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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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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9일 11시 44분 등록

신화의 힘 (The Power of Mith)

(Joseph Campbell & Bill Moyers 대담, 이끌리오, 2002.07.20)

 

1. ‘신화, 무한의 깊이(저자에 대하여)

 

Joseph Campbell

 

 

Joseph Campbell (1904-1987)         

캠벨.JPG

- 저자는 비교신화학이라는 학문 장르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보통 새로운 학문을 시도하거나 새로운 직업을 탄생시키는 사회나 사람은 그 창조적 성과에 맞먹는 대중적 아픔이나 정서적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캠벨 또한 그 그늘의 시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고통의 시기는 당사자에게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1달러 지폐를 보며 이 지폐가 있는 한 나는 가난하지 않다는 자족으로 버틴다. 웅크린 그늘의 시기 5년 동안을 뉴욕 주 우드스턱에서 보냈다. 그 시기는 신화학자로써의 자궁이었다.

 

모든 그 분야의 대가는 자연스러움과 간결함이 있다. 이것은 경지라 부를 만 한데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월이 필요하다. 제주 유배의 황망함 완당, 자의식과의 싸움 고흐, 고개가 굳어감을 개의치 않았던 미켈란젤로, 강진 유배 정약용, 흑산 유배 정약전, 연습생 홈런왕 장종훈, 기어코 일가를 이루어낸 그 뚝심. 바로 고통의 세월이 만들어 내었다.

 

캠벨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유럽에서 공부하다가 1929년 월스트리트가 무너지기 3주 전 미국으로 돌아왔다. 일자리 같은 것을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 시절은 정말 멋진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그에게 돈이 없다는 건 느꼈지만 가난하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않았다. 그는 회상한다. 

 

그 당시 사람들, 좀 좋았어요? 나는 그 당시에 프로베니우스를 발견했어요. 문득 이 양반이다 싶었어요. 그래서 나는 프로베니우스가 쓴 것은 모조리 읽겠다고 결심하고 읽었지요. 책 살 돈은 없어서 취직하면 주겠다고 하고 서점에서 미리 받았지요. 그때 5년간 틀어박혀 책을 읽으며 기본 독서와 공부는 다 했어요.’

 

그는 제임스 조이스와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토마스 만의 글을 읽었다. 한번 잡은 책을 이해하기 위해 그 책의 저자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들을 거슬러 읽어가며 모든 책들을 씹어 삼켰다.

 

그의 독서법은 슈펭글러가 니체를 언급하면 니체를 읽고 니체가 쇼펜하우어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쇼펜하우어 를 읽고 쇼펜하우어를 읽고 보니 칸트라는 철학자의 사고를 읽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어 칸트를 읽고 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진행되는 지적 희열의 세계는 결국 사태의 본질에 이르는 길과 다르지 않았다. 그가 삶의 원형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만물의 원형질을 갈구했다. 존재 너머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질문을 대신하여 고민했다. 그 질문의 대답은 신화가 풀어줄 것이라는 확신을 놓지 않았고 신화라는 화두를 잡고 또, 놓지 않았다. 말하여 질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의 진리로써의 지위를 상실한다. 그리하여 말하여진 중에서 가장 윗자리가 신화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그는 그 끝에 본질이 드러나는 광경, 생의 눈물겨움을 두 눈으로 목도하는 순간을 이 책에서 밝혀 놓았다.

그것은 그가 갈구해 마지않던 원형질의 감동이었다.

 

어느 날 해변을 걷던 중 나는 신기한 경험을 목격했어요. 황소 모양의 원형질이 풀 모양의 원형질을 먹는 것 같았고 새가 물고기를 잡아먹는 광경도 새 모양의 원형질이 물고기 모양의 원형질을 먹는 것 같았어요. 많은 사람에게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이런 놀라운 심연 체험이 있을 겁니다.(신화의 힘 에서)

 

그의 원형은 어떠했는가? 그의 어린 시절은 신화를 생산할 수 있었던 천혜의 환경이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신화를 만들어 내었으니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 환경의 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신화라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신화를 삶에 적용시키고 신화 모티프와 유사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교육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카톨릭 가정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무리를 가르치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고 하늘 나라로 돌아가는 이 순환적인 주기를 계절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랍니다. 말하자면 1년 내낸 계속되는 의례가 가변적인 존재의 불변하는 핵 같은 것을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다 새겨놓는다는 겁니다.’ (신화의 힘 에서)

 

그러다 그는 곧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지게 된다. 당시 버팔로 빌이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해마다 와서 와일드 웨스트 쇼로 공연을 벌였는데 그걸 보고는 그만 인디언을 짝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인디언의 신화를 읽게 되고 오래지 않아 어릴 때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예수의 모티프와 아메리카 인디언의 모티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신화라는 화두를 잡고 오늘날까지 놓지 않았다. 카톨릭과 인디언에서 시작된 한 인간의 지적 탐구가 인류를 풍요롭게 하였는데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Bill Moyers

 

 빌모이어스.JPG  

Bill Moyers (1934~ )

 

Oklahoma, Hugo 출생 (1934)

North Texas State College in Denton, Texas (journalism 전공)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Austin, Texas (편입학)

▷ 케네디 정부 산하 평화봉사단장 임명 (1961)

▷ 존슨 정부 특별보좌관 (1963)

▷ 백악관 대변인, White House Press Secretary (Johnson Administration from 1965~1967)

▷ 뉴스 비평가, 방송인, 프로듀서, 저널리스트 (trenchant critic, 아주 예리한 비평으로 정평)

▷ 현, Schumann Center for Media and Democracy 이사장

▷ 현, New York City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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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ident Johnson (오른쪽) & Moyers 특별보좌관 (왼쪽),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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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과 모이어스 (방송 대담 중)

 

 

2. ‘신화속으로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캠벨 선생님의 언어, Ü : 나의 언어)

 

 표지.JPG

 

 

이윤기(옮긴 이)의 서문

 

□ 한 문화 권역과 다른 문화 권역의 영웅, 혹은 구세주는, 두 문화권의 교섭한 경험이 없는 경우에도 서로 비슷비슷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바닥,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이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른 것, ‘원형이라고 부른 것이 서로 비슷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캠벨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입니다. (P. 5)

 

빌 모이어스의 서문

 

□ 캠벨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P. 8)

 

Ü 생의 유한성, 임시성. 인류 발버둥의 근원

 

□ 재판관이라는 위치가 단순한 직업적 역할만을 상징한다면 그 사람들은 굳이 검은 법복을 입을 필요 없이 회색 양복을 입고도 재판정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법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강제력 이상의 어떤 힘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장의 권능이 의례화하고 신화화하는 것이다. (P. 10)

 

Ü 보이지 않는 권위는 신화적 의례로 비로소 눈 앞에 현현하는데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거나 유치한 수준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는 그 신화를 공유하는 구성원의 의식 안에서 완성된다. 맞는가?

 

□ 해탈을 겨냥하는 요가의 행자는 자신을 빛과 동일시합니다. 그는 일단 여기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을 섬길 뜻이 있는 사람은 이런 식의 탈출은 하지 않습니다.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P. 12)

 

Ü 의례의 탄생은 사물, 인물, 현상 등과의 일치화 작업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동일시 된 신화의 덕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P. 12)

 

□ 지적 가능성을 강타하는 에너지의 폭풍 (P. 12)

 

Ü 영웅이 되려거나 누군가의 스승, 친구가 되려면 그 폭풍을 상대방에게 날릴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P. 15)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 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비로 이것임. 사냥꾼과 사냥감이 된 동물 사이에는 참으로 불가사의하고도 놀라운 일종의 협약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협약을 통하여 이 양자는 죽음과 매장과 재생의 신비스럽고 영원한 주기 속에서 하나의 동아리가 된다. (P. 16)

 

Ü 신화는 인류 원형의 본질을 읽으려는 시다. 걷어내고 걷어내어 그 홍심에 다가서려는 눈물겨운 시다.

 

□ 너희가 참으로 하찮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이 곧 신에 대한 대접이 되느니라 (P. 17)

 

그가 찾아낸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는 인종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신의 이미지는 무수하다.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신화 역시 신의 가면이다. (P. 18)

 

Ü 낮고 왜소한 우주의 외침을 듣는 것, 그 안에 우주가 있고 신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은 인종의 굴레 안에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며 천하고 더러운 것 안에서 없다는 생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신은 우리를 천하고 더럽고 가난하고 우습고 그래서 나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우리를 테스트한다.

 

□ 우리 현대인들은 이 땅으로부터 신비라는 신비는 모조리 벗겨버렸습니다. 그래서 사울 벨로의 말마따나 믿음을 대청소해버린상태입니다. , 이제 어떤 것이 우리의 상상력을 살찌우는지요? 할리우드의 영화, 텔레비전 영화에게 이 일을 맡겨야 할까요? (P. 19)

 

Ü 물신의 관성이 계속될 때 결국은 대지 위를 철근으로 뒤덮어버리고 그 마음 자리에는 남들에 대한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똬리를 틀고 앉아 스스로를 갉아 먹는다.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 우리는 이 순간에도 우리의 외적인 자연에 관한 지식은 물론 내적인 신비에 관한 지식을 겨냥한 인류 정신의 가장 위대한 도약에 참여하고 있다. (P. 20)

 

Ü 깨달음의 시대, 수행의 시대를 지나고 만이 남은 시대에는 더욱 절실하게 참여하여 할 것이다.

 

□ 강력한 복합 문화적 미래 (P. 20)

 

Ü 인류 전체에 편재된 신화의 파편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어 가면 도래할 미래

 

□ 그는 전인미답의 광대한 우리 과거의 파노라마를 아는사람이었다. (P. 21)

 

Ü 나를 그리로 인도해 주시라. 간절하다.

 

. 신화와 현대 세계

 

□ 그저 우리 몫의 삶을 살면 신화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지요 (P. 25)

 

Ü 움직이는 만큼만 먹고 필요한 만큼만 얻고 얻은 만큼만 소비하고

 

□ 교육과정에서 그리스 문학, 라틴 문학, 성서 등 이런 게 다 떨어져나간 지금은 신화에 관한 정보를 얻을 길이 깜깜해지고 말았어요 (P. 26)

 

Ü 근본적이고 시원적인 물음에 답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우주가 날마다 시시때때로 제공하는 각종의 ‘Sign’을 읽어낼 능력이 없다는 말과 또한 같겠다.

 

□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토마스 만의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를 통해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P. 28)

 

Ü 진실에 다가서려는 시인에게서 독자는 자기 검열의 비수가 꽂힌다. 삶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바로 그 독자 대중이 말이다. 완전히 불완전한 인간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밤낮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데다 몸은 조그만데 머리는 터무니없이 크니, 사랑스럽지 않은가요? 일곱 난쟁이를 그려낸 월트 디즈니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집에서 기르는 우스꽝스런 강아지를 보세요. 불완전해서 사랑스러운 겁니다. (P. 28)

 

Ü 그렇다면 나는 사랑스러워야 할 텐데.

 

□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몹시 힘이 드는 사람이 생기는 게 다 이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은 진정한 사랑으로 연결 될 수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무슨 뜻이냐, 고통이라는 거지요. 고통은 불완전한 존재만 체험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P. 28~29)

 

Ü 그 고통이 부활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닌가. 33세 청년 예수의 피는 그래서 성스러움의 가장 윗자리에 있는 피다. 고통이다.

 

□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순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P. 29)

 

Ü 육체와 자아의 공명, 소동파는 그의 시 琴詩에서 이 공명의 매커니즘을 이렇게 말한다.

 

만약에 거문고에 소리가 있다 하면

갑 속에 두었을 젠 어이 해 안 우는가

그 소리가 손가락에 있다고 한다면

그대의 손끝에선 어째서 안 들리나

 

동서의 길이 이렇게 연결되고 이어지는구나.

 

□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P. 30)

 

Ü 바로 거기에 있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일. 우리가 숨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

 

□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래서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는 일은 가슴이 말해줍니다. (P. 31)

 

□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훌륭한 삶을 함께 산 사람들도 40~50대에 무수히 갈라서는 것을 볼 때 마다 놀라고는 한답니다. 이들은 자기네 관계를 아이들을 통한 관계로 해석하면서도 그것이 실수를 범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p. 32)

 

Ü 얼마 전 우리부부도 이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몇 가지 규칙을 만들어 놓았는데 먹을 것은 어른먼저, 부부(라는 용어가 왜이리 어색할까)가 대화할 때는 아이는 잊는다. 등등 아이 위주에서 부부 위주의 생활로 재편하는 내용이다.

 

□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P. 33)

 

Ü 이것은 통찰이다. 관계 정상화를 위해 상대의 욕망을 잠재울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의문들이 이 관계라는 단어 하나에서 풀려 나간다. 캠벨은 최고의 부부관계 컨설턴트였구나.

 

□ 전 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하지만 나같이 전문가가 아닌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에게 한 수 배우기 때문에 문제를 일단 위에서 내려다 볼 줄 알지요 (P. 38)

 

Ü 문제를 위에서 내려다 볼 줄 안다는 것은 사태를 객관화하고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P. 41)

 

Ü 본질이라 불리는 원형의 마음 간 곳. 한번 가보자.

 

□ 우리가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판사 자체가 아니라 신화적인 인격인 것이지요. 우리는 그들의 인격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지닌 신화적인 역할에 따라서 반응합니다. 어떤 사람이 판사가 되거나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신성한 직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P. 42)

 

Ü 이 책의 4. ‘희생과 천복에서 이 문장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결국 거룩하게 희생될 수 있는 자격은 육체가 영혼을 수레로 옮기는 자 중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거룩한 행위다. 으로 죽고 으로 다시 사는 길. 그래서 우리는 이 신화가 부여하는 권위, 그 권위를 위해 삶의 전부를 내던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올바로 이끌어지지 못한 신화를 좇을 때 항상 같이 따라다니는 폭력성을 우리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개인화 된 신화를 맹신함으로써 발생하는 폭력성 말이다. 극적으로 편향된 생각 또는 신화들이 다른 면을 인정하지 않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그 폭력, 우리는 무수히 보아왔다. 순수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그 피비린내를.

 

□ 신화는 바로 이 시각에 우리가 사는 삶과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줍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악덕이라고 하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필요악이 되어 있는 경우도 수없이 볼 수 있어요. 도덕적인 질서는 지금 바로 이 곳에서 우리가 사는 실제적인 삶의 도덕적 필요성과 발이 맞아야 합니다. (P. 43~44)

 

□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어린 시적 숲 속에서 많이 지냈습니다만 숲 속에 살다 보면 서로 각기 다른 이런 의식이 상호 관계 속에서 뒤엉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숲 속에는 식물의 의식도 있고 동물의 의식도 있는데 우리의 의식은 이런 의식들과 상호 작용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담즙은 우리가 먹은 음식에 우리 의식에 도움이 될 만한 게 들어 있는지 없는지를 압니다. 이 모든 작용이 곧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을 단순한 기계적 술어로 번역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P. 47)

 

Ü 갯메꽃 의지, 바람을 이기고 물을 얻으려는 눈물겨운 생의 욕망에서도 볼 수 있다. 내 주위의 모든 생의 모습들이 이와 같다. 의식 없는 것이 있겠는가. 기원을 알 수 없는 먼 곳의 생명들이 내 몸 안에 정주하기 오기 위해 했던 노력은 이와 같다. 눈물겹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그 명상의 대부분이 비의도적인 명상이기는 하지만요. 많은 사람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 데, 돈이 나갈 데에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 ~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 (P. 47)

 

Ü 그리하여 우리의 신은 物神이다. 나무 목주에서 목주 이상의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느끼는 것과 통나무 십자가에서 통나무 이상의 신령이 있음 느끼는 것과 같이 종이화폐를 보고 그 이상의 교환 가치를 읽어 내리는 물신숭배 말이다.

 

□ 성당 안에 있다가 거리로 나오면 문득 내 의식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는데 지금은 아주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구나 하는 인식이 생기겠지요. 의식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이러한 신비는 가령 돈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합니다. 이른 바 돈이라고 하는 것은 에너지를 감추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는 단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화는 이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본이 될 경우, 그는 신화화하는 차원으로 들어가지요. (P. 48)

 

Ü 나를 자신의 신화 안으로 들어서게 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 인가?

 

□ 우주라고 하는 것은 우리 태양계의 태양 같은 무수한 항성이 폭발하는 원자로 같은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지구에서 일어나는 폭발은 이 어마어마한 대폭발의 조그만 이미테이션 같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전 우주의 운행을 모조리 지켜보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어요. 우리 지구의 온도가 50도로 올라가서는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이 지구에는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다는 것. ~ 말하자면 이 균형이라는 것이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 알고 지구에서 물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 생명을 안아준 우리 환경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고 많은 일을 염두에 두고도 어떻게 우리가 아는 이러한 생물이 이 우주의 어떤 행성에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어요? 하고많은 별들이 거느리는 위성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나는 상상할 수 없어요. (P. 52)

 

Ü 광막한 우주를 상상한다는 것은 생명을 연원을 넘어선 그 너머를 응시하는 것. 얼마 전 우주의 골디락 영역에서 지구와 유사한 행성이 발견 되었다는 소식. 빛의 속도로 600, 인간의 기술로는 2,200만년을 날아가야 도착할 수 있는, 아니다. 상상으로도 발 붙일 수 없는 그 곳의 시간과 공간을 가늠할 수 있는가. 우주인의 한 사람으로서 저 광막한 우주와 시간의 역사를 헤아릴 수 있는가. 지구의 조그만 땅 구석에서,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직장인이 말이다.

 

□ 나는 현대의 진정한 공포의 도가니를 베이루트에서 봅니다. 거기에서는 서양의 3대 종교,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치고 받고 합니다. ? 성서에 나오는 같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지 못해요. 메타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참 의미는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P. 58)

 

Ü 신화의 폭력성을 본다. 서로 관계하지 못하고 이해의 문을 닫아버린 그래서 생각의 불구자들이 지배하는 곳. 반목하고 불신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네들의 편견때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 피그미족의 전설

한 소년이 숲 속에서 아름다운 새 소리를 듣고는 그 새를 사로잡아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소년은 새에게 먹이를 주자고 아버지를 조르지요. 아버지는 새 따위에게는 먹이를 줄 수 없다면서 새를 죽여버리고요. 이 전설은 그 사내는 새를 죽이고 새를 죽임으로써 새의 노래를 죽이고 노래를 죽임으로써 제 자신을 죽인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로써 그 사내는 죽는 것이지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죽는 것이지요. (P. 59

 

Ü 그 자리에 의연하게 자기 삶의 몫만큼 살아내는 새를 왜 잡아와서 자신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비약을 선사 하는가. 본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잡은 새에게서 본다. 우리는 성미정의 시를 통해 본성이 파괴된 유사사례를 볼 수 있었다. 파랑새를 통해 말이다.

 

동화-파랑새’ (성미정, 대머리와의 사랑, 1997)

 

처음부터 파랑새는 아니었어 당신도 저런 새를 갖고 싶다면 좋은 방법을 알려주지 위험을 무릅쓰고 추억의 나라나 밤의 나라 따위를 헤맬 필요는 없어 우선 새를 잡아와 흔해빠진 참새라도 새를 잡을 정도로 민첩하지 않다고 그렇다면 새를 사오라고 그리고 남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새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때리란 말이야 시퍼렇게 멍들 때까지 얼룩지지 않도록 골고루 때리는 게 중요해 잘못 건드려서 숨지더라도 신경 쓰지 마 하늘은 넓고 새는 널려 있으니 오히려 몇 마리 죽이고 나면 더 완벽한 파랑새를 얻을 수 있지 그리고 가족들 앞에서 말하라고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왔다고 모두들 기뻐하겠지 물론 밤마다 새를 때리다 보면 둔해빠진 가족이라도 비밀을 눈치채겠지 걱정 마 그 정도는 눈감아줄 거야 맞아서 파랗든 원래 파랗든 파랑새라는 게 중요한 거야 그리고 비밀 없는 행복은 하늘 아래 존재하지 않는 거야 뼛속 깊이 퍼렇게 골병 든 행복 맞으면 맞을수록 강해지는 행복 처음부터 파랑새는 아니었어

 

□ 모든 신화학은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 자라납니다. 그런 신화학이 밖으로 나오면서 충돌하고 충돌을 거쳐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여기에서 혼효를 거치면서 더욱 복잡다단한 신화학이 됩니다. 오늘날에 유효한 단 하나의 신화학은 지구라고 하는 행성의 신화학인데 이와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문제는 만유(萬有)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 것, 그리고 형제애로써 이 만유의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P. 61)

 

Ü 신화학이 생산되는 매커니즘, 그 체계를 꽤 뚫는 불교철학.

 

□ 십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장에 가면 가나안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 죽여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과는 한솥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거지요. (P. 61)

 

Ü 예수의 의도를 곡해한 대표적 구절이다. 곡해한 교파는 기독교일 것이다. 기독교가 종교에 머물고 철학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우리가 아닌 것에 대한 경멸을 넘어 폭력으로 이어지는 가치체계를 정립한 교파, 이 나라와 이 사회는 그 수장부터가 이런 가치체계로 무장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지향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여전히 민족과 국가를 보듬어야 하는가. 슬프다.

 

□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힘,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복 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복 돋우기도 하지요. (P. 61)

 

Ü 신화의 정의쯤 되겠다.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잠재력.

 

□ 자연의 충동은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대상이 아니고 복종해야 할 대상, 가꾸어야 할 대상이라고 되어 있어요.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자연과 관련된 환경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정말 놀라워요. 그래서 어떤 정원을 보면 어디까지가 자연이고 어디까지가 예술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이게 내가 일본에서 했던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지요. (P. 62)

 

Ü 캠벨은 모르긴 몰라도 한반도 이남의 전통 미술과 건축을 보게 된다면 기절하겠다. 일본에서 그리 놀랐으니 그 원형질을 보면 어떻겠는가. 순천의 선암사, 경주 남산, 청도 상원암, 설악의 백담, 봉정, 오세암, 가야 해인사, 지족, 약수, 금당선원, 백련암을 그리고 경복궁을 보게 된다면 말이다. 산 능선을 수제비로 끊이고 날 선 준봉들을 제 집 앞 정원으로 끌어들인 재기를 보면 말이다. 앵글로 색슨은 보아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보기 좋게 섞여 있다. 제 나라, 제 민족 우월함. 이래서 자기검열은 힘든 건가). 그 스케일

 

□ 인류는 기원전 5백 년경에 큰 전기를 맞습니다. 이 시점은 석가, 피타고라스, 공자 그리고 노자(만일에 노자가 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설이 옳다면)가 살던 시점입니다. 바로 인류의 이성이 크게 깨어난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인류는 동물적인 힘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때부터 천체 운행의 아날로지를 길잡이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는 이성을 길잡이로 했던 것이지요. (P. 71)

 

Ü 현생 인류의 지적 수준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때 이때가 바로 깨달음의 시대라 했다. 그 다음이 수행의 시대이며 현재는 이 지배하는 시대다. BC 500년 전과 비교하면 깨달음의 인간 지혜는 발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이제 별은 더 이상 우리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호기심의 대상, 혹은 우주 여행의 기착지로서의 관심의 대상일 수는 있겠지만요. 인간에 대한 신화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지금 어느 지점에 있는 것일는지요? (P. 74)

 

Ü 멋진 질문이다. 빌 모이어스.

 

□ 앞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 (P. 74)

 

Ü 느낀 만큼 깨닫고 마음의 여유만큼 수신한다. 신화는 우리의 여유의 크기에 따라 그리고 인간성(우주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의 크기에 따라 다가 올 수도 다가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 신화의 네 가지 기능

1.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 : 우주의 신비, 존재의 신비

2.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 : 과학이 아직 질문도 채 완전히 하지 못한 우주에 대한 차원

3. 사회적 기능 : 질서를 일으키고 한 사회의 질서를 유효하게 하는 것

4. 교육의 기능 :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 (P. 74~76)

 

Ü 신화의 역기능은 없는가. 이쯤 해서 반골기질이 뭉그적 뭉그적 올라온다. 문명의 전체주의를 붙들어 매는 기능이 있지 않겠는가. 주로 부당하게 그리고 기반 없이 민족이나 국가를 통치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부당함을 정당하게 하고 약해진 기반을 다지려 할 때 신화는 아주 효과적인 도구로 전락한다. 우리 사회는 아주 오랫동안 이 도구에 모든 구성원이 빠져있었다. 그와 같은 신화는 패쇄적이며 패쇄적인 만큼 통치는 자유롭다. 아직도 반공 신화에 빠져 붉은 색을 보면 어쩔 줄을 모르는 분들이 많이 계시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고 하면 만유신론이라고 매도합니다. 하지만 이 만유신론이라는 말은 사람을 오도하는 말입니다. 이 관념의 진정한 의미는 초 신학적 입니다. 이것은 정의 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 신학,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이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입니다. (P. 76)

 

Ü 나는 힌두를 공부하고 싶어졌다. 말하여 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더 깊은 침묵의 방법을 일러 줄 것이라 기대한다.

 

□ 내 나라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종교 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언어 집단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아시겠지요? 이렇게 태동한 신화는 이 집단, 저 집단, 그 집단의 철학이 아닌 이 땅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P. 78)

 

달에서 지구를 보면 국경 같은 게 안 보이잖아요. 이것은 미래 신화를 위한 대단히 중요한 상징 같습니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나라가 이러한 나라이고 우리가 한 겨레가 되어야 하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인 것이지요. (P. 78)

 

Ü 캠벨이 내 가슴으로 자꾸 들어온다. 존 레논이 그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Imagine’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 시애틀 인디언 추장의 편지

(중략)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 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P. ~81)

 

Ü . 위대한 철학자, 그는 이미 과학이 자연을 능멸하며 만들어낸 질량보존의 법칙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뼛속으로 알아내고 있었다. 불가의 자비를 피 속에 담아 흐르게 하고 예수의 사랑을 자연에게 아낌없이 쏟았구나. 연기(緣起)’를 어찌 깨달았을꼬. 내가 생의 임시성에 눈물겨워하며 나를 위해 이대로 죽기 싫다며 발버둥을 칠 때 현대적이지 못한 시애틀의 추장은 나의 그 마음까지 사랑하고 있지 않았나. 이 쪽팔림 어찌할건가. 어찌.

 

. 내면으로의 여행

 

□ 만일 어떤 사람이 내적인 신비, 내적인 삶, 영원한 삶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경우, 그 생각을 확장시켜줄 이미지가 처음에는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관념 체계에서 제시된 이미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게 좋겠지요. (P. 85)

 

□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음과 재생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시바신과 동일시해도 좋겠지요. 나는 시바신이다. 이것은 히말라야 요가 행자들이 수행하는 명상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기도 하답니다. (P. 86)

 

Ü 일체화, 빙의, 자리바꿈, 역할 전환. 수행의 방법 곧 신화를 체화하는 방법이다.

 

□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러한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 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P. 86)

 

□ 만물의 바탕자리는 바로 우리 존재의 바탕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세상 여기저기에 널린 온갖 잡사를 다 보고는 하지요.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이 바로 이세상 잡사의 근원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P. 87)

 

Ü 한 번 고개를 돌리니 피안이 저 쪽이네. 내가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만물은 규정된다.

 

□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P. 89)

 

Ü 사적 신화의 총량은 공적 이상과 같은가. 형이상학의 측면을 공학으로 풀어보니 역시, 아둔한 시도를 끝없이 되풀이 한다는 생각.

 

□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전제 조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식물 역시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삶의 요체 중 하나가 바로 생명이 생명을 먹는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먹는 행위 아닌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 곧 주로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의례의 기능인 것이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세상은 원초적인 범죄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이 원초적인 범죄를 모방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이 모방의 의례에 참가함으로써 위에서 말한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 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 (P. 91~92)

 

Ü 너를 죽여 내가 취함으로 내가 살고 그리고 결국 내가 죽어 너에게로 간다. 원초적인 범죄에 대한 죽임의 양형 기준, 그 벌을 받는 일과 원형의 삶에서 화해하는 일은 같다.

 

□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p. 96)

 

Ü 원형에 다가서는 삶의 Ritual. 식물과 같이 스스로 밥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원초적 결함이 이러한 리츄얼을 낳았으나 인간에게는 결함을 넘어선 범죄로의 진화가 이 하나의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MORE’

 

□ 기독교는 삶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요. 우리가 이어받은 성서 문화를 보면, 할례나 세례를 받지 않은 삶이라고 하는 것은 썩은 것, 아주 자연스러운 충동은 죄악입니다. (P. 97)

 

Ü 터부와 금기, 제약과 통제. 그리하여 발달된 법체계,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공리를 들이미는 기하학에 기반한 기독교 체계, 자본 체계 그 거대한 SYSTEM을 떠받치는 근간이 될 수도 있겠다.

 

□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P. 100)

 

Ü 여성의 위대한 능력에 대한 남성의 열등감으로 인류에게 보태어진 폭압에 대해 남성의 한 사람으로 머리 숙여 사죄한다. 그 아름다운 육체와 정신을 무슨 근거를 들어 오랜 시간 동안 꽁꽁 묶어 놓았을까. 그 아름다움을.

 

□ 하느님이라는 말은 우리 언어에서 상당히 모호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기왕에 알려진 개념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월한 존재는 기왕에 알려진 바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결국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이름과 형상 너머에 있는 존재인 것이지요. (P. 101)

 

Ü 말하여 질 수 없는 곳 또는 것

 

□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P. 102)

 

Ü 그래서, 아는 것을 뽐내는 인간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 줄 알았다. 자숙하고 겸손하자. 사회적으로 강요된 겸손이 아닌 우주의 미물로써의 겸손 말이다.

 

□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칸트의 말마따나, 그 자체로써만 존재하는 사상은 사상이 아니지요. 그 자체로써만 존재하는 사상은 사상성을 초월합니다. 생각될 수 있는 것을 초월합니다. 최상의 것은 생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표될 수 없습니다. 차상은 오해됩니다. 왜냐,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이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좋은 것이 바로 우리가 언표하는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언표되는 장입니다. (P. 103)

 

Ü 이것, 눈물 겨운 것이다. 존재로써의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 되어질 수 없는 생각. 죽었다 깨어나도 이를 수 없는 지경. 그런데 왜이리 목마른가.

 

□ 우리는 실제적으로 형이상학적 이원성의 두 측면 중 한 측면으로만 태어난 것이라고 하겠지요. (P. 104)

 

Ü 결핍은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것이었다.

 

□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 박사는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P. 107)

 

Ü 융을 한번 만나 보고 싶다. 생의 원형에 대해서 생각한 사람. 그를 따라가고 불교철학을 나서면 삶의 연원에 대해 맛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겠는가.

 

□ 내 생각으로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시인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우리의 영혼이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고요. (P. 109)

 

Ü 결국 신화가 노리는 것과 시인이 노리는 것은 같은 것이다. 바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

 

□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P. 113)

 

Ü 라고 하였는가.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시라 하였는가. 시처럼 사는 것은 곧 내 속을 신화로 충만하게 하여 모든 것이 은유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 것 인가. , 그러면 내가 의식하는 나의 자아는 사라지고 결국 만유 중의 하나로써 나를 객관화하며 살게 되는 것인가. 바람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절로 행복해 지리라.

 

□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다. (p. 114)

 

Ü 결핍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간, 그리하여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개념 너머에 있고 존재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다. 그래서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은 위선이며 실로 모르는 것과 같다.

 

□ 라마크리슈나는 늘 죄만 생각하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는 겁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P. 114~115)

 

Ü 뭐 그리 어깨에 힘주며 살 필요 없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모든 근심 짊어지고 살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게 참, 뜻대로 되질 않는다.

 

□ 모든 종교는 일장일단이 있지요. 즉 이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일 수도 있고 저런 입장에서 보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은유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은유라는 것을 오해하여 사실로 해석하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됩니다. 은유라는 것은 드러내기는 드러내면서도 사실 본뜻은 다른 데 있는 표현법입니다. (P. 116)

 

Ü 완전하다 순수하다는 생각의 발현은 그 발현과 동시에 그와 다른 것에 대한 폭력성을 수반한다. 우리는 이런 생각들이 예수의 의도를 곡해하여 인류를 전쟁의 도가니로 끌고 가는 모습을 역사에서 보았다. 은유라는 것을 오해하여 해석한 인간의 어처구니 없는 자화상이다.

 

□ 그러나,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을 은유적 코노테이션(내포된 의미)의 문맥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내면을 향함으로써 그의 승천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알파요 오메가인 우리의 바탕자리로의 되돌아옴, 육신의 껍질을 버리고 육신 자체의 역동적인 바탕자리로 되돌아옴을 뜻하는 은유인 것입니다. (P. 117)

 

Ü 원형의 자장(磁場)이 미치는 육신.

 

□ 세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P. 117)

 

Ü 결국, 이 모든 이야기를 자기와 연결시키지 못하면 결국 배우지 못함과 같다. 읽지 않은 것과 같다.

 

□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깊이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P. 119)

 

Ü 지금 자신의 깊이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이미 깊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깊이를 인식 조차 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지 않던가.

 

□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어떤 음성을 구체적으로가 아니라 은유적으로 듣는 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P. 120)

 

Ü 단순한 이 말을 이해하는데도 오랜 기간이 걸릴 만큼 나는 아둔하고 무지했다. 제대로 들을 수있기 전에는 함부로 말하지 말자. 

 

□ 신화는 문화와 시간, 장소와 정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만일 상징과 은유가 예술을 통해 되살아나지 못한다면 삶은 신화에서 떨어져나가 버립니다. 오늘날에는 누가 은유로 말합니까? 시인들이지요. 시는 은유의 언어니까요. 은유는 잠재적인 것을 암시하죠. 그렇지요. 그러나 가시적인 측면의 배후에 있는 실제성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은유는 신의 가면입니다. 이 신의 가면을 통해 사람들은 영원을 경험하지요. (P. 123)

 

Ü시라는 아름다운 액세서리를 통해 그 볼품이 없는 몸뚱어리는 순식간에 우아함의 거푸집으로 변한다. 우리의 삶이 그 미끈한 정신적 나체의 윤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밥벌이를 떠나 시를 읽고 시를 써야 하는 충분한 이유다. 시는 이런 것이었다.

 

□ 우리의 생각은 막연합니다. 언어적이고 단선적입니다. 언어의 현실보다는 이미지의 현실이 훨씬 풍부한데 말이지요. (P. 124)

 

Ü 침묵이 최선의 언어가 되는 이유다.

 

□ 우리는 사물을 생각하되 실제적으로만 생각하지요. 하지만 이렇게 신비의 측면에서 생각할 수 도 있는 거예요. 가령, 이것은 시계입니다. 하지만 이 시계는 존재하는 사물입니다. 이 시계를 이렇게 벗어놓고 여기에다 고리를 걸면 바로 다른 차원의 사물이 되는 거지요. 성별(聖別, consecration)이라고 하는 게 바로 이겁니다. 고리를 거는 순간 기계는 성별되는 거지요. (P. 125)

 

Ü 김춘수는 이와 관련한 주제로 은유를 펼쳐 놓았다. ‘으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칸트는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시공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울의 경험은 어떤 공간 안에서 어떤 시간대에 생기는 것이지요.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이것은 사물이 아닙니다)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초월자는 사유의 모든 카테고리를 초월합니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카테고리입니다. (p. 126~127)

 

Ü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일차원적이었다. 존재를 사유로 규정하였으니. 존재하는 중의 하나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겠다. 점점 미궁으로 빠져든다. 실마리가 없다.

 

□ 무엇이든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범주를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느냐 없느냐는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부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둘 다이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하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궁극적인 신비로서의 하느님은 생각 너머에 있습니다. (P. 127)

 

Ü 결론이다. 너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하다. 너와 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둘 다이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하다. 아이고 어려워.

 

□ 비쉬누는 잠의 신인데 이 신의 꿈이 곧 우주입니다. (P. 128)

 

Ü ! 이 스케일! 브라만, 인드라, 비쉬누의 이야기는 이 문장 하나로 완결된다. 시공을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우리의 삶은 한갓 꿈이다.

 

□ 다른 종교의 전승에 따르면 선악은 우리의 입장에 따라서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 쪽에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는 악한 것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P. 133)

 

Ü 캠벨 쌤, 너무 많은 거 요구하시는 거 아입니꺼. 그러니까 이런 것 아닌가요. 죽어야 살 수 있는 원형의 범죄가 모든 존재에게 들씌워져 있다. 그래서 인생은 참혹할 수 있는데 그 뿐만이 아니고 자신의 깊이를 스스로 알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졸렬함, 아둔함, 두려움 같은 것들이 서로가 서로를 반목하게 만든다. 그래서 생은 참혹한데 그렇다면 참혹하다는 것을 아는데 그치지 말고 그 참혹함의 시원(始原)으로 들어서서 그 속에서 자신의 신화를 세워라. 영웅은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탄생되니까 말이다. 그리하면 참혹함이 신비로 바뀔 것이니. 신비로 바뀌어 다시 바라보는 는 만유 중에 하나임을 알게 될 것이니. 맞는가요. 캠벨 쌤. 어려워요.

 

□ 제임스 조이스는 말했다.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이다. 그러니까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P. 134)

 

Ü 캠벨은 독자의 난해함을 다음 페이지에 이와 같이 설명한다. ‘나에게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비슷한 생각을 적어둔 기억이 난다. ‘그 눈물겨움을 견디며 비루한 생을 살아가는 순간을 목도하는 일은 그래서 위대한 것이 아닌가. 2500년 전, 노새가 토끼를 낳은 사실만큼, 다레이오스의 어미가 오른 쪽 젖으로 그를 먹여 키운 사실만큼이나 오늘 아무것도 아닌 내가 몸서리 치게 되는 사소한 발버둥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 뱀이 사람을 물려고 하면 우리는 뱀을 때려 죽이고 맙니다. 이 경우 우리가 부정한 것은 뱀이 아니고 그 상황입니다. (P. 136)

 

Ü 상황이 처지가 삶을 규정하고 행동을 규정한다. 기품 없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각자의 사람들이 처해진 처지로 인해 만들어진 그네들의 사상과 삶의 양식을 두고 판단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그러나 처지가 생의 품격을 완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건희와 아니타 로딕은 기업가로서 그 처지는 비슷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은 다르다.

 

□ 캠벨은 인도에서 구루를 찾아 이렇게 묻는다. 힌두의 사고 체계에 따르면 이 우주의 만물은 모두 신의 현현(신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폭력에도 우둔함에도 비천함에도 사려분별이 없음에도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이럽디다. ‘선생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아니라고 하면 안 되겠지요.’ (P. 138)

 

Ü 이 부분은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신이 하는 일이기 때문인가. 그러면 내가 신에게 반하는 행위를 하면 신이 나에게 현현하여 신을 반하는 일인가. 그렇다면 신을 부정하는 신의 뜻 인가. 그것은 나에게 어떤 운명을 예지 하는 것 인가. 그 또한 신의 뜻 인가.

 

□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p. 139)

 

Ü 자신의 마음에 끼어있는 먼지를 깨끗이 지워 버릴 때 그 지워진 거울은 자신을 바로 보게 하고 바로 보아진 자신은 지복을 누린다. 그것이 영원인가. 성철은 그리 말했다. 마음을 명경같이 하라. 그래서 明心하여 見性하라고

 

. 태초의 이야기꾼들

 

□ 들소, 라스코의 암벽화(岩壁畵) (p. 140)

라스코암벽화.JPG

 

□ 인간은 이제 처녀림 세계의 신인(新人)이 아니다. 인간의 이웃은 이제 들짐승이 아니라, 끊임없이 불바퀴 별을 도는 이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먹을 것과 살 데를 다투는 다른 인간이다. 지복의 석기 시대 수렵민의 삶과 삶의 양식이 우리 육신을 형상 짓고 우리 마음의 얼개를 짜놓았는데도 그 수렵민의 세계는 우리 육신에도 남아 있지 않고 마음에도 남아 있지 않다. <금수의 권능을 찾아서, the way of the animal power> (p. 141)

 

Ü 우리의 혼은 고대의 신화에 어떤 빚을 지고 있는가.

 

□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 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그러다 결국 죽는 거지요 (p. 142)

 

Ü 이대로 죽기 싫다. 이대로는 해방될 수 없다.

 

□ 매장 의례는 가시적인 삶 너머에 있는 다른 삶의 존재에 관한 관념, 가시적인 차원 너머에 있는 다른 존재의 차원(우리가 사는 가시적인 삶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이라는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p. 145)

 

Ü 그러므로 삶의 가장 든든한 back ground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닌 죽임이었다. 키햐!

 

□ 다시 말해서 부족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가 현실의 조직보다 훨씬 더 큰 조직의 한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심습니다. 현실 사회는 그 부족의 목적지에 있는 큰 조직의 한 기관에 지나지 않지요. 의례의 중심적인 목적은 한 개인을 그 개인의 육신보다 훨씬 큰 형태론적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입니다. (p. 145)

 

□ 동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계약을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물은 사냥꾼에게 기꺼이 목숨을 내어줍니다. 그냥 내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삶이 육신의 한계를 초월하면 회생의례를 통해 흙으로 돌아오든지 아니면 어머니의 빗속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내어주는 겁니다. (p. 145~146)

 

Ü 태초의 사냥꾼은 바로 보았다. 그 역시 자연의 일부임을 느껴서 그 끝에는 인간의 자만이 없었다.

 

□ 의례는 나의 개인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다. (p. 147)

 

Ü사냥꾼의 자기 희생적 금제를 지켜 신비에의 참여를 한다. 일종의 신화적인 동일시가 개입되는데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다’ (p. 147)

 

□ 이들에게 짐승은 적어도 동등한 존재, 때로는 우월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짐승에게는 사람에게는 없는 힘이 있지요 (p. 151)

 

Ü 그런 짐승을 잡아 먹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일이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인류에게는 ritual이 필요했을 것이다.

 

□ 연발총으로 무장한 개척자들이 들소를 무더기로 죽이고는 가죽만 벗기고 살은 그대로 썩혔어요. 이건 대학살입니다. 그대이던 들소가 그것이 되고 말았지요.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P. 155)

 

Ü 우리는 시애틀 인디언 추장의 편지를 기억한다. 그의 바램(자신들과 같이 우주를 사랑해 달라는)이 여지 없이 묵살 당하는 장면이다.

 

□ 만물이 비롯될 때에는 지혜와 지식은 짐승들에게만 있었다. 절대적 존재인 티라와가 인간에게는 직접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라와 신은 어떤 짐승을 인간에게 보내고 그 짐승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현현한다. 인간은 그런 짐승, 하늘의 해, , 별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P. 156)

 

Ü그대들에게서 배운 지혜를 우리는 지금 무엇에 쓰고 있나. 어디로 돌려주고 있는가. 배우기는 하고 있는가.

 

□ 고대의 암벽화가 있는 동굴에 들어가는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하지요. 이러한 이미지를 그려내면서 이들은 대체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 이것은 그들이 의도한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일가 새들의 노래가 아름다운 것은 새들에게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새들이 지닌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 것 일까? (P. 156~157)

 

Ü 자연은 항상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 뿐이다. 아름다움이라는 언어적 한계에 매몰되지 말자.

 

□ 암벽화가 그려진 동굴, 사원굴이라 부른다. 사원은 우리 영혼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성당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사실은 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로 들어갑니다. 어머니 교회인 것이지요. 이 성당의 이미저리는 신인동형동성(神人同形同性)의 형태를 취합니다. (p. 159)

 

Ü 사원, 동굴, 교회, 성당, 사찰 등은 영혼의 옛 기억이 현실의 천박함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장소

 

□ 여자는 생명을 나르는 수레

 

□ 원시 사회도 문제아(말하자면 수순한 자연의 충동을 그대로 표현하는 아이들)를 사회의 일원으로 통합시키는 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런데 사회는 규칙에 따라오지 않는 문제아들을 견디지 못했어요. 그런 아이들을 용인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사회가 그들을 죽여버렸던 겁니다. 사회라는 몸을 병들게 하는 암 같은 존재라는 것이지요. 부족 사회는 늘 아슬아슬한 가장자리의 삶을 살았던 겁니다. (p. 165)

 

Ü 이성의 작용에 대해서는 자연스러움을 지향하면서 실로 자연스러움을 드러내면 천박하다 찍어내 버리는 양태는 과연 무엇인가. 지금도 그 때의 부족사회와 깨달음의 깊이가 다르지 않다면(오히려 낮다)우리 시대의 문제아에 대한 사회적 알레르기 증상은 학문과 제도의 괴리로 치부하기에는 그 부당함이 깊다. 한 예로 폭주족을 대하는 사회의(중산층의) 시선은 지나치다. 철가방을 나르는 십대들이 밤을 도와 스피드를 즐기면(다소의 교통법규의 위반은 있다) 마치 범죄조직인양 대대적인 공권력을 들이대지만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검정 가죽점퍼를 입은 점잖은 사회 지도층들이 줄줄이 때지어 달리는 것은 삶의 여유를 즐기는 취미로 추앙 받는다. 비천한 신분들의 자식들은 죽어지내길 바라는 모종의 사회적인 합의인가. 뒤에서 더러운 짓은 중산층이라 불리거나 공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다 하는 사회에서 우리, 폭주족만큼만 솔직하자.

아홉 시 뉴스 보면 진짜 나쁜 새끼들은 따로 있잖아요.’

 

캠벨은 의례의 중요성을 신화에 다가가는 수단이라 말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듯이 이 사회에서는이제 껍데기만 남았다. 캠벨이 말한 사회적 규칙→의례화→외계향→문제아 순서는 더 이상 맞지 않는 말로 나는 간주하겠다.

 

□ 새 우주관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동화시키지 않아 왔어요.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화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p. 168)

 

‘das vlok dichtet’ 이것은 전통 문화의 관념과 시는 모두 민중에게서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p. 168)

 

□ 블랙엘크라는 수우적 인디언의 9살 때 일입니다. 샤먼은 이 소년에게 붙어있는 신을 떼어주기는커녕 더욱 밀착하게 해버립니다. 정신분석의의 방법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쓴 거지요. “귀신을 몰아낸답시고 그대 안에 있는 가장 귀한 존재를 몰아내지 않도록 주의하라이런 말을 한 사람이 니체였지요. 소년에게 달라 붙어 있던 신은 소년을 떠나기는커녕 아주 자리를 잡아버립니다. 그러니까 둘의 관계는 끝난 것이 아니고 새롭게 된 겁니다. 이렇게 되면 당사자는 영적인 조언자가 되어 자기 부족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 수 있게 되지요. (p. 173)

 

Ü 이미 밀착한 내 안의 신, 권능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하자. 나에게 은혜를 베풀라 나를 위해서만은 쓰지 않을 터이니.

 

□ 이어서, 세계의 중심에 있는 성스러운 산이라고 한 것은 사우드 다코타에 있는 하아네이 봉우리입니다. 블랙엘크는 그러나 그런 산은 도처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화적 깨달음입니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산은 ‘axis mundi’를 말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 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ㅇ뤼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p. 173~174)

 

Ü 모든 생은 axis mundi(세계의 축)가 될 수 있다. Axis mundi, axis mundi, axis mundi 되내인다.

 

. 희생과 천복

 

□ 그 광막한 벌판의 밤하늘 아래서 저는 저 자신이 옛날은 옛날인데 아직도 살아 있는 옛날에 속한다는 묘한 느낌을 체험합니다. 큰 나무 빽빽한 숲으로 들어가면 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고 한 사람이 키케로였지요. (p. 178)

 

Ü 그 같은 체험을 시로 녹여낸 시인이 있다. (황인숙, 신성한 숲, 1988)

 

이 숲.

들벚나무와 사시나무

뿌리 사나운 아카시아와 싸리나무, 소나무

뜻밖에 만난 놀란, 한 그루의 향나무와

밟은 적도 긁힌 적도 무수한

덩굴나무와 가시나무.

본 적은 있으나 이름 모를 나무들과

보지 못한 나무들

보지 못할 나무들

이 숲.

꿈틀거리는 나무 사이로

두려움 없이 내가

지나갈 수 있을까?

나는 새처럼 가볍지도 않은데

이들은 내게 적의의 새를 날리지 않을까?

이 숲.

나무의 무리 가득한

안개로

깊어지고.

 

□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남이 나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p. 179)

 

Ü 그 여백을 만드는 의무는 순전히 자신에게 달려있다. 자신의 성소를 만드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자.

 

□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p. 180)

 

Ü 낯설게 보고 새롭게 보아서 그렇게 보여진 것들에게 말을 건내 본다. ‘그대…’

 

□ 모든 땅이 다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p. 183)

 

Ü 모든 생명이 경이롭다고 전제한다면 그 존재들이 거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모든 곳이 성지가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 사르트르 대성당에 가면 성당의 영적인 원리가 사회의 삶을 버티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마천루가 사회의 무엇을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잘 아시겠지요? 중세 도시에 가보면 성당이 가장 높은 건물 행세를 합니다. 18세기에 조성된 도시에서는 정치가 벌어지던 장소가 가장 높은 건물 행세를 합니다. 현대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은 누가 차지하고 있지요? 당연히 경제 생활의 중심인 업무용 건물이지요. (p. 185)

 

Ü 캠벨은 이 책의 138페이지에서 말한다. ‘힌두의 사고 체계에 따르면 이 우주의 만물은 모두 신의 현현(신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폭력에도 우둔함에도 비천함에도 사려분별이 없음에도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이럽디다. ‘선생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아니라고 하면 안 되겠지요.’ 라고. 그렇다면 시대를 통과하며 벌어지는 힘의 기득권에 의한 결과물조차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 또한 신의 뜻이므로. 그러나 사르트르 대성당을 생각하듯이 해인사를 생각하고 선암사를 생각한다면 캠벨의 신화에 대한 연민이 느껴진다. 이와 유사한 나의 정의가 comment 중에 있어 인용한다. 사원, 동굴, 교회, 성당, 사찰 등은 영혼의 옛 기억이 현실의 천박함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장소

 

□ 모든 궁극적인 영적 암시는 침묵에 담겨져 있지요. 이 침묵은 소리 너머에 있어요. 육이 된 말씀은 최초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 너머에 있는 것이 초월적인 미지의 존재, 불가지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침묵, 혹은 공, 혹은 초월적인 절대자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p. 187)

 

Ü 언어와 음성으로 사람이 만들어내는 모든 signal 체계가 손 닿지 못하는 곳, 그 곳이 우리의 원형질이 거하는 곳이다.

 

□ 샤먼과 사제, 사제가 한 사회에서 맡는 일은 기능적입니다. 샤먼의 권위는 그 자신의 심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사회가 부여한 성직의 권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p. 190)

 

Ü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수렵문화에서는 제 자신의 친교영신이 신성이겠지만 공동체 기반의 농업문화에서는 공동의 권위가 사회적으로 부여된 사제가 신성을 담당하게 되는 것인데 인간의 삶이 농업화되면서 샤먼은 그 신성과 힘을 상실하게 된다.

 

□ 블랙엘크의 예에서 보았습니다만, 샤먼은 자기가 본 환상을 자기 부족을 위한 의례 행위로 해석해낼 수 있습니다. 즉 내적인 경험을 외적인 경험으로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것이지요. 종교는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p. 191)

 

Ü 종교 생산의 매커니즘

 

□ 여성에게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 마력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의 마력이 대지의 마력을 버티어주게 된 거지요. (p. 194)

 

Ü 체내에 외부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죽여버리는 신체적 매커니즘을 완전히 배반하면서까지 하나의 몸에 두 신을 현현하게 하는 사람이 여성이다. , 타자를 자기 몸 속에서 기를 줄 아는 포용력을 지닌다. 신의 마음과 닮았고 자연의 심성과 같다. 반면 남성은 여성과는 달리 이런 영적인 기능이 전혀 없으므로 존재론적 열등감은 영원히 풀 수 없는 과제로 남을 것이다.

 

□ 식물은 영속하는 생명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p. 195)

 

Ü 어찌보면 식물은 동물보다 우월하다.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말이다. 김용규 선생님이 말했듯이 자기 살 자리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p. 201)

 

Ü 이 명확하고 간명한 말이 어찌 이리 무서운가. 버려야 얻고, 잃어야 채워진다. 해는 져야 다시 뜨고 달은 기울어야 차는 법이다.

 

□ 우리가 낙원으로 들어서려면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깨달음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육으로는 죽고 영으로는 다시 나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의식과 동일시합니다. 이런 삶에서 육신은 의식을 나르는 수레에 지나지 않아요. 수레로는 죽고, 의식과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은 동일시해야 합니다. 이 수레에 실려 있는 것 그것이 곧 신입니다. (p. 204)

 

□ 죽음의 신은 춤의 신인 동시에 섹스의 신이기도 하지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p. 209)

 

Ü 제 아이를 낳으면 비로소 삶의 유한성이 엄습한다. 낳는다는 행위 자체는 내가 죽는다는 사태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signal 이다.

 

□ 쇼펜하우어는 그의 명편 에세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사심 없이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들의 고뇌와 고통에 인류가 참가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는 자연의 제일 가는 이법과 자기 보존을 기하는 일이 어떻게 함께 가능할 수 있는가?’ ~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p. 210~211)

 

Ü 사고의 제약이다. 인식의 한계다. 시간과 공간의 한정된 사고체계를 뛰어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개념들이다.

 

□ 베트남전, 쇼펜하우어의 이른바 타인을 위한 자발적 행위와 똑 같은 것을 보았어요. 사람들은 살아 있음의 경험을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베트남전 당시의 젊은이는 전우를 위해 용감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p. 215)

 

□ 목숨을 아끼되 그 목숨의 원수가 되어라. (p. 216)

 

□ 순종하면 하느님에게 찬스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 (p. 220)

 

Ü 하느님과의 교감을 위해서라도 가끔은 반항하고 일탈하라.

 

□ 토마토 주스가 마시기 싫다는 아이에게 아버지가 말합니다. ‘저 좋은 것만 하고 인생을 살 수는 없는 법이야. 저 좋은 것만 하고 세상을 살려고 했다가는 굶어 죽어. 나를 봐, 나는 하고 싶은 일은 평생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어.’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 천복을 한 번도 좇아보지 못하고 산 셈입니다.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p. 222)

 

Ü 이 문장은 이 책, 캠벨의 말의 백미다. 금강경의 게송과 어찌이리 비슷한가. 이 문장을 읽고는 책을 덮었다. 머리 속에 환청이 계속 들려오는데 한 동안 계속되었다. ‘따분한 인생, 따분한 인생..’

應無所住 而生其心 (금강경 10장 게송)

 

□ 우리는 늘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p. 223)

 

Ü 자신이 세운 자신의 기준으로 생을 살아가는 것은 곧 자신을 누르는 또 다른 권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법.

 

□ 부모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천복을 찾게 해줄 수 있습니까?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아이에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p. 224)

 

Ü 자신의 천복을 좇지 못하면서 아이의 천복이 보일 리 있겠는가. 자기 몫의 삶을 사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었구나 자기 몫의 천복을 누리며 사는 것은 이 외로움이 둘러싼 곳에서 어려운 일이었다. 어찌 이리 어려운 일을 나는 쉽게 시부리고 다녔나. , 이 쪽팔림을 또 어찌할건가.

 

나는 유럽에서 공부하다가 1929년 월스트리트가 무너지기 3주 전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일자리 같은 것을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 시절은 나에게 정말 멋진 시절이었어요. 돈이 없다는 건 느꼈지만 가난하다는 느낌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어요. 그 당시 사람들, 좀 좋았어요? 나는 그 당시에 프로베니우스를 발견했어요. 문득 이 양반이다 싶었어요. 그래서 나는 프로베니우스가 쓴 것은 모조리 읽겠다고 결심하고 읽었지요. 책 살 돈은 없어서 취직하면 주겠다고 하고 서점에서 미리 받았지요. 그때 5년간 틀어박혀 책을 읽으며 기본 독서와 공부는 다 했어요. 정말 멋진 시절이었지요. 나는 내 천복을 좇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 말하는 이 천복이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배운 겁니다. 산스크리트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가지 있어요. 사트’, ‘취트’, ‘아난다가 그것입니다. 사트라는 말은 존재, 취트라는 말은 의식, 아난다라는 말은 천복, 혹은 황홀을 뜻합니다. 이 말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을 했지요.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천복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p. 225~226)

 

Ü 마음이 가는 곳을 찾고 그 마음이 자기의 영혼을 움직일 때 마땅히 머물러라. 그 마음으로.

 

□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p. 227)

 

Ü 이 확신은 굉장한 경지다. 캠벨은 신화를 팔아먹는 사기꾼이 아니면 인류의 영적 스승, 둘 중 하나겠다.

 

□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p. 227)

 

. 영웅의 모험

 

□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을 가져온 어머니 역시 영웅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전장에서 전사한 병사와 출산 때 죽은 어머니는 똑같이 최고천(最高天)을 배정받지요. (p. 231)

 

□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보다는 밖에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 더 영웅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니까요. (p. 232)

 

Ü 이지러진 관계의 원인이었구나. 일차원적이고 단편적인 행위가 영웅적으로 여겨지는 현대의 우리 삶이 스스로 부끄러운 것인 줄 알아야 하는데.

 

<코란>은 앞서 간 사람들이 치른 것과 같은 시련을 치르지 않고 지복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p. 233)

 

Ü 고통은 겪어야 극복할 수 있고 가진 것은 잃어야 얻을 수 있다. 베풀어야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 지구촌 전부가 우리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마당에 특정 국가, 혹은 특정 국민의 영웅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p. 235)

 

Ü 의표를 지른다. 우리는 지금 어떤 영웅에 열광하는가. 지구를 위한 영웅을 우리는 본적이 있긴 한 걸까?

 

□ 영웅은 생소한 여행을 경험하지만, 사실 영웅에게는 그런 여행을 할 준비가 사전에 다 되어 있어요. 여행은 그러니까 그를 등장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인 것이지요 환경의 상황이나 조건도 영웅에 맞게 예비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p. 239)

 

Ü 우리에게 왕관은 이미 씌워져 있는 줄도 모르는 일이다. 어릴 적 동네 무당 아주머니는 어머니를 보고 나를 가리키며 왕관 다칠라라고 했다고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이것 참 괴상하다. 그 무당 아주머니는 영적으로 완성된 샤먼인가. 복비에 환장한 샤먼의 이무기인가. 어쨌든 스스로를 한계 짓지 않고 자신을 던져 보면 결국 해내고야 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꾸 집어 던지자. 자신을. 현실에게.

 

□ 거인을 풍차로 만들어버리는 일, 약간의 시적인 상상력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가능해요. 그러나 옛날의 세계는 영웅이 대적하러 달려나가던 세계는 기계적인 세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세계, 영웅의 영적인 준비에 반응하는 세계였어요. 그런데 이 세계가 지금은 우리의 물리학 마르크시스트 사회학, 행동심리학 등을 통해 해석되는 순전히 기계적인 세계가 되고 말았어요. 이러한 과학에 따르면 우리는 자극에 반응하는 범용한 전선 덩어리에서 더도 덜도 아닙니다. 이러한 19세기의 해석이 현대 생활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를 쥐어 짜내고 만 겁니다. (p. 240)

 

Ü 자유와 삶의 여유가 모두 자본과 욕망에 소진되고 그에 따라 우리의 감정 또한 감가상각 되어 버리는 세계가 아닌가 자문한다.

 

□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현대 사회의 사람들에게 육체는 말합니다. ‘이봐, 나라는 존재는 아주 잊어버리고 있군, 그래’, ‘나는 고인 물이 되고 말았어, 썪겠지’. 신화의 이면에 있는 세계는 영적 가치라고는 모두 고갈되어버린 우리 세계인 것 같고요. 사람들은 발기 불능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저에게는 불감증, 권태, 보편적인 질서로부터의 소외감. 이것이야말로 현대인들에게 내려진 저주 같아 보입니다. (p. 241~242)

 

Ü 서툴더라도 쪽팔리더라도 춤추자’.

 

□ 대중의 영웅은 자기 시대의 필요에 대단히 민감한 법입니다. 비틀즈는 대중 음악에다 정신적인 깊이를 더했습니다. 이것을 분위기라고 해도 좋을까요. 하여튼 명상적이고 동양 음악적인 분위기를 더한 거지요. 비틀즈가 얻은 명성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p. 246)

 

Ü hey jude, imagine… 비틀즈는 동시대인들의 유산이다. 내나라 내 민족을 넘어서서 말이다.

 

□ 석가는 그리스도와 아주 흡사한 길을 따릅니다. 차이가 있다면 석가가 그리스도보다 5백 년쯤 전에 살았다는 것밖에 없어요. 이 두 구세주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비교해보세요. 직제자, 혹은 사도의 역할이나 성격까지 비슷합니다. 가령 아난다와 베드로를 한번 비교해보세요. (p. 249)

 

□ 우리 삶(남의 삶을 시늉하는 것이 아닌 우리만의 삶) 역시 탐색의 여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p. 251)

 

Ü 이제껏 시늉하는 삶을 살았다!!!

 

□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p. 254)

 

Ü 모험해라, 떠나라, 광야에 머물러라, 자신을 찾아라, 어려움을 이겨라, 정주하는 삶이 아닌 움직이는 삶을 살아라.

 

□ 화가 티치아노는 아담과 이브를 그리면서 이 둘 역시 석가가 받은 것과 같은 두 가지 유혹(욕망과 공포)을 받은 것으로 그리고 있어요. 티치아노의 나이 아흔네 살에 이르러서 구상된 작품이지요. 아담과 이브는 흔들리고 맙니다. 그러나 석가는 흔들리지 않아요. (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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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베첼리오(1488~1576) ‘아담과 이브

 

□ 신화는 시예요. 시적 언어는 대단히 유동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종교는 시를 산문으로 바꾸지요. 하느님은 글자 그대로 저기에 있다. 이거야말로 글자 그대로 하느님 말씀이다. 저 위에 계신 하느님께 가까워지려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이런 식이지요. (p. 259)

 

Ü 신에 대한 외경이 신학으로 축소될 때 자유를 노래하는 시가 분석적 산문이 될 때 우리 삶도 지리멸렬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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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은 우리의 영혼, 선의 아래는 무의식, 위는 의식. 점은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나오는 곳. 네모는 자아. 우리는 자아가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쇼를 연출하는 줄(주도권을 행사하는 줄) 알지만, 아니에요. (p. 261)

 

□ 아기는 엄마의 젖꼭지가 입술에 닿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압니다. 아이의 기억에는 우리가 동물에게서 볼 수 있는 붙박이 행동 체계가 있어요. 우리는 이걸 본능이라고 하지요. 이게 바로 생물학적 기반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금 더 지나면 외부로부터 강제를 당할 때마다 무엇인지 거북살스럽고 이질적이고 두렵고 죄의식이 느껴지는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시기가 우리의 가장 까다로운 심리적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시기인 거죠. 바로 문턱 넘기 의례를 찾아야 합니다. (p. 262)

 

Ü 본능에서 의식으로 진화될 때 그 혼란을 이해하는데 신화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 신화 또는 리츄얼이 없이 여전히 본능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나는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사회 상황에서 자라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그만큼 모르는 상태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늘 이것 해라, 저것 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p. 262)

 

Ü 터부와 금기가 많은 사회일수록 숨기는 게 많고 솔직하지 못하며 그 속에서 감추는 것을 배우고 위축을 몸을 베게 하고 개인의 상상력은 물론 사회 전체적인 상상력을 죽여버린다. 굳이 사회까지 가지 않아도 가족, 학교, 회사, 친구, 단체를 보자.

 

□ 신화가 암시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법

1.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

2.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라.

 

□ 이 조직은 우리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조직이 과연 우리 인류의 목적을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조직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이 조직을 더 이상 섬기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요. 조직이 가해오는 비인간적인 압제에 저항함으로써요. (p. 265)

 

Ü 꿈틀대는 것, 야만의 시대에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은 오직 그것에 저항함으로써 완성된다는 말, 이렇게 어려운 일을 이렇게 간단하게 할 수 있는가. 저항하는 마음을 먹기는 쉬어도 실제 저항하는 일이 그리 쉬운가? 어려운 숙제다.

 

□ 스승이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이지만 누구나 될 수 있어요. 나날의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는 진짜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이런 능력이 있어요. (p. 272)

 

□ 천복을 찾되 천복을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안 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p. 272)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어떨 때는 우리를 아주 꼼짝 못하게 합니다. (p. 273)

 

Ü 내 안에서 나를 옥죄고 있는 자아를 죽이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스스로 금기를 만들고 금제를 만들어 세상에 맞추어 가는 것은 아닌가. 자신이 있으면 솔직해지자. 더 이상 나로 인해 내가 짓눌려지지 않도록 나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자.

 

□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했지요. 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살아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p. 276)

 

Ü 그 본을 선택하는 기준은 순전히 나에게 달려있다.

 

□ 커스터 장군의 부하들이 쏘는 총탄의 소나기 속을 뚫고 들어가던 용감한 인디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죽기에 좋은 날이다이겁니다.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가 없지요. (p. 279)

 

Ü 캠벨은 다시 이와 같이 말한다. 죽음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죽음과 화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 그러나, 청년기는 자기 발견의 시대, 사자로 변모하는 시기입니다. 이 청년기에는 법률이 적용되기는 하되 강압적인 그대의 미래에 복종시키는 방향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갖게 하는 방향으로 적용됩니다. (p. 284)

 

Ü 여전히 젊다면 그 젊음으로 정해진 미래를 하나하나 부수어 나가는 것.

 

□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그윽한 행복의 상태,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p. 286)

 

□ 정하여진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p. 287)

 

Ü Break the mold!

 

□ 모험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곧 모험에 대한 보답입니다. 하지만 모험이라는 것은 위험해요. 모험에는 긍정적인 가능성도 있고 부정적인 가능성도 있는데 둘 다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길이 아닌 우리의 길을 좇고 있어요. (p. 291)

 

Ü 모험의 가치는 모험 그 자체이니 모험을 하는 자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사람.

 

□ 달라이 라마와 그 교파의 구성원들은 무서운 격동기, 무서운 폭력의 희생자들인데도 증오의 감정이 없어요. 나는 그들에게서 종교가 무엇인가를 배웠어요. 오늘날에 살아 있는 참 종교가 거기 있었던 겁니다. 바로 우리 운명을 빚는 도구이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지요. (p. 293)

 

□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涅槃)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獸性)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p. 296)

 

Ü 남의 고통에 온전히 참여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 인가. 우리는 관념상으로 달과 우주로 갈 수 있지만 실제 행동 양태로 이어지기까지는 한 발짝도 디딜 수 없는 경험을 많이 한다. 과연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말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함부로 지껄여도 되는 말인가.

 

□ 니체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지요. 아모르 파티 (amor fati)라는 건데 운명에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가 말했듯 우리가 우리 삶의 어떤 한 측면에 대해서만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 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p. 298)

 

Ü 삶의 고통은 그래서 찬스다. 고통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찬스를 잡아 성공으로 이끌 확률은 높아진다. 그런 것인가? Amor fati.

 

□ 부처는 인생은 고해라고 했고 조이스는 인생이라는 게 우리가 이 세상에 흔적을 남겨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p. 298)

 

Ü 질문은 적어도 이러 해야 하지 않겠나. 무릎을 친다. 조이스는 어떻게 저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건가. 나의 존재는 우주가 진행해온 무늬고 다시 그 존재는 다음 우주를 위한 수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흔적, 굳이 남기려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 아닌가.

 

□ 여섯 가지 환생의 영역(六道)은 끊임없이 돌고 있는 바퀴의 여섯 바퀴 살로 나타나 있어요. 첫째 영역은 짐승의 삶이 잇는 곳(축생계), 둘째 영역은 사람의 삶이 있는 곳(인간계), 셋째 영역은 천상계 신들의 삶이 있는 곳(천상계), 넷째 영역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영혼의 삶이 있는 곳(지옥계), 다섯째 영역은 호전적인 귀신의 삶이 있는 곳 신들과과 맞서는 티탄 같은 귀신들의 삶이 있는 곳(수라계), 여섯째 영역은 굶주린 귀신들의 삶이 있는 곳(아귀계)입니다.

 

중심에 굴대와 소위 삼독(, , )의 주위에는 어둠으로 내려가는 인간의 영혼, 깨달음으로 오르는 인간의 영혼이 있지요.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p. 300~301)

 

Ü 우리가 신기한 듯 바라보는 현미경 아래의 미생물의 입장에서는 그네들의 은하계위에서 관찰하고 있는 하얀 옷을 입고 현미경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을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를 바라보는 거대 세계의 사람이 우리를 자신들의 현미경으로 보고 있지는 않을까. 거기에는 영원의 개념이 있을까.

 

□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 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p. 303)

 

Ü 말하여 질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로써의 지위를 상실하는데 말하여진 중에 가장 윗자리의 지위는 신화가 차지하고 있다는 말씀. 캠벨 쌤, 맞는지요? 어렵습니다. 어렵다는 말만 반복하게 될 수 밖에 없는 말씀.

 

. 조화여신(조화연신)의 은혜

 

□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가 아닙니까? (P. 305)

 

Ü 글쎄, 왜 그럴까요? 오래 전부터 사실 궁금했었습니다. 당시, 그러니까 주기도문이 만들어 질 당시의 남, 녀의 지위 때문일까요? 여성에게는 신이 현현할 수 없다는 당시 인류의 천박한 고정관념 때문일까요?

 

□ 육화한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이야기만 해도 그렇지요. 예수의 아버지는 하늘에 있는 아버지입니다. 적어도 상징적인 문맥에서는 그렇지요. 십자가로 다가감으로써 예수는 어머니를 이 땅에다 남겨두고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대지를 상징하는 십자가는 어머니 상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어머니에게서 얻은 자기 육신을 남기고 궁극적으로 초월적인 신비의 근원인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P. 306)

 

Ü 그렇구나! 어머니는 여기 있고 아버지는 저기 멀리 있다. 영웅의 여정을 제공하는 것은 아버지다. 근데 왜 아버지는 멀리 있는 걸까?

 

□ 그런데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p. 307)

 

영어에는 아버지와 화해(atonement) 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이 화해는 곧 하나 되기(at-one-ment)랍니다.

 

Ü 의문에 대한 답은 바로 나왔다. 역시 캠벨.

 

□ 여신 숭배는 주로 농경 문화, 농경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요. 즉 대지와 아주 밀접합니다. 대지가 식물을 낳듯 인류의 여성은 인간을 낳지요. 대지가 그 식물을 기르듯 인류의 여성도 인간을 기릅니다. 따라서 여성이 지니는 마력은 대지가 지니는 마력과 같은 것이지요. (p. 308)

 

□ 여성은 시공 그 자체인데 이 여성 너머에 있는 신비는 곧 한 쌍의 대극을 초월하는 신비인 것입니다. 이 신비의 형상에 이르면 그것은 남성도 아니요 여성도 아닙니다.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만물은 이 안에 있지요. 그래서 여성은 그 여성이 낳는 자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여신이 낳은 것입니다.

 

황소 모양의 원형질이 풀 모양의 원형질을 먹는 것 같았고 새가 물고기를 잡아먹는 광경도 새 모양의 원형질이 물고기 모양의 원형질을 먹는 것 같았어요. 많은 사람에게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이런 놀라운 심연 체험이 있을 겁니다. (p. 309)

 

Ü 본질이 드러나는 광경, 생의 눈물겨움을 두 눈으로 목도하는 순간, 나에게도 그런 광경, 그런 순간이 올까. 그 때 나는 어떤 희열을 느낄까. 마치 금강경의 화자가 되는 느낌? 如是我聞..기대된다.

 

□ 우리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 우리 몸, 우리 육체의 형상과 이 만물을 짓는 에너지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알아내어야 한다는 겁니다. 에너지가 없는 몸은 살아 있을 수가 없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에서 무엇이 몸에서 나오는 삶이고 무엇이 에너지와 의식에서 나오는 삶인가를 느끼고 있지 않아요? (p. 311)

 

Ü 물건을 들고 산을 오르는 일은 몸에서 나오는 삶이다. 몰입하거나 또는 사랑하는 사태는 에너지와 의식에서 나오는 삶이다. 맞는가요. 캠벨 쌤.

 

□ 원초적인 존재의 몸을 잘라 우주를 빚는다는 이야기는 조금씩 모습이 다를 뿐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티프입니다. 인도의 경우, 이렇게 몸이 토막 나는 신은 그림자가 곧 우주인 푸루샤입니다. (p. 313)

 

Ü 푸루샤의 그림자가 우주라면 푸루샤의 형체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인가? 어쨌든 그 스케일, 기가 찬다.

 

□ 지중해의 헬레니즘이 꽃필 때도 득세했고 그 뒤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처녀와 함께 컴백했다고 아름답게 꽃핀 적은 없을 거예요. 이 개화기에 여신은 모두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요. (p. 314)

 

Ü 여신의 정신이 득세한 시기를 말하고 있다. 그 시대 여성과 남성의 상대적 지위에는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까?

 

□ 끊임없이 먹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 이자리에 있을 수 없어요. 그리고 우리가 먹는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생명입니다. ‘아 놀라워라, 아 놀라워라, 아 놀라워라! 나는 먹거리이다. 나는 먹거리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자기 삶에 집착한 나머지 남의 먹거리가 되어주지 않는 것도 삶을 거부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그렇게 하면 생명의 흐름이 끊겨버립니다. 이 흐름을 타는 것은 매우 신비스러운 체험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먹거리가 된 동물에게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 자신을 주어야 할 거예요. 우리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우리라는 것이군요. (p. 319)

 

Ü 타자성의 회복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하는가. 죽여서 먹어야 살 수 있는 이 배반의 삶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가. 그리하여 자연임을 모르는 인생이 자연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 길 뿐인 것을 알아차리는 일.

 

□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 수다스럽게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하지만 고통은 우리 안에서 일어났던 거예요.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 보았던가요? 우리가 언제 동물의 근성을 죽이고 자비로운 인간으로 화신해본 적이 있던가요?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를 한 거예요. 말씀이 빛 줄기로 들어갔다는 것이군요. 그렇지요. 석가도 같은 의미에서 어머니의 가슴 차크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p. 321)

 

□ 예수는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지 육체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영웅이나 반신의 자비로움이 육화된 존재로 태어나지 성적인 욕망의 소산, 혹은 종의 보존을 위한 소산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두 번째 탄생이에요.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p. 322)

 

Ü 두 번 태어날 수 있다는 말. 가슴이 사는 삶!

 

□ 에게해에서 인더스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광대한 지역에서 이 모신 이미지가 인류을 주도하지요. 그런데 북쪽으로부터 인구인들이 페르시아, 인도, 그리스, 이탈리아로 내려오면서부터는 남성 위주의 신화가 태동합니다. 남성 위주의 신화가 대두되는 지역은 인구인들이 내려온 지역과 거의 일치합니다. (p. 332)

 

□ 그대들 남성은 궁극적인 존재의 신비에게서 힘을 부여 받았는데 조금 전에 그대들이 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존재의 신비는 그대들에게 힘을 부여할 수도 있고 그 힘을 거두어갈 수도 있다. (p. 332)

 

Ü 윌 듀란트가 이야기 했던가. ‘남성은 여성이 기른 마지막 가축여성이라는 존재의 신비는 남성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

 

□ 어머니가 자식에게 본성을 부여한다면 아버지는 자식에게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사회, 그 사회의 어떤 무리와 동일시하는가?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속한 특정 무리와만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 (p. 334)

 

Ü 나에게 계급성을 초월한 이와 같은 박애 정신은 사실 없다. 그러나 한국의 위정자와 재벌 집안과 나와의 유대감 보다는 먼 이국 땅 브라질의 이름 모를 직장인과의 유대감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은 알고 있다.

 

□ 어떻게 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까? 스승을 찾는 일이고 그 스승이 사제들과 함께한 의례라는 게 있었습니다. 의례의 집전은 곧 신화의 연출입니다.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p. 335)

 

Ü 퍼뜩 생각나는 이 의례를 지켜 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저녁 6시에 울리던 해인사의 예불 소리. 소리를 먹어버리는 목조 건물의 법당에서도 성능 좋은 고출력 스피커를 맘껏 틀어놓은 듯 쩌렁쩌렁 울리던 이 시대 마지막 남성 중창단의 장엄한 소리, 나에게는 물리적, 영적 체험이었다. 모순인가.

 

□ 이 우주에는 수억 개, 수억 갑절이나 되는 열원자로가 흩어진 채 불길을 내뿜고 있어요. 이 열원자로가 바로 별인데 우리 태양은 그런 별 중 하납니다. 그 중 많은 별은 실제로 산산조각이 나면서 우주 저편으로 흩어지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여기에서 나오는 먼지와 가스에서 수많은 생명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잇는 아득한 우주 저편에서 끊임없이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지 않습니까? 이 초음파는 이른 바 창조의 빅뱅이라는 대폭발의 메아리라더군요. 이런 초음파 중에는 자그마치 18억년 전에 발생한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18억년 동안이나 우주를 가로질러와 이제야 우리에게 들리게 된 것이지요.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인식과 체험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p. 336~337)

 

Ü 지금은 이 우주가 창조되고 사라지기를 세 번을 거듭하고 다시 창조되고 사라지는 중임을 믿겠는가. 찰나에도 지나지 않을 눈물겨운 우리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책의 백미가 되는 문장이다. 그래서 신화가 필요하다. 신화는 생을 행복으로 살게 하는 정신적 설계도를 내장하고 있다.

 

. 사랑과 결혼 이야기

 

□ 이렇듯 사랑은 눈과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크레도에 대한 리비도의 승리

 

Ü 성적으로 충동질 하는 욕망이 신앙 선언에 대한 믿음을 눌러 버리는 문화, 개인적 체험이 사회적 공공성에 우선하는 사회. 서양 사회에 대한 인식의 출발이 될 수 있는.

 

□ 트리스탄은 자기의 사랑은 죽음보다 고통보다 이세상의 어떤 것보다 귀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삶의 고통을 대단히 대승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지요.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p. 347)

 

Ü 세상의 권위는 자기 기준으로 사는 삶을 제압할 수 없다. 자기가 스스로 기준을 삼을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의 신화가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세상에 권위에 휘둘리지 않는 삶, 그 삶은 곧 자신의 신화대로 사는 삶과 같은 것이 아닐까.

 

□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p. 349)

 

Ü 내가 만든 나의 제국, 죽기 전 맛보아야 할 인생의 맛.

 

□ 여성이 자기 몸을 기꺼이 내어놓는 걸 기술적인 용어로는 메르시(merci, 慈悲)’라고 하지요. 여자가 남자에게 메르시를 베푸는 겁니다. 그래서 여성은 자기를 좋아하는 남성에게 사랑을 수용할 만한 가슴이 있는지 사랑의 상대가 될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거지요. (p. 353)

 

Ü 몸을 내어 주고 아래에 둔다?

 

passion은 곧 고통인데 이걸 함께(com-)하는 것이 곧 자비(compassion). 독일어로 자비는 미틀라이트(mitleid)’라고 하는데 미트(mit)’는 함께라는 뜻이고 라이트(leid)’는 고통, 혹은 슬픔이라는 뜻 (p. 353)

 

Ü .. 아무 생각 언어를 만들지는 않았군. 이 역시 남의 고통에 기꺼이 참여하는 자의 모습과 그 의미가 담겨 있구나. 

 

□ 눈과 눈의 만남을 통하여 사랑이 가슴을 얻는 것은 눈이 늘 가슴을 염탐하기 때문인 거지요. (p. 355)

 

Ü 사랑에 대한 기가 막힌 표현. 이 보다 더 한 사랑의 아포리즘이 있을까?

 

□ 토마스 만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이 만나기 때문이다.’ 청년 파르지발을 기사로 교육시키는 스승이 자기의 아름다운 딸을 줄 터이니 결혼을 하라고 합니다. 스승의 제안을 파르지발은 이렇게 응수하지요.

 

싫습니다. 저는 아내를 벌겠습니다. 주어지는 아내는 싫습니다.

 

이게 바로 유럽의 시작입니다. 개인주의가 꽃 피는 유럽, 성배 전설이 있는 유럽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p. 358~359)

 

□ 다른 인간을 향한 자연스러운 가슴의 열림입니다. 이게 바로 성배인 겁니다. 융 박사는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p. 360)

 

Ü 이거 어렵다.

 

□ 기독교 역사를 보면 참 흥미로운 데가 있어요. 처음 5세기 동안에는 기독교의 종류도 많았고 기독교가 되는 데도 여러 방법이 있었어요. 그게 4세기의 테오도시우스 시대부터는 로마 제국이 인정하는 유일한 종교는 기독교, 로마 제국이 인정하는 유일한 기독교의 형태는 비잔티움에 있던 제국의 수도가 인정한 기독교 형태, 이런 식으로 그 의미가 한정되어버렸어요. (p. 362)

 

조직화된 교회에 의해 파괴된 이교도, 권력! 유럽 역사의 근본적인 충동은 권력 충동이에요. 그런데 그게 우리의 종교 전통으로 흘러 들어 왔어요. (p. 362)

 

Ü 한정시키고 울타리치고 금기와 터부를 만들고 니것과 내것이 생기고 너는 나와 다르고 다름과 동시에 틀리고 그래서 우리는 전쟁한다.

 

□ 청교도들은 결혼을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결혼을 하면 날마다 사랑해야 하고 날마다 용서해야 하니까요. 말하자면 사랑과 용서의 현재 진행형 성사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을 다 하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 이런 걸 성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p. 365)

 

Ü 아 깝깝해. 목을 죄어 오는 답답함. 종교가 나에게 흥미를 주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계율이다.

 

□ 사랑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사랑이 반드시 사회가 인정하는 삶의 양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랑이 은밀한 게 다 이 때문이랍니다. 사랑은 사회의 규범에 대들어요. 사랑은, 사회가 조직하는 결혼 이상의 정신적 체험이지요. (p. 370)

 

Ü 이런 사랑, 이게 늙발에 뜬금없는 이성과의 사랑이라면, 제발 나에게 오지 마라.

 

□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떠나 보내는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지요. 어머니는 그 영적인 스승의 말에 따라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주다 보면 결국 자기 아들도 포기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p. 373)

 

Ü 이런 것, 훈련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모자란 미물이라 힌두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 사랑과 결혼 이야기

 

□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p. 375)

 

□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을 우주의 에너지와 경이의 종국적인 근원, 혹은 본원으로 봅니다. 그러나 동양의 사고 방식은 - 원시적인 사고방식도 마찬기입니다만 - 신들을 결국 비인격적인 에너지의 그 자체로서의 드러남이자 에너지의 공급자로 파악하지요. 따라서, 이들에게 신들은 에너지의 본원이 아닌 겁니다. 신은 그러니까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인 것이지요. (p. 376)

 

□ 우주의 생명인 궁극적인 에너지에서 오지요. 내가 이렇게 대답하면, ‘그런 에너지를 생성시키는 어떤 존재가 있기는 있구나.’ 이렇게 응수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나는 왜 궁극적인 신비가 비인격적인 자연이면 안 되느냐고 반문하게 될 테지요. (p. 377)

 

Ü 나는 누구인가.

 

□ 융 박사는 종교는 하느님의 체험에서 인간을 방어하는 수단이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어요.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미지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떤 신의 이미지는 결정적인 장애, 궁극적인 장벽이 되는 수가 많아요.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소아병적 생각에 집착해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큰 체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보다 큰 체험이 접근해오는 순간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에 매달림으로써 거기에서 도망쳐버리려고 합니다. 이걸 사람들은 신앙으로 오해하고는 하지요. (p. 379)

 

□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 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입니다. (p. 380)

 

Ü 캠벨은 이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이 경지는 오랜 수행의 결과로 최고의 단계로 보아도 무방한가.

 

□ 신의 은유적인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이 곧 라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라고 하는 존재의 궁극적 신비는 세계라는 존재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 (p. 381)

 

Ü 45억년 간의 생명이 결국 나를 완성하기 위한 일이고 우리를 존재하게 하기 위한 눈물 겨운 삶의 연속이 아니었나.

 

□ 원수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뽑아내려 하지 말고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럴 수 있으면 원수가 사는 삶의 방법을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p. 383)

 

Ü 우리는 타자를 판단할 수 없다. 받아들일 뿐.

 

□ 뉴욕의 실내 체육관 수영장에서 만난 카톨릭 대학교 교수와의 만남.

 

캠벨 씨, 목사님이신가요?

아닙니다. 신부님.

그러면 카톨릭 신자이신가요?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신부님.

인격신(人格神)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다. 신부님.

그런데 말이지요. 인격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어요.

신부님, 증명이 되어버린다면 믿음의 가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렇군요. 캠벨 씨,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웠어요.

 

카톨릭 신부가 나에게 인격신을 믿습니까?’ 라고 한 것은 그 신부 역시 비인격신의 존재, 초월적인 바탕자리, 혹은 에너지 자체로서의 비인격신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뜻이에요. 부처의 의식은 만물, 만상에게 미치는 내재적, 이지적 의식입니다. 우리는 의식의 파편, 에너지의 파편으로만 살고 있지요. 그러나 종교적인 삶이라는 것은 이 특정 시간에 존재하는 이 특정 육신의 의도에 따르는 삶이 아니라 대국적인 의식의 통찰 한에서 사는 겁니다. (p. 384~385)

 

Ü 존재 너머를 깨닫기 위한 믿음이 종교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신부는 존재하는 신의 유무를 물어왔던 것이고 캠벨은 인격으로 존재하는 신은 없고 만약 있다면 종교의 믿음에 대한 가치가 모순됨을 지적한 것인가. 한 동안 책을 덮고 눈을 감았는데 잡히지 않는 물고기와 같이 뜻을 알아차릴 수 없다.

 

내입으로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고 나 또한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했지요? 이때 예수는 그 자리에 있는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가 실재한다는 관점에서 말한 겁니다. 그 다른 존재는 그리스도일 수도 있고 우리 모두의 존재일 수도 있어요. 누구든 그 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살면 그리스도 같을 수 있다는 겁니다. 누구든 말씀의 메시지를 삶 속으로 동화시킬 수 있으면 곧 그리스도와 동등해질 수 있다. 이게 바로 이 구절의 의미인 겁니다. (p. 386)

 

□ 종교(religion)이라는 말은 렐리기오(religio) , ‘뒤로 연결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둘이서 나누어 사는 하나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삶이 있다면 내가 사는 조각난 삶은 산 삶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렐리기오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은 종교의 이미지에 상징으로 나타나 있어요. 상호 연결되는 상태를 드러내는 것. (p. 388)

 

□ 마술사는 마술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 주위에다 원을 하나 그립니다. 그의 마술은 바로 이 원, 신비스럽게 성화된 영역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이 원 밖으로 나가면 마력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p. 388)

 

Ü 마력이 닿는 한계를 한정 짓는 리츄얼은 무슨 뜻일까?

 

□ 우리 삶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을 생각해보세요. 살의 시작에는 두려움도 없고 욕망도 없어요. 그냥 시작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다 존재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두려움과 욕망이 시작되는 겁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버리고 우리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한 점으로 돌아가보세요. 이 한 점이 바로 요체랍니다. 괴테는 신성은 산 자에게 유효하지 죽은 자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신성은 존재하기 시작하고 변화하는 데 유효하지 존재가 확정되고 변화가 끝난 데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 무구한 한 점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나가는 병사의 마음이 바로 이 한 점의 상태와 같지요.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식물 생장의 신비이자 전쟁의 신비이기도 한 것이지요. (p. 394~395)

 

Ü 어렵다. 흔적 없는 점에서 시작된 만큼 우리 삶의 가치는 흔적을 남길만큼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는 말로도 생각이 되는데, 이건 조이스가 말했다.

 

□ 미학적 체험은 그저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조이스의 말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란 액자에 넣어 두게 하고 처음에는 그저 바라보게 하고 다음에는 그것이 작품임을 느끼게 하고 다음에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 다음에는 부분과 전체, 그 다음에는 전체의 각 부분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작품이 지녀야 하는 필수적인 미학적 요인(관계의 조화 정연한 리듬)입니다. 예술가가 복선으로 깔아놓은 우연한 리듬에 감동을 받을 떄 우리는 여기에서 빛을 경험합니다. 이때 우리는 미학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파니입니다. 이 순간을 종교 술어로 설명하자면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원리를 체험하는 것과 같은 순간이 되지요. (p. 399)

 

Ü 에피파니에피파니이 책을 읽으며 새로운 것을 깨달아 가는 것도 에피파니의 한 경험이 될 수 있을까.

 

□ 산스크리트어 비베카(viveka)’. 분별이라는 뜻이지요. 머리 위에 불칼을 높이 치켜든 부처 이미지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 이게 어디에 쓰이는 칼일까요? 이게 바로 분별의 칼입니다.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것과 덧없이 지나가는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째깍, 째깍 흐르는 시간이 영원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간의 장에 삽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의 장에 비치는 것은 스스로 드러나는 영원의 원리입니다. (p. 404)

 

Ü 깨달음. 영원과 현세의 분별, 존재 너머의 세계, 모든 생명이 연결, 내가 너임을 자각하는 경험. 시간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영원을 의식할 수 있는 정신세계.

 

□ 흔히들 천국과 지옥을 영원하다고 하지요. 천국은 끝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끝나지 않는 시간과 영원은 달라요. 영원은 시간 너머에 있어요.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영원을 나타낼 수 없어요. 불교에는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이 세상의 슬픔에 동참하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이 있어요. 이 개념은 시간이 있는 데엔 슬픔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 슬픔은 우리의 온 존재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참 모습입니다. (p. 405)

 

Ü 시간에서 슬픔이 존재한다그 슬픔을 느낄 사이조차 없이 시간의 효율에 사로잡힌 지금은 역사상 슬픔의 강도가 가장 높은 시대임은 확실하다. 모든 사태를 빨리 하지 못해 안달이 난 우리의 모습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을 느낄 여백이 절실하다.

 

□ 나는 부모님도 잃었고 많은 친구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하던 시간은 영원의 체험에 견주어질 만큼 소중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의 체험을 통하여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때의 깨달음을 나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이 깨달음은 이 세상에서의 영생불사 체험과 관계가 있습니다. (p. 409)

 

□ 아름다움은 살아있음의 환희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p. 410)

 

Ü 이 책 157페이지에서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있다. remind한다. ‘이것은 그들이 의도한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일가 새들의 노래가 아름다운 것은 새들에게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새들이 지닌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 것 일까?’ 그 자리에서 존재함으로써 최선을 다하는 모습.

 

□ 우리의 체험을 언어로 드러내기는 해야겠지만 우리 언어는 그 체험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군요. 그래서 시가 있는 거지요.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 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는 정수를 통해야 드러납니다. (p. 411)

 

Ü 결국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문학이다. 문학가들이 현 시대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음에도 꿋꿋이 살아내어 주는 것은 우리가 갚아야 할 정신적 부채임을 알자. 그런데 그 문학의 부채 중 최우선 탕감 대상은 시다. 시가 문학의 가장 윗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 어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자기 인생이 누군가의 명령과 계획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되어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말하자면 어떤 소설가에 의해 쓰여진 소설 같다는 느낌을 받는 거지요. 이렇게 놓고 보면, 인생을 살면서 당한 중요한 사건은 외견상으로는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은 일관된 구성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듯 보입니다.

 

꿈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은 알지 못하는 우리의 어떤 측면이 만들어낸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도 우리 안에 있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의지에 의해 구성되고 계획되는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우연히 만나는 특정인은 때로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지는 우리 모르게 그 특정인을 중요한 인물로 인식하고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우리가 모르는 중에 만사가 만사의 구조를 결정함으로써 우리 생의 만사는 하나의 교향악단처럼 아귀가 척척 맞아 들어 갑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은 한 사람이 꾸는 큰 꿈,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또 꿈을 꾸는 말하자면 규모가 방대한 꿈이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그 본질상 우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한 개인 의지의 동기 부여에 따라, 만사가 만사와 빈틈없이 연결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p. 411~412)

 

Ü 장자의 호접몽을 보는 듯.

 

□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p. 412)

 

□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제 믿음도 이쪽으로 기웁니다.

 

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크하임은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 목적지가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보일 때가 있다. 이때,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행임을 깨닫는 수가 있다.’ (p. 413)

 

□ 시는 언외(言外)의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요. 괴테는 만물은 메타포라고 했습니다. 무상한 것은 모두 은유적인 해석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고요. (p. 414)

 

Ü 결국 서양을 지배하는 플라톤 철학은 시를 말한 것인가. 언어 밖의 이데아를 표현하는 유일한 언어는 시라고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 옴(AUM)…태어남, 존재하게 되기, 사멸하여 온 곳으로 되돌아감. 옴은 사대의 음절이라고 불립니다. A, U, M, 침묵. 옴이 시작되기까지의 그 밑에 깔리는 침묵입니다. 내 인생은 옴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는 침묵도 있어요. 그 침묵을 우리가 여기에서 영생하는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옴은 우주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소리입니다. 옴송을 통하여 우주와 접촉하고 우주를 느끼는 것, 이것이야말로 절정 체험입니다.

 

관계의 본질에 대한, 다분히 감정이 이입된 상태에서 했던 사고가 내 깨달음을 가능케 한 순간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P. 414~415)

 

Ü 깨달음의 순간의 외마디 비명, !

 

이윤기 선생님의 멋진 번역에 감사 드립니다.

 

 

3. 다시 말하는 신화의 힘(내가 저자라면)

 

주옥 같은 구절 때문에 내 손이 더욱 수고스러웠다. 그러나 4월 초, 천복 같은 봄 날씨에 캠벨(신화의 힘)을 읽었던 사람으로써 우주 운행의 위대함을 목격하기 위한 여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 틀어박혀 북리뷰의 마감 압박에만 시달리고 있었다면 그것은 캠벨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마감이 눌러오는 Press는 내 손가락을 자르기 직전이다. 나는 후달린다. ‘마감은 보릿고개의 끼니와 같아서 이 보다 더한 두려움은 없다.

 

캠벨의 언어는 쉽지 않았다. 이거다 싶은 구절이 나타나 줄을 긋고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문장을 계속해서 읽어 내리려 하는데 다시 줄 그은 데로 눈이 가는 일이 빈번했다.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찝찝함에 나의 아둔한 이해력이 원망스러운 거다. 옳거니 싶을 때는 책을 덮고 한참을 생각해도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해서 속을 태웠다. 마감의 시간은 다가오는데 말이다.

 

이 책은 깊다. 빌 모이어스라는 미국의 걸출한 방송인과 비교신화학자의 대담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또한 신화에 대해 일가견 있는 이윤기 선생님의 번역이기에 그 깊이는 더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 형식이 이 책의 얼개다. 이런 구성이 아니었다면 우리를 대신하여 묻고 대답하는 두 사람의 선문답을 이렇게 짧은 지면에 그와 같은 속도감으로 읽어 내릴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빌 모이어스는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을 적절한 때에 적절한 질문으로 물어 들어갔고 캠벨을 곧바로 깊이 있는 대답으로 우리의 질문들을 해소해 갔다. 독자는 편리했다. 군더더기 없는 직선의 질문과 대답, 대화체가 가지는 현장감, 풍부한 예화와 스피디한 진행. 그러나 다시 생각하는 신화의 힘은 이와 같은 얼개의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선 독자들은 이 구성이 친근하지 않다. 독자 자신에게 이야기해 주기를 원한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인내심을 기대하는 것은 관음증적 쾌감의 대리 만족이 이 사회의 선()을 훼손하고 지금에 맞지 않다. 이와 같은 영적 주제를 관음하고 싶어 하는 독자 대중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최저의 수준이 가장 높은 수준을 구축할 수는 없는 일, 독자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 형식으로 바꾸자면 이 또한 대대적인 구성의 보수가 필요하다. 대화체의 구성을 바꾸려면 이 책 전방의 내용이 달라 질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내가 이 책을 재구성해 본다면 신화의 사례를 중심으로 얼개를 엮을 것 같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예화을 챕터의 전면에 배치

(ex, 물소와 인디언의 신화 또는 피그미족의 전설 등의 신화 예시를 아주 재미있게 풀어간다.)

- 이후 캠벨의 심오한 설명,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이런 식이 되겠다.

 

다음으로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대화에 빨려 들게 하고 집중하게 하는데 매우 탁월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 흐름이 한번 끊기고 시간이 지나 책갈피부분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때는 그 뜬금없는 대화에 한 동안 앞부분의 이야기를 주의를 기울여 뒤적거려야 한다. 책의 내용상 8가지 구분법에 더하여 중간중간에 챕터를 서너 개 더 구분하여도 무방할 듯 하다.

 

한가지를 더 추가하자면 책의 8가지 챕터는 모두 별개의 주제가 이야기되고 있는데 그 서술 중에는 이 책을 관통하는 신화라는 주제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독자는 그 주제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읽어 내리지는 못한다. 가끔, 숲에서 벗어나 나무에 집중하게 되면 시사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를 보완하기에는 본문의 내용 중에 있는 오늘날 세태와 신화를 연결하여 이야기하는 부분을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과거 인류가 생산해 낸 신화와 오늘날 우리의 신화, 그리고 점점 신화를 잃어가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콕콕 짚어내어 일갈한다면 독자가 느끼는 감동을 더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IP *.51.145.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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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09:07:00 *.163.164.152

공들여서 읽고 썼다는 것이 느껴지네요.

회사 다니면서 성심으로 북리뷰를 작성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

수고스러운 손,

보릿고개를 넘는 마음....후후 알지요. 그 마음을, 손가락 관절이 버벅거림을... 

 

초심으로 끝을 이루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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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10:01:49 *.51.145.193

선배님, 말씀 감사합니다. 처음이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열정 안배, 잘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선배님 사진이 보면 볼 수록 그윽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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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19:27:24 *.154.223.199

잘 읽었습니다. 재용랑의 빨간 화살표에서 배우게 됩니다. 한편 내가 평소에 인용문을 타이핑하면서 즐기는 것이 다른 이들의 인용문을 즐기면서 읽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북리뷰와 칼럼을 읽고 댓글을 달면서 남의 시선과 노력에서 배우겠다는 것은 면접여행에서 말씀드린 저의 공헌 약속 중 하나였습니다만 제 첫번째 북리뷰의 부실에 대해 다른 사람의 글에 다는 댓글마다 반성문을 쓰고 있습니다. -_-

 

아 그리고, 난쟁이가 아니어도 재용랑 사랑스럽습니다요 (여기 읽으며 쿡쿡 웃었습니다. 모이어스씨한테 질문 잘 한다고 추임새 넣을 때도 재미있었어요.) 깊은 숲에 들 때 느끼는 경외감에 대한 황인숙 시인의 시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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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1 15:43:53 *.118.21.153

맞아요 난 ....모이어스 저자는 살펴볼 생각을 못하고 저자라면에서 잠시 언급했는데

늘 재용씨 글을 보면 배울게 많아요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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