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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9일 10시 48분 등록

신화의 힘 


조셉캠벨 ˙ 빌 모이어스 대담 / 이윤기 옮김 


1. 저자에 대하여 

1) 조셉 캠벨 

 미국의 유명한 신화종교학자이자 비교신화학자이다.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소년 시절 북미대륙 원주민의 신화와 아더왕 전설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콜롬비아 대학과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그는 뉴욕, 상위 중산층의 로마 카톨릭 가족 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메리칸 인디언에 관한 책을 즐겨 읽었으며, 뉴욕 맨해튼에 있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방문하였다. 캠벨은 그 박물관의 한 코너에 있는 토템 기둥에 특히 매료되었는데, 그 뒤로 1925년과 1927년에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대학교와 뮌헨 대학교에서 중세 프랑스 어와 산스크리트 어를 공부하였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에는 존 스타인벡과 생물학자 에드 리켓츠와 교류하였다. 1934년에는 캔터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사라 로렌스 대학교의 문학부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스와미 니칼라난다를 도와 우파니샤드와 「스리 라마큐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기도 했다. 

 후일 방대한 정리 작업과 연구를 통해 그는 『신의 가면 the Masks of God』(전4권)을 펴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 볼링겐 시리즈의 탁월한 편집자로도 유명하며, 『신화의 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의 가면 1~4』, 『신화와 함께 살기』, 『신화의 세계』, 『야생 수거위의 비행』, 『신화 이미지』 등의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세상을 떠났다.


2) <<신화의 힘>>에서 발견한 조셉 캠벨 

 <어린시절_천복을 만나다>

 그는 뉴욕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인디언의 토템 기둥과 가면에 매료당한다. 소년은 그런 것들을 보면서 상념에 잠긴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겨우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한다. 바로 이 공부가 그를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화끈한 스승으로 만든 것이다.(p13) 

 그는 고집이 세서 누가 무슨 말을 하건 듣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했단다. 언제 어디에서든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 자신이 몰두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었단다. 가족이 그를 배려하고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p223) 


<좋아하는 영웅>

 어릴 때 두 영웅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더글러스 패어뱅크스, 또 하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그는 이 둘을 합친 것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서는 좋아하는 영웅이 없다고 했다. (p245)


<우드스턱에서 5년>

 그는 박사 과정을 밟아 박사가 되는 것도 마다하고 책의 숲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그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양을 읽으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문화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역사, 종교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 (p12)


<교수법>

 그는, 큰 스승들이 그러하듯 예증을 통해 가르친다. 말을 통하여 믿음으로 이끄는 일은 그가 좋아하는 방법이 아니다. (아내 진에게 구혼할 때 이 방법을 쓴 것을 보면 딱 한 번은 예외를 허용한 모양이다.) 그의 가르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p14)

  1. 말로 믿음에 이르게 하지 말고 스스로 보고 경험한 것을 넌지시 보여줌으로 가르침을 준다. 
  2. 기왕 알려진 것, 기왕에 사유된 것을 알고 난 후 이 지식을 참되고 신선한 사상의 흐름으로 창조하여 가르친다. 


<작업>

 ‘중심 사상’이 ‘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는 일’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그는 세계의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신들이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까닭을,이 수많은  문화의 가지에서 서로 비슷한 이야기 - 창세, 처녀 수태, 신자 성육, 죽음과 부활, 재림 그리고 최후의 심판 이야기-가 생겨나는 까닭을 알고자 한다. 

 그는 환상과 진리의 갈등 너머 존재하는 지혜의 해각을 믿는다. 이 지혜의 해각을 찾는 일은 ‘어느 시대에서든 그 시대의 중심 과제’이다. 만년에, 그는 과학과 정신을 새롭게 통합시키는 일에 힘을 쏟았다. (p15)

그는 생전에 20여 종류의 책을 쓰거나 편집했다. (p14)


<신화>

그에게 있어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주의 우노래’, ‘천구의 가락’이다. 

 그는 오로지 가르치는 일,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 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를 불러들이는 그는 마치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 같았다. 

 그는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박식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전인미답의 광대한 우리 과거의 파노라마를 아는’ 사람이었다. (p21)


<좋아했던 것들>

1. 성당 : 샤르트르 대성당을 자신의 고향 교회로 여긴다. 파리에서 공부하던 때, 그가 이 성당에서 어느 한 주말을 고스란히 보낸 적이 있다. 그때 그는 관리인과 함께 종탑을 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종소리가 발 밑에서 울려퍼질 때 그의 가슴은 설레임을 감추지 못했다고 했다. 종을 다 치고 내려와 관리인의 방을 구경했는데 그 방을 구경하고 나서 캠벨은 그에게 반했따. 관리인과의 만남은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다고 이야기 한다. (p184~185)

2. 이야기 : 캠벨은 일본에서 열린 세계 종교학회에서 뉴욕의 사회철학자와 일본 신도의 신주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회철학자가 신주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신도의 종교 의례를 숱하게 보아왔고, 귀국의 성지도 여러곳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신도의 종교적 이념을 모르겠어요. 신도의 신학을 이해할 수 없어요.”

 일본인 신주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응수했다. 

 “글쎄요. 우리에게 종교적 이념 같은 게 있는 것 같지 않군요. 신학도 없고요. 우리는 춤을 출 뿐이지요.”

 그렇다. 캠벨도 춤을 추었다.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다. (p21)

3. 작가 :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이 사람들의 책을 통해 배움)


<그가 받은 비판>

 그가, 신화를 지나치게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해석한다. 신화의 당대적 역할을 지나치게 이념적, 치료적 기능에 국한시키는 듯하다는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p20)


<마지막>

 그의 영결식은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있었다.(p13)


3) 조셉 캠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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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 as a young man at the university of paris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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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 and jean on their honeymoon in woodstock ny(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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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ing on a skeleton key to finnegans wake(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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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the national arts club receiving medal of honor(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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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home in hawaii(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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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캠벨 (1904~1987)


4) 대담자 : 빌 모이어스 

미국 저널리스트. CBS 뉴스와 PBS(사회교육방송)를 통해 시청자들을 만나고 있다. 우리 시대의 탁월한 사상가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과 학문적 성과를 대중에게 쉽게 소개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5) 역자 : 이윤기 

 이윤기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탁월한 번역가이다.  1947년 경북 군위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하였다. 경북중학교, 성결교신학대 기독교학과를 수료하였다. 1976년 첫 번역서 『카라카스의 아침』을 펴냈고 그 이듬해 197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 종교학 초빙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1998년 중편소설 「숨은 그림 찾기」로 동인문학상을, 2000년 소설집 『두물머리』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5권, 『두물머리』, 『숨은 그림 찾기』 『한 손님의 두 얼굴』, 『미친 개에 대한 생각』, 『패자부활』, 『하얀 헬리콥터』, 『뮈토스』, 『하늘의 문』, 『만남』 등이 있으며 『신화의 힘』,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그리스 인 조르바』, 『세계 풍속사』 등의 책을 번역했다.
 200여 권의 책을 번역한 이윤기 씨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번역작가이자 문학상도 여럿 받은 소설가이다. 중학교 2학년 때 학비를 위해서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면서 책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인문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국군 나팔수로 있다가 베트남전에 참가하기도 했었다. 그리스·로마신화를 비롯해 오랫동안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뒤 신화에 관한 저서를 내 크게 성공했다. 이후 다양하게 활동하다 2010년 8월 27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참고자료]

1. http://www.yes24.com/24/goods/289185?scode=032&OzSrank=1

2. <<신화의 힘>>

3. http://www.jcf.org/new/index.php (조셉 캠벨 저작권물 보존, 보급단체, 오디오북, 소설, 강의 동영상 등 자료 소개)
4.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Campbell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초판_옮김이의 말> 희망의 신화학 

p6 저널리스트 특유의 감각으로 자그마치 8년 동안이나 캠벨과 교우하면서 작업을 함께 해온 모이어스의 글은 신화에 대한 캠벨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요긴할 것으로 보입니다. 

 책에 대한 신뢰가 가는 대목이다. 길게 생각하고 연구한 결과물을 책으로 내는 것도 작가가 가질 수 있는 계획 중 하나라는 힌트도 얻는다. 

p7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는 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고 이것을 분석하면서 신화와 종교에 관해 무수한 질문을 제기하던 그가, 그로부터 반 세기가 흐른 뒤에 펴내는 이 <<신화의 힘>>에서는 바로 그 신화와 종교에서, 궁극적인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모습을 읽어내고는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휩쓸리면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시대적으로 뒤에 씌여진 <<신화의 힘>>을 먼저 씌여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보다 먼저 읽으라고 하신 이유를 이대목을 보면서 이해한다. 조셉 캠벨의 정리 된 생각을 먼저 읽고 그가 탐구했던 방식을 찾아가는 것이 내가 그의 전공을 이해하기 더 쉬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빌 모이어스의 서문_우주의 노래, 천구(天球)의 가락>

p8 그는 자신이 만난 신화의 이미지에 대해 이렇게 쓴 바 있다. “이 시각에도 현대판 오이디푸스의 화신(化身)과 <미녀와 야수>의 속편(續編)은 41번가와 5번가가 만나는 네거리에서 교통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린다.” 

 그가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의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經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침을 마련한 일이었다. 조이스가 말한, ‘참으로 엄연하고 항시적인’ 인간의 고뇌에서 캠벨은 바로 고대 신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읽었다.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죠.” 

 정민 교수님이 말씀하신 ‘삶의 본질적으로 한번도 바뀐적이 없다.’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인간은 유한하고, 삶의 회전(싸이클) 즉 생로병사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삶의 본질적인 원리를 기억하고 우리의  그 원리를 지금의 시대와 상황에 맞게, 내게 맞게 적용해야 할 일임을 기억하고 싶다. 

p9 “아, 이그쥬가르쥬크 말이오? 북부 캐나다 카리부 에스키모의 샤먼이었소. 이 사람은 유럽 손님들에게,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을 했지요. 

p10 여직원의 친구는 ‘그리스의 신들 따위’가 오늘날의 우리 인간 조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 신들 따위가 우리와 무슨 상과이 있느냐는 것은 우리에게는 익숙한, 대단히 현대적인 견해이다. 

 그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서진 질그릇 부스러기가 문화 인류학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듯이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러한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 

 법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강제력 이상의 어떤 힘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장의 권능이 의례화하고 신화하 하는 것이다. 캠벨은, 종교와 전쟁에서 사랑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 삶의 양태는 이러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p11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캠벨 : 인류는 ‘자기의 내부에 식인종적이고, 색정적인 열정’을 지니고 있는데도 이러한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탄한 바 있다. 그는 이러한 열정을 인류의 전염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루카스의 영화를 보고는, 영웅의 역정을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닌 자기 발견의 삶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p12 “자기 내부에 자기 운명의 실을 풀어낼 힘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그렇게 합리적일 수 없는 것이지요.” 

그의 말에 따르면,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를 구원하기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조셉 캠벨은 인생을 모험이라고 확신한다. 

p14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p17 “어르신, 저는 아직도 제가 신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이 말을 듣고 성자가 묻는다. 

“하면, 그대가 사랑하는 게 무엇인가요? 사랑하는 게 하나도 없지는 않겠지요?”

 “제 조카를 사랑하기는 합니다만.......”

 성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그 아이를 사랑하고 다독거리는 그 몸짓에, 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몸짓이 깃들여 있답니다.” 

 캠벨은 이 이야기 끝에, “여기에 종교의 귀한 메세지가 있지요. 즉 ‘너희가 참으로 하찮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이 곧 신에 대한 대접이 되느니라’라는 메세지가 그것이랍니다.” 하고 덧붙였다. 

p18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그러나 이 신화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다른 까닭은 각 문화권에 따라 마땅히 자각하여야 할 삶 자체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있지 않은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p25 

모이어스(이하 ‘모’)) 왜 하필이면 신화입니까? 우리는 왜 신화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까? 도대체 신화가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캠벨(이하 ‘캠’)) 우리는 우리 몫의 삶을 살면 됩니다. 삶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저 우리 몫의 삶을 살면 신화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지요.” 이것이 나의 첫 대답입니다. 나는 남들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주제라고 해서 관심을 두는 것은 신용하지 않아요. 내가 신용하는 것은 어찌어찌 하다보니 사로잡히게 되는 주제입니다

p26 캠) 인류의 삶을 떠받쳐오고, 문명을 지어오고, 수천 년 동안 종교의 틀을 지어온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적 문제, 내면의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의례의 문턱을 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우리는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p27 캠) 토니오가 보헤미안 무리 중 쓴 편지 : 만일 이 세상에 유식한 인간을 시인으로 만들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과 살아있는 것과 일상적인 삶을 사랑하는 나의 고향일 것입니다. 

p28 캠) 토니오는 “작가는 진실에 진실해야 한다”고 씁니다. 그런데 토니오가 진실에 진실하면서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왜냐,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세상을 떠날 즈음의 석가가 어떠 했습니까? 석가의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한 모습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은 토마스 만의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p29 모) 신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 의미 있음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캠)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진동하는 계의 진폭이 급격하기 늘어남)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p30 모) 선생님께서는 신화의 정의를 ‘의미의 모색’에서 ‘의미의 경험’으로 바꾸셨는데요? 

캠) ‘삶의 경험’이라고 하기로 합시다. / 모두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지요. 그겁니다. 모이어스 씨, 당신이라는 분의 의미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캠)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되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p31 캠)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모) 제대로 된 상대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겁니까?

캠)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 

p32 캠) 감히 말합니다만,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가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둘은 실제로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캠벨 선생님의 주례사를 마음에 새겨본다. 

p33 캠)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 사람은 결혼을 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이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재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p34 모) 선생님께서는 결혼은 사회적 계약이 아니라 영적인 수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캠)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 아닙니까? 

p35 모) <고린도 전서>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나는 군요.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캠) 사춘기 의례가 필요한 까닭이 거기에 있지요. 

p37 모) 선생님께서는 선생님께서 들려주시는 신화나 옛 이야기가 학생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캠)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상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볼줄 알지요. 

p38 캠) 신환에 우리 삶에 유효한 메시지가 있다는 말을 처음으로 한 분이 침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전까지는 신화 하면 학자들이나 우려먹는 것인 줄 알았지요. 침머의 말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느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어요.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것을 깨달은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 조셉 캠벨. (예로 써먹어야지.)

p41 캠)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인 신화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p43 캠) 신화는, 바로 지금 이 시각에 우리가 사는 삶과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줍니다. 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시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p46 캠) 의식을 머리가 지닌 특수한 기능으로 여기는 것은 데카르트식 사고방식의 일부지요. 데카르트파 사람들은 머리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의식에 영향을 미쳐 어떤 방향, 혹은 어떤 목적에 맞게 작용하게 하는 기관이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은 아니지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온몸에 두루 존재합니다. 이 의식은 의식을 하는 주체에게 살아 있는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 

 나는 의식과 에너지(氣)는 어떤 점에서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p47 캠)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p48 모) 하지만 신화라고 하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의 꿈이 아닙니까?

캠) 아닙니다, 아니에요.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명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p51 모) 시인 예이츠는 우리가 위대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주기를 산다고 느낀 모양입니다. 그는 시 <재림(再臨)>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빙글빙글 하늘을 돌고 또 돌면서/ 매는 매잡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중심이 잡아주지 못해서./세상에 흔한 것은 무지서/ 피거품이 번진다./ 그리고 도처에서/ 순진무구한 의례(儀禮)가 익사한다.” 선생님께서는 ‘이 세상으로 나오려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사람들의 구부정한 걸음걸이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캠) 모르겠군요. 적어도 예이츠 이상으로 알 도리는 없어요. 하지만 어차피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고통과 혼란의 시기가 있게 마련인걸요. 

p54 캠) 인간은 외부에서 들어온 권능에 복종하지 않아요. 다스릴 따름이지요. 문제는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거지요. 

캠) 기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메피스토펠레스는 우리에게 어떤 수단이든지 다 제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생의 과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말끔하게 정의해줄 듯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p56 캠) 만일 어떤 종교에 진정으로 몸을 담고, 진정으로 그 종교를 통하여 삶을 지어나가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는 (그래요, 아주 잘 가지고 놀지요) 나 같은 작자는 성인들의 경험에 견줄 수 있을 만한 경험은 평생 해보지 못하고 말 겁니다. 

p59 캠)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에서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禪師)가 설법을 하기 위해 무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새 한마리가 끼여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p60 캠) 우리의 신화학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자기가 사회의 어떤 동아리에 속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요. 모든 신화학은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 자라납니다. 그런 신화학이 밖으로 나오면서 충돌하고, 충돌을 거쳐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여기에서 혼효(混淆,섞임)를 거치면서 더욱 복잡다단한 신화학이 됩니다. 

p61 캠) 신화가 무엇이지요? 사전적인 의미를 좇으면, 신들에 관한 이야기이겠지요. 그러면 응당, 신들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이어서 나와야 합니다.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쳬게의 화신(化身)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 신화학에서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회적인 시화가 있는 것이지요. 

p65 캠) 오류의 가능성에서 온전하게 해방된 사람의 마음은 얼마든지 하느님에 대한 앎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계시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하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든지 가능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이 부분의 앞 뒤를 자세히 읽어보고 다시 새기고 싶다.)

p70 캠)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어느 곳에 있는 어떤 사람이든지, 그 마음이 진리를 떠나 있지 않다면 진실을 말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진리를 떠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을 가다듬기만 하면 곧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p71 캠) 이뉴는 기원전 5백 년경에 큰 전기(轉機)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만일에 ‘노자’자 한 사람의 이름라는 설이 옳다면)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천체 운행의 아날로지를 길잡이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는 이성을 길잡이로 했던 것이지요. / 인도(人道)가 열린 것이지요. 그런데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 합니다. 우리가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지 않고 측면에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p73 캠) ‘이성’이라는 말과 ‘생각’이라는 말부터 구분해볼 필요가 있겠어요. / 이성은 생각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성이 작용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이성이 아니지요. 새앙쥐가 코를 내밀어 밖을 내다보고는, 응, 여기라면 나가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 벽을 뚫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성이 아니지요.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p74 캠)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1. 신비주의와 관련되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만,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2.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이 모든 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해답은커녕 질문도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 하고 반문합니다. 성냥을 켜면 불이 입니다. 불이 무엇이지요? 산소가 연소되는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불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안 됩니다. 

  3.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重婚)의 신화도 있고, 단혼(單婚)의 신화도 있는 것은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이든 단혼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다르니까요. 신화의 기능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시대착오적이지요. 

 p76 

        4.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어요. 

캠)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의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p77 캠) 오늘밤에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알 수 없듯이, 내일 어떤 신화가 태동할지도 알 수 없어요.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 입니다. 

p78 캠) 시애틀 추장이 한 말 : “워신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땅을 사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어떻게 그걸 사겠다는 것일는지요?

p81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

p83~84 모) 신화는 왜, 제가 혼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 그러면서도 제가 진실일 거라고 믿던 것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까? 제가 혼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이 저라는 존재의 바탕, 제 앞을 살던 모든 존재에게서 물려받은 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어서 그렇습니까? 

캠) 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동굴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우리는 똑같은 삶의 단계를 거칩니다. 즉 아기 시절을 거치고 성적으로 성숙한 청년이 되고, 어린 시절의 의존적인 시기에서 독립적인 한 남성 또는 여성으로 변모하는 시기를 거치고, 결혼하고, 그러다 몸이 기울고 점차 힘을 잃어가고, 그러고는 죽는 단계를 거친다는 겁니다. 

p85 캠)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p87 캠) 사람은 다 어떤 종류의 문턱을 넘어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시험이 이러한 보편적인 것을 반영하게 될 경우에 이것은 개인적인 단계의 꿈이 아닙니다. 이런 꿈을 원형적(原型的)인 꿈이라고 합니다. 

p88 캠)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p91 캠) 융 박사는 꿈에는 두 종료, 즉 개인적인 꿈과 원형적인 꿈 혹은 신화 차원의 꿈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개인적인 꿈은 그 개인의 연상을 통하여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꿈이 그 사람 삶의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느냐, 그 개인의 문제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느냐, 이런 것을 알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때로는 꿈이 신화의 테마를 드러내면서 순수한 신화 세계의 이미지, 예를 들면 우리 내면의 그리스도 같은 이미지를 전해 올 때도 있습니다. 

 모) 우리의 내면에 있는 원형적인 인격, 우리의 본질인 원형적인 ‘자기’를 드러낸다는 것이군요?

 캠) 그래요. 그래서 꿈꾸는 시간이 대단히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의 시간은 사실은 시간이 아니고 존재의 상태 그 자체입니다.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 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식물 역시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p96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인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신비입니다. 

p102 캠)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 

캠) ‘너’와 ‘나’, 이것과 저것, 진실과 허위....... 이 세상 만물은 대극으로 이루어져있지요. 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시인 블레이크는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고 했지요. 

p103 캠)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칸트의 말마따나, 그 자체로써만 존재하는 사상(事象,관찰할 수 있는 사물과 현상)은 사상이 아니지요. 그 자체로써만 존재하는 사상은 사상성(事象性)을 초월합니다. 생각될 수 있는 것을 초월합니다. 최상의 것은 생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표(言表)될 수 없습니다. 차상(次上)은 오해됩니다. 왜냐,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이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좋은 것이 바로 우리가 언표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언표되는 장(場)이랍니다. 

캠) 초월적이라는 의미에서, 우리 영어 중 가장 본원적인 단어가 ‘하느님’(God)입니다. 초월적인 것임은 분명한데, 이 말을 들으면 하나의 개념이 잡히지요? 그래요, 모이어스 씨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 혹은 창조자가 모신(母神)인 종교에서는 이 세상이 모두 이 모신의 몸입니다. 몸 아닌 곳은 없습니다. 이 세상이 모신의 몸이라고 해서 남성신(男性神)이 없다는 것은 아니고 어딘가에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이라는 것은 한 원리의 두 측면에 불과합니다. 생명에 성별을 두는 것은 훨씬 뒤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p104 모) 하지만 인간으로서 이 어마어마한 존재를 더듬기 위해서는, 초라하지만 언어의 도움을 빌려 남성신이다, 여성신이다 할 수밖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캠) 그렇기는 합니다만, 문제는 남성이니, 여성이니 해서는 그 존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남성이니, 여성이니 하는 것이 초월성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도약대라고는 할 수 있겠지요. 초월성이라는 것은 초월하는 것, 이원성을 넘어서는 것을 뜻합니다. 

p105 캠)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태아가 최초로 체험하는 것이랍니다. 지금은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분석심리학자 스타니슬라프 그로프는 수년 동안 LSD를 가지고 환자를 치료해온 사람입니다. 그는 이 치료과정에서 환자 중 일부가 환각 상태에서 탄생의 과정을 경험한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그런데 이 재경험의 첫 단계는 자궁 안에 태아 상태로 있을 때의 경험이래요. ‘나’라든지, 존재라든지 하는 인식이 전혀 없는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지요. 

 경험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으로 태어나기 직전에 자궁의 율동이 시작되는데 이때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낀답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 공포인 셈입니다. 이어서 태어나기 위한 무시무시한 단계, 산도(産道)라는 아주 험한 길을 지나면, 드디어 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이지요. 상상할 수 있겠어요? 

p106 캠)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p107 캠) 원형이란 ‘바탕되는 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융 박사는 이런 관념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지요. ‘원형’이라는 술어가 ‘근본적인 관념’이라는 술어보다 나은 것 같군요. 

p109 캠) 내 생각으로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시인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의 영혼이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고요.   

모) 하지만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 믿는 사람들, 삶 속에 녹여버려 사는 사람들은 이보다 더 소박한 질문을 하는 게 아닐까요? 혹시,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을까,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왜 세상이 만들어졌을까,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아닐는지요? 창조 신화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아닐는지요? 

캠) 아니지요. 사람들이, 창조신이 온 세상에 실재하고 있음을 아는 것은 그 해답을 통해서랍니다. 

p110 캠) 어쨌든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는 어떻게든 그 영원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이렇게 근원에서 멀어진 것은 우리 마음 때문이빈다. 

p111 캠) 신화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가령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 큰 신화는 신전의 신화, 대규모의 신성한 의례의 신화이지요. 인류는 의례를 통하여 자기네끼리, 혹은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데, 큰 신화는 바로 이 의례를 설명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은유로 알고 해석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캠) 그런데 세상을 신의 나타남이라고 보지 않고 방사(放射), 홍은 응결(凝結)의 현상으로 설명하는 관점도 있어요. 

p112 캠) 인간은 지금도 원래의 반쪽을 찾아내는 일에 평생을 진력한다는 겁니다. 

모) 선생님께서는 신화가 인간에 관한 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하시는데, 그 큰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인지요?

p113 캠) 시간의 장으로 현현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원래 한 존재의 바탕에서 왔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캠)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지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내가 ‘시’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는 행위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접하면 우리 자신이 우주적인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낍을 받는 겁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시처럼 산다’에서 ‘시’가 캠벨이 말하는 행위와 모험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시처럼 산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p114 캠)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는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시 중에 자주 인용되는 시가 있는데, 이게 중국의 <<도덕경>>에도 나옵니다. 이렇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모) 신화에 관한 선생님의 작업은 저의 신앙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은 채로 제 믿음을 그때까지 갇혀 있던 문화의 감옥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캠) 나의 믿음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모) 신화 중에는 믿을 만한 것도 있고, 약간 터무니없는 것도 있을 수 있겠지요?

캠) 각각 다른 의미에서 모두 믿을 만한 것입니다. 모든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가령 우리의 신화는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종교에는 윤리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와 화해, 정당함과 부당함을 정해놓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 쪽으로 사람들을 모는 경향이 있습니다. 

p115 캠)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p116 모) 은유가 무엇입니까?

캠) 종교 전통에 등장하는 은유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문자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거지요. 만일에 은유를 은류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가리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점에 가서 메뉴를 달라고 한 뒤, 그 메뉴에 비프스테이크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페이지를 씹어먹는 것이나 같지요. 

p117 캠) 은유는 암시적 의미로 읽어야지, 명시적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캠) 셰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것이지요.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바로 외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p119 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깊이 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 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p120 캠)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그래서 샤먼이나 선견자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구성원들은 서로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아니,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해낼 수 없어서 못하던 내 이야기가 아니야?” 이렇게 되자면 샤먼이나 선견자와 그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상호 작용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 사회의 구성원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듣는 선견자는 선견자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작가가 사회 구성원들이 듣고 싶어하는 ‘그것’을 캐취하는 것 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 부분에서 깨닫게 된다. 글을 잘 쓰는 것 이전에 사회 구성원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사람들과 더불어 상호작용하며 그들에게 ‘공감’이 될 만한 이야기거리를 잘 지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을 해주는 부분이다. 

p 122 근본적인 관념을 나타내는 신화도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마르가’라고 하는데, 이것은 ‘길(path)‘이라는 뜻입니다. 이 ‘길’은 곧,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데, 이 길은 신화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되돌립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신화가 무엇인지 가르치는데, 이 ‘마르가’는 개인을 신화에서 떼어내고, 명상을 통해서 곧바로 ‘길’을 좇게 합니다. 

p123 모) 오늘 날에는 누가 은유로 말합니까? 캠) 시인들이지요. 시는 은유의 언어니까요. 

p124 캠) 메시지, 메시지에 이르는 단서를 간취(看取)하기 위해서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어느 누가 진리를 말해도 귀에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모) 우리 사회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기술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캠) 정말 잃어버렸지요. 우리의 생각은 막연합니다. 언어적이고 단선적입니다. 언어의 현실보다는 이미지의 현실이 훨씬 풍부한데 말이죠. 

p126 캠)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이것은 사물이 아닙니다)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p127 캠) 우리는 하느님을 정말 많은 방법으로 인격화할 수 있습니다. 신이 한 분이던가? 신이 여러 분이던가?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생각의 카테고리에 묶여 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려는 존재, 생각하려는 그 존재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내 말은, 무엇이든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범주를 초우러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느냐, 없느냐는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부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둘 다이기도 하고 두 다 아니기도 하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궁극적인 신비로서의 하느님은 생각 너머에 있습니다. 

p133  캠)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모) 조르바는 인생에 대하여 “말썽?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말썽 아닌가”하고 있습니다.

캠)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이에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 일을 낙관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됩니다.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지요. 

 어느 한쪽에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는 악한 것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이것은 석가가 처음으로 내밷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으니까요.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상실하는 것을 하나 찾았다. 우린 ‘시간’을 계속 상실하고 있는 게 아닐까?  

p134  캠) 단언은 어려워요. 우리는 늘 조건을 붙여가면서 단언하지요. 나는, 산타클로스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하던 것과 똑같은 조건을 붙이면서 단언하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단언하는 것, 그것도 실은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의례가 있는 겁니다. 의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행위에 무리를 지어 참가하지요. 은밀한 행위가 무엇일까요?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해우이지요. 우리는 이런 짓을 무리지어 합니다.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p136 캠) 우리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일 중 하나는, 속으로는 구역질이 나는 타인, 혹은 타인의 행동, 혹은 타인의 조건에 대해서도 ‘옳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무 위에 새 두 마리가 앉아 있다. 아주 약삭빠른 녀석들이다. 그런데 한 마리는 그 나무의 과실을 먹는데, 다른 한 마리는 먹지 않고 관찰만 한다.” 

 자, 나무의 과실을 먹는 새는 그 과실을 죽이고 있지요. 그러나 관찰만 하는 새는 필경은 굶어죽고 말 것입니다. 결국, 생명은 생명을 먹고서 산다는 이야깁니다. 

p137~139 캠) 우리는 우리가 정한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 삶의 기적 앞에서 고개를 끄덕거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모) 고전적인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이 물질의 세상은 무시되고, 뒤에 생명만 천국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이승에서 보냈던 삶에 걸맞은 상을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면, 뉘어쳐 깨달을 경우 이 순간의 세상이 곧 영원이라는 확신에 이르는 것 같군요. 

캠) 내가 하는 말의 뜻이 바로 그겁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천국의 개념이라는 문제로 보면, 거기에서 지복(至福)을 누리면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됩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느님의 지복 직관에서 끊임없는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그 경험은 인생의 그런 기능이 있어요. 

모) 그렇군요.

캠) 그렇지요.


<3. 태초의 이야기꾼들>

p141 모) 워즈워드의 시에 “우리의 삶은 수면(睡眠)과 망각일 뿐./ 영혼은 우리와 함께 떠오르는, 우리 삶의 별/ 영혼에게는 집이 있음인가? / 그렇게 멀리서 오는 것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워즈워드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영혼이 정말 이럴까요?

캠) 그런 것 같군요. 하지만 망각만인 것은 아니지요. 우리 육신의 신경은 우리의 기억을 운반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경계통의 조직을 일정한 상태까지 빚어낸 것이 바로 우리의 기억입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p142 캠) 인간의 발달 단계는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캠) 죽음은 최종적인 해방입니다. 

p146 캠) 삶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사냥꾼입니다. 사냥꾼은 맹수와 마찬가지입니다. 신화를 보면, 사냥하는 맹수와 사냥감이 되는 짐승이 어울려 의미심장한 역할을 연출해냅니다. 이 양자는 삶의 두 측면을 암시하지요. 즉 공격적이고 죽이고 정복하고 창조하는 삶의 측면과, 대상, 혹은 객체가 되는 삶의 측면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p150 캠) 일본의 무사인 사무라이 이야깁니다. 이 무사는 자기 영주의 복수를 하기 위해 떠돕니다. 마침내 사무라이는 자기 영주를 죽인 원수를 어느 집에서 만나 구석으로 몰아놓고 단칼에 베려고 합니다. 그런데 베려는 찰나 그 원수가 사무라이의 얼굴에 침을 밷습니다. 그러자 사무라이는 칼을 칼집에 넣고는 가버립니다.

모) 아니, 왜요?

캠) 원수가 침을 밷자 사무라이는 화가 났던 겁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 그 원수를 죽이면, 죽이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행위가 됩니다. 영주의 원수를 갚는 행위가 개인적인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 그 자리를 떠버린 겁니다. 그는 개인적인 행위와는 전혀 다른, 비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다시 그 원수를 찾아 내야 합니다. 

p156 캠) 고대의 암벽화가 있는 동굴에 들어가는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하지요. 이러한 이미지를 그려내면서 이들은 대체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저 높은 곳까지 어떻게 올라갔을까? 무엇으로 암벽을 비추면서 그렸을까?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라고는 일렁거리는 횃불밖에 없었을텐데....... 이런 생각이 안 들 수 없지요. 

p165 캠) 모든 사람의 의례적 삶에서 변모라는 주제는 상당히 근본적인 관심을 환기시킨 문제였던 것으로 보여요. 오늘날에도 이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시 사회도 문제아(말하자면 순수한 자연의 충동을 그대로 표현하는 아이들)를 사회의 일원으로 통합시키는 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런 아이들을 용인할 수가 없었던 것지요. 그래서 사회가 그들을 죽여버렸던 겁니다. 

p166 캠) ‘미사’를 뜻하는 라틴어는 원래 우리를 일상성의 마당에서 ‘몰아낸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래서 사제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곳, 그곳이 제단입니다. 그렇게 등을 돌리고 있는 사제와 더불어 우리는 비로소 외계를 향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사제들이 성소를 돌려놓아 버렸어요. 세상과 오순도순 지내보자는 거겠지요. 

p167~168 인간은 환경에 반응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환경에 반응하지 않는 문화 전통이 생겼어요. 이것은 기원전 약 1,000년에 다른 데서 온 겁니다. 이 문화 전통은 우리 현대 문화와, 새 우주관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동화시키지 않아 왔어요.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神話化)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캠) 독일에는 상당히 로맨틱한 데가 있는 묵은 표현이 있습니다. ‘다스폴크 디히테트’라는 건데, 이것은 전통 문화의 관념과 시는 모두 민중에게서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전통 문화는 엘리트의 경험,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들의 귀는 우주의 노래에 열려 있어요. 이들이 민중에게 이야기하면 민중에게서 반응이 생기는데, 이 작용과 반작용이 상호 작용을 하는 겁니다. 민중의 문화를 빚겠다는 최초의 충동은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아래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p174 캠) ‘악시스 문디’는 중심점, 모든 사물의 회전 중심인 극점을 말합니다.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이 함께 하는 점입니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일시적 체험에서 그 일시적 체험이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거야 말로 신화 체험인 것입니다. 

p175 캠) 수많은 철학자에 의해 되풀이된 신에 관한 정의가 있습니다.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구체(球體)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바로 모이어스 씨가 앉아 있는 그 의자입니다. 내가 앉아 잇는 이 의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 둘 다 이 신비의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화적 자각일 수 있습니다. 


<4. 희생과 천복> 

p177 캠) 사는 곳을 성화(聖化)시키는 것,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p178 캠) 큰 나무가 빽빽한 숲으로 들어가면 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고 한 사람이 키케로였지요, 아마? 성림은 도처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나는 자주 숲을 드나들었는데, 그때 나는 “와, 살아도 많이 살았겠고 알아도 많이 알겠다.”는 생각에서 숭배하는 느낌이 들어 나무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창조의 실재에 대한 느낌이야말로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조그만 땅다람쥐와 커다란 올빼미가 사는 숲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은 아예 다른 세계에서 자라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생며으이 힘과 권능과 마술적인 가능성을 표상하는 존재로서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이 생명의 ㅎ미과 권능과 가능성은 우리의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들이 삶의 일부분이 되면 우리에게로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가 늘 우리 안에 메아리친다는 느낌을 자주 경험합니다. 우리 자신이 곧 자연이니까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p179 캠) 그러나 우리 삶의 겨낭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p183 캠) 하지만 모든 땅이 다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땅에서 삶의 에너지의 상징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p185 캠) 중세 도시에 가보면 성당이 가장 높은 건물 행세를 합니다. 18세기에 조성된 도시에서는 정치가 벌어지던 장소가 가장 높은 건물 행세를 합니다. 현대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은 누가 차지하고 있지요? 당연히 경제 생활의 중심인 업무용 건물이지요. 

p186 캠) 왜 우리가 새삼스럽게 신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까?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잡아줍니다. 

p187 캠) 모든 궁극적인 영적 암시는 침묵에 담겨져 있지요. 이 침묵은 소리 너머에 있어요. 육이 된 말씀은 최초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 너머에 있는 것이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 불가지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침묵, 혹은 공(空), 혹은 초월적인 절대자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p188 캠) 사람들은 참 삶을,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결코 하지 못하는 채 살아야 했던 중세는 바로 황무지나 다름없어요. 황무지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불가항력의 법이 설정한 목표를 좇았습니다. 

 정신이라는 것은 삶의 향연입니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 시인은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캠)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도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로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p193 캠) 신 관념은 항상 문화적 조건을 따릅니다. 선교사가, 자기가 생각하는 하느님, 자기의 신을 어느 땅에 들여온다고 한들 그 신은 그 땅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신으로 변모합니다. 영국의 선교사가 하와이에서 겪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이 선교사는 펠레 여신을 섬기는 제니의 방문을 받았더랍니다. 제니는 바로 펠레 여신의 화신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선교사는 실제로 제니의 방문을 받은 것이 아니고 펠레 여신의 방문을 받았던 셈이지요. 선교사는 제니에게 “나는 당신들에게 전할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제니가 응수합니다. “그건 당신네 신이지요. 펠레는 나의 여신이랍니다.”

p194 캠) 가치, 즉 평가의 결과는 삶을 지배하는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식물의 세계는 생멸의 반복이라는 의미에서 사람의 삶과 동일시됩니다. 그래서 내계 지향적 관계가 이루어지지요. 

p195 캠) 따라서 숲과 농경 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여기에서는, 개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개체가 아니라 식물의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예수는 이 이미지를 이용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하고 말합니다. 이 포도나무 이미지는 동물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농경 문화는 먹이가 될 식물을 끊임없이 추켜세웁니다. 

p201 캠)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모) 선생님 글이 생각나는 군요. “땅에 쓰러진 고목과 떨어진 잎에서 새싹이 나온다. 이것은 죽음에서 생명이 솟고 죽음으로부터 새 삶이 비롯됨을 깨닫게 한다. 어설프게 결론을 내려보자면, 생명이 늘어나려면 죽음이 늘어나야 한다. 이 지구의 적도대 문화의 특징은 희생 제물을 바치기에 광분해 있다는데 있다.”

p203 삶의 모습 자체는, 반드시 삶의 행위를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p204 초월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모든 깨달음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육으로는 죽고 영으로는 다시 나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의식과 동일시합니다. 이런 삶에서 육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아요. 수레로는 죽고, 의식과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은 동일시해야 합니다.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 그것이 곧 신입니다. 

p205 캠) 죽음과 삶의 균형을 잡아주어야 하는 거지요. 이 양자는 한 사상, 즉 ‘존재’의 두 측면이니까요. 

p206 캠) 희생에 대한 옛 관념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확연하게 달라요. 마야 인디언은 의례의 마당에서 농구 경기 비슷한 시합을 합니다. 승패가 결정되겠지요? 그러면 이긴 팀의 주장은 진 팀의 주장에 의해 그 자리에서 제물로 희생됩니다. 목을 잘리는 거지요. 삶에서 승리한 자만이 제물이 될 수 있다....... 이게 바로 희생과 관련된 옛날의 관념입니다. 

모) 선생님께서는 정말 목숨을 버리는 자가 새 삶을 얻는다고 믿습니까?

캠) 그리스도의 말씀 아닙니까?

모) 선생님께서 이걸 믿으시는지 안 믿으시는지 궁금한 겁니다.

캠) 믿어요. 무엇인가를 위해서 버린다면 말입니다. 

p209 캠) 탄생과 죽음 앞에서 우리가 깊은 심리적 연상에 빠져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p211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런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줍니다.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p212 캠) 자진해서 이 세상에 참가한다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p213 캠) 자살 역시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떤 시간대에 처하게 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시간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위가 곧 자살인 겁니다. 하지만 융 박사의 말마따나 상징적인 상황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p216 캠) 우리 어머니는 우리를 낳으신 분이자, 그 살로 우리를 먹이신 분입니다. 우리 어머니의 몸이 곧 우리의 양식인 것이지요.

p217 캠)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인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p219 캠) << <피네간의 경야>의 겉쇠>> 겉쇠: 어떤 자물쇠든 다 딸 수 있는 열쇠 

p222 캠)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조셉 캠벨에 확신에 찬 발언이 부럽다. 학생들 앞에서 늘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생각해보라고 하면서도 내심 부모님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부모의 바람이 곧 학생들의 꿈이 되면 안된다는 신념의 나무가 아직 자라고 있는 단계여서 그런 것일까?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하던 공부를 멈추고 마음껏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 좀 해보라고 이야기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다. 특히 나를 막는 이유 중 강력하게 있는데 그것을 바로 학생들이 속으로 ‘현실적이지 못한 선생, 공부나 가르치지지.’라는 마음을 가질까봐이다.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라고 외치고 싶다. ‘그러면 그 길이 진정한 네 삶의 길이 될것이다!’ 라고 응원해주고 싶다. 

p223 캠) 중세의 필사본에, 여러 문맥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가 바로 행운의 바퀴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성혼 서약에도 성할 때나 아플 때나 넉넉할 때나 가난할 때나,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나 ...(중략)... 나는 그대를 중심으로 맞아들이고 그대를 천복으로 좇는다. 그대가 나에게 줄 재물도 아니요, 그대가 나에게 줄 사회적 지위도 아닌 오직 그대만 좇으리다....... 워 이런 대목이 있지요. 이게 바로 천복을 좇는 것입니다. 

캠)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p223 모) 부모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천복을 찾게 해줄 수 있습니까?

캠)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아이에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도와줄 수 있지요. / 학생들과 독서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노라면 학생이 보이는 반응에서 뭔가를 느껴낼 수 있지요.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p224  캠) 천복거리를 찾는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자기가 전적으로 관심을 쏟지 않던 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방향 전화의 계기를 기다리는 능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p225 캠) 어떤 학생이 나에게 와서 “제가 이걸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저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어요. 

 “모르겠네. 남들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릴 수 있겠는가? 아니면 대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자 하는가?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가게.”

부모는 자식에게, “너는 범과대학에 가야 해. 법관이 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거든”, 이런 말을 능히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 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자, 돈이 중요하겠어요, 천복이 중요하겠어요? 나는 유럽에서 공부하다가, 1929년 월스트리트가 무너지기 3주일 전에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일자리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지요. 그런데 내게 그 시절은 정말 멋진 시절이었어요.

p226 캠) 뉴욕의 우드스톡에 아주 멋진 노인이 있었어요. 이 양반에게는 방이 아주 많은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는 이 방을, 예술을 공부하는 가난뱅이 학생들에게는 1년에 20달러 정도의 임대료로 빌려주었어요. 그런데 이 집에는 수도가 없었어요. 물은 우물물을 길어다 쓰거나 펌프로 자아올려 써야 했어요. 그런데 수도를 놓지 않는 이유가 걸작입니다. 수도를 설비해놓으면, 이 집이 수도가 있는 집에 살던 학생들의 관심을 끈다는 거예요. 

정말 멋진 노인이다. 

리뷰를 하면서 사부님이 왜 ‘신화의 힘’을 연구원 첫번째 과제로 내셨는가를 생각하게 됐다. 도대체 왜일까? 그런데 캠벨의 우드스톡의 이야기를 리뷰하면서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면 그 중 한가지를 알아낸 것 같다.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할 때 풍부한 자료를 갖고 있을 지라도 자신의 책에서 쓰고자 하는 것만 써야 한다는 사실이다. 구본형 사부님의 <<깊은 인생>>에는 이 재밌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감추어졌기 때문이다. 사부님도 이 노인의 이야기를 읽으시면서 멋지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캠벨이 가난했지만 가난을 느끼지 못했던 원인의 중심에 이 노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 것이 비밀을 알아낸 기분이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어요. 즉 ‘사트(Sat)’ ‘취트(Chit)’ ‘아난다(Ananda)’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이 말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p227 모) 선생님은 천복을 좇는 그 순간 순간에, 혹시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저에게는 그럴 때가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캠) 늘 하지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것이다.” 


<5. 영웅의 모험>

p229 캠)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p230 캠)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내가 나의 장례식을 준비하며 글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 아닐까? (과제를 생각하며)

모) 넓은 의미에서, 이 죄 많은 세상에서는 영웅이 아니어도, 누구나 내면을 향한 영적, 심리적 여행을 해야 할 테지요.  

p232  캠) 변모라는 것은 많은 위험을 거치는 굉장한 변화이지요. 

p233 캠)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p234 캠)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캠)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p239 캠)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p241 캠) 우리 문명권에서 중년의 문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 겁니다. 

p244 캠)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p245 모) 오늘날의 사람들은 영웅이 아닌 명사(名士)를 숭배하는 것 같은데요. 

캠) 유감이지만 그렇군요. 브루클린의 고등학생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설문을 돌렸더니 3분의 2가 ‘명사’라고 대답했다더군요. 뭐가 되자면 어느 정도 노력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하는 한심한 대답이지요. 

p246 캠) 대중의 영웅은 자기 시대의 필요에 대단히 민감한 법입니다. 비틀즈는 대중 음악에다 정신적인 깊이를 더했습니다. 

p247 캠) 무덤에서 끝난다고 해서, 인생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판다로스의 시에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대목이 있어요. 퓌티아 경기의 씨름 대회에서 챔피언이 된 젊은이를 핀다로스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어요. 

 “광명의 아들이 아닌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인간은 꿈같이 덧없는 존재, 그러나 하늘의 선물인 태양이 비치면, 광명한 일광이 머무르면, 아, 아름다워라!” 

p249 모) 왜 첫 처서의 제목을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고 하셨습니까?

캠) 이 세계 모든 문화권, 많은 시대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영웅의 행동에서 하나의 전형적인 체계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심지어, 원형적인 영웅상은 하나밖에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랍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의 원형적인 영웅상이 많고 많은 사람에 의해 모든 지역에서 베껴졌다는 것이지요. 전설적인 영웅은 큰 일을 한 사람, 무엇을 세운 사람인 경우가 보통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 새 종교를 세운 사람, 새 도시를 세운 사람,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세운 사람인 것이지요. 이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땅에서 새로운 것을 싹 틔울 잠재력이 있는 씨앗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p254 캠)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마야’의 신화가 가슴에 와 닿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p255 캠) 내가 그 책(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쓴 40여 년 전에 견주면 지금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적인 삶의 양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따라서 잠깐만이라도 이 세상의 기원 신화를 접어두고(기원에 관해서는 과학자들이 뭐라고 말해줄 테니까), 인간의 내면 탐색에 관한 신화로 되돌아가, 깨달음의 단계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어떤 시련을 경험하게 되는지, 어른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읽어보세요. 

 p258 모) 영웅이 시련을 이기고 돌아오는데, 그가 가져오는 것을 사회가 달가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캠)  으레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원하지 않는다기보다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라서,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닐까요? 


p260~262) 다시 읽기


 p263 캠) 좋은 코치는 선수가 달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선수의 천성적인 동작 양식만 조금 수정해줍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들도 제자를 이런 식으로 가르칩니다. 그렇다고해서 가만히 있는 게 좋은 스승이 되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들려줄 스승이 없으면 스스로 창안한 방법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자기에게 어울리는 바퀴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p265 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이 조직은 우리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조직이 과연 우리 인류의 목적ㅇ르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조직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이 조직을 더 이상 섬기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만, 우리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요. 

p270 캠) 우리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지요. 사고를 하기는 하되 가게를 운영하는 것처럼 사고를 해요. 하지만 의식은 우리 인간 존재의 부수적인 기관일 뿐이에요.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캠)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p272 캠)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 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p273 캠)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이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내가 가졌던 무기력함에 답을 주는 대목이다. ‘천만에요!’ 튼튼이 나의 삶을 사는 것. 생명력을 가지고 사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시작이자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쁘다. 

p273 캠)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p276 캠)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이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했지요. 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 있는 신화를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p277 캠) 우리가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ㅇ리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줄 수 있을 때도, 주어지는 것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 개개의 경험과 우리 개개인이 지닌 잠재력의 발현이 되는 겁니다. 

 영적인 문제의 도움을 받으러 스승을 찾아갈 경우, 이 스승은 그 제자가 전통적인 길 어디쯤에 와 있는지,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거기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할지도 압니다. 그러면 스승은 이 제자에게 무엇을 주는고 하니, 바로 자기가 구상한 바를 일러줍니다. 그러니 제자가 스승 비슷하게 될 수밖에요? 서구의 교수 방법은 이와 판이하게 다릅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그들 나름대로 구상하게 하고 그렇게 구상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인도해주지요. 그러니까 학생은 자기 나름의 자기 길을 찾아야 하지요. 그러니까 그 길은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을 향한 잠재력, 다른 사람은 체험해보지 못한 것, 다른 사람에 의해서는 체험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p278 캠)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279 캠)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83 캠) 거웨인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석가가 취한 방법을 택하건 거웨인이 취한 방법을 택하건 욕망과 공포라는 이 무서운 계곡을 벗어나야 성취의 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p285 캠) 예술 학교 학생들에게는, 스승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이 순간이 스승이 가르치고자 하는 기법을 모두 자기 것으로 동화시키는 순간, 날 준비가 된 순간이지요. 상당수의 예술가는 제자에게 이런 식의 홀로 날기를 허락합니다. 많은 예술가가 실제로 그 홀로 날기를 보려고 제자를 가르치고요. 그러나 개중에는 날 준비가 끝났는데도 제자를 계속해서 학교에 잡아두는 스승도 있어요. 이렇게 되면 제자는 아주 다루기 까다롭게 되어가면서 결국 스승을 험담하게 되지요. 이건 전적으로 씅의 잘못입니다. 스승 소리를 듣는 사람은 마땅히, 제자에게 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먼저 알고 때가 되면 날게 해주어야 합니다. 

p286 캠) 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짐작케 해주는 좋은 기준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개인차가 엄청나게 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p287 캠)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p296 캠)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p297 캠)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p298 캠) 삶의 고통이 크면 클 수록 돌아오는 상 또한 그만큼 큽니다. 

프로이트는 우리 삶이 오점 투성이인 것은 다 부모 탓이라고 했고, 마르크스는 우리 삶이 이렇게 열악한 것은 우리 사회의 상류 계급 탓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탓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밖에 없어요. 

p299 캠)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가령 우리 부모가 서로 눈이 맞는 것부터가 우연이지요! 우연, 혹은 인연이라고 합시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걸 통해서 와요.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生起)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p301 모) 깨달음이라는 건 무엇입니까?

캠)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캠) 나는 보통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아요.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p302 모) 결국 깨달음의 경험은 성자나 예술가에게만 가능한 게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군요.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잠재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잠재력은 기억이라는 튼튼한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이고요. 어떻게 하면 이걸 열 수 있습니까? 

캠)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면 열 수 있지요. 가까운 친구, 혹은 훌륭한 스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요. 이런 깨달음을 촉발하는 자극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도 있고, 교통사고 같은 것으로 당하는 충격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역시  깨달음의 문제를 다룬 책에서 나온다고 해야겠지요. 내 경우, 대부분은 책에서 나옵디다. 정말 많은 선생님을 만나는 은혜도 누리기는 했지만요. 

나의 경우 8기 연구원들, 선배님들, 구본형 사부님, 그리고 양서들을 읽을 수 있는 일주일들이 있다. 천복을 누리고 있구나. 은혜를 누리고 있구나. 감격스럽다. 

p303 모) 하지만 사람들은 묻습니다. 신화는 결국 거짓말이 아니냐고요? 

모이어스 씨는 용기있는 사람이다. 기껏 캠벨 선생님께서 다 이야기 해놨는데 이렇게 반문을 한다. 근데 이 질문을 보니 또 나도 궁금해졌다. 

캠) 아니에요.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으로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모) 모험이라면 영웅의 모험 말씀이신지요?

캠) 그래요. 영웅의 모험, 즉 살아 있음의 모험이지요. 


<6. 조화여신의 은혜> 

p307 캠) 그런데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는 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p309 캠) 많은 사람에게,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이런 놀라운 심연 체험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각각의 형상은 모두 나름의 의도와 가능성을 지닙니다. 바로 여기에서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형질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요. 

p311 캠) 우리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 우리 몸, 우리 육체의 형상과 이 만물을 짓는 에너지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알아내어야 한다는 겁니다. 에너지가 없는 몸은 살아 있을 수가 없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에서, 무엇이 몸에서 나오는 삶이고, 무엇이 에너지와 의식에서 나오는 삶인가를 느끼고 있지 않아요? 

p320 캠) 우리 가슴 가까이 있는 중심을 깨닫고 자비를 실천할 때, 곧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생깁니다. 바로 이 중심에서 인간성이 비롯됩니다. 

p322 캠)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p328 캠) 우리 삶과 우리 생각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즉 과거의 죽음과 미래를 향한 부활, 곧 수성(獸性)의 죽음과 영혼으로서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죽음과 재생의 상징을 보면 이 점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지요. 

p332 이 세상 만물의 존재가 비롯된 곳은 남성과 여성이 분화되지 않은 곳, 그러니까 성(性)너머에 있어요. 그곳은 존재와 비존재를 초월해 있어요. 그러니까 존재하는 곳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범주를 훨씬 초월해 있는 것이지요. 

p334 캠) 이 사회에서 어떤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하는 우리의 기대는 우리 인간의 정신에 어떤 변화가 와야, 이로써 사회가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사회, 그 사회의 어떤 무리와 동일시하는가?”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속한 특정 무리와만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p335 모) 어떻게 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까?

캠) 옛날에는 스승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그 방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어요. 즉 옛날의 스승들에게는 제자들에게 영적인 삶의 단서를 줄 의무가 있었지요. 그래서 사제들이 있었고, 의례라는 게 있었던 겁니다. 의례의 집전은 곧 신화의 ‘연출’입니다.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p336 캠)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p337 캠) 모이어스 씨, 우리는 이런 데 살고 있어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사람은,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모) 그런 인식과 체험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군요. 

내 방에서 우주를 보다니. 캠벨은 내게 어마어마한 저장고를 선물했다. 생각할 것, 이야깃거리, 창조성을 자극하는 것 등을 가진 보물상자같은 저장고를 말이다. 사실 지금 나는 이 거대한 사유를 소화시키기 어렵고, 체한 상태이다. 즉 그의 사유를 따라가다 길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그러나 그가 준비해 놓은 힌트들을 펼쳐보며 길을 찾아 나서본다.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므로.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p343 캠) 여기에 견주어 아모르적 사랑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닌 사랑입니다. 이 아모르적 사랑은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듯 눈과 눈이 만나는 데서 싹트지요. 말하자면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경험인 겁니다. 

모) 결국 사랑을 경험하겠다는 용기가 전통에 반하는, 다시 말해서 교회 전통에 반하는 자기만의 경험에 뛰어들게 했겠군요. 그런데 이게 어째서 서구 문화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까?

캠) 바로 그 용기 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종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남들에게서 이어받은 체험이 아닌 자기만의 체험, 그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중요시할 수밖에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은 획일적인 체계를 무너뜨립니다. 

p344 캠) 타인을 향하여 열려야 할 우리의 기관이지요. 가슴을 열고 남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는 게 바로 짐승들과는 다른 인간의 특질 아닙니까?

p345 캠) 그 의식하지 못했던 사랑을, 사랑의 묘약이 일깨워놓은 겁니다. 누구에게나 젊은 시절에는 이런 종류의 체험이 있었을 겁니다.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p347 캠)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p348 캠) 단테의 <<신곡>>중에서도 명구로 꼽힙니다.

 “저와 파울로는 정원의 나무 밑에서 기사 랜설럿과 귀네비어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 두 주인공이 첫 입맞춤을 나누는 대목을 읽다 말고 저와 파울로는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그러고 나서는 그날 그 책을 한 줄도 더 읽지 못했습니다.” 

p349 캠) 사랑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순간은 인생에서 고귀한 순간이지요. 

모) 바그너는 자기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런 말을 하지요?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나의 사랑이 있어야겠다, 나의 인생이 있어야겠다”, 이런 뜻이겠지요. 

p350 모) 개인적인 직관, 개인적인 리비도, 개인적인 욕망, 개인적인 사랑, 개인적인 충동을 적절하게 조정할 어떤 장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캠) 그래서 우리에게 머리가 있는 겁니다. 좁은 길은, 면도날 같이 좁은 길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지요? 

p353 캠) 사랑을 수용할 만한 다정한 가슴은 곧 ‘자비’를 수용할 만한 마음인 것이지요.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의비지요. ‘passion’은 곧 고통인데 이걸 ‘함께(com-)’하는 것인 곧 ‘자비(compassion)’인 것이지요. 독일어나 자비의 의미를 가장 확연하게 표현합니다. 독일어로 자비는 ‘미틀라이트(mitleid)’라고 하는데, ‘미트(mit)’는 ‘함께’라는 뜻이고, ‘라이트(leid)’는 ‘고통’, 혹은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은 이 남자가 자기와 사랑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테스트 한 겁니다. 

p355 모) 사랑은 내 앞에 있는 것이군요. 아모르는 내 앞에 있는 길이기 때문에 눈과 눈이.......

p356 캠) 사람들이 살기는 살되, 죽은 삶을 살고 있는 땅, 자기 삶에 대해 아무 용기도 없이 사는 땅, 남이 하는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사는 땅이 바로 황무지 입니다. 

p358 캠)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이자 성취이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 

p359 캠)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p360 캠) 다른 인간을 향한, 자연스러운 가슴의 열림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인 겁니다. 

모) 융 박사는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고 한 적이 있습니다. 

p361 캠) 결국 우리는, 모든살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듬살이가 용남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어려움 중 하나는 모듬살이가 베풀어주는 마당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실제로 버티어주는 것이 모든살이가 될 때 이 삶은 그만큼 더 어려워집니다. 

마틴 루터는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음유시인입니다. 그에게는 ‘사제’라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느냐에 대해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중세의 교회를 허물어 버린 겁니다. 루터가 허물어버린 교회는 아직까지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지요.

p364 캠) 결혼은 결혼입니다. 결혼은 사랑 놀음이 아니에요. 사랑 놀음에서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결혼은 평생의 약속입니다. 평생의 약속이니까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지요. 만일에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모) 결혼에서 연애 감정은 끝납니까?

캠) 어떤 결혼에서는 그렇고 어떤 결혼에서는 안 그렇죠. 그러나 음유시인 전통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이었어요. 

모) 성실이라면요?

캠)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도 않는 태도....... 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결혼함으로써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그 개인보다 더 귀한 것에다 복속시킵니다. 진짜 결혼 생활, 진자 연애는 바로 이러한 관계 안에 있어요. 우리도 바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내 말뜻을 알겠지요?

p366 캠) 인생은 관계 속에 들어 있어요.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런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결혼과 연애의 차이점이 분명해집니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의 동의 아래 한 동안 계속되는 두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p367 캠) 눈을 감음으로써, 즉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모르폴로지, 즉 사물의 근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p368 캠)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이성의 측면과의 만남이랍니다. 

모) 사랑에 관한 자기 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캠) 참 신기한 일도 다 있지요. 이건 흡사, 그 사람과 함께 할 미래가 기정사실이 되어 우리에게, “이 사람이 바로 너와 함께 살 사람이다”,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아요. 

p369 캠) 사랑에는 면역성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을 어떤 관계에 면역되게 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훌륭한 연애 관계, 내가 말하는 건 진짜 근사한 연애 관계를 말합니다만, 그런 걸 가지면서도 동시에 결혼 관계에 성실할 수 있느냐 하면, 나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봐요. 

p370 캠) 사랑은 도덕성에 도전하지요.

사랑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사랑이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삶의 양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이지요. 

사랑은 곧 신의 임재입니다. 사랑이 결혼보다 상위 개념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이게 곧 음유시인들의 생각이기도 했고요. 신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곧 신이 아닙니까? 

p371 모) 이 세상에도 지옥은 있습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옥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채 살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참 일리 있는 말입니다. 

p373 캠) 나는 언젠가, 있는 대로 다 벌리고 아무거나 다 삼키는 입 속에 심장이 하나 들어 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를 집어삼키게 될 사랑을 그린 것이지요. 부모가 조금 줄여서 베풀어야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사랑이고요.

모) 사랑에는 기쁨만 있는 게 아니라 슬픔도 깃들여 있다는 것이군요.

캠)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모)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캠)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8. 영원의 가면> 

p375 캠) 신비를 체험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오감(五感)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우주의 어떤 차원이 있다는 걸 압니다. 여러 <<우파니샤드>> 중 하나에서 적절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어요.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2004년 미크로네시아의 축 섬으로 선교여행을 갔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연신 ‘아!, 아! 아!.......’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때보다도 더 강렬하게 대자연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했던 사건이었다. 

캠) 이렇게 참여하고 있는 순간에 이 사람은 아마 존재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는 겁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이런 경험을 하지요. 즉 인간의 차원보다는 훨씬 위대한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p376 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우리 마음속에서도 전쟁이 터집니다. 우리가 내릴 가능성이 있는 결정은 네댓 가지나 됩니다. 물론 내 마음속에 있는 가장 힘센 신의 영향력이 바로 나의 결정을 주도하게 되겠지요. 그 힘센 신이 잔인하다면 나의 결정은 물론 잔인할 테지요. 

모) 그게 우리의 신앙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선생님은 믿음도 있고, 경이도 느끼시는 분 아닙니까?

캠) 아니에요. 내게 믿음은 있을 필요가 없어요. 내겐 경험이 있으니까요.

p377 모)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디에서 옵니까?

캠) 우주의 생명인 궁극적인 에너지에서 오지요. 내가 이렇게 대답하면, “그런 에너지를 생성시키는 어떤 존재가 있기는 있구나”, 이렇게 응수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나는, “왜 궁극적인 신비가 비인격적인 자연이면 안 되느냐”고 바문하게 될 테지요. 

p385 캠) 

신부 : 인격신(人格神)을 믿습니까?

캠 : 안 믿습니다. 신부님

신부 : 그런데 말이지요, 인격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어요.

캠 : 신부님, 증명이 되어버린다면 믿음의 가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신부 : 그렇군요, 캠벨 씨, 만나 뵉게 되어 반가웠어요. 

카톨릭 신부가 나에게 “인격신을 믿습니까?” 라고 한 것은, 그 신부 역시 비인격신의 존재, 초월적인 바탕자리, 혹은 에너지 자체로서의 비인격신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뜻이에요. 

p387 캠) 자기 삶을 가슴으로 사는 삶의 단계에 올려놓은 사람에게는 다 그렇습니다. 

(다 그러함 : 모이어스 씨가 곧 그 깨달음의 수레인 것이지요. 모이어스 씨가 곧 정신의 광휘인 것입니다.)

모) 삶의 본원은 무엇입니까?

캠)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신은 그 하나의 삶을 표상하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 하나의 삶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는 질문을 자주 던지지요. 사람의 현상을 놓고 자꾸만 그러한 현상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 하느님이 만드신 거야”, 이러고 말겠지요. 이런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삶의 본원인 겁니다. 

모) 그러면 종교는 무엇입니까?

캠) ‘종교’라는 말은 ‘렐리기오’, 즉 ‘뒤로 연결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둘이서 나누어 사는 하나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삶이 있다면 내가 사는 조각난 삶은 한 삶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렐리기오’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은 종교의 이미지에 상징으로 나타나 있어요. 상호 연결되는 상태를 드러내는 것, 이것이 곧 종교인 겁니다. 

p388 모) 유명한 분석 심리학자인 융 박사는 종교의 상징 중에서 가장 강력한 상징은 원이라고 했습니다. 

캠) 온 세상이 원입니다. 세계에 있는 원꼴의 둥근 이미지는 모두 인간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p389 원은, 한편으로는 전체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건 아마 원의 공간적인 측면일 것입니다. 그러나 원에는 시간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어딘가로 갔다가는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고는 합니다. 그렇듯 원도 항상 떠났던 자리로 돌아옵니다. 

신은 알파요 오메가요, 본원이자 종국입니다. 따라서 원은 바로 시간의 장과 공간의 장에서 완결된 완전성을 상징하는 겁니다. 

p392 모) 융 박사는 원을 ‘만달라’라고 부르고 있지요?

캠) ‘만달라(mandala)’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가 곧 ‘원’입니다. 그러나 만달라의 원은 근야 원이 아니고 다른 원과 상호 관계하거나 상징적인 문양을 이룸으로써 하나의 우주 질서를 상징합니다. 만달라를 그리는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원을 우주적인 원과 상호 작용하게 합니다. 

p393 캠) 우리 삶은 어디에선가 쉴새없이 솟아오르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으로 끊임없이 생명을 내어보내는 곳, 이곳이 바로 무궁무진한 에너지의 근원인 겁니다. 

p394 캠) 우리 삶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을 생각해보세요. 삶의 시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 점으로 돌아가보세요. 이 한 점이 바로 요체랍니다. 괴테는 신성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 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p395 캠) 비교신화학 강의를 시작하면서 사실 나는 약간 두려워했어요. 학생들의 종교적인 신앙을 허물어뜨리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던 거지요. 그러나 곧 정반대가 된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학생들에게 종교 전통이라는 것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되었어요. 그런데 학생들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이미지를 비교하다가 종종 자기네 종교의 이미지가 지닌 전혀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다른 문화권 이미지에서, 자기네 이미지 이상의 내적, 영적 의미를 해석해낼 수 있을 대 특히 그렇지요. 

p407 모) 신화는 형이상학을 다룹니다. 그러나 종교는 윤리, 선악은 물론이고, 신 안에서 우리가 타인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타인을, 아내를,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다룹니다. 신화에서 윤리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어떤 역할을 합니까?

캠) 우리는 우리와 타인이 하나됨을 깨닫는 형이상학적인 경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바 있지요. 윤리라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윤리는 우리와 타인이 하나인 듯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요. 그러나 종교에서는 우리가 이런 경험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종교는 우리에게, 타인과의 자비를 나누는 관계에서 비롯하여 우리의 행동 양식을 아주 교리로 찍어내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자기에게 유익한 방향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가르침으로써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라는 식의 삶의 양식을 제공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와 타인을 동일시하는 겁니다. 

p409 캠)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때의 깨달음을 나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이 깨달음은, 이 세상에서의 영생불사 체험과 관계가 있습니다. 

p410 모) 아름다움은, ‘살아 있음’의 환희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캠) 순간 순간의 삶이 그런 체험의 연속이어야 합니다. 

‘이 순간’이 바로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모이어스 씨,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주제인 존재를, 우리 나름의 표현법을 통해서 그려내려고 하는 일에 지나지 못합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가 안고 있는 이 주제는 아닌 것입니다. 

캠) 예술이 ‘비추어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신에 대한 예술가의 생각, 신에 대한 사람들의 체험....... 그러나 궁극적인 신비, 무량의 신비는 역시 인간의 체험 너머에 있어요. 

p411 모) 그러니까 우리의 체험을 언어도 드러내기는 해야겠지만 우리 언어는 그 체험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군요. 

캠) 그래서 시(詩)가 있는 거지요.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含意)의 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는 정수(精髓)를 통해야 드러납니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명문 <<개인의 운명에서의 명백한 의지에 대하여>>에서 재미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어요. 그의 생각은 이래요. 어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자기 인생이 누군가의 명령과 계획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어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말하자면 어떤 소설가에 의해 쓰여진 소설 같다는 느낌을 받는 거지요. 이렇게 놓고 보면, 인생을 살면서 당한 중요한 사건은 외견상으로는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일관된 구성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듯 보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일관된 구성은 누구 손에서 이루어지느냐?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꿈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은 알지 못하는 우리의 어떤 측면이 만들어낸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도 우리 안에 있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연히 만나는 특정인은 때로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지는 우리도 모르게 그 특정인을 중요한 인물로 인식하고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모르는 중에 만사가 만사의 구조를 결정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만사는 하나의 교향악단처럼 아귀가 척척 맞아들어갑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의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어떤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많은 사건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의 책임이 어느 한 사람에게 있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사람을 비방할 일은 아니라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우리 뒤에 어떤 의지가 있고, 그 의지가 우리를 조종하는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의지의 정체를 알지 못하지요. 우리가 그 의지의 조종대로 움직이느냐 여부도 모르는 일이고요. 

p412 모) 우리는 모두 목적이 있는 인생을 삽니다. 선생님께서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는 걸 믿습니까?

캠)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모) 그건 아닌데요. 그건 아닐 겁니다. 

캠)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 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모)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제 믿음도 이쪽으로 기웁니다. 

p413 캠)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p414 캠) ‘옴(AUM)’은 우리 귀가 들을 수 있는, 만상이 체현하는 우주 에너지의 소리입니다. 먼저 목구멍으로 ‘아!’ 소리를 내고 ‘오’라는 소리를 입안으로 가득 채웠다가, ‘음’, 하면서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이 소리를 제대로 내면 모든 모음이 이 소리의 발음 안으로 들어옵니다. 한 번해보세요. “옴!” 자음은, 모음의 소리를 끊는 일밖에는 못합니다. 모든 형상이, 궁극적인 ‘형상’의 단편에 지나지 못하듯 모든 말 또한 이 ‘옴’의 단편에 지나지 못합니다. ‘옴’은 소리나는 것, 곧 우주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소리입니다. 티베트 승려의 ‘옴’ 송(頌)을 한번 들어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겁니다. 우주는 존재의 ‘옴’ 송입니다. ‘옴’ 송을 통하여 우주와 접촉하고 우주를 느끼는 것, 이것이야말로 절정 체험입니다. 

 옴....... 태어남, 존재하게 되기, 사멸하여 온 곳으로 되돌아감. ‘옴’은 사대의 음절’이라고 불립니다. A, U, M ....... 셋밖에 없는데 또 한 음절은 어디에 있을까요? 한 ‘옴’이 끝나고, 또 한 ‘옴’이 시작되기까지 그 밑에 깔리는 침묵입니다. 내 인생은 ‘옴’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는 침묵도 있어요. 그 침묵을 우리가 여기에서 영생하는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이것은 필멸의 팔자를 지닌 것, 저것은 영생하는 것, 영생하는 것이 없으면 필멸하는 것 또한 없습니다. 

p415 모) 의미는 결국 언외에 있군요

캠) 그렇습니다. 말이라는 것에는 조건이 있고 제한이 있어요.

모) 그런데도 우리 이 하잘것없는 인간은 이 하찮은 언어에 머무는군요. 아름답기는 하나 모자라서, 그리려고 해도 그리려고 해도.......

캠)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3.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와 전체적인 뼈대

 <<신화의 힘>>은 서문에서 작가에 대하여 많이 보여주고 있다. 책을 읽기 전 독자가 작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시작할 수 있었던 점이 책을 읽는 내내 도움을 주었다. 

 목차는 8개로 구성되어 있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2. 내면으로의 여행
3. 태초의 이야기꾼들
4. 희생과 천복
5. 영웅의 모험
6. 조화여신의 은혜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8. 영원의 가면

 간단한 목차이지만 내용은 간단하지 않다. 한 챕터 아래 있는 대담 내용은 모이어스와 캠벨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잠시 옆길로 새는 것 같다가도 다시 큰 줄기 안으로 들어온다. 8챕터를 다 읽으면서 느낀점 중 하나는 조셉캠벨은 다양한 이야기거리 속에서 하나의 줄기를 놓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던 것을 다른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신화에 대한 정신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작가는 많은 사례를 들어 이야기 하면서도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한 메시지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내 책을 읽고, “이거저거 다 이야기 하고,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데?” 라는 질문을 받지 않도록 말이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내가 신화에 대해서 까막눈이라 그럴지도 모르지만) 캠벨의 대답을 듣고 모이어스가 질문할 때 화제가 전환되고 있다는 느낌이 몇 번 있었다. 큰 주제 아래 작은 소주제로 나누어 대담 내용을 좀 더 체계화 시켰더라면 신화를 처음접하는 초보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신화의 힘>>은 비교신화학의 세계적인 거성 조셉 캠벨과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의 TV대담 초고를 책으로 재구성한 것이란다.  그리스 로마 신화뿐 아니라, 북미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와 인도 신화, 불교 사상, 중국의 노장 사상은 물론 20세기 현대 영화 <스타워즈>, 비틀즈까지 풍부하게 활용하여 신화의 본질과 그 속에 녹아 있는 '큰 지혜'를 들추어냄으로써, 영적·정신적 가치를 잃어 버린 현대인에게 더욱 지혜롭고 깊이 있는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1985~1986년에 이루어진 이 대담은 미국의 사회교육방송 PBS(우리 나라 EBS와 비슷함)에서 6시간 짜리 시리즈물로 방영한 것이란다. 다양하고도 심오한 빌 모이어스의 질문에 아무런 막힘없이 설명해주는 조셉 캠벨은, 세계 전역에 퍼져있는 다양한 신화를 넘나들며 사회·정치·경제·종교·인간·환경·결혼·사랑·범죄 등 현대 인간사 거의 모든 문제를 신화의 테두리 안에 빗대어, '신화란 내면의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 현대인이 궁극적으로 걸어야 할 길을 알려주는 자상한 안내판임'을 전해주었다.  

  두 대담자가 자기의 학식이나 경력 등을 내세우지 않고 일상이나 주변 인물과의 사건이나 상황 등을 통해서 신화가 어떻게 삶에 뿌리 내려 있는가를 들려준다.  또한 100여 컷의 그림·사진 자료는 고대부터 현대를 아우르는 신화의 다양한 상징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설명을 읽어도 아직 볼 줄 아는 눈이 없어 어렵다. 특히 책 중간에 ‘원형’의 이미지들 모아두었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우리 나라에서 이 책은 1992년 고려원에서 처음 펴냈단다. 그리고 절판 됐다가 10년 후 다시 이끌리오에서 펴내면서, 역자 이윤기는 당시 오역을 바로잡고 문장을 꼼꼼히 다듬었다. 신화가 새로운 문화 코드로 자리잡은 요즈음, <<신화의 힘>>은 불확실한 우리 삶의 지침을 이야기 해준다. 


       2. 감동적인 장절(배울점)

 P12 조셉 캠벨은 인생을 모험이라고 확신한다.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란 책이 있다. ‘인생은 하나님이 진두지휘하시는 모험이다.’라고 압축하여 표현 될 수 있는 이 책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조셉 캠벨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안에 있는 신에 의해 인생은 모험의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닐까? 모험을 생각하면 ‘용기’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데 용기 있는 선택을 하고 싶다. 그래서 후에 나도 인생은 모험이었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P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진동하는 계의 진폭이 급격하기 늘어남)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강의할 때 살아 있음을 가장 많이 느끼는 데, 욕심을 내보자면 글을 쓸 때도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다. 더 강렬하게. 


P120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너는 가능성이다>라는 가제를 가진 초고를 쓸 때 내가 마음에 품고 있었던 기도.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나를 통해 흘러가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바라기만하고 내 맘대로 써서 그런지 초고는 전하고자 하는 큰 줄기가 없이 나의 추억어린 사례들의 열거로 남았다. 큰 줄기, 내가 하고 싶은 말, 아니 나를 통해 하고 싶어 하는 그 말들을 잘 받아적어 써내려가고 싶다. 그분이 오셨을 때 ‘훅’ 말이다. 


P233)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거나 다름없습니다

변모의 과정에 든거나 다름 없는 상태에 대한 설명은 기록하고 다시 읽어보며 그 과정에 드는지 안드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p223 모) 부모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천복을 찾게 해줄 수 있습니까?

캠)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아이에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도와줄 수 있지요. / 학생들과 독서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노라면 학생이 보이는 반응에서 뭔가를 느껴낼 수 있지요.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관찰’은 어디에나 요긴한 행위인듯 하다. 


p234 캠)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캠)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변모의 열쇠! 이것도 당연히 기록해 놔야 하는 감동적인 장절!


p245 모) 오늘날의 사람들은 영웅이 아닌 명사(名士)를 숭배하는 것 같은데요. 

캠) 유감이지만 그렇군요. 브루클린의 고등학생들에게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설문을 돌렸더니 3분의 2가 ‘명사’라고 대답했다더군요. 뭐가 되자면 어느 정도 노력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하는 한심한 대답이지요. 

나에게 하는 말이자,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뭐가 되자면 어느 정도 노력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해. 무엇을 얻으려거든, 무엇이 되려거든, 무엇을 하려거든 반드시, 희생해야 하는 부분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희생을 다른 말로 한다면 그것이 노력 아닐까? 


P277우리는 학생들에게 그들 나름대로 구상하게 하고 그렇게 구상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인도해주지요. 그러니까 학생은 자기 나름의 자기 길을 찾아야 하지요. 그러니까 그 길은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을 향한 잠재력, 다른 사람은 체험해보지 못한 것, 다른 사람에 의해서는 체험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교육자의 입장에서 배워야 할 점이다. ‘그들 나름대로’ 이 부분을 마음에서 놓치 말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간에 척박한 교육환경 속에서라도 내가 가진 심연의 교육관을 놓치지 말고 학생들 앞에 서야한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면 표현도 달라지겠지. 그리고 같은 것을 같은 방법으로 전달하더라도 내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졌으므로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도 내 마음을 조금은 알아차리게 되지 않을까? 


279 캠)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려야 한다는 것! 


P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p347 캠)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 내 천복에 머물러 내가 행복한 것. 머무르자. 누가 뭐래도, 내 길을 가면 그뿐인 것이다. 


     3. 보완점

 개인적으로 <<신화의 힘>>을 읽는 내내 즐거움, 힘듦, 어려움, 혼란, 행복, 깨달음 등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했다. 컬럼에도 썼지만 아직 알것 같은면서도 모르는 상태가 지금의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신화에 관해 초보인 나 같은 사람에게도 조셉 캠벨의 사유가 쉽게 잘 전달되려면 독자인 나의 노력과 함께 책을 쓴 저자의 노력도 가미되면 좋겠다.  8개로 나뉜 목차 아래 하위 소주제로 엮인다면 좀 더 다양한 이야기가 체계적으로 독자의 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큰 줄기가 있음은 알겠는데 그 줄기에 붙은 작은 줄기들이 엉켜있는 상태이다. 물론 읽은 내가 재구성한 줄기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 더 이야기 하자면 중간에 모아둔 원형에 관한 이미지들에 대한 구체적인 카테고리 또는 적절한 배치가 주어진다면 독자에게 더 효과적으로 전달 될 것 같다. 

 정리 상자에 차곡차곡 물건들을 잘 정리하면 더 많은 물건을 넣을 수 있는 것처럼 ‘신화’라는 큰 틀에 체계적으로 다양한 신화들을 잘 정돈하여 제시해주면 더 많은 생각 너머의 생각들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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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20:02:53 *.154.223.199

세린낭자 잘 읽었습니다. 특히 세 가지 점에서 감탄했어요.

첫째는 인용문 중에서 밑줄을 그어놓았다가 나중에 감동적인 장절로 그걸 모으는 방법, 오 제가 벤치마킹하고 싶은 특정 기술입니다.^^

두번째는 조셉 캠벨씨의 사진을 볼 수 있었어요. 아내와 허니문을 갔을 때의 사진이 특히 마음에 들어요. 여든 때 사진도 훈남이었는데 젊을 때도 번쩍번쩍하시네요.

아이들과 학생들이 어떻게 천복을 찾아나가게 할 건지에 대한 인용문을 읽으며 교사로서 고민하는 정성이 느껴졌습니다. 그거 저도 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레이스 때도 내내 느꼈지만 사부님이 하라시는 대로 성실하게 하는 세린낭자, 멋지십니다. 저도 말 좀 잘 들어야할텐데 말입니다. 이러다 공과금 연체료 물듯이 할 것 같스므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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