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키 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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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만 나의 때 묻은 손톱을 간직하면 열손가락 손톱 밑에서
푸릇푸릇 싹이 돋지 않을까. 내 손톱 밑에 낀 것은 단지 때가 아니라 흙이므로. 매니큐어 대신 손끝에 푸른 싹이 난 열 손가락을 하늘 향해 높이 쳐들고 도심의 번화가를 활보하는 유쾌하고 엽기적인
늙은이를 상상해본다. – 박완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중에서
박완서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는 그의 정원 가꾸기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는 송파의 아파트에 살다 구리의 단독주택으로 이사오면서 정원일을 시작했다. 집에 딸려 있는 작은 마당에 처음에는 텃밭을 만들까 하다가 농사에 자신이 없어 잔디를 심었는데 채소보다 손이 더 간다. 소녀 적 꿈이었던 양옥집과 푸른 잔디는 실현되었지만 마당 일은 한도 끝도 없다. 잔디가 푸르러지기 전에 고개를 곧추세우고 올라오는 풀은 틀림없이 잔디가 아닌 ‘나도 잔디’인데 이들은 가차없이 뽑아버린다. 그는 잔디하고 비슷하게 생긴 풀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좋으련만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제거하려는 건지 모르겠다며 자신의 그런 심리에는 내 집 마당이라는 소유욕, 이웃집 마당 보다 더 예쁜고 싶은 경쟁심, 주위가 가지런하기를 바라는 정리벽, 그리고 남들로부터 잔디를 잘 가꾸었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허영심도 있을 것이라 분석한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마당에 나가 바닥을 기며 잡초를 뽑다 늦은 아침 들어와 앉아 고달픈 노동 후의 휴식의 달콤함을 음미한다. 그는 바쁜 사람들은 휴식이 일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지만 자신 같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안 하는 동안의 달콤한 충족감을 즐기기 위해 일을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일로 충전을 안 하면 휴식은 심심하고 무료한 시간이 될 거라는 논리다. 맨손으로 흙을 주무르다가 들어오면 손톱 밑이 까매진다. 외출할 일이 있으면 정성 들여 손을 씻지만 대충하고 외출할 때도 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면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감추고 무안해 하지만 손끝에 푸른 싹이 돋는 엽기적인 상상을 하곤 한다고 고백한다.
박완서에게 정원일은 휴식이었을 것이다. 귀찮은 허드레 일이고 힘에 겨운 노동이지만 하고 나면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을 주는 일. 그 일 후의 시간은 달콤한 나른함으로 가득 차는 의미 있는 일 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죽음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양배추를 심은 동안 죽음이 날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네.’라고 말했고 헤르만 헤세는 정원일을 좋아해 『정원일의 즐거움』이라는 책까지 썼으니 정말 정원일이 주는 행복감과 기쁨은 무궁무진한가 보다.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중기로 이동해보자. 여기도 한 여자가 나름의 휴식법으로 인생의 고비들을 넘고 있다.
오랜 세월 그미는 벽 속에 갇혀 있는 답답함과 숨을 틀어막는
폐쇄감에 몸부림치며 공허함에, 덧없음에 몸을 떨었다. 그미는
가슴으로, 머리로 시를 쓰고 읊조렸다. 아이를 안은 채 오색구름
위를 날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자유자재로 영혼의 나들이를 한다.
그것은 그미에게 절대의 시간이다. 아무도 그것만은 빼앗을 수가 없다. 그미만의 세상이다.
위의 그미는 시인 허난설헌이다. 소설가 최문희는 『난설헌』에서 시를 짓는 동안은 그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시간임을 위와 같이 유려한 문체로 설명했다. 난설헌은 시를 지을 때면 화관(花冠)을 쓰고 향안(香案) 앞에서 앉아 있었다고 한다. 화관은 그를 천상세계의 선녀로 만들어주는 선녀옷이 아니었을까? 밖으로만 도는 허랑한 남편과 시어머니의 억지와 구박 속에서도 그는 시 속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어린 아이들을 잃은 뼈에 사무치는 슬픔을 위로해 준 것도 바로 시였고 스물 일곱의 그녀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어렴풋이 비추어 준 것 역시 시였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휴식도 필요한 법이다. 난설헌은 처녀 적에는 재능의 물레에서 뽑아낸 실로 시를 지었지만, 결혼한 후에는 외로움과 절망, 천착의 물레에서 뽑아낸 실로 시를 지었다. 시작(詩作)은 그녀에게 고달픈 영혼을 누일 수 있는 진정한 쉼의 시간이었다. 나는 어떤 휴식법을 가지고 있을까? 잠자기나 TV보기와 같은 소극적인 휴식이 아닌 박완서의 정원일이나 허난설헌의 시작처럼 영혼의 휴식을 창조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나는 요즘 블로그를 가꾸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내가 블로그를 처음 시작한 것은 약 2년 전이다. 글쓰기 모임에 가입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 글을 들어 놓을 집이 필요했다. 지인들에게 보냈던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모으고 간단히 정리한 독서일지, 그리고 하나 둘 써 놓은 미스토리를 정리했다.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활동을 하면서는 매주 일요일 저녁 과제인 북리뷰와 칼럼, 매월 진행되는 오프수업 일지를 다듬어 사진과 함께 올려 놓았다. 최근에는 내 책의 주제와 관련된 신문기사나 연구 결과와 같은 자료, 북리뷰, 꼭지글 등을 올려 놓았더니 방문자가 부쩍 늘었다. 하루 방문자가 많을 때는 150명 가까이 되는데 가끔은 그들이 다녀간 흔적을 남기곤 한다. 그러면 마치 독자에게서 편지를 받은 신출내기 작가인양 기쁘고 행복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블로그에 들린다. 누가 다녀갔나 다녀간 블로거 리스트를 살펴보기도 하고 통계자료를 통해 어떤 검색어를 통해 방문이 유입되었는지도 알아본다. 칼럼을 쓸 때는 키워드 검색을 통해 블로그의 자료들을 참고한다. 내 블로그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아늑하고 포근하다. 나의 관심사와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 공간이 나에게는 박완서의 정원이요, 허난설헌의 향안 앞이다.
쉼을 즐길 줄 아는 여자들은 자신만의 휴식법이 있다. 당신에게 만약 나름의 휴식법이 없다면 어떤 일을 할 때 은은한 기쁨의 감정이 솟구치는지 자신의 마음을 유심히 관찰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소풍 전날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하지는 않더라도 그 일만 생각하면 행복해지고 그 일을 하고 나면 만족감으로 샤워를 할 수 있는 일, 그 일을 자신만의 휴식법으로 만들어보자. 그리고 손끝에 푸른 싹이 난 열 개의 손가락을 들고 도시를 활보하는 박완서처럼 사람들에게 뽐내는 상상을 해보자. 아무리 참으려 해도 입 안에서 웃음이 삐죽삐죽 삐쳐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