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書元
- 조회 수 2449
- 댓글 수 4
- 추천 수 0
대전역에서 환승할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즈음 새벽녘 나오다보니 허기진 뱃속이 본능적인 신호를 보내어 가락국수집으로 향한다.
어느 역에서든 국수집이 있지만 이곳에서 먹는 그 맛은 색다른 감이 있다.
대전발 영시 오십분이라는 대중가요도 있듯이 갈아타는 요지의 길목에서 내려오는 사람, 올라가는 사람, 지역과 신분에 할 것 없이 사연으로 간직한 이들이 저마다의 빈 공간을 이 기다란 면발 하나로 한 끼를 때웠다.
이십대 중반. 갈 길의 부재로 허덕이던 시절. 당시 나의 심신을 따뜻함으로 채워주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우동 한 그릇 이었다.
아침 책을 싸들고 도서관에가 졸음과의 사투를 벌이다보면 어느새 점심시간.
배는 고프고 주머니를 뒤져 구겨진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낸다.
“아줌마, 우동 하나 주세요.”
플라스틱 그릇에 담겨져 나오는 내용들 그것은 세상이다.
가늘고 하얀 긴 목의 새색시를 닮은 듯 배시시 연꽃의 웃음을 짓는 오동통한 밀가루 면발.
그 위에 얹어지는 바다 생물인 김 조각과 따가운 햇살아래 흙의 기운을 받고 자란 양파와 고춧가루.
그리고 다시다를 넣었는지 멸치를 풀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배를 채워주는 국물.
더불어 앙꼬 없는 찐빵처럼 빠질 수 없는 노란 단무지 조각들.
외로움과 추위에 지친 빈속에 국물 한 모금을 먼저 들이킨다.
카. 죽인다.
뜨끈한 액체가 위장을 휘저으면 그제야 놓았던 정신이 돌아온다. 살아가야 한다는 본능.
젓가락을 휘저어 면발 하나를 입에 넣고 후루룩.
우리네 사는 모양 세와도 닮았을 꼬불꼬불한 면발이 어둠의 공간으로 들이밀다 보면 불끈하는 존재와 희망의 채움이 들려온다.
거기다 알싸한 맛으로 다가오는 단무지의 우적거림.
마시고 씹고 삼키고 배설하고. 삶의 순환은 그 순간에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간다.
한 가닥의 긴 줄이 들어가다 보면 나의 시린 삶 흔적의 모습이 흔적을 내밀고
국물 한 모금이 들어갈수록 나의 여린 생명력의 모진 목숨이 한숨을 내쉬어
옆구리 살이 불러오는 살아있음의 만족감과 포만감의 기대치는 그래프의 상승곡선을 그린다.
거기다 이게 웬 횡재. 숨겨있던 어묵 하나를 건지면 그것이 로또다.
우동 한 그릇 삶 한 그릇.
독불장군 없듯이 여러 개체 결합의 집합체인 그것.
때론 배고픈 이에게 한 끼의 식사로 제공이 되고
때론 추억이 그리운 이에게 한 끼의 넘치는 별미가 되기도 하며
때론 뱃가죽에 기름이낀 낯선 이에게는 하나의 간식이 되기도 하지만
가난한 시인의 어휘로 제공이 될 때는 불합리한 세상에서 그래도 한줄기 바람을 찾는 작가의 작품으로 탄생되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난 지금도 생존하기 위해서
낭만에 초쳐먹는 소리의 확인사살을 위해서
그때의 맛과 멋의 변치 않는 의미의 만남을 위해서 당신을 만난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332 |
나비 No.45 - 남편을 서포터로 만드는 방법 ![]() | 재키 제동 | 2012.03.18 | 4493 |
2331 |
[태어나서6년] 상처받은 아이(수정) ![]() | 양갱 | 2012.03.19 | 2218 |
2330 | 내 나이가 벌써 [1] | 루미 | 2012.03.19 | 2350 |
2329 | #22. 신치의 모의비행-임원의 뒷담화 외 [2] | 미나 | 2012.03.19 | 2311 |
2328 | [늑대 44] 중소기업이기에 가능한 것은? [1] | 철학하는 인사쟁이 | 2012.03.20 | 2455 |
2327 |
단상(斷想) 93 - roots(뿌리) ![]() | 書元 | 2012.03.25 | 2362 |
2326 | 나비 No.46 - 인생의 열망 [9] | 재키 제동 | 2012.03.25 | 2294 |
2325 | #23. 신치의 모의비행 '비전있는 직장이란' 외.. [4] | 미나 | 2012.03.26 | 2614 |
2324 | 내 꿈은 뭐지? [4] | 루미 | 2012.03.27 | 2446 |
2323 | [늑대 45] 제가 이름을 가졌습니다 [11] | 철학하는 인사쟁이 | 2012.03.27 | 2363 |
2322 |
단상(斷想) 94 - 한 그리움이 그때의 그리움에게 ![]() | 書元 | 2012.04.01 | 2444 |
2321 | 쉼표 하나 -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이유 [8] | 재키 제동 | 2012.04.02 | 2354 |
2320 |
[양갱] 연구원 1년차의 끝과 시작 ![]() | 양갱 | 2012.04.03 | 2259 |
2319 | 엄친아보다 더한 엄마 아들 [3] | 루미 | 2012.04.03 | 2230 |
2318 | #24. 신치의 모의비행 '아프다' [4] | 미나 | 2012.04.03 | 2454 |
2317 | 첫번째 칼럼 - 천복을 찾는 독서법 [5] | ![]() | 2012.04.07 | 2847 |
2316 | 인성은 교육될 수 있는가? | 백산 | 2012.04.08 | 2684 |
2315 |
인성이란 무엇인가? ![]() | 백산 | 2012.04.08 | 16067 |
2314 |
#1. 신화는 살아있다. ![]() | 한젤리타 | 2012.04.08 | 2297 |
» |
단상(斷想) 95 - 우동 한 그릇 ![]() | 書元 | 2012.04.08 | 24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