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젤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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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대하여
■ 어린 시절(1904~1920) : 신화와 운명적 만남을 가지다.
그는 1904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고,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면서 신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10년 가족과 함께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보면서 아메리카 인디언에 푹 빠져 버린다. 또한 뉴욕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방문하면서 그 곳에 수집된 토템 기둥들에도 매료된다. 이후에도 수녀 선생님에게 들은 것과 똑같은 모티브가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 있다는 사실과 여러 민화들이 아더왕 전설의 상징체계가 유사한 것을 발견한다.
■ 청년 시절(1921~1928) : 다양한 신화를 접하고 영적 영향을 받다.
1921년 코네티컷 주 뉴 밀포드의 캔터베리 학교를 졸업하고 콜롬비아 대학교에 진학해 1925년에 영문학사 학위를, 1927년에는 중세 문학을 전공하고 석사 학위를 받는다. 그 후 콜럼비아 대학교로부터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연구원 장려금을 받았고 프랑스 파리대학과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배운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의 작품을 즐겨 읽었고, 모던 아트를 접하게 되면서 폴 클레,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에 매료된다. 그리고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칼 융(Karl Jung)의 작품에 빠져들었다.
■ 영적 성숙(1929 ~ 1937) : 혹독한 시간을 거쳐 위대한 도약을 이루다.
1929년 유럽으로부터 돌아온 후, 그는 시대적 상황적 환경 속에서 회의를 느낀다. 1934년까지 5년 동안 혹독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진다. 그는 뉴욕 우드스톡의 작은 오두막에 살면서 하루 9시간 동안 책을 파고 들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면서 작가 존 슈타인벡(John Steinbeck)과 해양 생물학자인 에드 리켓츠(Ed Ricketts)와 교류한다. 1933년에는 캔터베리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자신의 소설을 출간하려 하기도 했다. 1934년 캠벨은 사라 로렌즈 대학의 교수 제의를 받아 들인다. 그는 이후 38년간 이 대학 문학부에 재직한다.
■ 결혼에서 죽음까지(1938 ~ 1987) : 인류에게 천복을 찾는 나침반을 남기다.
1938년에 자신의 옛 제자이고,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 단원이었던 진 어드먼과 결혼한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의 신화이야기는 학문뿐만 아니라 영화 매트릭스나 스타워즈처럼 문화예술 등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신의 가면>을 펴냈다. 그는 83세의 나이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던 본인의 자택에서 암으로 타계했다. 대표적인 저서로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의 가면> <신화의 힘>등이 있다.
■ 출저
출처: 네가 바로 그것이다(조셉 캠벨, 도서출판 해바라기, 2004, pp286~287)
신화와 인생(조셉 캠벨, 갈라파고스, 2009, 앞날개 및 뒷날개)
신화의 힘(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주)이끌리오, 앞날개, p39, p41)
Wikipedia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Campbell
Joseph
■ 저자와 닮고 싶은 점(저자에 대한 평가)
캠벨은 뉴욕 우드스톡에서 책만 파고 드는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그 곳에서 그는 자기 운명의 실마리를 풀어낼 힘이 책에 있음을 발견한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는 것을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신화의 힘, 190p)
그는 책과 책을 연결하면서 수 많은 보석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 보석들이 서로 다른 보석들을 비추고 있는 모습까지도 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찾아내고 다른 분야를 꿰뚫어 보는 통찰을 얻게 된다. 자신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천복을 따르라,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된다.” 이것은 또한 스승님이 연구원 과정에서 ‘신화의 힘’을 첫 책으로 선택한 의문에 대한 해답이었다.
캠벨은 그의 첫 책<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도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변모를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탐구의 반복을 거쳐 그는 위대한 도약을 이루는 정점을 발견한다.
이렇게 나는 캠벨의 책 읽는 마음가짐과 천복을 쫓아가는 성실함, 자기 탐구에 대한 열정을 닮고 싶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문구
#1. 신화와 현대 세계
0p 이 세계는 원으로 되어 있다. 이 컬러 도판에 나오는 모든 원형 이미지는 마음(정신)을 상징한다.
11p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12p 켐벨은 언젠가, 인류는 ‘자기 내부에 식인종적이고, 색정적인 열정’을 지니고 있는데도 이러한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탄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열정을 인류의 전염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루카스의 영화를 보고는, 영웅의 역정을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닌 자기 발견의 삶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자기 내부에 자기 운명의 실을 풀어낼 힘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그렇게 합리적일 수 없는 것이지요.”
13p “우리는, 그분이 내주시는 일주일분의 독서량에 기가 막혔답니다. 결국 우리 중 누군가가 벌떡 일어서서 그분과 맞섰습니다. 그 학생이 그랬지요. ‘선생님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이 과목만 듣는 게 아니고 다른 세 과목을 듣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독서량을 할당하십니다. 도대체 이걸 일주일에 어떻게 다 읽으라는 것입니까? 그러자 캠벨 선생님이 웃으시면서 이러시더군요.
‘해보기는 했다니 놀랍군.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일주일에 읽으라는 것이 아니고 평생 읽으라는 것이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신화의 힘’ 또한 내가 평생 동안 읽어야 할 책이다. 읽는 내내 가슴을 울리는 문장들이 나를 깨웠다.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지혜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새로운 영역에 눈을 뜨게 했다. 그것은 내가 잊고 지내고 있었던 ‘미생물의 세계’였다.
16p 그의 상상력에 따르면 이 엄장하면서도 음산한 화성(和聲)은 우리 조상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아 먹거리 삼아 죽인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죽은 동물의 영혼이 가는 곳으로 여겨지는 초자연적인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 태동한다.
16p 우리 존재의 가시적인 지평 너머, ‘어딘가 멀고 아득한 곳에 동물의 주님이 있는데’. 바로 이 동물의 주님이 인간에게 동물의 삶과 죽음을 다스릴 권능을 넘겨준다. 만일에 이 동물의 주님이 동물을 인간의 손에 붙이지 않으면 사냥꾼의 일족은 굶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옛 모듬살이는 일찍이,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 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세계도 이와 같다. 미생물은 모든 생명이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다. 태초의 야생과 신비가 공존하고 있다.
16p 곡물은 죽고 땅에 묻힌다. 그러면 그 씨앗이 그 곡물을 재생시킨다. 캠벨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 모두 이 곡물의 씨앗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로써 영원한 진리(죽음에서 새 삶이 생긴다는 진리, 캠벨 자신의 말에 따르면 ‘희생에서 지복의 삶이 빚어진다는 진리’)를 드러내는 데 매료당하고 만다.
태안군에 있는 어느 박물관에 큰 야자 씨앗이 보관되어 있다. 눈을 감고 그 씨앗을 두 손으로 감싸고 기(氣)를 느껴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 에너지는 나의 심장까지 전해져 왔다. 땅 위를 뚫고 나오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했다.
17p 그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를 인용하거나 <코란>에 나오는 말, “너희는, 선인이 겪은 것과 같은 시련을 겪지도 아니하고 지복의 낙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를 인용하고는 한다.
17p 그는 인도의 성자 라마크리슈나를 찾아갔던 고달픈 한 여자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여자는 성자를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성자가 묻는다.
“하면, 그대가 사랑하는 게 무엇인가요? 사랑하는 게 하나도 없지는 않겠지요?”
“제 조카를 사랑하기는 합니다만…….”
성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그 아이를 사랑하고 다독거리는 그 몸짓에, 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몸짓이 깃들여 있답니다.”
캠벨은 이 이야기 끝에. “여기에 종교의 귀한 메시지가 있지요. 즉 ‘너희가 참을 하찮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이 곧 신에 대한 대접이 되느니라’ 라는 메시지가 그것이랍니다.” 하고 덧붙였다.
19p “천동설적 세계관에서 지동설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은 인류를 중심에서부터 벗어나게 한 듯하다.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영적으로 볼 때 중심은 시점(視點)이 있는 곳이다. 높은 곳에 오르면 지평선이 보인다. 달에 서면 지구가 떠오르는 광경이 온전하게 보인다. 비록 텔레비전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안방에서 그것을 보았다.”
19p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커녕 이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투사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 말하자면 과학이 우리를 깨우쳐, 우리 자신이 실은 우리의 내적인 자연의 귀이자 눈이자 사고이자 그 말이라는 사실(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귀이자 하느님의 눈이자 하느님의 생각이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는 것이다.
과학은 그 동안 우리들이 볼 수 없었던 미생물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했다. 문명이 발전하더라도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가는 인간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미생물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오래 전부터 반복되어온 그들의 삶은 신화가 태어나기 이전의 모습 그대로이다.
21p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를 불러들이는 그는 마치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 같았다.
25p 나는 남들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주제라고 해서 관심을 두는 것은 신용하지 않아요. 내가 신용하는 것은 어찌어찌 하다 보니 사로잡히게 되는 주제입니다.
우연으로 다가온 인연에 대해 그는 신뢰를 보내는 것 같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건을 사러 갈 때에도 누군가 권하는 것에는 눈길이 가지 않는다. 나의 눈에 들어온 첫 느낌을 중요시 한다. 그래서 나의 쇼핑시간은 매우 짧다.
25p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정신의 문학과 친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일어날 일이나 그 시각에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만 겨우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26p 예전에는 그리스 문학, 라틴 문학 그리고 성서와 관련된 문학이 교육 과정의 일부를 이루었어요. 하지만 교육 과정에서 이런 게 다 떨어져나간 지금은 신화에 관한 정보를 얻을 길이 깜깜해지고 말았어요.
26p 이런 게 없어진 것을 보니 우리가 대단히 중요한 걸 잃었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왜냐? 우리에게는 앞에서 말한 것 같은 문학을 대신할 만한 게 없기 때문이지요. 인류의 삶을 떠받쳐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 년 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적 문제, 내면에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26p 길을 가는데 도로 표지가 없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는 도로 표지에 상응하는 걸 만들어서 길잡이로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신화라는 주제를 마음에 두게 되면 우리는 대신할 것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 경험했던 미생물의 세계를 신화의 관점으로 접근하고 싶었다. 태초부터 존재 했던 그들의 세계는 단순하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정보와 느낌들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인간 세상의 모습과 미생물들의 삶은 다르지 않았다. 단지 인간의 삶이 조금 더 긴 것뿐이다.
26p 그러니까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하고, 읽는다는 말씀이군요?
내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고 말고요. 소설(위대한 소설)이라는 것은 놀랍도록 교훈적입니다. 20대와 30대에. 심지어는 40대에도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만은 나의 스승이었어요. 이분들이 쓴 것은 죄다 읽었으니까요. 이 두 분이 쓴 작품들은 신화적 전통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 대단히 밀접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27p 만일 이 세상에 유식한 인간을 시인으로 만들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과 살아 있는 것과 일상적인 삶을 사랑하는 나의 고향일 것입니다. 따사로움의 모든 것, 정겨움의 모든 것, 유머의 모든 것은 내 고향이 알고 있는 이 같은 사랑에서 유래합니다.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중에서)
28p 토니오는 “작가는 진실에 진실해야 한다”고 씁니다. 그런데 토니오가 진실에 진실하면서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왜냐,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28p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토마스 만의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28p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데다, 몸은 조그만데 머리는 터무니없이 크니, 사랑스럽지 않은가요? 일곱 난쟁이를 그려낸 월트 디즈니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집에서 기르는 우스꽝스런 강아지를 보세요. 불완전해서 사랑스러운 겁니다.
28p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 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 게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완전한 데가 없거든요.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온통 불완전한 모습이다.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 원초적인 생김새들을 보고 있으면 귀엽고 사랑스럽다.
29p 선생님의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읽고는 인간 사이에 있는 공통점이 신화에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를 이해했습니다. 신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 의미 있음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과 맞설 줄 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이 기나긴 삶의 길에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평생 영원의 의미를 이해하고, 영원을 접하고 신비를 이해하고, 누군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도움이 필요합니다.
29p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내 인생에서 3번의 큰 교통사고는 ‘살아 있음에 대한 황홀’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 사고를 떠올리면서 이야기할 때마다 더욱 삶에 대한 가치와 열정을 가진다. 아직 내가 살아가고 있음은 무언가 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한 순간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 갈수록 나의 존재와 현실과의 공명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29p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30p 석가는 그저 꽃 한 송이를 쳐듭니다. 그런데 좌중에 딱 한 사람이 그 의를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석가를 향해 웃어 보입니다. 석가라는 분 자신은 ‘이렇게 해서 오신 분(如來)’이라고 불립니다. 여기에는 의미가 없어요. 우주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벼룩의 의미는 무엇이던가요?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모이어스 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30p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30p 신화는 결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연애 같은 것과는 달라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31p 오랫동안 연애하던 사람이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결혼하고 나서는 얼마 되지 않고 갈라서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왜 갈라설까요? 이른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31p 제대로 된 상대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것입니까?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
그러니까 내적인 존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수수께끼의 요체가 거기에 있지요.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에게 있는 또 하나의 ‘자기’를 알아보실 수 있습니까?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이거다. 하고 오는 게 있어요. 그러면 사람의 내면에 있는 어떤 존재가, 이게 바로 그것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대학교 때 처음 연애를 할 때에는 상대의 관능적 관심에 이끌렸다. 3년 넘게 연애를 했지만,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이 났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와 만나기 전에 조건이 훌륭한 여자를 만났다. 집안이 어려웠을 때라 당연히 결혼을 전제로 사귀었다. 그러나 함께 있으면 손을 잡고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느낌이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슴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를 만났을 때는 보는 순간, 끌림이 있었다. 나의 모든 감각들이 아내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도 아내와 함께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32p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굴이 하나의 육(肉)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가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둘은 실제로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32p 제대로 된 관계를 지닌 사람들이라면 자기네의 관계를 상호간의 인간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요,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33p 사람은 결혼을 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33p 젊은이의 결혼은 어느 대목에 이르면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드는데, 이것이 내가 바로 ‘연금술적 단계’라고 이름 붙인 단계입니다. 이 단계 이르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단계에서 부부는 내가 앞서 말한 희생의 의미를 서로 아름답게 깨닫게 됩니다.
35p 모든 아이는 지금의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기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어린 시절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36p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37p 오늘날 우리는 비신화화한 세계를 살고 있어요. 참 역설적이게도, 그 결과 내가 만난 많은 학생이 신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더군요. 왜 신화에 관심을 기울이느냐고 했더니, 거기에는 메시지가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신화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신화가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는 설명할 수가 없군요. 하지만 이러한 메시지가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건 분명합니다.
38p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볼 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그 전문가들은 어떤 현상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는 전문화한 문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38p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란 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신화라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신화를 삶에 적용시키고 신화 모티프와 유사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카톨릭 가정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무리를 가르치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고 하늘 나라로 돌아가는 이 순환적인 주기를 계절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랍니다. 말하자면 1년 내내 계속되는 의례가 가변적인 존재의 불변하는 핵(核)같은 것을 어린 아이의 마음속에다 새겨놓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라는 아이에게 죄악이라는 것은 그러한 조화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행위이지요.
39p 당시 버팔로 빌이 뉴욕의 메디스 스퀘어 가든에 해마다 와서 <와일드 웨스트 쇼>로 공연을 벌였는데, 그걸 보고는 그만 인디언을 짝사랑하게 되고 만 겁니다. 인디언을 좀더 알고 싶었지요. 우리 부모님은 너그러운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인디언에 관해 쓰여진 그 시절의 책을 사 볼 수 있었지요. 이렇게 해서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수녀 선생님에게 들은 것과 똑 같은 모티프가 있는 것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41p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 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42p 어떤 사람이 판사가 되거나, 미합중국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신성한 직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43p 젊은 시절의 저에게는 제가 지향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붙박이별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붙박이별의 영원성은 저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습니다. 붙박이별은 저에게 삶의 지평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48p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50p 영화에는 확실히 마력 같은 게 있어요.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곳, 그러니까 영화가 나타내고 있는 상황을 체험합니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렇지요. 영화배우가 극장으로 들어서면 사람들은 모두 고대를 돌려 그 영화배우를 봅니다. 그는 그 상황에서는 진짜 영우입니다. 그는 영화 안에 존재하는 동시에 바로 그 자리에 있기도 합니다. 복수현현(複數顯現)하는 존재인 것이지요.
50p 텔레비전이 명사를 만들고 있는 데 견주면, 영화는 그런 거물을 만들고 있는 듯합니다. 텔레비전이 만드는 명사는 입방아의 대상이 되는 것 이상의 모델은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의 퍼스낼리티라고 하는 것은 극장이라는 이름의 특별한 ‘신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보는 것이지 때문이겠지요.
위대한 작가를 만날 때의 느낌도 마찬가지이다. 최근에 만난 스승님과 어제 만난 정민 교수님이 그러한 존재다. 인터넷에서 동영상으로 보는 느낌과 실제 모습을 산 속에서 그리고 글을 쓰는 사무실에서 마주한 감응은 분명 다르다. 그들은 나의 본이다. 만남과 대화 속에서 나의 꿈도 무르익어 간다. 지금의 과정을 즐기면서 가다 보면 나 또한 전설이 되지 않을까?
52p 우리 지구의 온도가 50도로 올라가서는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이 지구에는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온도가 영하 100도쯤으로 떨어져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아도 역시 이 지구에는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도, 말하자면 이 균형이라는 것이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 알고, 지구에서 물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 생명을 안아준 우리 환경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고 많은 일을 염두에 두고도 어떻게 우리가 아는 이러한 생물이 이 우주의 어떤 행성에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어요? 하고많은 별들이 거느리는 위성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나는 상상할 수 없어요.
현미경으로 미생물 세계를 들여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미생물의 입장에서 보면 밝은 빛을 보내주는 렌즈는 태양과 같은 존재다. 그 태양 너머에는 내가 있다. 마치 신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둥근 렌즈로 그들의 몸 구석구석까지 들여다 본다. 먹이를 잡고 삼키는 모습은 원시 생태 그대로다. 밝은 빛은 서서히 그들의 수분을 빼앗아 간다. 5분 정도 지나면 미생물의 몸은 터져 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나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 깨닫는다.
61p 내가 아는 한, 지구라는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지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인식에 이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만유(萬有)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만유에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61p 내가 아는 형제애는 모두 구속적인 사회에 갇혀 있어요.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는 공격성이 밖으로 투사되지요. 가령, 십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장에 가면, “가나안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 죽여라”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주에 구속된 사회의 도그마입니다. 참여와 사랑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을 향하면 태도는 표변합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과는 한솥밥을 먹을 수 없다는 거지요.
61p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을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73p 선생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이성의 시대를 창조하고 고무한 사람들을 찬양하시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컴퓨터를 끄고 네 느낌을 믿으라”고 한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에서 정의를 표하십니다. 결국은 이성인 과학의 역할과, 결국은 종교인 믿음의 역할을 어떻게 화해시키시겠습니까?
73p 이성은 생각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성이 작용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이성이 아니지요. 새앙쥐가 코를 내밀어 밖을 내다보고는, 응, 여기라면 나가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성이 아니지요.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해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74p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만,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76p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77p 오늘밤에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알 수 없듯이, 내일 어떤 신화가 태동할지도 알 수 없지요.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77p 이러한 신화는 다른 모든 신화가 다루었던 문제를 고루 다루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유아기에서 성장기를 거쳐 성인기에 이르고, 성인기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기까지의 모든 문제, 심지어는 이 사화와의 관계, 이 사회가 지니는 자연의 세계와 우주와의 관계까지 고루 다루어진 신화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신화가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 이야기가 한결같이 반영하는 신화인 것입니다. 내가 앞에서 말한 사회 역시 이 지구라는 사회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사회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신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78p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79p 우리는 나무 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 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곰, 사슴,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81p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2. 내면으로의 여행
83p 우리는 3만 년 전에 살았던 크로마뇽인의 몸과 그 기관이 똑같고 에너지도 똑 같은 몸을 지니고 있어요. 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동굴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우리는 똑 같은 삶의 단계를 거칩니다. 즉 아기 시절을 거치고 성적으로 성숙한 청년이 되고, 어린 시절의 의존적인 시기에서 독립적인 한 남성 또는 여성으로 변모하는 시기를 거치고, 결혼하고 그러다 몸이 기울고 점차 힘을 잃어가고, 그러고는 죽는 단계를 거친다는 겁니다.
84p 가령 독수리와 뱀이 싸우는, 우리 주위에 아주 흔한 이미지를 하나 예로 들어봅시다. 뱀이라고 하는 것은 땅에 붙박여 사는 동물입니다. 독수리는 영적인 비상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이 두 동물의 싸움이라고 하는 거야 우리가 늘상 체험하는 갈등과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이지요. 이 양자가 하나가 되면 놀랍게도 용의 이미지가 됩니다. 용이라면 날개 달린 큰 뱀이 아니던가요?
85p 신화가 무서운 까닭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깡그리 부수기 때문이고, 신화가 놀라운 까닭은 이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본성이자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적인 신비, 내적인 삶, 영원한 삶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경우, 그 생각을 확장시켜줄 이미지가 처음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관념 체계에서 제시된 이미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
86p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이것은 기원 전 9세기에 성립된 인도<우파니샤드: 바라문교의 철학 사상을 나타내는 성전>의 위대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 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우리 몸의 각 기관이 갈등한다고 한 까닭은, 이 기관은 이것을 원하고 저 기관은 저것을 원하는 식으로 바람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뇌도 이러한 기관의 하나입니다.
88p 어떻게 하면 우리 꿈에 좀더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꿈의 기억을 떠올려 메모하는 겁니다. 다음에는 꿈의 작은 단편 중에서 하나, 두어 개의 이미지나 관념을 선택하고 이를 연관시켜보면서 이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기록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꿈이라는 것이 사살은 우리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다가 다른 꿈을 꾸면 우리의 해석은 걸음마를 시작하게 되지요.
89p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91p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사적인 꿈은 신화적인 테마를 표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꿈은 신화의 아날로지 없이는 해석이 안 됩니다. 융 박사는 꿈에는 두 종류, 즉 개인적인 꿈과 원형적인 꿈 혹은 신화 차원의 꿈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개인적인 꿈은 그 개인의 연상을 통하여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꿈이 그 사람 삶의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느냐, 그 개인의 문제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느냐, 이런 것을 알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때로는 꿈이 신화의 테마를 드러내면서 순수한 신화 세계의 이미지, 예를 들면 우리 내면의 그리스도 같은 이미지를 전해올 때도 있습니다.
96p 생명력은 뱀으로 하여금 허물을 벗게 합니다 흡사 달이 그 그늘을 벗듯이 말이지요. 달이 다시 차기 위해서 그 그늘을 벗듯, 뱀은 거듭나기 위해서 그 허물을 벗지요. 이 양자는 대응하는 상징입니다.
97p 뱀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전승에도 등장하지요. 뱀은 친화력이라고 하는 대단히 중요한 힘을 지닌 것으로 믿어집니다. 가령 남서부 푸에블로 지역에 사는 호피족의 뱀춤에서 춤추는 인디언은 뱀을 입에 댐으로써 친구로 삼고는 산에다 놓아줍니다. 그러니까 뱀은, 산의 메시지를 가지고 인간에게 왔듯이 이번에는 인간의 메시지를 가지고 산으로 갑니다. 결국 인간과 자연의 상호 작용이 인간과 뱀의 관계로 상징되고 있는 것이지요. 뱀이 기어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물처럼 흐르는 것 같지요. 혀를 보세요. 불꽃 같지 않아요? 결국 우리는 물과 불이라고 하는 한 짝의 대극(對極)을 뱀에게서 발견합니다.
100p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100p 대극이라는 것은 죄악에서 비롯되지요. 다른 말로 하면, 죄악으로 인하여 인류는 낙원의 동산이라는 신화적인 꿈의 시간대에서 쫓겨납니다. 초시간대인 이 시간대는 시간이 없는 곳, 남성과 여성은 그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도 실제로는 같습니다. 하느님은 석양의 서늘한 바람을 쏘이려고 이 남성과 여성이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남성과 여성이 사과를 먹습니다. 이 사과가 바로 대극에 관한 인식입니다. 이 사과를 먹음으로써 둘은 대극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차이는 왜 일까? 초시간대적인 개념에서는 이 둘은 차이가 없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인류가 낙원의 동산에서 쫓겨 났듯이 이 미생물들로 분리되어 생존해가고 있다. 미생물들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살아간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대극을 초월하여 동일시하는 개념을 가지게 된다. 결국 그들의 삶과 우리는 하나라는 진실을 알기 때문이다.
102p ‘너’와 ‘나’, 이것과 저것, 진실과 허위……. 이 세상 만물은 대극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시인 블레이크는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고 했지요.
극대와 극미의 세계도 대극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대극은 현미경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존재하고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한다. 신화라는 책을 보면서 인식하는 상상의 세계와 현미경을 통해서 보는 현실의 세계는 이어져 있다. 그것을 우리는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주변의 꽃들에게도 피고 지는 운명이 있듯이 미생물에게도 운명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느끼는 우주의 세계가 있듯이 미생물도 그들만의 우주가 있고 그 힘을 느끼고 있다.
104p 우리 시공의 장에 있는 만물은 ‘이원적’입니다. 신의 화신은 남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여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우리 자신이 바로 신의 화신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실제적으로 형이상학적 이원성의 두 측면 중 한 측면으로만 태어난 것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밀교(密敎)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즉 밀교에 따르면, 한 개인이 일련의 입문 의례를 통하여 자기의 깊은 곳을 하나 하나씩 드러내다 보면, 이윽고 자기는 영생불사하는 존재인 동시에 필멸의 팔자를 타고난 인간이며,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105p 에덴 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 나위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랍니다. 바로 이 원초적인 중심에서 인간의 의식은 서로 다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내면에서 착함과 나쁨이 공존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극도 태어나서 의식을 가지기 전에는 하나의 메타포를 가지고 있다가 두려움이 들어오면서 둘로 나뉘어 졌을 겁니다.
105p 경험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으로 태어나기 직전에 자궁의 율동이 시작되는데 이때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낀답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 공포인 셈입니다. 이어서 태어나기 위한 무시무시한 단계. 산도(産道)라는 아주 험한 길을 지나면, 드디어 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지요. 상상할 수 있겠어요?
106p ‘자기’가, “내가 있다”고 진술한 직후에 공포를 느낀다는 신화가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으니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일단 ‘나’만으로 외로움을 느끼면 ‘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이 ‘자기’는 둘로 나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상이 비롯됨이요. 한 쌍의 대극이 비롯됨입니다.
107p 원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바탕 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융 박사는 이런 관념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지요. ‘원형’이라는 술어가 ‘근본적인 관념’이라는 술어보다 나은 것 같군요. 후자는 어쩐지 머리를 굴려서 만들어낸 관념 같아서 말이지요.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한 까닭은 이 원형이라는 것이 하의식에서 위로 솟아오르기 때문일 겁니다.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과 프로이트의 콤풀렉스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109p 내 생각으로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시인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의 영혼이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고요.
변신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간과 자연의 탄생을 상상해본다. 그런 상상 속에서 현재 우리의 모습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연에게 비춰진 인간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간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은 어떤 것인지 상상해 본다.
113p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113p 내가 ‘시’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는 행위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접하면 우리 자신이 우주적인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114p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는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것입니다. 산크리트어로 된 시 중에 자주 인용되는 시가 있는데, 이게 중국의 <도덕경>에도 나옵니다. 이렇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114p 모든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가령 우리의 신화는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종교에는 윤리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와 화해, 정당함과 부당함을 정해놓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 쪽으로 사람들을 모는 경향이 있습니다.
115p 아시다시피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116p 은유라는 것은 드러내기는 드러내면서도 사실 본뜻은 다른 데 있는 표현법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너는 도토리이다”라고 할 경우, 그 사람은 상대방에게 정말 글자 그대로 도토리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도토리’는 ‘얼간이’의 은유인 것이지요. 종교 전통에 등장하는 은유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문자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거지요. 만일에 은유를 은유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를 가리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점에 가서 메뉴를 달라고 한 뒤, 그 메뉴에 비프스테이크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페이지를 씹어먹는 것이나 같지요.
116p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은 은유적 코노테이션(내포된 의미)의 문맥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미지는 외향적입니다만 그 본뜻은 내향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내면을 향함으로써 그의 승천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알파요 오메가인 우리의 바탕자리로의 되돌아옴, 육신의 껍질을 버리고 육신 자체의 역동적인 바탕자리로 되돌아옴을 뜻하는 은유인 것입니다.
117p 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17p 현실의 개념을 넘어서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라는 범주도 초월합니다. 신화가 바로 우리를 늘 이 지점에다 데려다 놓고는 합니다. 신화는 우리에게 그것의 신비(그 신비는 바로 우리 자체입니다만)에 이르는 사다리를 마련해줍니다.
117p 셰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것이지요.
117p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게, 외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118p ‘부처’라는 말은 ‘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 깨어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혹은 부처의 의식에 다가서야 합니다.
118p 사람들이 나에게, “재림을 믿나요?”하고 물으면, 나는 “천구이나 마찬가지로 재림도 메타포(은유)입니다.”라고 대답하고는 합니다. 재림과 대응하는 기독교의 메타포는 ‘정죄(淨罪)’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벗지 못한 채로 죽어 지복직관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즉 약점이 말끔히 씻기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약점이라는 것이 곧 죄악입니다. 죄악은 의식을 한정시키고, 의식으로 하여금 온당하지 못한 조건에 얽매이게 하는 약점인 것입니다.
119p 동양의 메타포에 따르면 그런 상태로 죽게 되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 또 한 차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몇 차례가 되든, 깨끗하고 깨끗하고 또 깨끗해질 때까지, 약점이 되는 이 모든 것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환생의 모나드(물적,심적요소)는 동양 신화의 주인공인 셈이지요. 모나드는 환생할 때마다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러니까 환생할 때마다 다른 인격으로 나타나지요. 따라서 우리가 환생할 경우, 지금 이 모습으로 환생할 것이라는 생각은 틀린 것이지요.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은 모나드가 벗어버리는 옷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나드는, 그것의 당사자가 이 시간의 장에서 지은 없을 깨끗이 씻을 때까지, 남자가 되든 여자가 되든 다른 육신의 옷을 입게 되는 것이지요.
119p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깊이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20p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120p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122p 근본적인 관념을 나타내는 신화도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르가(marga)’라고 하는데, 이것은 ‘길(path)’이라는 뜻입니다. 이 ‘길’은 곧,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데, 이 길은 신화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되돌립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신화가 무엇인지 가르치는데, 이 ‘마르가’는 개인을 신화에서 떼어내고, 명상을 통해서 곧바로 ‘길’을 좇게 합니다. 문명은 신화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132p 자, 우리 모두 어떤 의미에서 금생(今生)을 사는 인드라일 겁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빠질지, 속세에 남아 있을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면서 사는 일은 모두 다 금생에 우리가 해야 할 입니다.
136p 우리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일 중 하나는, 속으로는 구역질이 나는 타인, 혹인 타인의 행동, 혹인 타인의 조건에 대해서도 ‘옳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139p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을 누리면서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직관에서 끊임없는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경험에는 인생의 그런 기능이 있어요.
#3. 태초의 이야기꾼들
142p 죽음은 최종적인 해방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두 가지를 두루 섬깁니다. 즉 젊은이를 이 세상의 삶과 만나게 할 때도 신화가 끼여 들고, 이 삶에서 해방될 때도 신화가 개입합니다. 말하자면, 종족적 관념은 인류의 근본적인 관념의 껍질을 벗기는데, 이 근본적인 관념이 바로 우리를 내적인 삶으로 안내해준답니다.
146p 삶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사냥꾼입니다. 사냥꾼은 맹수와 마찬가지입니다. 신화를 보면 사냥하는 맹수와 사냥감이 되는 짐승이 어울려 의미심장한 역할을 연출해냅니다. 이 양자는 삶의 두 측면을 암시하지요. 즉 공격적이고 죽이고 정복하고 창조하는 삶의 측면과 대상, 혹은 객체가 되는 삶의 측면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자연현상을 주관하는 신들 또한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인간의 마음과 닮았다. 시기와 질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과 연민등 인간들이 가지는 모든 감정들이 신들의 마음속에 담겨 있다.
147p 죽임이라는 것은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의례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 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 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니까 사냥은 의례인 것이지요.
157p 암벽화를 볼 때마다 예술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하고는 하지요. 어느 단계까지가 우리가 ‘미학’이라고 부르는 예술가의 의도이고, 어느 단계까지가 아름다움을 간직한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지, 어느 단계까지가 그들이 습득한 바를 드러내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겁니다.
158p 거미가 아름다운 거미줄을 만들 때, 그 아름다움은 거미의 심성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거미줄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거미가 지닌 본능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삶이 지닌 아름다움 중에 어느 정도가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일까……. 어느 정도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일까…….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지요.
163p 원시 입문 의례에서 아이는 소년 시절에서 격리됩니다. 바로 이렇게 격리된 상태에서 아이는 할례를 당하든지, 몸의 한 부분에 상처를 입는데, 이러한 시련은 곧 아이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이 치러지면 입문자의 몸은 어른의 몸이 됩니다. 이런 의례를 치른 이상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4. 희생과 천복
189p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189p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을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190p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는 것을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 다니면 안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193p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순전히 히브리적인 관념입니까?
다른 데서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왜 유일신입니까?
이해가 안 가는 일이지요.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네 지역 사회 신을 중시한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이런 사회의 구성원은 자기네를 보호해주는 사회에만 헌신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언제나 부계적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항상 모계적입니다.
198p 한 문화권의 이야기가 다른 문화권에서 그대로 발견되는 데에는 여전히 놀라고는 합니다. 같은 이야기의 복사판이 퍼져 있으니 놀라울 수 밖에요? 차이가 있다면 옥수수와 야자의 차이 정도라니까요.
201p “땅에 쓰러진 고목과 떨어진 잎에서 새싹이 나온다. 이것은, 죽음에서 생명이 솟고 죽음으로부터 새 삶이 비롯됨을 깨닫게 한다. 어설프게 결론을 내려보자면, 생명이 늘어나려면 죽음이 늘어나야 한다. 이 지구의 적도대 문화의 특징은 희생 제물(식물,동물,혹은 인간)을 바치기에 광분해 있다는 데 있다.”
204p 초월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모든 깨달음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육(肉)으로는 죽고 영(靈)으로는 다시 나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의식과 동일시합니다. 이런 삶에서 육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아요. 수레로는 죽고, 의식과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은 동일시해야 합니다.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 그것이 곧 신입니다. 농경 문화권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표면적인 이원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동일성 관념입니다.
205p 이 모든 드러남의 이면에는 빛으로 만물을 비추는 하나의 광원이 있어요. 예술의 기능은 창조작업을 통해 이 광원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잘 짜여진 예술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아, 하고 감탄하고는 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까닭은 이 작품이 우리 삶이 질서를 드러내고, 종교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때문이겠지요.
211p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런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줍니다.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11p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212p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자비가 있기 때문에 계속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불사를 획득한 존재이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의 슬픔에 참가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자진해서 이 세상에 참가한다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213p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떤 시간대에 처하게 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시간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위가 곧 자살인 겁니다. 하지만 융 박사는 말마따나 상징적인 상황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고를 통해서 나는 육체적인 죽음에 대한 경험보다는 영적인 죽음을 보았다. 나는 그저 그렇게 태어난 삶이 아니다. 세상에 있는 동안 내가 분명,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을 찾고 노력하는 삶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살아있는 이유를 찾고 그 해답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삶이 나의 삶이다.
216p 우리 어머니는 우리를 낳으신 분이자, 그 살로 우리를 먹이신 분입니다. 우리 어머니의 몸이 곧 우리의 양식인 것이지요.
217p 종교 집단의 구성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217p 단테의 <신곡>이 다루고 있는 문제도 결국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때’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 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이 숲에서, 각각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 세 마리를 만납니다. 그런데, 시적 통찰력의 화신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지옥의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지옥의 미궁은 자만과 욕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영원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의 지복직관을 경험하지요.
성경에서도 예수님의 말씀들은 수 많은 비유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비유를 통해 이해하기 힘든 삶의 고난과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을 빠져나갈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219p 레오폴드 블룸이 더블린 거리를 이리저리 다니는데, 탑에서
222p “저 좋은 것만 하고 인생을 살 수 없는 법이야. 저 좋은 것만 하고 세상을 살려고 했다가는 굶어죽어, 나를 봐! 나는 하고 싶은 일은 평생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어”
나는 그 친구의 말을 듣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세상에, 여기에 바비트의 화신이 있었군”하고 중얼거렸지요.
그러니깐 그 사람은 자기 천복을 한 번도 좇아보지 못하고 산 셈입니다.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222p 중세의 필사본에, 여러 문맥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가 바로 행운의 바퀴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성혼 서약에도 성할 때나 아플 때나, 넉넉할 때나 가난할 때나, 올라갈 때난 내려올 때나…(중략)… 나는 그대를 중심으로 맞아들이고 그대를 천복으로 좇는다. 그대가 나에게 줄 재물도 아니요. 그대가 나에게 줄 사회적 지위도 아닌 오직 그대만 좇으리다……. 뭐 이런 대목이 있지요. 이게 바로 천복을 좇는 것입니다.
223p 부모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천복을 찾게 해줄 수 있습니까?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아이에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도와줄 수 있지요.
226p 뉴욕의 우드스톡에 아주 멋진 노인이 있었어요. 이 양반에게는 방이 아주 많은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는 이 방을, 예술을 공부하는 가난뱅이 학생들에게 1년에 20달러 정도의 임대료로 빌려주었어요. 그런데 이 집에는 수도가 없었어요. 물은 우물물을 길어다 쓰거나 펌프로 자아올려 써야 했어요. 그런데 수도를 놓지 않는 이유가 걸작입니다. 수도를 설비해놓으면, 이 집이 수도가 있는 집에 살던 학생들의 관심을 끈다는 거예요. 나는 이 집에서 기본 독서와 공부는 거의 다 했어요. 정말 멋진 시절이었죠. 나는 내 천복을 좇고 있었던 겁니다.
226p 지금 말하는 이 천복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배운 겁니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어요. 즉 사트(Sat), 취트(Chit), 아난다(Ananda)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226p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227p 천복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것이군요.
227p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p 생명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목을 쥐어뜯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지요.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5. 영웅의 모험
229p 사람의 행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작가는 정신적 행적을 남기기 위해 자신의 삶의 범위를 넘어서 새로운 체험을 하고 글로 표현합니다.
231p 출산은 영웅적인 행적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니까요.
233p <코란>은 “앞서 간 사람들이 치른 것과 같은 시련을 치르지 않고 지복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33p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233p 여기에서 핵심은,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참선하여 진리를 탐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234p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스승님이 왜 이 책을 권하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의식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살면서 미숙한 의식은 시련, 시험, 난관을 거쳐서 다듬어져 갑니다. 신화의 이야기를 보더라도 시련을 받고 이겨낸 뒤에는 새로운 의식을 가진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고 다른 인생이 펼쳐지면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갑니다. 기나긴 여행이 될 수 있지만 이전에 느끼지 못한 설레임과 가슴 뜀이 있습니다. 그 중심에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237p 나의 첫 책<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바로 이 문제의 제시를 시도한 것이지요. 세계의 서로 다른 모든 신화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동일한 탐색을 다루고 있어요. 자신이 속하던 세계를 떠나, 더 깊은 세계, 혹은 먼 세계, 혹은 더 높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영웅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의식하지 못하던 것, 혹은 의식에서 빠져 있던 것과 만납니다. 이렇게 되면 영웅에게는 문제가 생깁니다. 즉 그것을 만난 상태로 그곳에 머물 것인지, 세계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그 홍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원래 있던 세계로 귀환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그 갈림길에 서 있는 것 같다. 나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냥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어보자. 이전에 내가 느끼지 못했던 것이 펑펑 쏟아진다. 시작하자.
237p 그러니까 영웅은 무엇인가를 ‘찾으러’ 가는 것이군요. 그저 떠나보는 여행도, 한번 해보는 모험도 아닌 것이군요?
238p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243p 사람들은 다이달로스 이야기보다는 이카로스 이야기를 더 많이 합니다. 문제는 이카로스가 아니라 이 우주인을 바다에 추락시킨 날개 속에 들어 있는 태도 압니까? 그러나 산업이나 과학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엾은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지만, 바다와 태양의 중간을 날았던 다이달로스는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 해변에 착륙하지 않았습니까?
248p “헛되도다,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런 끔찍한 말이 있지요? 하지만 이 말에서도 모든 것이 헛된 것만은 아니랍니다. 이런 말이 나오는 순간은 헛된 순간이 아니라 승리의 순간, 열락의 순간인 것이지요. 승리의 순간에 맞게 되는 이 완전성이 정점에 가해지는 악센트, 대단히 그리스적이지 않습니까?
249p 왜 첫 저서의 제목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고 하셨습니까?
이 세계 모든 문화권, 많은 시대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영웅의 행동에서 하나의 전형적인 체계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심지어 원형적인 영웅상은 하나밖에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랍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의 원형적인 영웅상이 많고 많은 사람에 의해 모든 지역에서 배껴졌다는 것이지요. 이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땅에서 새로운 것을 싹 틔울 잠재력이 있는 씨앗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254p 우리의 본 모습은 우리 내면에 있는데, 이 내면에 대한 탐색이 바로 내가 40여 년 전에 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 담으려고 했던 주제랍니다. 신화가 지니는 우주론 및 사회학과의 관계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에요. 이 관계는 여전히, 우리가 속한 이 새 세계에 적용될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255p 예수이야기에는 보편적으로 건실한, 영웅의 행적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어요. 먼저 그는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시대 정신의 극단으로 갑니다. 다음에는 현세의 문턱을 넘어 광야로 나가 40일을 견딥니다. 유태 전승에 따른 ‘40’은 신화적으로 대단히 의미심장한 숫자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맸지요? 예수도 광야에서 40일을 견뎠어요.
256p 첫 번째 시험에서 ‘욕망’의 신은 석가에서 자기의 아주 예쁜 딸 셋을 보여줍니다. 이 세 딸의 이름은 ‘욕망’ ‘성취’ ‘후회’,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지요. 그러나 감각적인 존재에 대해 집착에서 이미 벗어난 그는 요지부동이지요.
그러자 ‘욕망’의 신은 그 자리에서 ‘죽음’의 신으로 둔갑, 마군이 쓴 무기를 휘두릅니다. 그러나 석가는 자기내부에서 부동(不動)하는 한 점을 찾아낸 사람입니다. 이 점이 바로 시간이 다치게 하지 못하는 영원입니다. 이번에도 석가는 요지부동입니다. 그러자 석가를 향하여 던져진 무기는 꽃송이로 변합니다.
258p 내게는 일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거예요.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욕망이 없다면 죽는 거야 언제 죽어도 좋아요. 그리스도와 석가는 죽음 너머에 있는 구원을 찾아서는 광야에서 돌아와 제자들을 뽑고 가르칩니다. 이들의 메시지는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에 전해집니다.
259p 신화는 시예요. 시적 언어는 대단히 유동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종교는 시를 산문으로 바꾸지요. 하느님은 글자 그대로 저기에 있다. 이거야말로 글자 그대로 하느님 말씀이다. 저 위에 계신 하느님께 가까워지려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이런 식이지요.
260p 플라톤은 어느 책에선가, 영혼은 원 같다고 했어요. 나는 이 플라톤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칠판에다 원을 하나 그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원에다 가로 선을 하나 긋지요. 그러면 이 선의 위는 의식, 아래는 무의식이 됩니다. 다음에는,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나오는 곳을 표시합니다. 즉 가로 선 밑에는 점을 찍는데, 이 점은 조금 전에 그린 원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261p 아기에게는, 그 조그만 몸에서 나오지 않는 의도라고는 없어요. 말하자면 아기의 몸은 제 모든 의도를 뿜어내죠. 그래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기의 삶은 생명의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런데 아기가 자라감에 따라 마음이 모양을 갖추어나갑니다. 즉 내가 원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이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마음이 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원 속의 가로 선 위에는 자아가 있어요. 나는 이 자아를 조그만 사각형으로 표시하지요. 이 자아는, 우리가 중심과 동일시하는 의식의 한 측면이에요. 하지만 보세요 자아가 우리의 중심은 아니잖아요? 자아를 나타내는 사각형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나타내는 점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지 않아요? 우리는 자아가,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쇼를 연출하는 줄(주도권을 행사하는 줄)알지만, 아니에요.
261p 그럼 무엇이 이 쇼를 연출합니까?
무엇이 쇼를 연출하는가 하는 것은, 가로 선 아래에서, 즉 무의식에서 무엇이 솟아오르느냐에 달려 있어요. 한 인간이, “쇼를 연출하는 게 나 자신이 아니구나”, 이런 걸 깨닫는 시기가 바로 사춘기예요. 전혀 새로운 요구 체제가 우리의 의식 아래에서 자기 존재를 알리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나 사춘기 청소년에게는 여기에 아무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장악할 수 없어요. 그래서 소년들은 “나를 이렇게 충동질하는 이게 대체 무엇일까”, 소녀들은 “나를 이렇게 충동질하는 이 신비로운 것은 대체 무엇일까” 하고 의아해할 뿐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전혀 모르지요.
262p 사람들은, “너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말의 뜻을 어떻게 푸시는지요?
우리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막연할 때는 이웃의 충고나 영향력이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요. 나는,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사회 상황에서 자라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그만큼 모르는 상태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262p 늘,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입니까?
지금 우리가 그래요 지금 우리가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살고 있어요. 군대 생활을 하고 있는 거죠. 바로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늘 명령과 지시를 받으면서 살지요. 아이들이 달력을 보면서 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휴일이 되어야 저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63p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263p 좋은 코치는 선수에게, 팔은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 다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는 등의 구체적인 지시는 하지 않아요. 좋은 코치는 선수가 달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선수의 천성적인 동작 양식만 조금 수정해줍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263p “나는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명령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예술가들도 제자를 이런 식으로 가르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게 좋은 스승이 되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따끔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들려줄 스승이 없으면 스스로 창안한 방법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자기에게 어울리는 바퀴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263p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이 두 사람은 기초적인 신화 테마를, 현대 젊은이들의 경험하는 개인적인 문제, 어려움, 깨달음, 관심의 해석에다 응용하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문제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소설가의 작품에서 신화 모티프를 선택해서 길잡이로 삼는 것도 좋겠지요.
265p <스타워즈>를 보면 마지막의 싸움이 벌어지는 절정에서 스카이워커의 귀에, “컴퓨터를 끄고, 기계를 끄고 너의 느낌에 따라 너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는 벤 케노비의 음성이 들리지요? 스카이워커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결국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면 관중은 박수를 치면서 환호하지요.
266p 벤 케노피는, “포스란, 살아있는 만물이 지어내는 에너지 장(場)을 말한다. 포스는 우리를 감싸고 있고, 포스는 우리를 관류한다. 이 우주를 하나로 묶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포스이다”
270p 우리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지요. 사고를 하기는 하되 가게를 운영하는 것처럼 사고를 해요. 하지만 의식은 우리 인간 존재의 부수적인 기관일 뿐이에요.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270p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1p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동양의 영적인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자신 있게 “네 안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라”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272p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는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272p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 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273p 여행을 떠나고, 우리 심층으로 내려가고, 용을 죽이는 이 일……. 반드시 혼자 해야 합니까?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라도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부서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274p 서구이야기에 나오는 용은 뭐든지 모아 자기 안에 가두려고 합니다. 자기가 지키고 있는 것이 어디에 소용이 될는지도 모르고 그저 지키기만 하는 거지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지요? 우리는 이런 사람을 자린고비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서는 나오는 삶이 없어요. 주는 삶이 없어요. 그저 남에게 빌붙어 돌면서도 죽자고 자기 삶의 방식에만 매달립니다.
275p 그 실이라는 게 찾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선생님 소리 듣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이 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
276p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277p 우리는 학생들에게 그들 나름대로 구상하게 하고 그렇게 구상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인도해주지요. 그러니까 학생은 자기 나름의 자기 길을 찾아야 하지요. 그러니까 그 길은,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을 향한 잠재력, 다른 사람은 체험해보지 못한 것, 다른 사람에 의해서는 체험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277p “그대는 그대의 운명에 깨어 있는가”라고 물은 햄릿의 문제가 여기에 있군요?
햄릿의 문제는 자기의 운명에 깨어 있지 못했다는 거지요. 햄릿은 운명을, 너무 커서 도저히 다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운명이 햄릿을 다스려버렸던 거지요. 이런 일을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어요.
278p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서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279p 커스터 장군의 부하들이 쏘는 총탄의 소나기 속을 뚫고 들어가던 용감한 인디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겁니다. 이게 그들의 구호였지요.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만,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283p 낙타, 즉 아이는 ‘그대의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 사자, 즉 청년은 이것을 벗어 던지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이 완전히 제압되면, 다시 말해서 ‘그대의 미래’가 완전히 극복되면 사자는 다시 그 사나운 본성을 버리고 아이로 변모합니다. 흡사 굴대를 떠난 바퀴처럼 말이지요. 이제 이 아이에게는 복종해야 할 법이 없습니다. 역사적인 필요에서 제정된 법률도 없고, 지역 사회를 위해 제정된 법률도 없습니다. 들꽃처럼 그저 충동에 따라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285p 예술 학교 학생들에게는, 스승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이 순간이 있어요. 바로 이 순간이 스승이 가르치고자 하는 기법을 모두 자기 것으로 동화시킨 순간, 날 준비가 된 순간이지요. 상당수의 예술가는 제자에게 이런 식의 홀로 날기를 허락합니다. 많은 예술가가 실제로 그 홀로 날기를 보려고 제자를 가르치고요.
286p 사람들 중에는 대기만성형이 있어서 아주 늦게야 빛을 보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286p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287p 구혼을 거절하는 순간에,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에 모험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이로써 주인공은 자기가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땅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바야흐로 소설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293p 달라이 라마와 그 교파의 구성원들은 무서운 격동기, 무서운 폭력의 희생자들인데도, 증오의 감정이 없어요. 나는 그들에게서 종교가 무엇인가를 배웠어요. 오늘날에 살아 있는 참 종교가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군요.
바로 우리 운명을 빚는 도구이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지요.
296p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296p 이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獸性,짐승의 성질)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자비)’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297p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삼켜버리는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賞)또한 그만큼 큽니다.
298p “천만에,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것이 당신의 내부 어디쯤인지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아내면 당신은 이것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당신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다.”
298p 부처는 “인생은 고해라고 했고, 조이스는 “인생이라는 게 우리가 이 세상에 흔적을 남겨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299p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연지사가 아닌 게 어디 있어요? 이것은 우연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 있으냐 여부와 관련되는 문젭니다.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가령 우리 부모가 서로 눈이 맞는 것부터가 우연이지요! 우연, 혹은 인연이라고 합시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걸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어디에선가 전쟁이 터지면 젊은이들을 징집을 당하겠지요. 그러면 바로 이 우연지사와 함께 5~6년은 좋이 썩어야 하겠지요. 이런 경우에 내가 충고해주고 싶은 것은, 징집당했다고 여기지 말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여기라’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의지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지금 내가 여기 구본형 변경연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도 우연으로 다가온 인연입니다. 이 인연은 끈을 계속해서 나를 어디론가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끌림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얻고 있습니다. ‘신화의 힘’을 읽으면서 조금씩 확신이 들고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선택을 했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300p 우리 안에 정점이 있다는 건 거의 확인이 된 셈입니다. 우리는 이 정점을 찾아내어 우리 의지로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내가 걸어가는 길에도 중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 옆으로 먼산 바라 보며 걸을 때 보다는 중심으로 걸어갈 때가 훨씬 안정감이 있고, 집중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정점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고 의지이다. 내 자신에 대한 무한신뢰이다.
301p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예수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블레이크는, “지각의 문전이 깨끗하면 만물이 그 자체로 영원하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고 씁니다.
302p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면 열 수 있지요. 가까운 친구, 혹은 훌륭한 스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요. 이런 깨달음을 촉발하는 자극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도 있고, 교통사고 같은 것으로 당하는 충격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역시 깨달음의 문제를 다룬 책에서 나온다고 해야겠지요. 내 경우, 대부분은 책에서 나옵디다. 정말 많은 선생님을 만나는 은혜도 누리기는 했지만요.
나의 경우는 세 번의 교통사고, 욕망의 영혼들과 싸우던 폐수처리장, 이 곳은 나의 영혼이 무의식에서 깨어나고, 공포와 두려움을 떨쳐 일어날 수 있게 해준 곳이다. 그리고 수 많은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다. 나의 신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303p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 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의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6. 조화여신의 은혜
307p 어머니는 ‘여기’에 있으니까요.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돌보고, 아버지를 찾으러 떠날 나이가 될 때까지 아들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선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319p 그 다음 네 번째의 중심은 가슴 가까이 있어요. 이 중심은 자비로운 마음 쪽으로 열려 있지요. 바로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동물적인 행동의 장에서 나와 인간적이고 영적인 장으로 들어갑니다.
320p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거기’에 매달려, 모든 것은 ‘거기’에만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면 ‘거기’에서 그가 받은 고통을 떠올리고는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예요.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 보았던가요? 우리가 언제 동물의 근성을 죽이고 자비로운 인간으로 화신해본 적이 있던가요?
그게 처녀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를 한 거예요.
말씀이 빛 줄기로 들어갔다는 것이군요.
그렇지요. 석가도 같은 의미에서, 어머니의 가슴 차크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322p 예수는 선생님이나 저처럼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만,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로마 카톨릭 교리에 따르면 마리아의 처녀성은 복원되었어요. 그러니까 마리아에게는 육체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겠어요? 예수는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지 육체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예요. 그러니까 영웅이나 반신은 자비로움이 육화된 존재로 태어나지, 성적인 욕망의 소산, 혹은 종의 보존을 위한 소산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두 번째 탄생이에요.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가슴 아래쪽에 있는 세 차크라는 바로 우리가 초극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초극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 가슴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333p <신약성서>에는, “예수님 안에서는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다”는 참으로 멋진 말이 있습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다는 뜻이겠지요.
당연하지요. 만일에 예수가 우리 존재의 근원이라면 우리 모두가 곧 예수의 생각이자 마음인 것이지요. 실제로 그는 육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선생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겉은
337p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343p 아모르적 사랑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랑입니다. 이 아모르적 사랑은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듯 눈과 눈이 만나는 데서 싹트지요. 말하자면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경험인 겁니다.
선생님 책에서 눈과 눈이 만나는 사랑에 관한 음유시인들의 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사랑은 눈과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이렇게 시작되지요, 아마?
343p 바로 그 용기 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남들에게서 이어받은 체험이 아닌 자기만의 체험, 그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중요시할 수 밖에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획일적인 체계는 기계적인 체계입니다. 기계라고 하는 것은, 같은 공장에서 나온 다른 기계와 똑 같은 기능밖에는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개인주의가 대두되면서 그것이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346p 마음과 마음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주관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영적인 화합을 깨닫고 들어가는 것 아닌가요? 중세 궁전의 사랑 놀음이라는 것만해도 대단히 영적인 겁니다. 그런데도 교회의 사고방식과는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아모르, 즉 AMOR라는 단어는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격상 아모르적 이기는 커녕 정치적, 사회적인 결혼도 교회적인 사고방식으로 합리화했어요. 그래서 개인적인 선택을 중요시하는, 내 식으로 말하면, 자기 천복을 좇는 움직임이 생겼던 겁니다.
346p 물론 개인적인 사랑이라고 해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깁니다만, 이 두 사람이 사랑의 묘약을 마신 뒤에야 유모는 그 사실을 알고는 트리스탄에게 달려가, “그대는 죽음을 마셨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트리스탄은 이졸데의 유모에게 이렇게 대답하지요.
“죽음이라니……. 이 사랑의 고통 말이오?”
여기에서 그의 이 말이 중요합니다. 결국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지요. 트리스탄은 이졸데에게서 진정으로 사랑을 느끼지만 이승에서 그것을 성취할 길은 없어요. 그래서 트리스탄은 이렇게 말하지요.
347p “죽음이라니……. 이 사랑의 고통이 죽음이라면 그것도 팔자소관이지요. 죽음이라니……. 이 사랑이 발각되었을 때 내가 받을 벌이 죽음이라면 나는 달게 받겠고. 그대가 말하는 죽음이 화염지옥에서 받게 될 영원한 벌이라고 해서 이 역시 나는 받겠소.” 어마어마한 뱃심 아닙니까?
347p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347p 단테는, 지옥에서 벌을 받는 상태는 결국 지상에서 우리가 이루려 하던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라고 했지요.
트리스탄은 사랑과 천복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천복을 위해서라면 고통을 받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지옥의 상태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가 이루려 했던 어떤 상태이겠지요.
349p 바그너는 자기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런 말을 하지요?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그래요. 바그너는 트리스탄에게 그런 말을 하게 하지요.
“나의 사랑이 있어야겠다. 나의 인생이 있어야겠다”, 이런 뜻이겠지요.
그렇지요. “이거야말로 내 인생이다. 내 인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달게 견딜 수 있다”, 이런 거지요.
그러자면 용기가 필요했겠지요?
‘하지요.’ 용기 없으면 생각도 못한답니다.
350p “그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사랑의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들은 도그마도, 정치도,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선의 당대적 개념도 좇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으로부터만 지혜를 구하려 했다.”
350p 그럼요. 그게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58p 토마스 만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이 만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365p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365p ‘내’가 아내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아내라고 하는 여성에게 헌신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 아내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헌신하는 거죠.
#8. 영원의 가면
380p 이렇게 하나 된 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도 없고 ‘나’도 없어요. 모든 개념을 완전히 초극해버린 ‘나’의 마음은 사라져 존재의 바탕과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신의 은유적인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이 곧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라고 하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는 세계라는 존재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
381p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오랜 명상을 경험하고 나오면 하는 말이지요. 자기의 모든 것을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에서 주어버립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이지요.
396p “아버지의 왕국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으나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니라.” 그래서 나는 이렇게 모이어스 씨를 보면서, 모이어스 씨를 통해서 신의 임재을 상징하는 광휘(눈부시게 훌륭함)를 본답니다.
386p 예수는 ‘내 입으로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고 나 또한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했지요? 이때 예수는 그 자리에 있는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가 실재한다는 관점에서 말한 겁니다. 그 다른 존재는 그리스도일 수도 있고, 우리 모두의 존재일 수도 있어요. 누구든 그 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살면 그리스도 같을 수 있다는 겁니다. 누구든 말씀의 메시지를 삶 속으로 동화시킬 수 있으면 곧 그리스도와 동등해질 수 있다. 이게 바로 이 구절의 의미인 겁니다.
386p 이 대화에서 모이어스 씨가 드러내고 있는 것.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영적인 원리의 깨달음입니다. 그러니까 모이어스 씨가 곧 그 깨달음의 수레인 것이지요. 모이어스 씨가 곧 정신의 광휘인 것입니다.
지금 내가 ‘신화의 힘’을 읽고 모든 구절을 뼈 속 깊이 새겨 읽는 과정 또한 깨달음입니다. 진리를 드러내고 가슴으로 느끼는 작업이 저의 천복입니다.
387p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387p ‘종교(religion)’라는 말은 ‘렐리기오(religio)’, 즉 ‘뒤로 연결됨’을 뜻합니다.
392p 융 박사는 원을 ‘만달라’라고 부르고 있지요? ‘만달라(mandala)’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가 곧 ‘원’입니다. 그러나 만달라의 원은 그냥 원이 아니고 다른 원과 상호 관계하거나 상징적인 문양을 이룸으로써 하나의 우주 질서를 상징합니다.
394p 우리 삶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을 생각해보세요.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394p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394p 우리 자신에 대한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한 점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나가는 병사의 마음이 바로 이 한 점의 상태와 같지요.
395p 중요한 것은 이 근원이 베푸는, 생명을 부여하는 기능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존재입니다. 이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삶이 샘솟는 한 점인데, 모든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396p 우리는 신화 이미지를 메타포라고 부르지. 사실이라고 부르지는 않거든요. 신화 이미지는 우리의 내적 체험과 삶을 위한 메시지가 됩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면 신화체계는 문득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이 되는 것이지요.
396p 광대 및 광대의 종교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요. 게르만신화와 켈트 신화에는 광대 이미지가 굉장히 많아요. 일종의 그로테스크한 신들인 거지요. 광대 이미지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봐라, 나는 궁극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나는 투명해서 속이 들여다보인다. 나를 통해서 보라.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형상을 통해서 보라!”, 이겁니다.
현미경으로 보는 미생물의 세계가 그렇다. 렌즈는 불빛을 하나로 모으고 유리판 위의 미생물들을 투명하게 비쳐준다. 그들의 흉측하고 우스꽝스러운 형상을 보고 있으면 그 이면의 숨어 있는 다른 존재를 느낀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나의 생각을 뒤집는다. 그렇게 나는 보이지 않은 세계에서 신의 존재를 느끼고 내 삶의 다른 모습을 투영해 본다. 원시적인 그들의 움직임은 하나의 춤이다. 나의 무의식 속에 무언가 꿈틀대면서 올라온다. 그들의 몸을 잡고 함께 춤을 춘다. 신과 나는 하나다.
398p 나와 나의 존재가 완벽하게 만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어요. 내 평생 그날의 두 경기만큼 내가 완벽하게 해낸 것은 없습니다. 온 몸으로 온전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경주를 끝낸 그 경험을 나는 잊을 수가 없어요.
399p 제임스 조이스의 에피파니(어떤 사물이나 본질에 대한 직관, 통찰)는 어떻습니까?
미학적 체험에 대한 조이스의 정의는, 그 대상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99p 미학적 체험은 그저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조이스의 말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란 액자에 넣어 두게 하고, 처음에는 그저 바라보게 하고, 다음에는 그것이 작품임을 느끼게 하고, 다음에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 다음에는 부분과 전체, 그 다음에는 전체와 각 부분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작품이 지녀야 하는 미학적 요인(관계의 조화 정연한 리듬)입니다. 예술가가 복선으로 깔아놓은 우연한 리듬에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경험합니다. 이때 우리는 미학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파니입니다. 이순간을 종교 술어로 설명하자면,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원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 되지요.
401p 우리가 괴물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에피파니를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술작품에는 다른 측면의 정서가 있어요. 즉 아름다움의 측면이 아닌 장엄함의 측면입니다. 우리가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장엄함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 장엄한가 하면 이들은 정상적인 생명의 형상은 감당할 수 없는 어머 어마한 큰 힘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대무변한 우주는 장엄합니다.
402p 내가 여기에서 괴물이라고 하는 것은, 조화와 질서와 윤리적인 행동에 대한 우리의 기준을 송두리째 무너뜨려버리는 무서운 존재, 혹은 무서운 도깨비를 말합니다. 가령 이 세상에 종말의 때가 오면 비쉬누는 괴물로 나타납니다. 이때 그는 우주를 부숴버리는 처음에는 불로 부수고 다음에는 물로 쓸어버립니다. 이 물은 불을 쓸어버리는 동시에 이 세상 만물을 쓸어버립니다. 남는 것은 재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파괴자 역할을 맡은 신의 모습입니다.
410p 이 세상을 빚은 창조의 대폭발로 인해서 생긴 이 에너지는 만물에 시간의 단편을 나누어줍니다. 그러나 시간의 단편을 통하여 원초적인 존재의 광대무변한 힘을 체험하는 것, 이게 바로 예술의 기능입니다.
아름다움은, ‘살아 있음’의 환희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순간 순간의 삶이 그런 체험의 연속이어야 합니다.
‘이 순간’이 바로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411p 우리의 체험을 언어로 드러내기는 해야겠지만 우리 언어는 그 체험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군요.
그래서 시가 있는 거지요.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含意)의 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는 정수(精髓)를 통해야 드러납니다.
412p 인도 신화의, 인드라의 그물에서도 이와 비슷한 관념을 대할 수 있어요. 인드라의 그물은 실과 보석으로 짜여진 그물입니다. 즉 실과 실이 만나는 곳마다 보석이 달려 있는데, 각 보석에는 다른 보석이 비칩니다. 이것은, 어떤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많은 사건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의 책임이 어는 한 사람에게 있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사람을 비방할 일은 아니라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우리 뒤에 어떤 의지가 있고, 그 의지가 우리를 조종하는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의지의 정체를 아직 알지 못하지요. 우리가 그 의지의 조종대로 움직이느냐 여부도 모르는 일이고요.
나는 이 구절을 읽고 비로서 나에게 일어났던 사고들, 꿈의 예시들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많은 상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 의지는 정체를 알 수는 없다. 다만 한 사람만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412p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왜? 서로 다른 목적이 얽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은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413p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제 믿음도 이쪽으로 기웁니다.
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은,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있어요.
나바호 인디언들에게는 소위 ‘화분의 길’이라고 하는 놀라운 이미지가 있어요. 그들에게 화분은 곧 생명의 근원입니다. 화분의 길은 곧 중심으로 향하는 길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내 앞도 아름답고, 내 뒤도 아름답고, 내 오른편도 아름답고, 내 왼편도 아름답고, 내 위도 아름답고, 내 아래도 아름답다. 나는 화분의 길에 들었노라”, 이렇게 노래한답니다.
413p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414p 저는, “말씀은 육으로 되어 있다”는 강력하고도 신비스러운 선언을, 우리의 인간적인 여행에서, 우리의 체험에서 찾게 될 수 있는 영원한 원리로 해석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그 말씀을 찾을 수 있어요.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없다면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시는 언외(言外)의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요. 괴테는, ‘만물은 메타포’라고 말했습니다. 무상(無常)한 것은 모두 은유적인 해석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고요.
415p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서 필멸하는 측면과 영생하는 측면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에 관한 체험에서 나는, 그 체험에서는 현세적인 관계의 체험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물론, 관계의 본질에 대한, 다분히 감정이 이입된 상태에서 했던 사고가 내 깨달음을 가능케 한 순간들이 있었지요. 나는 그런 순간들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내게는 그런 순간들이 곧 에피파니의 순간이요. 계시의 순간이요. 광명의 순간입니다.
416p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이다. 모이어스는 8년 동안 캠벨과 교우하면서 신화에 대한 캠벨의 생각과 경험을 정리하였다. 그는 서문에서 캠벨이 생각하는 신화의 주제를 ‘살아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라고 언급했다.
이렇게 신화에 대한 정의, 가르침,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식하지만, 실제 어떤 신화가 우리 삶에 적용되어 유익할 수 있는지 모호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문득, 시간의 흐름으로 구성하면 어떠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분명 8년이란 시간 동안 모이어스, 자신의 삶에 적지 않는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그 변화의 모습을 함께 담아냈다면 어떠했을까? 물론 지금의 구성에다 모이어스의 이야기까지 엮었을 때, 흐름이 분산되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대담의 내용을 다시 구성해서 시간의 흐름으로 다시 연결해 본다면 보완할 수 있는 문제다.
첫 번째, 내가 저자라면 서두에 캠벨의 첫만남을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평소 생각했던 신화에 대한 비뚤어진 관점을 생활 속 경험을 통해 소개한다. 처음부터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지만, 천천히 캠벨의 신화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질문을 던진다. 다음 만남에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고, 틀에 박혀 있던 자신의 삶에, 새로운 생각을 적용해 본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신화에서 영웅들이 갑작스런 위기를 맞이 하듯이 자신의 고난과 시련의 경험과도 연결시켜 본다.
두 번째, 이 책의 제목을 언뜻 보았을 때는 신화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많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금새 생각이 변해버린다. 인생의 지침으로 평생 동안 가슴에 새겨야 할 문구들로 압도되어 버린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읽고 난 뒤에 여운이 남아, 뒤적거렸을 때 제목을 가지고는 찾기 힘들었다. 제목 속에 여러 주제들을 연상할 수 없었다. 주제들이 대담 속에 녹아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8가지 제목 안에 소 제목을 3~4가지 둔다면 단점을 개선할 수 있다. 첫 번째 장의 제목인 ‘1. 신화와 현대 세계’를 다시 구성해보자
1. 신화와 현대 세계
(1) 우리 삶 속의 신화
(2) 결혼은 왜 하는가?
(3) 신화와 운명적인 만남,
(4) 현실 속에 신화를 찾는 방법
이렇게 4가지 소제목을 둘 수 있다. 읽을 때, 감동적인 부분들을 제목과 연상해서 기억한다면, 깨달음의 여운이 더욱 오래갈 것으로 생각한다.
가장 감동 깊었던 장면은 총탄의 소나기 속을 뚫고 들어가던 용감한 인디언들의 장면이다.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게 그들의 구호였지요.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모습은 스타워즈의 마지막 클라이막스 장면에도 영향을 주었다. 주인공인 루크 스카이워커가 컴퓨터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우주선을 조정하는 모습이다.
나는 살면서 여러 번 죽음을 마주했다. 하지만 그 죽음은 내가 선택한 상황이 아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순간’ 들었을 뿐이다. 지금도 나는 죽음이 두렵다. 아직도 나 자신을 모르고, 지금까지 굳어져 온 나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과감히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매일 내가 죽고 새롭게 내가 태어나는 ‘순간’을 사랑하게 된다. 그건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고 환희다. 앞으로 나는 매 순간 감사하며, 천복을 좇아 나의 길을 갈 것이다. 나의 느낌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운명을 조정하면서 말이다.
레이스 기간 똥쟁이님의 성실해서 현란한 파랑색을 여기서도 또 보게 되는군요.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그 파랑색에 비추어 제 불성실을 반성하는 한편 내가 놓친 것은 결국 나의 시간이었구나 싶어요.
다시 생각해도 한젤리타 (브라더^^)가 훨씬 어울리는 이름이예요.
미생물을 통해서 신화를 생각해보는 시야는 똥쟁이님 아니면 갖기 힘든 것이겠어요.
밑줄 쳤지만 타이핑 할 엄두가 안 나던 것이 모두 타이핑 되어 있고, 그걸 음미하면서 그었을
밑줄과 글자색바꿈을 보면서 배우는 게 많았습니다. 내용은 그 다음인 듯 해요.
결혼하신 분을 만났을 때의 열리는 느낌에 대한 묘사 흥미롭게 읽었어요. 다들 신기하게도 알아보시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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