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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9일 20시 14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박완서(1931. 10. 20 ~ 2011. 1. 22)는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의 반남 박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박적골은 개성 시내에서 20여 리 떨어진 한촌으로 홍씨 문중의 마을이었다. 반남 박씨 일가는 그 마음의 유일한 타성바지였다고 한다. 네 살 나던 해인 1934년 그는 아버지를 여읜다. 얼마 뒤 어머니는 어린 딸을 할아버지 밑에 떨어뜨려 놓고 아들을 대처에서 공부시켜 기울어가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작정으로 서울로 올라간다. 어머니가 그를 서울로 데리고 올라온 것은 1938년의 일이다. 어머니는 맹렬한 교육열로 학군 위반까지 하며 딸을 매동국민학교에 입학시킨다. 어머니의 꿈은 딸을 신여성으로 키우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신여성은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였다.

 

1944년 박완서는 숙명여고에 입학하는데, 얼마 뒤 4년제 여고에서 6년제 여중으로 바뀐다. 여중 5학년 문과반 소속일 때 담임교사가 소설가인 박노갑이었고, 소설가 한말숙과 시인 김양식 등이 같은 반에서 공부한다. 당시 시중에는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책이 넘쳐 나서 그는 일본어로 번역된 세계문학전집과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같은 러시아 작가들의 소설을 손쉽게 구해 읽으며 은근히 문학과 관련된 꿈을 키운다. 1950년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하지만, 6 20일 입학식을 치른 지 불과 닷새 만에 전쟁이 터진다. 얼마 뒤 피난처 임시 천막 대학에 등록도 해보다 끝내 그는 대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더구나 전란 중에 그의 오빠와 숙부가 죽고, 고향 땅은 북한 영토가 되어 버린다. 졸지에 어머니를 비롯해 올케와 연년생 조카들의 생계를 떠맡게 된 박완서는 동화백화점 자리에 있던 미8군의 초상화부에 취직을 한다. 거기서 그는 박수근 화백과 만나고, 뒷날 등단작이 되는 나목의 영감을 얻는다. 그는 휴전 직후인 1953년 결혼하고 이어 네 딸과 외아들을 낳아 키우느라 문학과 멀어진다.

 

박완서는 마흔 살 되던 해인 1970년 느닷없이 전쟁 직후 미군부대에서 만난 화가 박수근의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완성한 나목 <여성동아>의 여류장편소설 공모에 보내 당선한다. 느지막이 작가로 나선 그는 뒤늦은 출발을 벌충이라도 하듯이 왕성한 창작욕을 분출하여 문제작을 잇달아 내놓아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 이후 우리의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까지 뼈아프게 드러내는 소설들을 발표하며 한국 문학의 한 획을 긋고 있다. 박완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 적절한 서사적 리듬과 입체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다채로우면서도 품격 높은 문학적 결정체를 탄생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작가는 우리 문학사에서 그 유례가 없을 만큼 풍요로운 언어의 보고를 쌓아 올리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그녀는 능란한 이야기꾼이자 뛰어난 풍속화가로서 시대의 거울 역할을 충실히 해왔을 뿐 아니라 삶의 비의를 향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구도자의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

한국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다룬 데뷔작 『나목』과 『목마른 계절』『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아저씨의 훈장』『겨울 나들이』『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을 비롯하여 70년대 당시의 사회적 풍경을 그린 『도둑맞은 가난』『도시의 흉년』『휘청거리는 오후』까지 저자는 사회적 아픔에 주목하여 글을 썼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부터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작가는 행복한 결혼은 어떤 형태인가를 되묻게 하는 소설인 『서 있는 여자』『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 점점 독특한 시각으로 여성문제를 조명하기 시작한다. 또 장편 『미망』『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에서는 개인사와 가족사를 치밀하게 조명하여 사회를 재조명하기도 한다
.

『배반의 여름』은 1975 9월에서 1978 9월까지 발표했던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조그만 체험기」「흑과부
黑寡婦」「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등에서 볼 수 있듯이 박완서가 그리는 모성의 힘은 실로 놀랍다. 성균관대에서 열린 ‘2006 호암상 수상자(예술상) 초청 강연회’에서 박완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 문학의 뿌리는 어머니”라고. 박완서 특유의 수다스러움으로 풀어내는 모성의 힘은 힘센 것들만이 권력을 쥐고 판을 치는 현대산업사회에서 뒤로 처진 자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위무해준다
.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는 1987 1월에서 1994 4월까지 발표되었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가족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 네 개나 있는데 그 중「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남편의 죽음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아들의 죽음을 담고 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특이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체로 되어 있는데 담담하게 이어가는 주인공의 목소리에서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을 느낄 수 있다
.

『저녁의 해후』에는 1984 1월부터 1986 8월까지 발표했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해산바가지」「애 보기가 쉽다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에서 나타나는 하층민들의 인간애는 가진 자들의 야만성과 대비되어 더욱 빛을 발한다
.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은 1979 3월에서부터 1983 8월까지 발표한 작품들을 수록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속물성과 위선이 난무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진다. 젊은 것들의 무관심과 조롱 속에서 외롭게 늙어가는 노인들의 모습을 담아낸 「황혼」「천변풍경
泉邊風景」과, 출세한 자들의 허위를 그린 「내가 놓친 화합(和合)」「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 등이 그것이다
.

『미망』은 조선조 말기에서 625 전쟁 직후까지 그 파란만장했던 시대를 한 개성 상인의 가족사를 통하여 재창조한 대하소설이다. 민족의 수난사와 더불어 고난과 격동의 시대를 험준한 산을 넘듯 숨가쁘게 살아온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박완서 소설 문체가 도달한 궁극적인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작가는 사람과 자연을 한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느낀 기쁨과 경탄, 감사와 애정을 담아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펴냈다. ‘친절한 책읽기’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연재했던 글도 함께 실어 노작가의 연륜과 성찰이 돋보이는 글을 선보였다
.

1993
년부터 국제연합아동기금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1994년부터 공연윤리위원회 위원, 1988년부터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으로 한국문학작가상, 『엄마의 말뚝』으로 제5회 이상문학상 『미망』으로 대한민국문학과 제3회 이상문학상 『꿈꾸는 인큐베이터』로 제38회 현대문학상 등을 받았다. 2006, 문화예술인으로서 처음이자 여성으로서도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1 1 22일 향년 80세의 나이로 별세했으며 문학적 업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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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네이버 캐스트 박완서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7332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저자 소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335931

 

작년 1월 글쓰기 모임 선생님이 카페에 박완서 작가의 명복을 비는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파마머리에 한복을 입은 젊은 애기 엄마의 미소가 참 예뻤다. 그 명성은 잘 알고 있으나 그의 책은 그리 많이 읽지 못했다. 소설보다는 실용서 위주의 독서 습관이 그를 멀리하게 한 듯하다. 내가 읽은 그의 책은 우리집 책꽂이에 꽂혀 있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여동생에게 빌려 읽은 『친절한 복희씨』, 그리고 이번에 읽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정도다. 이번 책 또한 옛직장 상사로부터 퇴사선물로 받은 것이니 그와 나는 인연이 깊은 걸까, 없는 걸까? 그의 글에는 유년시절 이야기와 전쟁 통에 겪은 참혹한 전쟁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그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자 아픔이었으리라. 그러한 아픔은 그의 인생에 자주 찾아 왔다. 그는 88년 남편을 폐암으로,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리고 그 또한 담낭암이 발견되어 수술 후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맹장염을 방치하다 복막염으로 가셨고, 그의 오빠가 전쟁 통에 총기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일생에 질병과 사고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앗아가는 불청객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는 평생 좋은 글로 사람들을 울렸는데 가면서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문학인장으로 하려던 장례를 조촐한 가족장으로 바꾸고 가난한 문인들에게 부의를 받지 않았다. 한국문단의 자애로운 어머니라 불리는 그의 마지막 책을 읽고 있으니 그가 더 그리워진다.

 

마흔에 느닷없이 작가가 된 박완서. 마흔이 된 나는 느닷없이 뭐가 될까 생각해본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문구

 

책머리에

 

P5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주었다.

è  글쓰기가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저자를 지켜주었다니 새삼스레 글쓰기의 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1_내 인생의 밑줄

 

P17 외출할 일이 있으면 정성 들여 손을 씻지만 대상 씻고 무심히 외출할 적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고 사람을 만날 때면 열심히 내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감추지만 속으로는 엉뚱한 상상력으로 비죽비죽 웃음이 나온다. 며칠만 나의 때 묻은 손톱을 간직하면 열손가락 손톱 밑에서 푸릇푸릇 싹이 돋지 않을까. 내 손톱 밑에 낀 것은 단지 때가 아니라 흙이므로

 

매니큐어 대신 손끝에 푸른 싹이 난 열 손가락을 하늘 향해 높이 쳐들고 도심의 번화가를 활보하는 유쾌하고 엽기적인 늙은이를 상상해본다.

è  일흔이 넘은 할머니의 상상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발랄하지 않은가? 이 부분을 읽으며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P25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더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è  이 구절에서 제목을 뽑은 듯 하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내도 가끔 그때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그 길을 갔더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그 길이 지금의 길보다 더 아름다울까? 아마 현실이 고달플 때면 그리 보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만족스럽다면 지금의 길이 더 좋아 보이지 않을까?

 

P29 다만 차도에서 묘지까지 굴러가는 길이 가파른 것이 걱정스럽다. 운구하다가 관을 놓쳐 굴러 떨어지면 혹시 저 늙은이가 살아날까 봐 조문객들이 혼비백산할 테고 그건 아마 이 세상에 대한 나의 마지막 농담이 되겠지. 실없는 농담 말고 후대에 남길 행적이 뭐가 있겠는가.

è  박완서 작가를 실제로 만나 봤더라면 아주 유쾌한 분이란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의 엉뚱한 상상과 생각에 웃음을 참지 못할 때가 있다.

 

P32 잔디하고 비슷하게 생긴 풀을 그냥 내버려 뒤도 좋으련만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제거하려는 건지. 주위가 가지런하기를 바라는 정리벽 같은 것도 있고, 남들로부터 잔디를 잘 가꾸었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허영심도 있을 것이다.

è  내가 만약 정원을 가꾸었다면 박완서 작가처럼 했을 것이다. 정리벽에 허영심, 나도 그런 걸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P57 봄 여름 가을 없이 부지런히 옷을 강아 입고 아이는 어떤 꽃보다도 예쁘게 자랐고, 시냇물 소리보다 더 즐겁게 웃었다. 나도 따라서 자주 웃었다. 내가 다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웃음을 웃게 될 줄이야. 아마 외아들을 잃은 지 삼 년쯤 될 무렵이었을 것이다. 참척의 고통을 겪으면서 내가 앞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웃음을 웃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잃은 기둥에 비해 그 아이는 겨우 콩꼬투리만 하였으나 생명의 무게에 있어서는 동등했다. 생전 위로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이 새로운 생명에 의해 위로 받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P59 김훈의 인정머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이 냉정한 단문이 날이 선 얼음조각처럼 내 살갗을 저미는 것 같았다.

è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으며 그에게 반해버렸다. 그의 글은 무사를 연상시킨다. 굳게 다문 입에서 나오는 군더더기 없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금새 무인의 한시가 되고 웅장한 노래가 된다. 박완서 작가는 그의 글을 손톱만큼도 없이 냉정한 단문이라 표현했구나.

 

P77 결국은 돈이었다. 유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잘살아보세, 경제를 살리자, 경제제일주의가 만들어낸 파렴치, 책임져야 할 고위층들이 다 같이 형식적인 사죄 끝에 입에 올린 약속도 돈, 신속한 복구 그리고 돈만 있으면 문제없다는 식의 예산책정, , , , 돈자루를 틀어쥔 이들의 또 하나의 파렴치.

è  이 글을 읽고 있으면 돈이 징글징글하게 느껴진다. 그 놈의 돈, , !!!

 

P79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è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중에서 박완서 작가가 마음에 깊이 와 닿는다는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의 첫머리라 한다. 백범은 아름다운 문화를 가진 나라를 꿈꾸었나 보다. 문화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니 그 시절 그는 어떻게 이런 통찰을 할 수 있었을까?

 

P93 나중에 딸들한테 들은 건데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우리 집 아닌 어딘가에 자리보전하고 드러누워 있었다고 한다. 장례를 치르고 온 딸들이 엄마가 듣건 말건 위로가 되라고 한 말이, 장례식에 아들 친구들이 많이 와서 성대했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걸 전해 듣자 내가 눈을 번쩍 뜨더니 그 친구들 뭔 좀 잘 먹여 보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아이들은 아아,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엄마는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겠구나 안도했다는 것이다.

 

삶이란 존엄한 건지, 치사한 건지 이 나이에도 잘 모르겠다.

è  여든을 앞둔 나이에도 삶이 존엄한지 치사한지 잘 모르겠다는 작가의 말이 마음 속으로 쏘옥 들어온다. 둘 다겠지. 삶은 치사하기도하고 존엄한 것이겠지.

 

P126 안 걷고 달리기를 계속한 데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가 남기고 싶은 묘비명도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그리고 러너) 적어도 최후까지 걷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

è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일본 작가 하루키. 그의 미리 써 놓은 묘비명에 러너로서의 자부심이 보인다. 나도 그렇게 달리고 싶건만, 이 마음대로 안 되는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평생 함께 해야 할 몸인 것을. 그의 입장도 생각해줘야지.

 

P127 그들의 친절이 우월감의 소산이라면 우리의 불친절은 열등감의 소산일지도 모르겠다.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만.

è  맞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친절하다. 하지만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불친절하다.

 

P139 지금 우리집 살구는 빛도 좋고 맛도 먹을 만하다. 꽃은 또 얼마나 화사하게 피는지 벚꽃을 닮았으면서도 벚꽃보다 덜 헤퍼서 훨씬 품위 있어 보인다.

è  예전에 살던 아파트 정원에 살구 나무가 있었다. 벚꽃이 피는 시절이면 이 나무도 꽃을 피웠는데 벚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꽃이었다. 화사하지만 난해 보이지 않으며 소박한 맛이 있었다. 가을이면 살구색 살구들이 똑똑 떨어져 사람들의 발에 뭉겨지곤 했다. 감히 그 열매를 맛 볼 용기를 내지는 못했지만 상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P142 시간만 나면 분주하게 뭔가를 정리하다가 하루해가 갈 때가 많다. 요즈음 특히 그렇다. 그 분주함 속에는 쫓기는 것 같은 조급증과 짜증 같은 것이 섞여 있어, 이러다가는 신경줄이 끊어지고 말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낄 적도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심심한 시간을 갈망하면서도 그걸 제대로 누리질 못한다. 한가할 때 말고도, 외출할 적에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때 말끔하게 정돈된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저녁에 잠들 때는 내일 아침에 깨어났을 때 지저분한 집에서 깨어나기 싫어서, 또는 혹시 못 깨어났을 때는 남들에게 흉잡히지 않기 위해 눈에 거슬리는 것들, 늘어놓았던 것을 치우기도 하고 안 보이는 데다가 대강 틀어박기도 한다. 어쨌든 하루를 살고 난 흔적들을 마치 범죄자가 증거인멸 하듯이 깨끗이 없애고 나야 개운해서 잠이 잘 온다.

è  분명하다. 작가는 나와 비슷하다. 한가한 시간을 제대로 누르지 못하는 점, 남에게 흉잡히는 것을 싫어하는 점, 정리벽이 있는 점, 그리고 안 보이는 데다가 물건들을 대충 틀어 박기도 하는 점 등. 나 역시 청소나 정리를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개운하다.

 

P147 거의 대부분의 책들은 삐딱한 생각을 담고 있으니 삐딱하게 서 있어야 마땅하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책장에 책이 헐렁하고 삐딱하게 서 있으면 꺼내 보기는 또 얼마나 편한가.

è  얼마나 기막힌 발상인가. 책들이 삐딱한 생각을 담고 있으니 삐딱하게 서 있어야 마땅하다는 발칙한 생각.

 

P149 바쁜 사람의 휴식을 흔히 충전한다고 말한다. 휴식은 어디까지나 일을 위해 있다는 소리이다. 그러나 요즘의 나를 바라볼 때 아무것도 안 하는 동안의 달콤한 충족감을 즐기기 위해 일을 하는 것 같다. 일로 충전을 안 하면 휴식은 심심하고 무료한 시간밖에 안 될 테니까.

è  일과 휴식의 역설. 일한 뒤의 달콤한 휴식을 위해 일을 한다. 일로 충전을 하고 휴식을 즐긴다. 그가 말하는 휴식의 정의가 참으로 기발하다.

 

P155 이렇게 되기까지 소리 없이 나를 스쳐 간 건 시간이었다. 시간이 나를 치유해줬다. 그렇다면 시간이야말로 신이 아니었을까.

 

P156 나를 스쳐 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 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 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è  신이 당신을 솎아 내어 하늘나라에 계신 지금, 그는 어떤 마음일까?

 

P170 급한 원고가 있을 때도 전혀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하는 건 나의 못 말리는 고약한 버릇이다. 그날도 그 버릇이 도져 TV를 끄고 찬장 속의 것들을 끄집어내서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하면서 연방 시계를 보았다. 가장 불필요한 일을 하는 한가한 시간을 또 다른 긴박한 시간이 주름잡고 있는 것처럼 감정의 혼란과 시간관념에 착란이 왔다.

 

2_책들의 오솔길

 

P191 기다릴 사람 없는 밥상보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밥상이 훨씬 덜 쓸쓸하다. 산수유 붉은 열매를 쪼던 새가 목을 뒤쪽으로 젖히는 순간을 포착하면 나는 진밥을 먹다가도 목이 메어 된장국 한 모금을 떠 넣고는 목을 뒤로 젖힌다. 그리고 나를 목메게 하는 건 진밥이 아니라 여태까지 살아온 세월의 더께, 터무니없이 무거운 돌대가리와, 누추하고 육중한 몸으로 감히 창공의 자유를 꿈꾼 헛된 욕망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시가 와서의 나의 아무렇지도 않은 시간과 만나니 나 같은 속물도 철학을 하게 만든다. 시의 힘이여 위대하도다.

è  문태준의 시 를 읽은 작가의 소감이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이 시를 읽고 어떤 소감을 쓰고 싶은가?

 

새는 날아오네

산수유 열매 붉은 둘레에

 

새는 오늘도 날아와 앉네

덩그러니

붉은 밥 한 그릇만 있는 추운 식탁에

 

고두밥을 먹느냐

 

목을 자주 뒤쪽으로 젖히는 새는

 

P194 이 몸이 얼마나 사랑받은 몸인데, 넘치게 사랑받은 기억은 아직도 나에겐 젖줄이다.

è  사랑해줘야 한다. 사랑 받아야 한다. 그 기억이 살아가는 힘이 되고 젖줄이 되니까.

 

P210 우리가 미처 발견 못 한 미를 먼저 발견한 안목의 소유자들은 자신의 안목에 대한 자긍심 대문에 흔히 과장되거나 선동적인 문장을 쓰는 경우가 많다. 허나 최순우는 그가 발견하고 느낀 한국의 미를 내면 깊숙이 스며들게 한 뒤 비로소 글로 표현해서 읽는 사람에게 그의 것을 번지게 하는 힘이 있다.

è  , 나도 이리 해야 하는데. 어줍잖게 추동하고 잘난 척하면 안 되는데. 사람들에게 번지게 하여 감동해 움직이게 해야 하는데.

 

P215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 받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 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è  나는 시를 못 읽었다. 성격이 급해 천천히 읽지 못하니 그 뜻을 음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시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생각을 멈추니 시가 읽힌다. 시를 읽으면 마음에 초 하나가 켜지고 그 온기가 온 마음을 데운다. 그게 시의 힘인가 보다.

 

3_그리움을 위하여

 

P266 여인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힘과 정성을 다해 그린 게 아니었을까. 조금만 더 견디렴, 곧 봄이 오리니 하는 위로처럼.

 

3. 내가 저자라면

 

글을 읽을 때 메시지 위주로 인식하는 나는 문체라는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연구원 과정을 밟으며 여러 책들을 읽다 보니 그것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같은 내용이더라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달리 들리듯 비슷한 이야기라도 작가의 문체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경우가 많다. 남성 소설가 김훈과 김영하의 문체가 다르고, 여성 소설가 공지영, 박완서, 최문희, 은희경의 문체가 다르다. 박완서 작가의 글은 쉽게 읽힌다. 그리고 조근조근 귀에 대고 이야기해주는 듯하다. 여든이 가까워오는 작가가 쓰는 단어들은 가끔씩 사전이 필요하다. (이 책을 읽으며 참척, 턱찌끼, 노느매기 등의 뜻을 찾아 보았다.) 그래도 가끔씩 보이는 그의 유머와 익살, 소녀다움으로 읽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닌 산문집이기 때문에 신변잡기적인 내용이 많고 글의 호흡이 다소 짧다. 그래도 박완서 작가의 매력을 보여주기는 충분하다. 2부와 3부 내용은 신문에 연재 되거나 이미 발표된 내용을 추려 담아 다소 신선도가 떨어지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정원일에 대한 로망이 생겼다. 거실에 있는 화분 9개에도 자주 물을 주지 않는데 무슨 정원일일까 싶은 생각도 했지만 크지 않은 정원에 소박한 우리 꽃들을 예쁘게 길러내고 싶은 열망이 일었다. 하지만 그 열망은 당분간 마음 속에 간직해 놓아야 할 듯싶다.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하면 몸과 마음이 분주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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