 키워야 한다.
***모이어스: <신곡>의 <연옥편>에 보면 단테는 지옥에서 인류 역사상 유명한 연애 사건의 주인공들을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단테는 헬레네도 만나고, 클레오파트라도 만나고, 트리스탄도 만나지요. 그는 어떤 뜻으로 이런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일까요? (터키기행 위해 <신곡> 꼭 읽어볼 것)
캠벨:단테는 교회의 견해를 빌려 이곳은 지옥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이러고 있는 겁니다. 단테는 바로 거기에서 당대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했던 연애 사건의 주인공인 파울로와 프란체스카도 만납니다......(348페이지)
***죄악으로 지탄을 받아야 마땅한 이 행위가 음유시인들에게는 절대로 지탄을 받아서는 안되는 아름다운 경험이지요. 사랑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순간은 인생에서 고귀한 순간이지요.(349페이지)
***서구 선진사회는 개인을 살아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50페이지)
***성배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해석됩니다. 성배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 잇던 술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그 술잔을 말합니다. (356페이지)
***성배는 참 삶을 산 사람들이 획득한 것, 혹은 깨달은 것을 표상합니다. 성배는 결국 인간 의식의 가장 고귀한 영적 잠재성의 성취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원래 성배왕은 잘 생긴 청년입니다. (357페이지)
***사람들이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남이 하는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는 땅이 바로 황무지입니다. <황무지>를 통하여 엘리엇이 표현하려고 한 것도 발 이겁니다. (357페이지)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開花)이자 성취이다.(358페이지)
***캠벨: 낭만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가 두 세계에 걸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하면 밖에서 강요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기도 하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 두 세계를 조화 있게 상호관계 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나’는 이 모듬살이로 태어났으니까, 모듬살이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 살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모듬살이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간섭하고 나서는 것은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결국 우리는 모듬살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듬살이가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티어주는 것이 모듬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363페이지)
☆☆☆결국 ‘네 마음대로 살아라, 눈치 보지 말고 살아라’ 는 의미이다. 제도권 밖에서 사는 나는 정말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캠벨: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놀음이 아니에요. 사랑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그러나 사랑놀음은 그게 아니지요. 사랑놀음은 쾌락을 겨낭한 관계입니다. 괘락이 끝나면 사랑놀음도 끝납니다. 그러나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365페이지)
***페르시아 신화 중 최초의 부모이야기가 잇다.
이 부모가 태초에는 하나였어요. 하나가 일종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가 분리되고 나서 다시 화합하여 자식을 낳았지요. 그런데 자식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던 나머지 이들은 자식을 삼켜버리지요? 그러자 신은 “이런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되겟구나”싶은 생각에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99페센트, 혹은 10분의 9쯤으로 줄여버렸지요. 부모가 자식을 삼켜버리지 못하게 말이지요. (372페이지)
8. 영원의 가면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함은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하는 겁니다.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을 우주의 에너지와 경이의 종국적인 근원, 혹은 본원으로 봅니다. 그러나 동양의 사고방식은 신들을 결국 비인격적인 에너지의 그 자체로서의 드러남(顯現)이자 에너지의 공급자로 파악하지요. 신은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이지요.
이로서 밖으로 드러나는 에너지의 힘과 질에 따라 신의 성격과 기능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폭력의 신이 잇고, 자비의 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어주는 신, 전쟁 때 왕이나 나라를 보호해주는 신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신들은 모두 에너지의 화신인 것이죠. (376페이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우리 마음속에서도 전쟁이 터집니다. 우리가 내릴 가능성이 있는 결정은 네댓 가지나 됩니다. 물론 내 마음 속에 있는 가장 힘센 신의 영향력이 바로 나의 결정을 주도하게 되겠지요. 그 힘센 신이 잔인하다면 나의 결정은 물론 잔인할 테지요.(376페이지)
***우리의 삶에서. 우리 몸이 지니는 에너지에서 나오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은 우리 몸 안에서 서로 맹렬하게 갈등한답니다.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예수의 이미지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떤 신의 이미지는 결정적인 장애, 궁극적인 장벽이 되는 수가 많아요.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잇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소아병적 생각에 집착해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큰 체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보다 큰 체험이 접근해오는 순간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에 매달림으로서 거기에서 도망쳐버리려고 합니다. 이걸 사람들은 신앙으로 오해하고는 하지요.
우리의 영혼은 서로 다른 중심, 혹은 서로 다른 원형적인 경험의 단계를 지나 상승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아와 탐욕 같은 기복적인 동물적 경험 단계에서 시작하여 성욕의 단계를 지나 물질적인 것을 초월하는 단계로 이행합니다. 이런 단계가 바로 경험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부여하는 단계인 겁니다.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고,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379~380페이지)
***힌두교 경전에 보면 “오로지 신만이 신을 섬길 수 있다”고 합니다. 신을 경배하고 신의 말씀에 따라 살자면 ‘나’자신과 그 신이 표상하는 영적인 원리를 동일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겁니다. (381페이지)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서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381페이지)
***우리는 하느님이기는 하느님이되, 자아에 집착한 상태로의 하느님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비이원적(非二元的)초월자와 하나가 되는 깊디깊은 존재의 차원에서만 하느님인 겁니다. (382페이지)
***나는 자비를 근본적인 종교체험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자비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거지요.(384페이지)
***비인격신의 존대, 초월적인 바탕자리, 혹은 에너지 자체로서의 비인격적인 조재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뜻이에요. 부처의 의식은 만물, 만상에게 미치는 내재적, 이지적 의식입니다. 우리는 의식의 파편, 에너지의 파편으로만 살고 있지요. (385페이지)
***모이어스: 융박사는 종교의 상징 중에서 가장 강력한 상징은 원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원은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이미지이기 때문에 원의 상징을 정밀하게 검토하는 일이 곧 우리의 ‘자아’를 분석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8캠벨: 온 세상이 원입니다. 세계에 있는 원꼴의 둥근 이미지는 모두 인간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원형의 건축 구조와 우리 정신기능의 구조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 겁니다.
마술사는 마술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 주이에다 원을 하나 그립니다. 그의 마술은 바로 이 원, 신비스럽게 성화(聖化)된 영역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이 원 밖으로 나가면 마력이 없어지는 것이지요.(388페이지)
***우리는 시간을 원의 상징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감각을 잃어버렸어요. 우리에게는 디지털 시간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은 째깍거리면서 그저 그렇게 지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이 디지털 시간을 벗어나야 우리는 진정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389페이지)
***원은 한편으로는 전체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원 안에 들어 잇는 것은 모두 원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원이라는 프레임 속에 들어있는 것이지요. 이건 아마 원의 공간적인 측면일 것입니다. 그러나 원에는 시간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어딘가로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고는 합니다, 그렇듯 원도 항상 떠났던 자리로 돌아옵니다. 신은 알파요 오메가요, 본원이자 종국입니다. 따라서 원은 바로 시간의 장과 공간의 장에서 완결된 완전성을 상징하는 겁니다. (389페이지)
☆☆☆원은 순환, 재생, 화합, 완전 등 내포하고 있는 이미지가 많다.
*** 원은 하루에도 경험하고 일년에서도 경험하고, 사냥도 좋고 모험도 좋고, 하여튼 집을 떠낫다가 돌아오는 데서도 경험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의 경험도 있어요. 자궁과 무덤의 신비가 그럽니다.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재생을 위한 준비 작업입니다. 매장(埋葬) 풍속은 바로 재생이라는 관념에서 출발합니다. 고대의 여신 임지를 보면 여신이, 사자의 영혼을 다시 받아들이는 어머니로 그려져 있어요.(390페이지)
***모이어스: 융박사는 원을 ‘만달라’라고 부르고 있지요.
캠벨: 만달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가 곧 원입니다. 그러나 만달라의 원은 그냥 원이 아니고 다른 원과 상호관계하거나 상징적인 문양을 이룸으로써 하나의 우주질서를 상징합니다. 만달라를 그리는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작용하게 합니다. 만달라를 보면 중심에 힘의 근원이자 깨달음의 근원인 신이 잇습니다. 주변 이미지는 그 신의 드러남 혹은 그 신이 지나는 빛의 측면이지요.
우리는 이 만달라를 만들어 우리에게 적용시켜 볼 수도 있어요. 우선 원을 그리고 우리 삶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충동 체계와 가치 체계를 명상하는 겁니다. 만달라를 그려본다는 것은 우리 삶의 흐트러진 여러 측면을 한 자리에 모으는 훈련 방법이 될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중심을 찾아 여러 측면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결국 우리 자신의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관계를 맺게 하는 작업입니다.(392페이지)
***모이어스: 중심을 찾아 자기 마음을 거기에다 두자는 것이겠지요.
캠벨: 그렇습니다. 중심에 두자는 것이지요.
나바호 인디언은 병자에 대해 모래그림을 이용하여 병 낫게 하기 위하여 의례를 베풉니다. 모래그림이라는 것이 바로 만달라입니다. 병자는 만달라 안으로 들어가 앉아 자기 자신을 상징적인 힘의 중심과 동일시함으로서 신화적 문맥 속으로 돌입합니다.
티베트의 승려들 역시 모래 그림을 그리는데 이 모래 그림이 바로 우리 삶에 작용하는 영적인 힘을 나타내는 우주적 이미지인 것이지요.(392페이지)
***이미지는 우리를 도와 우리 자신과 상징적인 힘의 동일시를 가능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과 범용해 보이는 어떤 대상의 동일시는 쉬운 것 같아도 사실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범용해 보이는 것에 깨달음의 촉매라는 가치를 부여하면 이때부터는 이 범용해 보이는 것이 상당한 의미를 지나게 됩니다. (393페이지)
***모이어스: 서로 다른 수많은 문화권이 같은 창조이야기, 같은 처녀수태, 죽었다가 부활하는 구세주이야기를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선생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캠벨: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393~394페이지)
***우리는 신의 이미지에 따라 만들어졌어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적인 원형이에요.(394페이지)
*** 우리 삶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을 생각해 보세요.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 점으로 돌아가 보세요. 이 한 점이 바로 요체랍니다. (394페이지)
☆☆☆그냥, 이유없이 우연히 시작된 생. 그 생은 고통, 환희, 두려움, 불안, 기쁨을 안겨주었다. 한 점으로 시작해서 행성의 가족이 되었고, 대한민국의 구성원이 되었고, 부모가 되었고, 문단의 일원이 되었고, 글을 파는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대지의 숨결을 부여받고 생명을 부여받은 그것에 대한 정성과 열정이 부족했다. 붉은 동백꽃처럼 내 열정을 불태우고 싶다.
괴테는 신성(神性)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한 점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나가는 병사의 마음이 바로 이 한 점의 상태와 같지요.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394~395페이지)
***성배이미지, 무궁무진한 샘, 무궁무진한 근원의 의미가 바로 이겁니다. 근원은 어떤 일이 생기든 전혀 관심 두지 않고 존재할 것들을 생성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근원이 베푸는,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존재입니다. 이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삶이 샘솟는 한 점인데 모든 신화가 우리이게 가르쳐주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395페이지)
☆☆☆내 안에 그 모든 것이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 신화이다. 그리고 무한한 에너지를 주는 것이 신화이다.
***우리는 신화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지 사실이라고 부르지는 않거든요.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가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 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396페이지)
☆☆☆아무리 위대한 신화일지라도 개인적인 체험이 되지 않으면 나와 관계 맺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신화의 스토리를 내면화시키자.
***캠벨:심리학자 마슬로프의 절정경험이란, 우리 삶에 실재하는 어느 한 순간에 하는 경험입니다. 존재의 조화와 나 자신의 관계를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나와 나의 존재가 완벽하게 만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398페이지)
***진정한 미학적 체험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을 비평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게 해야 합니다. 미학적 체험은 그저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399페이지)
***예술가가 우연히 깔아놓은 우연한 리듬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경험합니다. 이때 우리는 미학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파니입니다. 이 순간을 종교 술어로 설명하자면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원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 되지요. (399페이지)
***캠벨: 내가 여기에서 괴물이라고 하는 것은 조화와 질서와 윤리적인 행동에 대한 우리의 기준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무서운 존재, 혹은 무서운 도깨비를 말합니다. (402페이지)
***모이어스: 영원이 지금 여기에 잇다는 것입니까?
캠벨: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어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천국은 영원한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영속하는 곳일 뿐입니다.
흔히들 천국과 지옥을 영원하다고 하지요. 천국은 끝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끝나지 않은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가니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이 현세적인 고통과 말썽이 오고가고 하는 곳은 영원이라고 하는 심오한 경험 저 너머에 있어요. (405페이지)
***불교는 시간이 있는 데엔 슬픔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참 모습입니다.(405페이지)
***종교는 자기에게 유익한 방향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가르침으로써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라는 식의 삶의 양식을 제공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와 타인을 동일시하는 겁니다. (407페이지)
***모이어스: 우리는 모두 목적이 잇는 인생을 삽니다. 선생님께서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는 걸 믿습니까?
캠벨: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체현(體現)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었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412~413페이지)
☆☆☆캠벨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예술가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부양가족이 없을 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천복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결혼을 유보해야 한다는 결론인가?
나의 천복을 위해서 가족이든 누구든 희생자가 따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는 없다. 가장이 전업소설가, 전업 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의 가족들이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한다. 이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나의 천복을 위해서 누군가가 희생되어야 하는 그런 구조!
이제 내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도 지금 천복을 좇아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책임감을 벗어던지고 변경연에 들어왔다. 몇 년 후 천복이 열매 맺을 것을 확신한다. 나에게도 절정의 순간이 오리라고 확신한다.
***모이어스: 고통과 슬픔, 죽음과 폭력이 있는 이 세상이 에덴이라고요?
캠벨: 그렇게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413페이지)
☆☆☆세상의 시작도 종말도,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에덴동산도 나로부터 시작되고 나로부터 끝난다. 이 우주의 존재에 대해 참여하지 않는 나는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준 캠벨에게 감사한다.
***‘옴’은 우리 귀가 들을 수 있는, 만상이 체현하는 우주 에너지의 소리입니다. 먼저 목구멍으로 ‘아’소리를 내고 ‘오’라는 소리를 입안에 가득 채웠다가 ‘음’하면서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옴....... 태오남, 존재하게 되기, 사멸하여 온 곳으로 되돌아감, ‘옴’은 사대(四大)의 음절이라고 불립니다. A, U, M....셋밖에 없는데, 또 한 음절은 어디에 있을까요? 한 ‘옴’이 끝나고 또 한 ‘옴’이 시작되기 까지 그 밑에 깔리는 침묵입니다. 내 인생은 ‘옴’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는 침묵도 있어요. 그 침묵을 우리가 여기에서 영생하는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이것은 필멸의 필자를 지닌 것, 저것은 영생하는 것, 영생하는 것이 없으면 필멸하는 것 또한 없습니다. (414~415페이지)
☼☼☼ 조지프 캠밸이 읽은 책 혹은 영향을 받은 책
1. 괴테 파우스트
2. 칼 융
3. 토마스만
4. 쇼펜하우어
5. 단테 신곡
6. 제임스 조이스, 피네간의 경야(經夜), 율리시즈
7. T. S 엘리엇 황무지
8. 핀다로스(그리스 서정시인, 불후의 명작 남김)
9. 하인리히 침머
10. 에크하르트
11. 우파니샤드/리그베다
3장. 내가 저자라면
조셉캠벨의 책을 이제야 접하게 되었다. <신화의 힘>은 캠벨이 죽기 전에 미국의 저널리스트 빌모이어스와 대담한 것을 엮은 책이다. PBS(사회교육방송)를 통해 미국전역에 방송된 대담은 조셈캠벨을 단숨에 인기인으로 만들어놓았다.
이 책은 신화학이면서 자기개발서 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찾아서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을 캠벨은 ‘천복’이라 표현했다. 천복을 따르고 싶은 사람은 남의 말을 듣지 말고 오로지 그 길을 향해서 가야 한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그리고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면 책을 스승으로 삼아 그 길을 가라고 했다.
<신화의 힘>은 그리스 신화뿐 아니라 아메리칸 인디언 신화, 인도신화, 이집트신화까지 언급을 했다. 그리고 신화와 연관지어 기독교시상, 불교사상에 대해서도 그의 해박한 지식을 풀어놓았다. <신화의 힘>을 통해 기독교의 상징적인 것들- 뱀과 에텐동산, 마리아의 처녀 수태,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음 -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동양사상에 심취한 캠벨 덕분에 불교사상을 신선한 언어로 신선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대담집이다 보니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이야기하더라도 가끔씩 주제를 벗어나기도 한다는 것이 좀 아쉬웠다.
책의 목차에 대해서
책의 목차는 텔레비전에 방영될 때의 제목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 빌 모이어스의 서문
1. 신화와 현대세계-
2. 내면으로의 여행
3. 태초의 야기꾼들
4. 희생과 천복(天福)
5. 영웅의 모험
6. 조하여신의 은혜
7. 사랑과 결혼이야기
8. 영원의 가면
마음에 드는 장절
1. 모이어스: 변모의 중심은 현세의 벽이 무너지면서 우주의 경이가 그러나는 관념적인 성소(聖所)라고 하셨습니다. 성소라는 말은 어떤 뜻으로 쓰셨는지?
캠벨: 성소는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흑백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朝刊)에 어떤 기사가 실려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179페이지)
☼☼☼성소를 마음의 여백으로 설명한 것이 놀랍고도 맘에 든다. 난 마음에 여백은 많은데 왜 내가 영웅이 되지 못했는지 생각해 본다.
2. 초원의 사냥꾼에게는 세계 전체가 성소였어요. 그러나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天福)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서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179~180페이지)
☼☼☼천복의 정거장, 그것은 다른 삶을 체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체험하는 것. 삶의 양식의 변화라기보다는 정신적인 양식의 변화라야 한다. 정민교수는 변화를 하고 싶다면 질문을 바꾸어보라고 했다. 자신을 향한 질문 혹은 세상을 향한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3. 가령 우리는 성지관광을 하고는 하지요. 우리 종교가 비롯된 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땅이 다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땅에서 삶의 에너지의 상징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발 딛고 선 그 자리를 성지화하고 그곳에서 내 삶의 에너지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상징적인 내 삶의 에너지는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이것이 영웅으로 가는 길일까?
4. 모이어스: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캠벨: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일고 도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사람이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189~190페이지)
☆☆☆ 보통사람의 접신의 방법, 참 쉽네요. 내가 골방에서 책을 읽은 것은 신을 만나기 위한 행위였음을 가르쳐 준 캠벨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나름 골방에서 책을 읽었는데, 왜 신을 만나지 못했을까? 내 안의 신을 만날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까닭이다.
5. 캠벨: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모이어스: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잇는 괴물을 죽일 수 있습니까?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란 무엇입니까?
캠벨: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모이어스: 우리의 일입니까? 삶입니까?
캠벨: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 나 스스로가 용을 가두어 놓고 사육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용이란 천둥과 번개가 칠 때 큰 소리를 내면서 하늘로 승천해야 생명력을 얻는 것인데, 용을 내 안에 가두어놓은 채 뱀 혹은 토룡으로 만들어버렸다.
모이어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나 예수같은 이들과는 달리, 우리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게 되지 않겠습니까?
캠벨: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 우리 자신을 구원하면 세상도 구원되듯이,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쉬운 장절
143페이지-나이를 먹어갈 때 생기는 심리적인 문제는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죽음의 문을 한사코 거부해요. 그러나 육체는 수레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하게 되면 우리는 그 의식의 수레인 육신이 낡은 자동차처럼 부서져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범퍼가 내려앉고, 다음에는 타이어... 그런 식으로 하나씩 무너져가다 보면 이윽고 의식이 의식과 다시 만나는 대목이 옵니다. 이렇게 하나씩 무너져가다 보면 이윽고 의식이 의식과 다시 만나는 대목이 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더 이상은 살아있는 상황이 아니지요.(143페이지)
☼☼☼ 중년의 의식이 궁금하다. 육신이 점차 무너져가면서 육신의 의식과 내면의 의식이 어떻게 만나는지, 만나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좀더 설명했더라면 좋을 것 같다.
241페이지- “우리 문명권에서 중년의 문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 겁니다.”
☼☼☼ 캠벨은 여기서도 이 한마디를 ‘툭’ 던져놓고는 묵묵부답이다. 영웅이란 청년의 전유물처럼 이야기하고 있기에 ‘중년’이라는 말이 나와서 가슴 뛰었다. 캠벨은 아마도 중년이 영웅이 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에 자신이 없나보다. 아니면 캠벨의 눈에는 중년의 나이에 영웅이 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나 보다. 중년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면 좋은지를 언급해놓지 않은 것이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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